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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웰스: 오늘의 에세이-로봇 경제와 자본주의의 위기: 보편적 기본 소득이 필요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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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0.

 

로봇 경제와 자본주의의 위기: 보편적 기본 소득이 필요한 까닭

The Robot Economy and the Crisis of Capitalism: Why We Need Universal Basic Income

 

―― 토머스 웰스(Thomas Wells)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질적 번영은 시장(그리고 사회적 규범과 국가 제도)뿐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다. 시장은 경쟁하는 사업들 사이에 인간의 노동 같은 자원의 할당과 관련된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반면에, 기술적 혁신은 그런 자원의 사용과 관련된 생산성, 즉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향상시킨다. <<우리의 손자들을 위한 경제적인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of Our Grandchildren)>>(1930)이라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케인스가 예언했듯이, 겉보기에는 끊임없는 생산성 증가 추세가 마침내 '경제적 문제,' 즉 인류가 시작한 이래로 인간 조건을 특징지워온 희소성을 극복하려는 투쟁을 끝낼 것이라고 약속한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부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고찰하는 것에 하나의 사회로서 전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만족을 위한 시기가 아니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런 놀라운 번영을 만들어낸 동일한 경제적 체계가 우리를 초기 자본주의를 특징지었던 승자와 패자의 디킨스적 세계로 복귀시킬 것이다. 또는 더 나쁠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그 경제가 우리의 노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자본주의 경제의 물질적 번영을 청구할 권리를 획득할 것인가?

 

위기

 

기본적으로 최초의 산업 혁명은 보잘것없는 인간의 완력을 화석 연료로 구동되는 엄청나게 더 빠르고 더 강한 기계로 대체한 에너지 혁명이었다. 인간 노동자들은 이런 번영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일자리들로 이동했는데, 일부는 실제 물건들을 제조하는 기계들을 관리하고 정비했지만, 대부분은 "서비스업"에 종사함으로써 생산성에 있어서의 기술적 혁명이 미치지 못한 인지적 노력에 의해 교육 같은 무형의 재화들을 생산했다.

 

현재 우리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뇌를 기계 지능으로 대체하고 있는 제2차 산업 혁명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규칙화될 수 있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인간 종업원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저렴하고 더 믿음직하게 컴퓨터들이 수행하는 지시들로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운전, 법률, 의학 그리고 문서 번역 같은 점점 더 정교해지는 인지 노동을 포함한다. 대학 강의도 온라인 공개 수업(Massive Open online Course, MOOC)의 형태로 기술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는 한편으로, 배우의 디지털 복제 덕분에 영화 제작자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배역을 저렴하게 제작하게 될 것 같다.

 

최초의 산업 혁명과 꼭 마찬가지로, 이것은 시장에 의해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솜씨를 갖춘 패자들을 대단히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사람들이 이동할 새로운 일자리들이 나타날지 분명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기계들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우리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기술적 실업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바꿈으로써 해결해야 하는 영구적인 사실이 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생득권―우리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알게 되는 물건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경제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자동화는 이미 경제로부터 화이트칼라 일자리들을 제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용 없는 회복과 항상 넓어지고 있는 노동 시장 중간 계층의 구멍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불황 같은 불황 속에서 가속되는 과정이다. 하위 계층에서는 청소와 패스트푸드 준비 같은 낮은 지위의 저임금 일자리들―기계가 아직 할 수 없거나, 또는 충분히 저렴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놓고 경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상위 계층에는 기계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을 위해 기계들을 개발하고 정비하는 새로운 창의적 계급의 지식 노동자들이 위치할 것이다. 그 사이의 일자리들은 로봇들이 비용 효과가 가장 높게 수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봇 경제의 출력 부문에서 우리는 이전 세대들이 꿈꾸지 못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입력 부문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과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되는 경제를 갖게 될 것이고, 그래서 인간 노동에 대해 지불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노동 시장이 경제의 생산성에 대한 권리를 분배하기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달시킨 복지 체계들은 주로 노동 시장을 보완하도록 설계되는데, 예를 들면, 성인이 되었을 때 고용 가능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과 장애자 및 일시적 실업자들을 위한 사회 보장 '안전망'을 통해서 보완된다. 또한 취업은 대단히 도덕화되는데, 사람들은 급여가 제공되는 일을 찾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간주되고 있다. (사실상 이런 규범을 계발하는 것은 유한 책임 회사 같은 법률적 혁신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필수적인 것으로 명백히 간주되었다. 십구 세기 식민 강대국들은 농부들을 억지로 임금 노동자로 만듦으로써 의도적으로 생계 경제를 수지가 맞는 경제로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로봇 경제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지속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자본주의는 변화해야 할 것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

 

보편적 기본 소득은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괜찮은 생활 수준을 영위하는 데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념―그것에 관한 판본들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토머스 페인의 <농업의 정의(Agrarian Justice)>에 대한 소책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은 아니지만, 적기가 도래한 관념일 것이다. 이상주의적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 관념은 얼마간의 정치적 지지를 누렸으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들도 수행되었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의 지배력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는데, 심지어 단호한 경제학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지불하는 것은 기본 소득 자체를 부담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비롯하여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노동 윤리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걱정했다.

 

더 최근에 기본 소득이라는 관념이 약하게 부활했었던 적이 있다. 일부 좌파는 그것을 자본가들의 초과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주는 정당한 방책일 뿐 아니라, 노동의 품위를 회복하는 수단, 즉 사람들에게 그저 생존하기 위해 품위를 손상시키는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자유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일부 우파는 현재 복지 체계의 강제적이고 온정주의적인 관료 체제를 폐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율성과 자유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시민에게 매달 2000유로를 지불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다가오는 스위스의 국민투표는 언론과 의견-사설면에서 많이 다루어졌는데, 대부분이 긍정적인 논조였다.

