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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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서평-블라인드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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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6.

 

블라인드사이트

Blindsight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피터 와츠(Peter Watts)의 새 책 <<블라인드사이트(Blindsight)>>는 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읽어본 최고의 과학소설이다. 그것은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최초의 접촉 소설이며, 뱀파이어 소설인 동시에 의식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소설이기도 하다. [...]

 

견해에 있어서 와츠는 강경한 사회생물학자이다. 사회생물학은 흔히 나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한다. 그런데 그는 <<블라인드사이트>>에서 으스스하면서도 강력하게 그것을 작동시키는 충분한 개념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다.

 

사회생물학에 관하여 살펴보자. "진화심리학" 부류들이 여성은 나이든 부유한 남자에게 끌리도록 "배선되어(hardwired)" 있다거나, 또는 "비범죄적인" 가족으로 입양된 "범죄적인" 부모의 아이가 "범죄적인" 가족으로 입양된 "비범죄적인" 부모의 아이보다 (필경) "범죄자"가 될 확률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범죄성(criminality)"(여전히 주의 깊게 규정되지 않은 낱말 또는 개념)은 현저하게 유전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사회생물학을 혐오한다. [이 두 주장은, 예를 들면, 매트 리들리(Matt Ridley)의 <<민첩한 유전자(The Agile Gene)>>라는 책에서 언급된다[...].] 현대의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한 조건을 "본성(자연)"으로 투사하는 그런 뻔뻔스러운 행위는 경멸할 가치조차 없으며, 그것들을 논박하는 데 에너지를 소요할 가치조차 없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우리는 가차없이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통제을 벗어나려고 분투하는 볼품 없는 로봇이며, 그리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관념들은 우리 육체와 정신을 장악해버린 바이러스성 감염("밈")이라고 시사하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주장이 무척이나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처럼 들리기 시작할 때 그의 대범함에 감탄한다.

 

그런데, 와츠는 이런 후자의 대범하고 두려운 의미에서 사회생물학적이다. 그는 우리가 "전쟁 우주(war universe)"(버로스가 서술하곤 했듯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조건이 어떤 적극적인 마니교적 악의[예를 들면,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경우에 그렇듯이)]가 아니라 그저 자연 선택의 맹목적인 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와츠의 경우에 자연 선택은 자동적으로 "최적의" 결과를 산출하는 자비로운 "보이지 않는 손"―다윈주의적 진화와 "완전 경쟁"에 관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 사이의 유사점들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현재의 풍조가 익숙하게 해내곤 하는 방식이다―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연 선택은 심술궂고 흉포하며 단기적인데, 그래서 다윈주의적 경쟁에서 "패배하는" 개체와 집단들뿐 아니라, 무작위적인 유전자적 부동 떄문에 또는 결국에는 그들을 없애버릴 변화된 조건에 처하지 않은 채 발달할 만큼 충분히 (잠정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발달하게 되었을 "승자들"에게도 엉망진창인 결과를 빈번하게 초래한다. 그것이 공룡들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조만간 우리에게도 일어날 일일 것이다.

 

와츠의 감성은 엄밀히 말해서 냉소적이지 않는데, 최소한 최악의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으며, 별도의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능글맞게 웃으며 응대하는 "무엇을 기대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일축당한다는 근거에서, 냉소주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일종의 변명 또는 순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와츠의 어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비관적이고 우울한데, 심연이 우리를 바라본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한 채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과학소설 전작들, 리프터스(Rifters) 삼부작의 경우에 그랬듯이, 와츠를 읽는 것은 언제나 꽤 상쾌하다[...]. 그런데 <<블라인드사이트>>에서 그는 자신을 넘어서 버렸다.

 

그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등장인물들로 시작하자. 와츠의 등장인물들은 꽤 기억에 남을 정도로 끌리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 어느 정도 소시오패스(sociopath)일 뿐 아니라 철저히 "탈인간적(posthuman)"이기도 하다. 컴퓨터가 인간보다 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2082년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잉여적 존재자들이 되어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추방당했는데, 자신의 육체를 창고에 보관하고 자신의 마음이 천국, 온화하게 자기도취적인 소원 충족의 가상 현실 공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량의 유전자적 변경과 신경적 변경을 겪으며 육체와 감각의 보철적 향상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가능한 한 대체로 물리적으로 격리된 채로 남아 있는 경향이 있는데, 성 관계 같은 지저분한 것들 대신에 가상 현실을 사용한다. 그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접촉을 하게 되는 것보다 정말로 더 안전하다(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이런 "탈인간적" 조건에 반대하는 분파인 실재론자들에 의한 테러 행위의 위험이 상존하는데, 그들은 불쾌한 레트로바이러스성 공격을 전문으로 한다.

