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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사카사스: 오늘의 에세이-영원성과 무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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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6.

 

영원성과 무용성

The Ageless and the Useless

 

―― 마이클 사카사스(Michael Sacasas)

 

<<미래의 종교(Religion of the Future)>>에서 하버드 대학교 법학 교수인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는 인류의 세 가지 "고칠 수 없는 결함", 즉 필명성(mortality), 무근거성(groundlessness) 그리고 탐욕성(insatiability)을 식별한다. 우리는 죽음에 시달린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원과 거대한 사물의 도식에 있어서의 우리의 지위에 관해 무지하다. 이것이 인간 조건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의 주요한 종교들은 모두 지금까지 이 세 가지 고칠 수 없는 결함을 해결하려고 시도했고, 그것들은 모두 실패했다. 이제 21세기의 난제들에 적합할 새로운 종교를 구상할 시기라고 그는 제안한다. 그 자신의 제안은 불멸성, 전지성 그리고 완전성 같은 몇몇 신과 같은 성질들을 회피하는 동시에 더 신처럼 될 수 있게 되는 꽤 모호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내게 실행 가능성이 미흡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종교적 선택지가 형성되고 있다. 전개될 미래에 관해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함께 응한 다방면에 걸친 엣지(Edge) 인터뷰에서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결론을 맺는다.

 

"역사의 견지에서, ISIS 등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역사의 고속도로 위에 있는 과속 방지턱에 불과합니다. 중동은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리콘 밸리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21세기의 세계입니다 ... 저는 기술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관념의 견지에서, 종교의 견지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소는 중동이 아니라 실리콘 밸리입니다. 이것은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입니다. 시리아와 이라크와 나이제리아에서 비롯될 종교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세계를 접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독창적인 주장이 아닌데, 하라리가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실상 몇 달 전에 나는, 재론 레이니어(Jaron Lanier)가 "기술적 분야이어야 하는 것"에 "종교적 사유의 층위"가 부가되고 있는 점을 겨냥했던 또 하나의 엣지 대화에 대해 논평했다. 레이니어는 인공 지능(AI) 분야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와 미신들을 거부한" 다음에, 그럼에도 "그런 낡은 종교적 미신들의 판본들을 다시 만들어내"는 "기술적으로 능숙한, 디지털적 사고를 갖춘 사람들의 집단"에 관해 계속 불평한다. "기술적 세계에서의 이런 미신들은 이전과 꼭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유해하며,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그렇다"고 그는 덧붙였다.

 

<<기술이라는 종교(The Religion of Technology)>>의 가장 최근의 반복에 불과한 이런 신흥 실리콘 밸리 종교는 웅거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고칠 수 없는 결함들 가운데 한 가지, 즉 우리의 필멸성을 해결하는 데 전념한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런 종교적 전통 내에는 두 가지 종파가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것들 가운데 첫 번째 종파는 의식이 다운로드되어 영원히 보존될 수 있게 하는 의식의 디지털화를 통해서 불멸을 추구한다. 부패하기 쉬운 육체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본질적 자아는 클라우드(cloud)―이제 새로운 견지에서 드러나는 은유―에서 계속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실리콘 밸리 종교의 영지주의적 종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종파는 불멸에 대한 약간 더 그럴듯한 희망을 생명유전학적 향상과 사이보그적 향상을 통해서 육체를 죽지 않게 만드는 전망에 정초한다. 하라리가 진지한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전망이다.

 

"그렇습니다. 이제 질병과 노화와 죽음에 대한 태도는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기술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사유에 있어서 거대한 혁명입니다. 역사 전체를 통해서 노화와 죽음은 항상 형이상학적 문제로, 신들이 정한 것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것, 인간 조건과 실재를 규정하는 것에 근본적인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

 

사람들은 죽음의 천사가 오기 때문에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들의 심장이 멈추거나, 또는 동맥이 막히거나, 또는 암세포가 간이나 다른 어느 곳에 퍼지기 때문에 죽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기술적 문제이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어떤 기술적 해결책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사고 방식이 과학적 집단들에서 매우 지배적인 것이 되고 있으며, 그리고 잠깐만,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초갑부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만약 내가 충분히 부유하다면, 나는 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라리는 마지막 발언에서 조금 더 부연한다.

