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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서평-단일한 우주와 시간의 실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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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단일한 우주와 시간의 실재성

The Singular Universe and the Reality of Time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나는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와 리 스몰린(Lee Smolin)가 저술한 <<단일한 우주와 시간의 실재성: 자연 철학의 한 가지 제안(The Singular Universe and the Reality of Time: A Proposal in Natural Philosophy)>>라는 새 책을 읽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바쳤다. 사실상 이 서평은 그 책에서 두 저자 가운데 철학자인 웅거가 저술한 제1부와 관련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물리학자인 스몰린이 저술한 제2부에 집중하는 두 번째 서평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주장을 개진하지만, 웅거는 폭넓은 철학적 시각에서 달려들고, 스몰린은 더 경험적인 과학적 관점에서 달려든다.

 

그 책은 철학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공히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야심만만한 책이지만, 목적이 형이상학, 물리학, 수학에 관해 생각하는 꽤 급진적인 방식에 노출되기 위한 것일 뿐이더라도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리고 이것은 스몰린이 기여한 부분에 비해서 웅거가 저술된 제1부가 얼마간 느리게 진행되고 장황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저자들이 무엇을 성취하려고 착수했는지 알기 전에, 그 책의 더 기본적인 한 가지 전제를 논의할 가치가 있는데, 그들은 그 책을 그들이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고 부르는 것의 습작으로 간주한다. 물론, 자연 철학은 과학이 철학 자체와 독립적인 탐구 분야가 되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이었다.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 그리고 심지어 다윈도 스스로를 자연 철학자로 간주했다(사실상 과학자라는 낱말은 1833년에 다윈의 조언자였던 윌리엄 휴웰(William Whewell)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런데 약간의 역사적 향수와 아마도 지적인 허세와는 별도로, 그런 옛 술어로 되돌아가는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실제로 웅거와 스몰린(지금부터 U&S)은 그것을 옹호하는 매우 훌륭한 논변을 전개하는데, 그 논변은 그들의 동료들이 사실상, 흔히 은밀하게, 또는 아마도 인식하지 못한 채, 바로 이런 종류의 활동에 관여해 왔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여러분은 지난 몇 년 동안 과학자들이 저술했으며, 그리고 일반 대중을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의 즐거운 디즈니 픽사 영화들―젊은 관객들을 겨냥한 명백하고 이해하기가 매우 쉬운 것과 더불어 감정가들만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더 정교한 조크와 뒤얽힌 투 트랙 전략 상품들―과 약간 흡사한 것으로 판명되는 수많은 책이 출판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U&S에 따르면, 자연 철학에서의 이런 습작들은 비전문가 독자뿐 아니라, 동료 평가라는 엄격하고 한정적인 형식을 벗어나서 자신들의 동료들에게도 말하고 싶은 과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었다. 그런 책들을 과학자들이 해당 분야의 의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부분적으로) 서로를 겨냥하는 장문의 의견 기사로 간주하자.

 

이것은 내게 정확히 올바른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내가 읽은 많은 책들(그리고 아마도 내가 저술한 몇 권의 책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예를 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이 새로운 장르의 모범 사례들로 간주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책들 가운에, 피터 보이트(Peter Woit)의 <<초끈 이론의 진실(Not Even Wrong)>>(초끈 이론에 관한 책),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의 <<연애(The Mating Mind)>>(인간의 성 선택에 관한 책),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경제학에 관한 책),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사회적 진화에 관한 책), 마크 커슈너(Marc Kirschner)와 존 게하트(John Gerhart)의 <<생명의 개연성(The Plausibility of Life)>>(진화론의 진화에 관한 책)이 그렇다. 사실상 거의 틀림없이 그런 접근 방식은 다윈 자신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책은 다른 자연학자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배포한 첫 날에 일반 대중에게 매진되었었다.

 

웅거는 그 현상을 이런 식으로 서술한다.

