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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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스탕제: 오늘의 에세이-가이아, 긴급히 생각해야(그리고 느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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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8.

 

가이아, 긴급히 생각해야(그리고 느껴야) 하는 것

Gaia, the Urgency to Think (and Feel)

 

――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 동일한 무명의 사건이 되어버릴 것―전지구적인 기후 변화가 진행 중에 있다는 발표―에 대한 천개의 번역이 아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능을 명명되는 것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할 때 명명하기는 진지한, 즉 실용적인 과업이다. 가이아라는 이름은 지구를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응하는 독자적인 방식을 타고난 하나의 개별적인 준생명체, 지구 생명에 대한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는 복잡한 자기조절적 체계로 규정되었던 존재자로 간주하자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과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담대한 제안을 분명히 암시한다.

 

가이아를 전지구적 돌연변이들을 일으키기 쉬운 민감하고 까다로운 존재자로 변환시켜버린 정의 변형은 과학의 역사에서 전형적인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전적으로 쪼갤 수 있는 것으로 알아낸 것을 여전히 원자―쪼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부르지만, 원자들을 참된 과학적 존재자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발견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러브록이 생명에 대해 안정한 최적의 것으로 규정했던 비선형적으로 결합된 과정들의 조립체가 이런 든든한 특성을 상실했을 때, 가이아는 러브록의 가설이기를 멈추고 자체의 과학적 이력을 개시했다. 이것은 1980년대에 일어났는데, 그때는 온실 가스의 배출로 인한 지구 기후의 점진적인 온난화라는 오래된 관념이 더욱 더 많은 새로운 관찰 자료와 더불어 더욱 더 강력한 컴퓨터 모의실험들을 통해서 전개된 시기이다. 문턱, 급격한 변화, 티핑 포인트, 급등적 자기증폭 진화 같은 비선형 체계들의 거동에 전형적인 가능한 것들이 위난에 대한 새로운 느낌, 혹독한 기후 변화를 피하는 데 남아있는 시간의 짧음에 대한 느낌과 더불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위협적인 가이아는, 그것이 바라건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착취되어야 할 자원으로 간주되든, 아니면 존중받아야 할 취약하고 독특한 경이로운 것으로 간주되든 간에, 지구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이 결코 아니다. 가이아는 새로운 과학 분야가 다루는 것, 그것의 현재 및 미래 거동에 관해 알기 위해 그것의 과거가 재구성되는 존재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모형과 자료들의 상호관련된 복잡한 집합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또한 가이아는, 이른바 인간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새로운 가능한 작용들의 제공자라는 상징으로부터 단절된, 과학에 대한 새로운 상징과 관련되어 있다. 기후 과학에 대한 공격은 징후적이다. 일반적인 과학 동맹자들의 경우에, 경고를 발설하고 있는 기후 과학자들은 진보와 발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굴로 돌아가자"는 사람들 편에 선 배신자들이었다. 기후 과학은 등 뒤에 꽃힌 칼이었는데... 아마도 은폐된 이데올로기적 의제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은 도대체 무엇인가? 더욱 더 강력한 컴퓨터들에서 돌아가는 모형들과 전에는 산출할 수 없었던 관찰 자료 때문에, 이누이드 족이든, 아마존 부족들이든, 케이프타운의 어부들이든 간에, 이미 목격된 많은 다양한 파괴는 그것들과 관련하여 일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진행 중인 동일한 전지구적 과정, 즉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이아는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통일된 객관적 진리가 아닌가?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은 하나의 동일한 과학적으로 판독된 자연적 현상에 대한 문화적 해석들에 불과한 것으로 묵인되어야 하는가? 확실히 인류가 유발한 현상이지만, 인류의 역할은 온실 가스의 배출량의 견지에서만 모형들―그것들의 산출 방식 또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에 의해 규정된다.

 

대단히 의심스러운 인류세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규정은 최소한 결정적인 증거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아가 하나의 자연/다수의 문화 분리를 입증하는 듯 보이는 것은 투덜거리는 인류학자들과 좌절한 문화적 해체주의자들에게만 관심사일 것이다.