 

"죽음은 선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그것은 끔찍한 듯 보이는데, 역사 전체를 통해서 죽음이 거대한 평형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 전체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큰 위안은, 괜찮아, 이 부유한 사람들, 그들은 편안하게 지내지만, 그들도 나와 꼭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획득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덧붙여 죽음으로부터도 면제되는, 예컨대, 50년 뒤, 100년 뒤의 세상에 관해 생각합시다. 그것은 엄청난 분노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카너먼은 이 점에 관해 하라리를 압박했다. 급진적인 수명 연장을 낳는 의료 기술이 대중에게 흘러 내려가지 않을까? 이에 대응하여 하라리는 그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두 번째 두드러진 주제, 즉 잉여 인간들에 의존한다.

 

"그런데 21세기에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의 군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상실할 확률이 높으며, 그들은 상실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가치의 경우에 이것은 참인데, 끝이 났습니다 .... 그리고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사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에 대해 더 이상 정말로 필요가 없게 된다면, 대중 의학이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몇 가지 문단에는 고찰할 것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 내가 취하는 것은 세 가지 특이한 점, 즉 죽음에의 접근을 해결하는 문제, 도래하는 급진적인 불평등, 그리고 "쓸모없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하라리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예측들의 본성에 관해 감탄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그는 자신이 기술학자도 아니고 외과 의사도 아니며, 관찰할 수 있는 추세들로부터 가능한 미래들을 외삽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그의 종합의 우아함 때문일 뿐 아니라, 그것이 개연성이 더 낮은 가능성들을 피한다―예를 들면, 그는 인공 지능이 의식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도 나는 하라리의 논의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인간사의 우연성에 대한 역사가의 이해에 의해 단련받는다는 점도 도움이 된다.

 

죽음의 기술적 문제로의 변환에 관해서 그는 거의 확실히 옳다. 이런 태도의 전조는 근대 과학의 바로 그 기원에 존재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근대 과학에 대한 위대한 진흥가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삶과 죽음의 역사(History of Life and Death)>>에서 이렇게 적었다. "원래의 전체를 파괴하지 않은 채 점진적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은 영원히 꺼지지 핞는 성화처럼 잠재적으로 영원하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는, "불멸(이것이 가능하다면)에서 가장 하찮은 기계적 행위까지 모든 조작과 가능한 조작들의 발견"을 지식 추구의 목표로 제시했다.

 

1950년대에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의 서론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인간의 수명을 100년 넘게 연장하려는 희망"에 관해 적었을 때, 아렌트 역시 이런 관심사들을 예상했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과학자들이 100년 안에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의 인간은 이미 주어져 있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인간의 반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미래인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온 이 공짜 선물을 버리고 자신이 만든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교환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능력이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그것이 불멸성이나 심지어 급진적인 수명 연장을 산출하지 못하더라도 한 가지 기술적 문제로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은 확실히 어떤 유형의 편익을 낳을 것이다. 그런데 비용은 어떠할 것인가? 비록 그것이 "해결책"을 산출하지 못하더라도 죽음을 기술적 문제로 전환하는 것은 심대한 사회적, 심리적 및 도덕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은 맞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내 삶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런 접근 방식은 죽음이 마침내 찾아 왔을 때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직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라리 자신이 서술하듯이, "이것은 추측일 뿐인데, 내 추측은 오늘날 살아 있으면서 영원히 살 수 있거나, 또는 50년, 60년 후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에 기대는 사람들은 대단히 실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과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데 결국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후자가 훨씬 더 힘들다."

 

놀랍게도, 아렌트도 "몇십 년 안에 공장을 텅 비게 만들 것이고 인간을 노동과 필연성에의 구속이라는 가장 자연적이고 오래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자동화의 출현"에 관해 언급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완전한 축복인 듯 보인다면, 아렌트는 우리로 하여금 달리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근대는 노동을 이론적으로 예찬하였으며 모든 사회를 노동하는 사회로 변형시켰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해서 자기를 기만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염원은 달성된다. 노동자의 사회는 노동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목표로 해야 할 보다 고차적이고 의미있는 활동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우리는 노동이 없는 노동자의 사회를 생각해야 할 사태에 직면해 있다. 노동은 노동자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동이었다. 이것이 최악의 사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의식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지능. 하라리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의식과 지능이 짝을 이루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점점 더 우리는 의식과는 별개로 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능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한 가지 일을 엄청나게 잘 할 수 있지만 명백히 단순한 다른 업무들은 전적으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전문화, 즉 노동의 분업은 의식에 기반을 둔 인간의 지능을 기계 지능으로 대체하는 길을 열어 버렸다. 다시 말해서, 인간 행위의 기계화는 인간 행위자들을 대체하는 길을 준비한다.