 

그런데 명백히 다른 태양계에서 도착했으며 인류에 위협을 제기할 수도 있고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는 에일리언들과 접촉하기 위해, 또는 최소한 그들을 연구하기 위해 카이퍼 대(Kuiper belt)을 벗어나는 우주선에서 물리적으로 대단히 근접 상태에 처해 있는 소규모의 사람들 사이에서 블라인드사이트(맹시)가 발생한다. 우주선의 사령관은 뱀파이어이다(그리고 와츠는 몇 가지 중대한 유전자적 및 생리학적 측면에서 "기준선"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거의 인간적인 아종으로서의 뱀파이어에 관한 뛰어난 해설을 제공한다). 승무원에는 (기술적으로 생성된) 다중 인격 증후군이 있는 한 명의 언어학자, 고유 수용성 느낌―자기 감각―이 자신의 살보다도 장거리에 걸쳐 기계적으로 확대된 것 속에 훨씬 더 내재하도록 자신의 거의 모든 감각을 광범위한 보철술로 뒤덮어버린 한 명의 생물학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각계가 원격 제어로 조작하는 전 영역에 걸친 살상 기계들로 확대된 한 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두 개의 뇌 반구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여 기계로 대체해 버렸는데, 그래서 그는 체질적으로 어떤 종류의 감정 이입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소설이 시작되는 기준선 조건이다. 전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판명되는 에일리언들을 만날 때 상황은 심각하게 기묘해진다. 나는 그들의 생물생리학은 생략할 것인데, 이것에 대해 와츠가 놀랍도록 창의성이 풍부하지만 말이다(해양생물학자로서 모든 종류의 무척추동물과 함께 보낸 배경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 에일리언들을 정말로 구별짓는 것은 그들이 좀비라는 점인데, 살아있는 시체라는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지과학과 마음의 철학에 의해 사용된 술어가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좀비이다. 좀비는 여러분이나 나와 꼭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존재자인데, 언어, 지능 등에 대한 명료한 징후를 나타내지만 내면적으로 자각 또는 의식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오래된 데카르트적/유아론적 딜레마이다. 나는 가 의식, 내면성 그리고 자기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데카르트에 따르면) 내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은 그저 의식을 흉내내고 있는 기계, 또는 자동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런 편집증적 환상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튜링,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데닛은 모두, 무언가(누군가)가 지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그녀/그것이 지능과 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좀비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은, 유아론적 편집증으로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그저 한 가지 가능한 일로 떠올릴 때에도, 의식의 어떤 소중한 내부적 본질은 행동적 기준에 의해 포착되지 않고, 그래서 의식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좀비는 우리가 최소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선험적 내면성에 대한 이런 감각을 일종의 신비화라고 거부한다면―튜링,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데닛이 모두 그렇듯이―좀비 가설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이 오리처럼 걷는다면,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낸다면, 기타 등등...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 인지적으로 복잡한 행위들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참인 듯 보인다. 추정컨대, 이것은 사람들이 잠자는 중에 걸어다니거나 깊은 최면 상태에 빠져 있을 떄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그들은 의식적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시야에서 무언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추측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그들은 대단히 정확하게 해내는 블라인드사이트―이것이 와츠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개념적 은유이기 때문에 그 소설의 제목이 된다―라는 현상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실상 최소한 어떤 수준에서는 볼 수 있다―그들은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좀비는, 시각에 대해서뿐 아니라, 모든 감각적 및 인지적 양태의 경우에도 블라인드사이트 현상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블라인드사이트>>에 등장하는 에일리언들의 경우에도 맞는 것으로 판명된다. 어떤 가능한 척도로도 그들은 인간들(그리고 심지어 보철술로 향상된 인간들)보다 지능이 엄청나게 더 높고, 기술적으로 더 선진적이다. 그런데 그들은 의식 또는 지각력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앎과 행함은 더욱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사실상 이 소설은 의식이 하나의 우연한 진화적 사건이라고 넌지시 주장한다. 우리가 일종의 진화적 역류 속에서, 지능을 갖춘 무의식적인 유기체들과 경쟁하지 않은 채, 발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잠깐 동안) 운이 좋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을 갖춘 마음을 발달시켰다. 그런데 의식은 생존 투쟁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불리한 점이고, 그래서 와츠는 그것이 충분히 도태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미래의 발달 과정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한다. 소시오패스는 이미 절반은 좀비적 특질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 (와츠가 신랄하게 강조하듯이) 오늘날 기업 문화의 상층 영역들에서 소시오패스적 특질―감정 이입, 양심의 가책 또는 자의식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경쟁력을 향상시키는―은 이미 적극적으로 선택되고 있다. <<블라인드사이트>>는 지각력이 없는 지능의 가능성에 관한 뛰어나고 으스스한 사고 실험이며, 우리가 실제로 지각력이 없는 지능을 갖춘 에일리언들을 결코 만나지 못할지라도, 로봇 공학(그리고 기업 문화)의 결과로서 미래에 나타날 확률이 높은 전망이다.