 

나는 IPCC의 작업 집단 I에 소집된 전문가들에 의해 판독된 대로의 가이아의 놀라운 역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이런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사실상 이들 전문가들이 가이아는 전지구적 위협이지만 그들의 경우에 "전지구적"이라는 낱말은 승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형들이 의미를 갖는 유일한 척도일 뿐이고, 그래서 그것은 그들에게 지역적 결과들을 도출하는 역능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추상물들이 비롯되는 모든 것을 감안하면, 그들을 이끄는 매우 특정한 의문들은 이런 추상물들의 신뢰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런저런 개입 과정의 역할이 고려되고 편입될 때 결과의 안정성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의 모형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그런데 그들의 가이아는  그것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의문들에 대해 제시되는 대답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침묵한다. 가이아는 경종을 울리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 외에는 어떤 통합력도 없다.

 

그렇지만, 기후과학자들에 의해 규정된 대로의 가이아는 아무 통합력도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정말로 중요한" 것을 규정하기 위해 가이아를 언급할 사람들에 의해,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럴 뿐이다. 그런 부가된 역능은, 좋든 나쁜든 간에, 과학적 주장들이 실험실을 벗어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IPCC에는 세 개의 작업 집단이 있으며, 세 번째 집단이 가이아의 무언의 의문을 정책입안자들을 위해 표현된 문제, 즉, 그들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경제적 인자들에 부합되는 술어들로 표현된 문제로 전환시키는 데 바쁘다는 것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왜 비판은 기력이 다해 버렸는가?(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라는 의문을 제기한 십 년 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merchants of doubt)"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납치된 비판적인 해체주의적 논증의 사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번에는 관심의 문제들을 다루며,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서술하곤 했듯이, 더 이상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자체의 취지로 삼을 다른 한 강력한 서술적 도구를 고안할 수 있는가? 사실의 문제들에 실재를 빼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더하는 누군가의 기풍 속에 있는 비판적 충동을 전환시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그를 좇아서 나는, 과학자들이 가이아를 사실의 문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는 점을 수용하면, 긴급하고 중대한 관심의 문제는 그것에 더해질 실재, 중요한 것으로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IPCC가 산출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과학"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확실히 동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집단 I 전문가들은 빙상의 복잡한 동역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될 때 악몽을 꾸는 반면에, 집단 III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시나리오들의 주인공들과 관련하여 그런 이야기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시장의 기능 작동에 대한 호의적인 국가들에 의해 취해지는 조치들의 비용과 편익을 예상한다. 온실 가스 감축을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business-as-usual) 이런 접근 방식의 실패가 인식될 때, 우리는 바로 그런 전문가들 사이에서 "좋은 인류세(good anthropocene)"의 가능성이 자체의 공식적인 근거를 갖게 된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아를 시험하고 길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될 것이다. 지구공학이 인간 해방과 자연 지배의 위대한 역사에서 한 가지 논리적인 성취로서 제시될 것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을 거스른다고 비난받을 것이다. 원고는 이미 작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도구들을 고안할 수 있는가? 2012년 12월에 지구물리학자이자 복잡계 전문가인 브래드 베르너(Brad Werner)는 미합중국 지구물리학 연맹의 학술회의에서 "지구는 개판이 되어 버렸는가? 전지구적 환경 관리의 동역학적 무용성과 직접 행동 행동주의를 통한 지속 가능성의 가능성들(Is Earth F**ked? Dynamical Futility of Global Environmental Management and Possibilities for Sustainability via Direct Action Activism)"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자신이 구성하고 있던 모형에 의지하여 지구물리학자로서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 문제는 "사회과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자신의 모형에서 그들을 위한 역할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지만, "직접 행동 행동주의"―즉, "토착민들, 노동자들,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다른 활동가 집단들"―의 영향은 상당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들이 "자본주의적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느낌을 보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너의 입장은 "객관적인 과학"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일례로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갑자기 비판적 사상가들을 향해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상황은 실제로, 객관적으로 개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나의 관심사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지식이 우리의 독자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느껴야 할 긴급 사태,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느껴야 할, 가이아로 명명되는 무언의 긴급 사태로부터 실재를 빼기보다는 그것에 실재를 더할 수 있는가?