 

이전에도 비슷한 예측들이 제시되었지만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하라리의 응대가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한다.

 

"또 다시 나는 20년, 50년, 100년 후를 예측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늑대가 왔다고 외치는 소년과 약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늑대가 왔다고 한 번, 두 번, 세 번 외치고, 사람들도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50년 전에 그들은 이미 컴퓨터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세대마다 그것이 더 가까와지고 있고, 이것들과 같은 예측들이 그 과정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전에 나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은 흔히 치킨 리틀(Chicken Little)을 그들의 해석적 패러다임으로 삼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하라리도 제안하듯이, 늑대가 왔다고 외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의 지혜를 고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이런 예측들의 타당성은 여러분의 시각에 따라 그것들을 흥미롭게 만들거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덧붙일 것이다. 이런 예측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그것들은 징후로서 교훈적이다. 데일 카리코(Dale Carrico)가 서술했듯이, 미래주의적 수사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이런 터무니없는 예측들이 징후로서 나타내는 것을 현재의 두려움과 욕망들의 입장에서 고찰하고, 현재의 후원자들이 이런 예측들이 함축하는 위협과 약속들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무엇을 부담하는지 고찰하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이런 예측들이 현재 추세들로부터의 외삽인 한에 있어서, 이런 현존하는 경향들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드러낼 것이다. 이런 노선들을 따라 나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광범위한 인간 활동을 기계와 장치들에 외주를 주는 현존하는 추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외주화는 물론 큰 혜택으로 제시되지만, 결국 그것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위해 해방되는가?

 

그것은 이른바 프로그램이 가능한 사물 인터넷의 세상과 관련하여 내가 이전에 제기한 적이 있는 주장이다.

 

최소한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 그 착상은 우리가 이런 평범하고 지루한 활동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 인류의 진정한 잠재력을 마침내 활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세계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필요에 의해 속박되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아무도 성취한 적이 없었던 인간 실존의 어떤 추상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나는 그 점이 이것을 일종의 영지주의적 환상으로 만든다고 추측한다. 우리가 더 이상 세계에 이바지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 정확히 무엇에 집중할 수 있는가?

 

조금이라도 연장된 수명의 가능성을 디지털 외주화의 귀류법과 결합하라, 그러면 노동 없는 노동자들의 사회에 관한 훨씬 더 날카로운 판본의 아렌트적 경고를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삶과 관련하여 정확히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어떤 설명도 상실해 버린 바로 이 시기에 우리는 인간 수명의 연장을 약속받고 있다.

 

쓸모없는 사람들, 즉 영구적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하라리는 덜 낙관적이다.

 

"저는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다가오는 수십 년 동안 경제와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쓸모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낼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한 경제적 모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추측일 뿐인데, 저의 최선의 추측은 식량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기술로 당신은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더 많은 권태,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지낼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무의미할 때, 가치가 없을 때 그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어떤 감각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라는 것들입니다.

 

현재 저의 최선의 추측은 약물과 컴퓨터 게임의 조합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일 것입니다 ...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이한 제목, 상이한 표제어 아래, 당신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약물을, 합법적 약물과 불법적 약물 모두를 복용하고 컴퓨터 게임를 하느라고, 또는 약물과 컴퓨터 게임과 관련된 내면적 문제들을 해결하느라고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하라리가 거듭해서 진술하듯이, 이 모든 것은 추측이다. 확실히 미래가 이런 식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기술적 노하우를 전개함으로써 인간 조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관해 언급한 후에 아렌트는 이렇게 덧붙인다.

 

"문제는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는가이다. 이 문제는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우선적인 정치문제인 까닭에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에게 그 결정을 결코 맡길 수 없다."

 

또는,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서술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색할 의지가 있는 한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