 

"오늘날 자연 철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위장한 채 살아간다. 과학자들은 교양 있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대중서를 저술하는데, 그들이 실천하는 과학에 관한 관념들을 비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공언한다. 그들은 이런 책들을 활용하여 우주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그들이 발견한 것들의 더 큰 의미에 관해 사색한다. 그렇지만 또한 그들에게는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겨냥하는 독자층, 즉 그들의 과학 동료들이 있다."(p. 82)

 

U&S(나 자신까지도)는 문제가 되는 과학자들이 불미스러운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거나, 또는 표리부동한 홍보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이와는 대조적으로, U&S가 하고 싶은 일은 그 추세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물리학과 우주론에 관한 자신들의 의제를 추동하는 것이다. 결국 U&S의 특정한 제안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나는 전체 발상이 꽤 신선하다고 알아챈다.

 

웅거는 자연 철학의 네 가지 표징을 식별한다.

 

"그것의 첫 번째 특징은 자연을 자체의 주제로 삼는 것인데, 과학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말이다. 그것은 자연에 관한 더 큰 주장의 일부로서만 과학 일부의 방향과 실천에 관한 논쟁에 관여한다. 현재 이해되고 실천되는 대로의 과학 철학의 직접적인 주제는 과학이다. 자연 철학의 직접적인 주제는 자연이고, 항상 자연이었다. ... 자연 철학의 두 번째 특징은 특수 과학들의 현재 의제 내지는 기성의 방법들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그렇게 한다. ... 자연 철학의 세 번째 특징은, 여기서 우리가 예증하듯이, 자연 철학이 수용된 장르였을 때 자연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바라보곤 했던 대부분의 방식과의 단절을 나타낸다. 우리는 기본적이면서 일반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을 벗어나거나 과학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들에 의존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한다. ... 자연 철학의 네 번째 특징은, 여기서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고 복원하려고 시도하듯이, 자연 과학의 의제에 관한 논의에 개입할 때 그것은 과학 내부의 담론과 과학에 관한 담론 사이의 분리의 명료함을 희석시킨다는 점이다."(pp. 75-77)

 

나는 웅거가 "과학을 벗어나거나 과학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관념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의 가능성에 대해 약간 낙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저술한 다른 부분들에서 웅거는 더 온건한(그리고 두드러지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과학의 (불가피한?) 형이상학적 신념들을 강조하는 것과 그것들을 공공연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최소한 것으로 줄이는 것―에 대한 찬성론을 펼치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전달해야 할 세 가지 가능한 "담론들"이 존재한다―과학의 내부(과학자들에 의해 적절히 수행되는)에, 과학의 외부(과학 철학자들에 의해 적절히 수행되는)에, 그리고 과학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철학적 성향을 지닌 과학자들과 과학적 성향을 지닌 철학자들이 공히 환영받는다)―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여기서 실행된 자연 철학과 과학 철학 사이의 구별짓기를 좋아한다. 나는 내 사무실 문패를 "자연 철학자"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앞의 글을 모두 머리말로 간주하면, U&S가 옹호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며,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옹호하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웅거가 저술한 부분과 스몰린이 저술한 부분에 공통적인 그 책의 서론에 많이 의존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내가 적절하다고 간주될 때 주석을 틈틈이 끼워 넣을 것이다.

 

U&S는 독자들의 고찰을 위해 세 가지 근본적인 관념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 관념은 우주의 단일한(singular) 현존이다. ... 우리가 논의하는 조건을 붙여, 한 시기에 오직 하나의 우주가 존재할 뿐이다. 자연적 세계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은 바로 그런 것이지 무언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관념은, 지금까지 때때로 현대 물리학의 어떤 설명적 실패 사례들을 설명적 성공 사례들로 위장하는 데 사용된 다중 우주(multiverse)―동시에 현존하는 다수의 우주들―라는 관념을 단호히 부정한다."(p. x)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내 친구 션 캐럴(Sean Carroll)과 수많은 다른 물리학자와 우주론자들에게는 실례지만, 아멘일 뿐이다! U&S는 다중 우주의 존재를 믿어야 할 특별한 과학적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설명하는데, 즉 그 관념은 경험적으로 시험할 수 없고, 그래서 비과학적이며, 그리고 그 관념 전체는 그들이 우주론적 모형들의 현재 실패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이 낱말의 나쁜 의미에서) 포장이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 관념은 시간의 포괄적 실재성이다. 시간은 실재적이다. 사실상 시간은 세계의 가장 실재적인 양상인데, 이것은 시간이 어떤 다른 양상에서도 비롯되지 않는다고 말할 이유가 가장 큰 자연의 양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은 시간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시간은 공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p. x)