 

로봇 경제의 맥락에서 보편적 기본 소득을 옹호하는 논변은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된다. 그것이 더 이상 더 자유롭고 더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이상주의적 전망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악몽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몽상적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보수주의자와 단호한 현실주의자들도 편승할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달성하는 데 매우 오래 걸린 자유와 번영을 조금이나마 유지할 최선의 희망이라는 점이 명료해지면, 사회적 제도의 급진적인 변화에 전념하는 것이 위험 회피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인 듯 보이게 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든지 그저 자본주의를 구하고자 하든지 간에, 그 행로는 기본 소득 같은 것으로 나 있다.

 

첫째, 항상 증가하는 자동화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적 풍요는 보편적 기본 소득의 부담 가능성과 지속 가능성을 더 신뢰성 있게 만든다. 기술적 실업이라는 재앙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계비를 지불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취업을 단념하게 만들고 '서핑광'으로 변신하게 만들지라도, 그것이 세금 기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어쨌든 인간들이 수행할 일자리는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노동 윤리에 미치는 영향도 무관할 것이다.

 

둘째, 경제적 출력에 대한 권리를 자본에서 노동으로 이전하기 위한 노동 시장 메커니즘이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제공할 새로운 길이 필요할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결국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과잉 생산 속 소비 부진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기계와 알고리듬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도 가능한 것보다 덜 부유할 것인데, 그들의 재화와 서비스가 아무리 저렴하게 생산되더라도, 그들의 이윤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부채 위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산의 분배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경제는 돌기를 멈추고 붕괴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도덕적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설치되고 유지되는 방식에 의존하여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더 많거나 더 적게 생산할 수 있는 복잡한 기계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부채 위기를 해결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은 경제가 계속 돌 수 있도록 정부가 강제적으로 일부 자산을 채권자들로부터 채무자들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부채 위기를 해결하는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방식은 채권자들이 채무자들의 마지막 남은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인데,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농업 경제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것들이 노예 사회였다. 이것과 동일한 공리주의적 추리에 의하면, 구매력을 보통 소비자들에게 돌려주어서 자본주의가 신봉건주의로 붕괴하지 못하게 막는 데 어떤 형태의 기본 소득―자금이 법인세에 의해 조달되든, 부유세에 의해 조달되든, 보편적 공동 소유권에 의해 조달되든 간에―이 필요한 듯 보인다.

 

세째,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의 복지 체계는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유토피아가 인구의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는 디킨스적 디스토피아 내지는 더 나쁜 것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노동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복지 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인간의 품위이다. 대부분의 부유한 나라들은 연금과 연결된 생활비와 무상 의료를 자선이 아니라 마땅한 권리로 확립함으로써 노인 빈곤이라는 재앙을 이미 종식시켰다. 오래 전에 우리는 노인들이 극빈, 빈민 구호품을 구걸하는 것 그리고 거리에서 살아가는 것의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동일한 고려를 일반 사람들에게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더 긍정적으로, 기본 소득 덕분에 우리는 물질적 풍요에 의해 제공되는 해방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형편없는 일자리 현상에 관하여(On the Phenomenon of Bullshit Jobs)>>라는 최근의 에세이에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래버(David Graeber)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수행하는 대부분의 작업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저 우리 모두를 계속 일하도록 하기 위해 저쪽에서 누군가가 무의미한 일자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이 실제로 무의미해져 버리고 케인스가 예언했던 물질적 번영이 실현된 이후에도 노동 숭배는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경제의 생산성에 대한 권리를 얻는 데 필요하며, 그리고 자동화가 식량 생산과 물건 제조 같은 실제로 유용한 물건들을 제조하거나 작업들을 수행하는 산업의 일자리 수를 감소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또는 대체로 무의미한 일자리에 갇혀 있는데, 그래버는 특히 기업 법률가와 대학 행정가들을 공격한다.

 

인공 지능은, 그런 사이비 일자리들이 도대체 수행할 가치가 있는 한에는, 그것들 대부분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고, 한편으로 기본 소득은 예컨대 새로운 상위 계급들의 하인 같은 새로운 일단의 무의미한 일자리들을 창출하는 데 착수하지 않을 자유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간에, 정말로 중요하지 않는 활동으로 우리의 꺠어 있는 삶 가운데 절반을 낭비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실업자의 무력하고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무활동이 아니라, 신사의 품위 있는 여가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자유을 고상한 사업과 철학적 사색에 착수하는 데 사용할지, 또는 TV를 더 많이 시청하고 골프를 더 많이 치는 데 사용할지 여부는 다른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독자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이것을 다루려고 시도했었다).

 

***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신은 아담에게 영원한 노동의 삶이라는 저주―"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세기 3장 19절)―를 내렸다. 기계의 등장은 인류에게 마침내 그런 저주에서 벗어날 멋진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 노동의 종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도 제공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가장 위대한 성취였던 널리 공유된 물질적 번영은 현재 망쳐지고 있는 기술, 시장, 사회적 규범 그리고 정부의 특정한 조화로운 배치에 의존했다. 우리는 두 미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한 미래에서는 우리가 익숙해져 버린 제도―노동 시장, 노동에 대한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들을 지원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하는 복지 체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 경우에 우리는 결국 부자와 빈자로 분리된 세계, 또는 더 나쁘게도, 영주와 농노로 분리된 세계로 되돌아갈 확률이 높다. 나머지 다른 한 미래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번영을 통제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위해 작동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