 

베르너가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내가 상상한 의문은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질 것인데, 그것 자체가 내가 의도한 것이다. 사실의 문제로서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들 속에서 가이아는 관심의 문제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이런 개입을 유발하는 동시에 그것이 일시적인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단을 제공한 세계에 속하는, 지금 내가 "우리"라고 부를 사람들의 경우에, 가이아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 진입하여 모든 기성 관계들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래서 이런 관계들이 전적으로 당연하게 여긴 것들―실재에 접근한다는 과학적 주장과 비판적 사유 사이의 유사 의례적인 근대적 적대 관계를 비롯한―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개입자, 주인공을 나타낼 것이다.

 

그렇다면 "개입하는 자"로 간주되는 가이아라는 이름은 무언의 의문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가리키는 적절한 도발적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상 궁극적인 미래의 끈덕지고 언제나 위협적인 부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을 가이아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런 사실의 문제에 인간 해방을 초월성에 대한 부인과 동일시한 우리들에 대한 그 사건의 수치스러운 특질을 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브록을 넘어서 가이아라는 이름이 이성과 국가 정치에 무심했던 고대 그리스 신을 가리키곤 하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개입하는 자, 인내하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없는 자로서의 가이아는 지구의 인민들을 통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이아의 맹목적이고 무정한 초월성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후렴구들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올림피아 신전의 신들과 그런 신들을 현장에서 축출한 인간들을 여전히 안정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회고적으로 전제한 우리 세계는 이미 과거의 일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실제적 불가사의가 걸려 있는데, 그것은 이 역사에 속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우리가 우리가 초래한 것의 결과를 직면할 때 창안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해답이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테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다른 많은 사람과 사회들이 세계를 파괴하는 그런 개입을 겪었다고 강력하게 강조한다. 개입하는 가이아에게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역능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알게 되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지만, 나는 복화술사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채 덧붙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공간을 차지하면서 상반되는 우리 자신의 원고들에 대한 역할을 다른 것들에 너무 많이 귀속시켜 버렸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에 우리를 상황에 처하게 하는 역능을 어떻게 부여해야 할지 알아야만 한다.

 

유럽의 현대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나는 유럽적 기반 위에서 인클로저 운동, 공유재의 파괴, 마녀들의 화형으로 시작된 세계를 파괴하는 과정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또 다시 모든 공간을 차지하는 죄책감이 아니다. 질 들뢰즈가 적었듯이, 수치심이 사유를 위한 강력한 모티프라면 그것은 당연히 수치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흔히 아무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이성 또는 진보라는 미명 아래 이런 파괴를 승인하는 모든 위대한 철학적 서사에 저항하고자 하는 신념―우리가 이성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을 파괴와 약탈과 더불어 생각하고 느끼고자 하는 신념―이다.

 

가이아의 개입에 직면할 때, 이것은 내가 그 사건을 어떤 종류의 신비스러운 정의, 구원과 지옥 사이에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어떤 이분법과 관련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신념이다. 그 대신에 내가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우리의 모든 정교한 사유와 기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홀로 서 있는 만인" 또는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원망하는 수동성의 뜨겁거나 차가운 공황 상태에 저항할 때―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그들이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역능을 부여할 만큼 서로 충분히 신뢰할 때―만들어낼 것으로 알고 있는 차이의, 점점 더 다양해지는 인클로저 수단을 통한 체계적인 파괴가 목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목격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이아의 개입에 대한 가장 개연성이 높은 대응책을 회피할 수 있는 역량을 대체로 박탈당했다. 이 대응책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후렴구가 된 "패자는 무참하다(vae victis)"라는 순전한 야만성이든지, 사실의 문제 가이아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는 어떤 맹목적인 경영 관료주의이든 간에, 야만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역량을 집단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브래드 베르너가 자신의 모형에서 도래할 야만성에 저항할 듯한 유일한 인자로서 인식한 "직접 행동 활동가들"을 위한 게임의 공통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현대 행동주의는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아무 모순도 없이 공유재와 관련된 실천 행위들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공유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통의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교묘한 지속적인 사회적 방책―획득하거나 육성하기보다 파괴하거나 오염시키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어떤 어떤 공유재 또는 공유 자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가 말하듯이, "공유자처럼 생각하기"는 결코 순진한 생각, 순진한 이상화된 과거로 돌아가자는 선의의 꿈이 아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이의 제기로서 어떤 동화도, 어떤 희망적 생각도 수반하지 않으며, 언제나 인간의 상호의존성보다 더 큰 것을 유지하는 것과 조립체의 취약성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관심을 수반한다.