 

데닛은, 좀비 옹호자들은 한 가지 차이점(우리는 의식이 있지만 그들은 의식이 없다)을 상정하는 동시에 이 차이점은 경험적으로 탐지할 수 없다(모든 가능한 측면에서 좀비는 우리와 꼭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고 상정하기 떄문에 좀비의 가능성은 자기모순적이고 비정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데닛은 우선 내면성과 의식의 존재에 관해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데닛은 로티와 비슷한데, 둘 다 비트겐슈타인을 오독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렇지만 와츠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그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최소한 우리 내부에, 의식이 정말 존재한다는 점을 당연히 여긴다면, 의식의 (실용적 및 인지적) 비효율성을 보상하는, 의식이 기여할 수 있는 진화적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의식은 무엇에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의식이 있는 반면에, <<블라인드사이트>>의 에일리언, 뱀파이어 그리고 CEO들은 의식이 없다고 넌지시 주장할 때, 와츠는 의식이 있는 존재자와 좀비 사이의 차이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하고, 그래서 그것은 정말 경험적으로 탐지될 수 있다고 상정한다. 그 차이는 대단히 미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악될 수 있는 것(최소한 의식이 있는 인간들에 의해)이다.

 

소설이 끝나갈 무렵에, 의식이 있는 존재자와 좀비 사이의 차이는 의식이 있는 존재자만이 미학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인 듯 보인다. 소설에 등장하는 에일리언들은 논리실증주의자와 약간 비슷한데, 그들은 미학적 감성이 없고, 그래서 미학적 진술과 정동적 진술은, 엄밀히 말하자면, 무의미하다고 알아챈다. 낱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잡한 대화를 계속 나눌 수 있지만, 비기능적 표현들은 일종의 스팸이라고 여길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와츠의 다윈주의는 결국 칸트를 확인하게 되는데, 미학적인 것을 규정하는 속성은 그것이 불가피하게 "아무 사욕도 없다"는 것, 그것의 구조적 목적성은 어떤 실제적인(경험적 또는 공리적)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학적 감성―이 시점에서 간단히 의식과 대체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은 진화적 적응물이 아니라 비적응적 부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우리를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관한 주장들로 데려간다. 리처드 러원틴(Richard Lewontin)과 고인이 된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같은 사회생물학적 접근 방식에 대한 반대자들은, 우리 현존의 많은 중요한 특징들은 사실상 자체적으로 적응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과정들의 부산물로서 생성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화적 가변성이 중요하고, 그래서 인간 현존의 모든 양상들이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배선되어 있으며", "우리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강경한 사회생물학자와 진화심리학자들―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같은―은 인간 현존과 인간 본성의 거의 모든 특징이, 대단히 특이한 정도로, 생물학적으로 보편적이고 문화적으로 가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특징이 직접적인 적응물(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홍적세의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렇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핑커가 진화적으로 중요한 "배선되어 있는" 특질이라기보다 비적응적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인정할, 인간 삶의 거의 유일한 양상은 바로... 예술과 미학이다. 물론, 이것은 예술과 미학은 사소하고 아무튼 아무 가치도 없거나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핑커의 방식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핑커가 미학은 비공리적이고, 비인지적이며, 그래서 아무 사욕도 없는 것이라는 칸트의 통찰을,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전도된 형태로, 표현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학적 판단이 아무튼 감성의 열쇠이다. 미학적 감성을 지각력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두 가지 다를 진화적 기능 장애로 귀속시킴으로써 와트는 이 사유 노선을 놀랄만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미학이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말처럼 들린다. 틀림없이 와츠는 내가 이 주장을 그의 소설의 "주제"로 삼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는 이것이 그의 급진적인 디스토피아주의의 불가피한 상관물인 듯 보인다. 의식은 우리 육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일시적인 갈팡질팡하는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우리 종에서 의식, 미학 그리고 부적응성 또는 기능 장애는 함께 간다. 그리고 추정되는 어떤 선함 또는 고귀함보다도 오히려 이것이 인간의 삶(생명)을 특징짓고 규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