 

그들은 이런 확신이 그들이 20세기 우주론의 가장 근본적인 발견이라고 간주하는(올바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것, 즉 우주는 나이가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이런 발견이 시간은 상대적이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어떤 특권적인 절대적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흔히 반복되는 관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이 내게 일반 상대성을 제시하기 전에,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라.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고, 그 책의 제1부에서는 철학적으로, 제2부에서는 과학적으로 적절히 그것을 다룬다. 그들은 일반 상대성을 거부하지 않으며, 물리학자들이 당연하다고 간주해 왔지만 우주론에서 비롯되는 경험적 데이터에 비추어 이의가 제기될 수 있는, 그것에 대한 보증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외삽물들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할 뿐이다.

 

"세 번째 관념은 수학에 대한 선택적 실재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학적 플라톤주의로 흔히 서술되는 것, 즉 자연과 별개로 수학적 존재자들의 실재적 현존에 대한 믿음에 대립되는, 유일한 실재적 자연 세계와 관련된 의미에서 실재론을 사용한다.) 그런데 가장 기초적인 자연 과학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은 수학에 대한 믿음과 과학 및 자연에 대한 수학의 관계와 관련된 믿음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과학이 식별할 최고의 대상인 자연 법칙들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p. xii)

 

그런데, "법칙들"은 전혀 없고 수학은 인간의 (매우 유용한) 발명품이기 때문에, 자연 법칙들은 경험적인 것들을 넘어서 더 심원한 실재를 탐지할 수 있는 신비한 육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약간의 해설이 필요하다. 나는 수학에서 시작한 다음에 자연 법칙이라는 쟁점을 다룰 것이다.

 

최근까지 나 자신은 수학적 플라톤주의에 매혹되었다. 그것은,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가 유명하게도 서술했듯이, "수학의 불가해한 유효성"을 이해하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는 관념이다. 그것은 수많은 수학자와 수학의 철학자들이 공유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수학 공식들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과학자들이 외부 세계의 특징들을 처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발견한다"는 수학자들의 강한 직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그것은 과학적 이론들에 관한 실재론의 옹호와 유사하며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에 의해 제기된 논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수학이 인간 정신의 임의적 창조물이라면 그것은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게다가 반복적으로 수학은 과학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런데 물론 똑같이 (더?) 강력한 반대 논증들도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그 책의 제1부에서 웅거의 의해 부분적으로 논의된다. 처음에 전체 상황은 약간 불편하게도 신비주의의 냄새를 풍긴다. 수학적 객체들의 이 영역은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게다가, 그리고 관련되게도, 아무튼 어떻게 인간들이 그런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섬뜩한 능력을 발달시켰는가? 아무리 불완전하고 간접적일지라도,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우리는 생존하고 생식하기 위해 그런 세계를 탐사할 수 있는 일련의 감각적 역량들을 진화시켰으며, 과학은 세계의 더욱 더 많은(그리고 우리의 생물학적 적응성과 점점 더 무관한!) 양태들에 대한 접근권을 획득하기 위해 더욱 더 정교한 장치를 통해서 우리 감각들의 힘을 확장하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사실상 수학의 (불)가해한 유효성에 대한 대안적인 자연주의적 해석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과학과의 유비이다. 수학 역시 세계 속에서 유용한 일들을 행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셈을 하는 방식(산술)과 세계를 측량하여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부분들로 나누는 방식(기하)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 수학자들은, 내부적으로 생성되는 문제들(오늘날 우리가 "순수" 수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런 세계로부터 완전히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더욱 더 정교하고 덜 직접적인 양태들을 이해하기 위한 독자적인 연장(경험적인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개념적인 것)들을 발달시켰다.