 

당신은 도울 수 있는가? 나는 브래드 베르너가 강단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으로 상상했다. 확실히 그렇지 않다. 당신은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신은 차이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실재를 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실재를 더할 수 있는가? 나는 그의 회의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의 모험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생태페미니스트에게 이 운동의 미심쩍은 영성을 추적하고, 그것으로부터 본질주의의 색조, 특히 매우 부끄러운 견딜 수 없는 여신―그럼에도 당연히 사실의 문제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들 가운데 하나인 여신―을 제거할 필요성에 관해 논하는 페미니스트 강단인들보다 더 나쁜 적은 전혀 없었다.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공격에서 살아 남은 신이교도 마녀들의 회복 운동은 이후에 많은 것을 배웠지만,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거리는 강단인들의 도움을 확실히 받지 못했다. 마녀 스타호크(Starhawk)가 "화형당한 마녀들의 연기 냄새가 아직도 우리 콧구멍에 매달려 있다"고 적을 이유가 있었다. 강단인들의 콧구멍에는 잘 속는 사람이라고, 강단인의 첫 번째 의무는 믿음을 폭로하는 것, 즉, 상처 주는 것을 첫 번째 속성으로 갖는 진리를 숭상하는 것이라는 점을 망각했다고 비난받는 것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이 매달려 있다.

 

우리는 도울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의문은 당연히 연구자들 스스로가 우리를 질식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비난하고 폭로하게 내버려두지만, 실재를 더하지 못하고, 슬픈 가능성들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을 유지하지 못하는 겉보기에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들을, 성찰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정동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지각하게 될 수 있는 독자적인 역량을 회복하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가 돕기를 원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 묵시록적이지도 않고 구원론적이지도 않은 이야기, 오히려 도나 해러웨이가 대응 능력(respons-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우리가 더하는 것이 세계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수용하고, 이런 차이의 방식에 대해, 어떤 삶과 죽음의 방식들을 위해 우리가 다른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주조하는 방식에 대해 응대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을 수반하는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해러웨이와 더불어 내가 SF 이야기라고 부를 이야기들이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SF―String Figures(실뜨기), Science Fact(과학 사실), Speculative Fabulation(사변적 허구화), Science Fiction(과학소설), Speculative Feminism(사변적 페미니즘), So Far(여태까지)―에 대한 해러웨이의 의기양양한 독법을 알고 있다.

 

 실뜨기를 진행하기 위해 다른 손들이 서로 연계될 때 실뜨기 놀이는 우리가 주고 받기를 배울 필요가 있는 그런 종류의 도움에 대한 중요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최종성도 없으며 여태까지의 불안정한 특수한 시간성과 기회만 갖춘 분산된 행위주체성의 상징이다. 실뜨기 과정에 속한다는 것이 중대한 관심의 문제들을 표명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관계자들과 공유되고 다른 손들에 의해 중계되기 쉽도록, 엮여지는 것에 새로운 차원과 기회들을 부가하기 쉽도록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과학소설과 사변적 허구화가 내가 결론을 내리는데 사용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신화일 것인데, "우리가 다른 관념들을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관념들"로 실험할 수 있는 우리 역량, 해러웨이가 인류학자 마릴린 스트라슨(Marilin Strathern)으로부터 배운 의문을 탐색한다. 철학자로서 나는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과 매리언 짐머 브래들리(Marion Zimmer Bradley) 같은 저자들에 빚을 지고 있는데, 내가 현대 인류학을 읽기 훨씬 전에 그들과 함께 나는 결코 믿음의 견지에서 타자들을 설명하지 않을 것, 결코 진리를 환상을 폭로하는 논쟁 능력과 관련시키지 않을 것을 배웠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수반하는 철학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배웠다. 인문학과 사회인류학적 과학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상 그런 과학소설 작가들은 사고 실험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실험들은 물리학과 다른 실험 과학들, 중요한 진정한 예술의 창의성이 풍부하고 모험적인 장점이었고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은 사회인류학적 과학들에 의해 결코 재생산될 수 없는데, 그것은 어떤 특수한 가설의 직접적인 결과들을 극화해야 하는, 동떨어진 허구적 세계를 상상할 자유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소설은 그렇게 동떨어질 수가 없는 세계, 저자의 가설의 많은 반향과 결과들로 가득찬 세계, 거주민들이 이런 허구적 가설과 정합적이지만 결코 그것에서 직접적인 결과로 도출되지 않는 기회, 문제, 딜레마, 습관, 희망 그리고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탐색한다.

