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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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핀 사트웰: 오늘의 오피니언-철학, 실제 세계로 복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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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8.

 

철학, 실제 세계로 복귀하다

Philosophy Returns to the Real World

 

―― 크리스핀 사트웰(Crispin Sartwell)

 

1980년대 초에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을 때 나는 탈근대적 문학 이론가 스탠리 피쉬(Stanley Fish)의 교내 소프트볼 팀에서 뛰었다. 나는 연습 경기에서 그가 심판을 보고 있었을 때 타자, 즉 지금은 예일 대학교의 뛰어난 교수인 내 친구 마이크가 판정에 이의를 제기했던 일이 떠오른다. 피쉬는 무엇이 볼이고 무엇이 스트라이크인지는 객관적, 외재적, 또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해석적 실천이며, 그리고 그런 실천에 따르면, 심판이 판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적인 것인데, 그가 스트라이크라고 판정하면 그것은 스트라이크라고 사근사근하게 지적했다. (그래서 그것은 스트라이크였어, 마이크.)

 

그 다음 날 수업 시간에 피쉬는 볼과 스트라이크 판정 사례를 문학 해석에 관한 이론으로, 그리고 마침내 실재에 관한 이론으로 확장했는데, 이런 영역들에서 참 아니면 거짓인 것은 권위 있는 해석적 공동체들이 승인하는 것이다. 법률은 이와 같은 실천이라고 그가 말했다. 철학도 그렇다. 과학도 그렇다.

 

자신의 경력 동안 피쉬는 "실락원"에 대한 꼼꼼한 독법에서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탈구조주의자들을 활용한 텍스트적 해석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나아갔었다. 그리고 진리는 언어 바깥의 실재를 참조하기보다는 언어적 실천의 문제라는 견해를 전개함으로써 그는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의 선봉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었다.

 

내가 나중에 나의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된 다른 한 주요한 탈근대주의자인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를 처음 읽은 것은 피쉬의 세미나 수업들 가운데 하나에서였다. 로티는 상대주의라는 혐위에 맞서 설득력 있게 자신을 방어했고―그의 연구실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며 그것을 인정받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그럼에도 그는 세계 또는 진리에 관해 말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언어적 실천 바깥의 실재를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서술되지 않고 있음에도 그럴 것이라고 실재를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터무니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그는 단언했다.

 

사실상 로티의 주장은 근대 초기의 아일랜드계 영국인 철학자 조지 버컬리(George Berkeley)의 주장과 비슷했다. 버컬리는 지각되지 않은 객체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으며, 그리고 존재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원 과정에서 나는 실제로 내 자신을 "멍청이 실재론자"라고 부르기로 작정했고, 나 자신을 선생들에 맞서는 외부 세계의 옹호자로 임명했다. 로티는 거듭해서 내게 서술되지 않은 객체를 서술하라고, 언어 바깥의 무언가에 관해 말해달라고 요구했다. 로티 자신에 따르면, 그는 세계의 현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단언 자체가 언어적 실천이라고 주장할 뿐이었다.

 

피쉬와 로티와 함께 공부하면서 종말에 대한 감각, 철학의 종말―한편으로 로티가 명시적으로 선언했다―과 그들이 오래 전에 끝나버렸다고 말한 많은 것들―객관적 진리, 명확한 의미, 필연적 가치, 물질적 외부 세계―의 종말에 대한 감각을 포착하지 않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확실히 그것은 그들의 지도 아래 학위논문 주제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한 대학원생에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내 세대의 저명한 분석철학자인 티모시 윌리엄슨(Timorthy Williamson)은 옥스퍼드 대학 시절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이제는 고인이 된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더밋은, 그의 평생의 작업이 헛된 노력이었다고 전제하고 애초부터 다른 쟁점들을 추구한 내 학위논문의 불쾌한 실재론에 대해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더밋의 반실재론은 로티의 반실재론보다 더 제한적이고 기술적이었지만, 그들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우선, 두 사람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 더밋은 진리란 외재적 실재들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기보다는 우리의 언어적 정당화 행위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윌리엄슨과 내가 공히 수행하려고 노력한 한 가지 일은 계속 나아갈 방법, 또는 아무튼 막다른 골목인 듯 보이는 것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개척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티와 피쉬의 1980년대 전성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보이기 시작하고, 반발이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철학에서 더 최근의 작업은 세계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실재론―실재는 의식 또는 인간의 지각적 구조 또는 언어 또는 해석적 공동체들의 산물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현존한다는 관념―을 포함한다. 아마도 누군가가 서술했듯이, 우리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를 만든다. 수십 년 동안 또는 심지어 수 세기 동안 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과 서술, 인간의 의식과 문화적 체계들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경험의 내용과 우리의 사회적 실천의 맥락을 구성하는 세계의 외재적 특징들에 주목하고 있다.

 

탈근대주의 이후의 이 단계를 탈-탈근대주의―간략히 "포포모(popomo)"―라고 부르자. 세계에 대한 이런 재몰입에는 여러 분과학문들의 사상가들에서 비롯된 다양한 변양태들이 존재하는데,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과 제인 베넷(Jane Bennett) 같은 인물들의 사변적 실재론,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마크 롤랜즈(Mark Roland)가 선도하는 마음의 철학에 있어서의 외재론, 로시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나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신유물론", 물리학자 리 스몰린(Lee Smolin)의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옹호 그리고 브뤼노 라트르(Bruno Latour)의 인류학이 포함된다.

 

실재론적 전환에 대한 동기들 가운데 일부는 생태적인 것이었는데, 기후 변화는 결코 우리 머리 또는 서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물리적 변형을 필요로 하는 실제 세계의 상황이다. 다른 동기들은 정치적인 것이었는데, 긴급한 진리나 정의에 대한 옹호, 또는 물질적인 경제적 조건과 물리적인 인간의 육체를 다루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옹호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경험이 다양한 방식으로 점점 더 매개되거나 가상적인 것으로 됨에 따라, 우리는 언제나 이용할 수 있었고 여전히 이용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철저히 의존하는 구식의 물리적 환경을 정말 갈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관념은 항상 갈망의 지표이다.

 

내 경우에, 그런 동기의 대부분은 그저 글쓰기와 철학을 계속해서 행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1990년 경에 나는 내 자신의 의식에 대한 관심이 소진되었지만, 세계에 대한 관심이 소진될 이유는 결코 없었다. 탈근대주의 이후에 등장한 지성적 세대들은 종말 이후의 시기 이후에 계속 나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했었다. 종말 이후의 시기 이후의 시기는 포포모 시대이다. 그런데 "탈"이라는 접두어는 자체적으로 항상 몰락과 종결에 대한 감각의 증상이고, 그래서 나는 우리의 탐구 시대가 결코 무언가 이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무언가이며, 무언가 이전에 등장한 것이기를 희망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