 

U&S는 수학의 힘과 유효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한 그들은, 수학을 그렇게 유용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세계의 특수한 것들로부터의 추상, 그리고 특히 시간적으로 비대칭적인 것들을 다루지 못하는 무능력(기초물리학의 수학적 방정식들은 시간 대칭적이고, 비대칭성은 외부에서 부과된 배경 조건으로 도입되어야 한다)―이 바로 단일한 실재적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경험 과학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런 긴장에 대한 최선의 사례는 우주가 무한한 질량과 에너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특이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웅거와 스몰린이 거부하는―에 대한 근거를 구성하는, 일반 상대성의 장 방정식들의 소급적 연장에 의해 제공될 것이다. 그들은 상황을 뒤집는데, 그 대신에 자연에서 어떤 무한한 양들이 선행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경험적 증거의 완전한 부재뿐 아니라 그것의 논리적 불가능성을 단언한다. 일반 상대성이 물리적 무한자들을 예측한다면 그것은 일반 상대성에게 너무나 좋지 않은데, 그것은 그 특수한 이론이, 모든 과학적 이론과 마찬가지로, 넘어서면 붕괴되는 특정한 적용 영역(확실히 꽤 넓은데, 알려진 우주의 역사 대부분 동안 대부분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논의된다). U&S에 따르면, 그 대신에 일부 물리학자들은 안내서와 실재가 대립하는 경우에 잘못된 것은 실재라고 독자에게 경고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의 (허구적) 저자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흥미롭게도, 물리학의 다른 영역들에서는 U&S의 충고를 흔쾌히 따르는 것은 물리학자들 자신이다. 예를 들면, 상전이라는 창발적 현상을 고려하자. 물질의 상태들 사이에 일어나는 전이들을 서술하는 곡선들이 구체적인 물질에 무관하게 동일한 것으로 판명되는데, 이것은 이런 과정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한 가지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게다가, 예상했듯이, 상전이에 대한 여태까지 가장 최선의(하지만 중요하게도 유일하지 않는) 수학적 처리는 특이점들을 초래한다! 즉, 수리물리학자는 상전이에 관여하는 분자들의 수가 무한한 것처럼 상황을 처리하는데, 그것 덕분에 그는 물리학을 서술하는 몇 가지 매우 우아하고 매우 다루기 좋은 수학적 형식들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물론 모든 사람이 이것은 이상화일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데, 분자들의 수는 결코 무한한 양이 아니며, 매우 매우 큰 양일 뿐이다. 그런데 왜, 빅뱅이라는 특정한 경우에는 형이상학적 반전을 이루는가? 나는 여기서 아인슈타인 본인은 경험적인 것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경의를 품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자연 법칙이라는 쟁점을 고찰하자. 자연 법칙이라는 관념 전체가 논쟁적 역사를 갖추고 있으며, 놀랍게도 그 역사는 최근에 이루어졌다. 초기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데카르트와 그 다음에 뉴턴이 그 관념의 열렬한 옹호자였는데, 물론 그들은 그것을 창조주 신의 존재에 직접 귀속시켰다. 결국, 법칙이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입법자가 필요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홉스와 갈릴레오는 그 관념에 분명히 흥분하지 않았는데, 그 대신에 그들은 경험적 근사와 일반화에 관해 말하기를 선호했다. 근대 물리학에서 데카르트-뉴턴 진영이 현대 물리학을 지배하는 한편으로, U&S가 주장하기 이전에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즉 불가사의(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서 몇 가지 관찰된 규칙성)를 설명하기 위해 수수께끼(법칙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명의 그런 철학자는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와 이언 해킹(Ian Hacking)이다.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은 독립적으로 그 주제에 관한 두 권의 획기적인 책―<<물리학의 법칙들은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How the Laws of Physics Lie)>>(참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제목이지 않는가?)와 <<표상하기와 개입하기(Representing and Intervening)>>―을 각각 출판했다.