 

과학소설이 실험 과학들에 의해 성취된 종류의 객관성과 아무 관계도 없는 객관성의 모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놓친 사고 실험, 사회인류학적 과학들이 단념해버린 놓친 중요한 예술이라면 어쩔 것인가? 과학소설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정착된 권위 있는 분배를 탐색하고 그것으로 실험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과학소설이 과학적 상상력이 요구하는 것―우리 세계는 지금의 모습일 필요가 없고, 명령조로 요구하는 듯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없다―을 발제한다면 어쩔 것인가?  과학소설이 세계가 구성되는 다른 가능한 방식들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당대의 능력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공들여 만들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오늘, 가이아에게 나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역능을 부여하고자 시도하면서, 나는 다른 한 과학소설 저자인 데이비드 브린(David Brin)과 이 년 전에 출판된 <<존재(Existence)>>라는 소설에서 그가 고안하고 있는 비묵시록적 실재에 빚지고 있다. 브린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처럼 어떤 불가사의한 갑작스러운 세계 종말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그것은 긴 과정이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우리 꿈의 기술적으로 복잡한 폐허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050년 세계는 우리 세계이자 우리 세계가 아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기후 변화는 피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미합중국이 더 이상 연방이 아니고, 테러리스트 "끔찍한 날"이 일어났으며, 10개의 출자 "영지", 상위의 엄청나게,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 하층 인민들 각자의 권리와 의무 규정에 의해 사회적 불안이 일시적으로 억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과도하게 연결된 수십 억 명의 인간들이 거주하는 세계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불화하는, 폭발 직전의 대중―실시간으로 측정되는 거대한 여론 물결들이 충돌하는 사나운 대양―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한 가지 의문이 데이비드 브린의 불안한 세계를 떠돌고 있다. 거대한 침묵에 관한 의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기하급수적으로 자기복제하는 로롯 탐사자들과 관련하여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옳았다면, 여태까지 왜 아무도, 바라건대, 인사하러 오지 않았는가? 어떤 "필터"가 존재하는가? 안심시키는 가설은 필터가 과거에 처해 있다―지능을 갖춘 종족들은 사실상 거의 없을 것이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점점 커지는 의심은 필터가 미래에 처해 있지 않을까,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어떤 문명의 경우에도 존재는 지뢰밭이 아닐까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도 당시에 가능한 많은 "큰 실수" 가운데 하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그것을 존재로부터 여과하여 제거하는 지뢰의 폭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은 연구자인데, 삶과 죽음의 방식과 운명을 같이 한다. 그에게는 어떤 구원의 이야기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대중을 양지로 데려오는 섭리적인 영웅 또는 구세주도 전혀 없다. 지혜로의 거대한 전환도 없다. 더 도전적으로, "할 수 있다"는 미합중국 심성의 포기도 없다. 브린의 경우에, 포기하는 것은 지금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이 글을 읽고 이의를 제기하며 의심할 수 있다는 점을 진정한 성취로서 갖는 세계를 포기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이 세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망각하는 점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예외적인 것인 포기할 자유의 혜택을 받고 있다. 브린의 경우에 9/11의 진정한 교훈은 항공기 93의 승객들, 당국자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은 채 행동하고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주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 이해하며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었기 떄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인 브린이 자신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난잡하며 의지할 수 없더라도, 그는 그들을 믿음직한 순종적인 위치로 되돌릴 현명한 권위자에 대한 어떤 향수 또는 소망에도 저항할 것이다.

 