 

특히 카트라이트에 따르면, 자연 법칙은 이른바 입자들의 거동에 대한 진실한 일반화된 서술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화된 모형에 따라 입자들이 어떻게 거동할 것인지에 관한 진술이다. 카트라이트의 중요한 요점은, 이론은 세계에 대한 다소 동형적인 (진실한) 지도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경험적인) 이상화된 모형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근본적 법칙과 현상학적 법칙을 구분짓는다. 근본적 법칙은 실재론자들에 의해 가정되는 법칙이며, (필경) 우주의 진실한 심층 구조를 서술한다. 반면에, 현상학적 법칙은 예측을 하는 데 활용될 수 있고, 충분히 잘 작동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뉴턴 역학은 현상학적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실제적 목적들에 대해 잘 작동하는 이상화이다. 카트라이트의 경우에, 모든 법칙은 그것과 같은데(그래서 카트라이트는 법칙에 관한 반실재론자이다), 이것은 물리학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만물 이론"을 찾는 대신에 각각 한정된 적용 영역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국소적인 (현상학적) 이론과 법칙들의 정합적인 짜깁기를 구성하는 것에 관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카트라이트는 이렇게 서술한다. "양자 이론도 고전적 이론도 그것들의 영역 내의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제공함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상황들은 양자 서술을 필요로 하고, 어떤 상황들은 고전적 서술을 필요로 하며, 어떤 상황들은 두 가지 서술의 혼합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양자 역학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노선을 따라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카트라이트에 따르면, 경험적인 것을 넘어서 불안정한 형이상학적 기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웅거와 스몰린은 그렇게 멀리 나아가지 않지만, 그들의 비판 정신은 유사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철학적 담론의 다른 한 주요한 요소인 인과성에서 시작하는 물리적 법칙들에 대한 분석에서 그것을 도출한다.

 

U&S에 의해 제시되는 기본 착상은 단순하고 심원하며 두드러지게 합당한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법칙들을 동원함으로써 인과적 과정과 상호작용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실상, 인과적 상호작용들에서 창발되는 것이 법칙들(의 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즉, 인과적 과정들이 일차적이며, 그리고 그것들이 예측 가능한 규칙성을 나타내며 일어날 때 우리는 결과적인 유형을 법칙이라고 부른다. 결국 이것은 그들이 시간을 창발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과성을 규정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간적 비대칭성이며, 그리고 사실상 시간 자체를 인과성의 견지에서 규정할 수 있다.

 

"시간이 실재적이지 않다면, 이전(원인)도 이후(결과)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떤 인과적 관계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시간에 속박된 인과적 관계들과 항구적으로 유효한 논리적 또는 수학적 함축 관계들을 구별짓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p. 7) 그리고 또한, "이 견해 내에서 시간은 변화와 밀접하게 그리고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변화는 인과적이다. 이런 명제들의 정신에서 우리는 마흐(Mach)의 진술로부터 낙담할 것이 아니라 고무되어야 한다. '시간으로 사물들의 변화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 능력을 전적으로 넘어선다. 정반대로, 시간이란 사물들의 변화에 의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추상물이다.'"(p. 222)

 

그런데, 잠깐, 나는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움직이는 속력이나 중력 효과 같은 국소적 조건에 따라 시간이 변화한다는 경험적 증거가 많이 있다는 것이 맞지 않는가? 웅거(그리고 제2부에서 스몰린)는 분명히 이 점을 고려했다. "아인슈타인-리만의 존재론과 일반 상대성의 엄연한 경험적 내용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런 존재론이 없더라도 경험적 잔류물을 간직할 수 있다."(p. 232) 여기서 실용적인 해법은 초, 기준 원자의 진동수 등과 같은 표준적 단위로 표명되지 않는 절대적 시간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U&S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시간은 바로 사건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런 연속은 국소적으로 상이한 속도로 발생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떤 것(가장 명백하게 빅뱅 같은 것)이 다른 것보다 이전에 일어났다(전자가 인과적으로 후자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보편적으로 참인 사실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상황을 바라보는 이런 방식의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존재하는데, 우선 자연 법칙 자체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사실상 자연 법칙들은 이미 변화했다. U&S는 우주가 최소한 두 단계를 겪었으며, 그것들 이전에 더 많은 단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단계는 빅뱅과 바로 빅뱅 전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인과적 사건들의 연쇄(즉, 시간) 동안, 오늘날 우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예측 가능한 규칙성을 전혀 따르지 않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인과적 과정 자체가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 수십 억 년 동안 진행되었고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서술될 수 있는 냉각된 우주의 단계인데, 그것을 특징짓는 인과적 상호작용들의 본성이 변화하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뚜렷하게 변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주는 다른 격변을 무한정 겪을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결과는, 물리학자들은 우주론을 기초물리학이 진전되는 점점 더 특이한 방식이 아니라 지질학과 생물학 같은 일부 "특수" 과학들을 좇아서 모형화될 수 있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과학으로 진지하게 간주해야 한다. 사실상 우주를 관장하는 바로 그 규칙성들이 인과적 조건과 더불어 변화한다는 관념은 기초물리학에서만 기묘한 듯 보일 뿐인데, 지금까지 기초물리학이 추상적인(그래서 필연적으로 시간 불변적인!) 수학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다른 모든 과학들은 인과적 조건의 변회로 촉발되는 새로운 행동 유형(즉, 새로운 규칙성)들의 출현을 인식했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 진화의 주요한 천이들(예를 들면, 단세포 생명에서 다세포 생명으로의 천이)은 전에는 결코 예화되지 않았던 전적으로 새로운 진화적 변화 양태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진화 가능성(evolvability)"으로 알려진 개념]. 추리 능력을 갖춘 지각 있는 존재자들의 출현은 사회과학(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에 의해 서술되는 새로운 종류들의 인과적 상호작용들을 촉발했는데, 또 다시 이것들은 어떤 시기 이전의 우주에서는 결코 입수할 수 없었던 유형들을 따른다. 이것은 열린 가능성에 관한 매력적인 견해를 낳는데, 여기서 미래는 과거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성이 어떻게 변화하여 어떤 새로운 형식들을 취할지에 의존한다.

 

이미 상당한 길이의 이른바 절반의 서평을 더 연장할 희생을 무릅쓰고, 나는 웅거가 분명히 그 책의 기획을 두 가지 넓은 철학적 전통 내에서 진척시킨다는 점도 지적할 것이다.

 

"지연에 대한 관계론적 접근 방식과 존재에 대한 생성의 우위. ... 관계론적 관념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독자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사건 내지는 현상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물리학과 자연 철학의 역사에서 관계론적 견해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진술은 17세기 말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에 의해 표명된 것과 19세기 말에 에른스트 마흐에 의해 표명된 것이었다. ... 이 책의 두 번째 철학적 영감은 단일한 신조, 기성의 서술 등과 연관시키기가 더 어렵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생성의 우위, 구조에 대한 과정의 우위, 그래서 공간에 대한 시간의 우위을 단언하는 사유 전통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일시성을 역설한다."(pp. xiii-xv) 글쎄, 적어도 인물들을 거명하면,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복희("변화에 관한 책"으로 적절히 명명된 역경의 저자)를 제시할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결코 논란을 불러 일으킬 여지가 없는 관념들이 아니지만, 두드러지게 옹호할 수 있는 철학적 틀들이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자들이 아니라, 사건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방식들이며, 그리고 우주는 영원한(아!) 법칙들에 따라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특징짓는 어떤 규칙성도 사물들의 전개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