9/11 승객들의 후예들은 똑똑한 군중, 제보자가 집단적인 주의 집중을 촉발했을 때 또는 관심이 집중되는 의문을 둘러싸고 웹을 통해서 자기조직하는 익명의 적극적인 군중으로서 소설 속에 존재한다. 그들의 다양한 솜씨는 웹을 자료를 조사, 발굴, 수집하고, 자료를 대조하고, 거짓말을 식별하며, 선전에 저항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변환시켜 버렸다. 그렇지만 위기의 시대에 그들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존재>>는 우리가 사실상 혼자가 아니라는 허구적 가설에 의해 극화된, 이런 의문들에 관한 한 가지 사고 실험이다. 일단의 이종적인 가상적 에일리언들이 거주하는 달걀 모양의 결정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은 우리 꿈을 충족시키는 듯 보이는데, 그들이 "합류하라"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제안? 아니면 오히려 유혹적인 덫? 나는 줄거리를 말하지 않고, 그것이 전개하는 가설의 시험적 특질을 강조할 뿐이다. 우리 세계는 난잡한 세계일 뿐 아니라 난잡하고 위험하기도 한 우주이다. 예를 들면 폰 노이만이 망각했었던 것은 자기복제 인공 지능 생명체들의 번성이 "최악의" 다윈적 진화―먹이를 공격하여 그것을 자기 번성의 수단으로 변환시키는 바이러스처럼 행동하는 것들의 선택―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부터 줄곧 사실상 인류는, 우리 종을 유혹하여 지구를 공장을 제조하는 결정으로 변환시킬 목적만을 지닌 채, 우리의 방어책들을 극복하거나 변환하는 방법을 배우는 "에일리언 바이러스들"에 의한 언제나 더 영리한 "공격"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할 것이다. 그때 합류하라는 제안은 "여러분이 생산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우리 결정의 많은 사본들 속에 여러분 자신의 불멸적인 가상적 판본들을 업로드하여 우리 함께 감염체를 모든 곳에 전파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합류하라, 그러면 소진된 죽어가는 행성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데이비드 브린의 사변적 명제이다. 유혹적인 "합류하라"는 제안에서 살아 남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가상적 에일리언들의 유혹이 (일반적인) 권위주의적 사회들의 지배 엘리트 계층에 대한 그것의 효험성의 견지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놀람, 놀람, 우리 사례에서 그들은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이 경청하고, 그 제안의 의미에 관해 추측하며, 주어진 것에 대한 해답에 관해 강하게 동의하지 않는 통치하기 어려운 사회를 다루어야 한다. 추측하고 조사하며 공황 상태에 저항할 시간, 에일리언들의 수법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정한 학습을 이루어낼 시간, 그리고 불멸성을 얻는 것이 명백한 권리인 사람들을 제지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소설이 끝날 무렵에 알게 된 것은 불화하는 다양성이 우리의 유일한 튼튼하고 강인한 방어책이라는 점이다. 인류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다. 이제 그것은 인공 지능 생명체들, 진정한 타자로 인식되는 자폐적인 사람들, [고양된] 돌고래들, 게다가  소행성 지대에 발이 묶여 잠복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전 탐사 물결의 폰 노이만 로봇들, 심지어 생명공학적으로 부활된 네안데르탈인들도 포함한다. 어떤 영리한 수법도 단박에 그렇게 다양한 지능들을 유혹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브린의 작업은 전적으로 엘리트주의적 단일 문화와 확고한 지도 체제에 대한 무언의 꿈의 위험성, 그 자신의 SF 판본인 소설의 끝 부분에서 울려 퍼지는 삶과 죽음의 방식에 대한 선택에 관한 것이다. 여태까지, 구원적 이상의 항성 없이 그냥 계속해서 살아가고 학습하는 것. "우리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 적기에 실패 양식들을 밝혀내고 있다. 때때로 약간의 숨 쉴 여지와 확신을 획득하고 있다. 때때로 공황 상태를 거의 피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수선을 행하고 있다. 독재자와 선동가들을 박살내고 있다. 사이비 신 제작자와 광신적인 향수(鄕愁) 중독자들을 극복하고 있다. 우리의 다양성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법을 점진적으로 배우고 있다."

 

여기서 나는 끝맺을 것이다. 소설은 논증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에 맞서 자체를 옹호하거나 결속을 요구할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 르 귄, 짐머 브래들리, 브린 등 사이에는 어떤 선택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고, 가이아라는 천 개의 이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공들여 만들고 있는 사고 실험들은 수천 명의 익명의 독자들의 상상을 촉발하거나 그 속에 스며들고 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어떤 유토피아적 꿈으로 도피하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사변적 취향을 육성하라고 권고한다. 책임감, "우리를 도와 주시겠습니까?"라는 부름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계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단인들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실뜨기 놀이 파트너로서 그들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콧구멍에 여전히 걸려 있는 화형당한 마녀들의 연기 냄새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 흔히 오늘날 심판으로 불리는, 마녀 사냥꾼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