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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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서평-코스모폴리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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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8.

 

코스모폴리틱스

Cosmopoltics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나는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의 위대한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다[...]. 그것은 [...] 난해하고 함축적인 책이고,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 나는 스탕제가 지난 일이 십 년의 "과학 전쟁"에 대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과학철학에 대한 최선의 안내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코스모폴리틱스>>에서 스탕제는 <<근대 과학의 발명(The Invention of Modern Science)>> 같은 이전의 책들에서 서술한 것을 대대적으로 증보했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찬가지로, 스탕제는 계몽주의 이후 근대성의 가장 위대한 유산의 절대적 패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를 바란다. 요점은 과학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과학이 객관적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과학의 실제적인 특수한 실증적 주장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고 자처하는 것, 그 밖의 모든 주장과 실천들의 타당성을 부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스탕제가 올바르게도 해체하기를 바라는 것은 여타의 담론과 관점들을 파괴함으로써만 자체의 실증적 주장들을 제기할 수 있는 전쟁 기계로서의 과학의 "동원"인데, 과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참"인 것으로 자처하는 반면에, 여타의 담론들은 미신적이고, 불합리하며, 단순한 "믿음"에 의거하는 것 등으로 비난받는다. 스탕제는, 예컨대, 유전학 연구에 반대하고 있지 않지만, 아무튼 "인간 본성"의 "진리"는 유전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반대하고 있다. 스탕제는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의 "통섭"(실증 과학이 심리학, 문학, 철학, 종교 그리고 여타의 "인문학적" 지식 형식들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에 반대하고,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환원적이고, 소박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젠체하는 거만한 설명에 반대하고 있는데, 물리학의 방정식들을 흉내내는 방정식들을 작성함으로써 자신들이 "진리"에 도달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계량적" 사회과학자들(경제학자, 정치학자 그리고 사회학자들)의 터무니 없는 노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스탕제는 과학적 실천의 구체성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그래서 과학을 자체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천들에서 분리함으로써 언제나 제기되는 과학의 초월적인 권리 주장, 토대적 지위에 대한 권리 주장을 거부하기를 바란다. 스탕제는 자신의 접근 방식을 철학적으로 "구성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철학에서 구성주의는 비(非)토대주의적인 관념인데, 그것은 아무튼 진리가 먼저 온다는 것을 부인하고, 진리가 세계 또는 마음 속 바로 저곳에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 대신에, 구성주의는 진리가 다양한 과정과 실천들을 통해서 산출되는 방식을 살핀다. 이것은 결코 진리가 주관적인 인간의 기획일 뿐이라고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진리를 산출하는 실천과 과정들은 그저 인간적인 것들이 아니다. (여기서 스탕제는 화이트헤드에 유익하게 기대는데, 화이트헤드에 관해서 스탕제는 방대한을 적었었다). 근대 과학의 경우에, 구성주의적 의문은 이런 실천이 독자적인 삶을 갖는 객체들, 이를테면, 세계 속에서 전개되는 그것들의 작용들에 대해 처음에 해명된 실험실 조건과 독립적으로 여전히 "대답할 수" 있는 객체들을 생산할 수 있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 조문, 또는 화폐, 또는 누군가를 홀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조상의 정령과는 다른, 예컨대, 뉴트리노와 미생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성주의적 접근 방식의 요점은, 과학적 객체들은 객관적이고 세계 저쪽에 있는 반면에, 여타 종류들의 객체들은 주관적이거나 허구적이거나 부조리하거나 우리 머리 속에 있을 뿐이라고 단언하지 않은 채, 이런 차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요점은 과학적 객체들은 "객관적으로 참"인 것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실천과 객체들을 고려하거나, 아니면 (예를 들면) 종교적 실천과 객체들을 고려하는 경우에, 바로 이런 이진적 대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스탕제의 접근 방식의 나머지 한 기둥은 그녀가 "실천의 생태학(ecology of practice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특수한 실천들―특히 과학의 실천들―이 동시에 현존하는 다른 실천들에 영향을 미치고 관련되는 방식을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학이 세계에 관해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과학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한 의문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특수한 실천―예컨대, 오늘날 유전학―에 대해서도 "실천의 생태학"은 그런 실천에 의해 어떤 요구 또는 요건들[...]이 제기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거나, 이용하거나, 또는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수한 의무들이 부과되는지 묻는다.

 

구성주의와 실천의 생태학 덕분에 스탕제는 창조적 기획, 즉 발명과 발견의 실천으로서의 과학과 여타 담론들을 무효로 한다는 과학의 근대주의적 주장을 구별지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그런 진술은 너무나 방대한데, 스탕제도 전적으로 같지는 않은 다양한 과학들을 구별짓기 때문이다. 이론 물리학의 가정과 기준들, 그래서 요구 조건과 의무들은 동물행동학(실험실 조건에서뿐 아니라 "변수들"을 제어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야생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동물 행동에 관한 연구)의 그것들과 꽤 상이하다. 침팬지을 탐구할 때, 더우기 인간들을 탐구할 때 지게 되는 의무들은 뉴트리노나 화학 반응을 탐구할 때 지게 되는 의무들과 대단히 다르다. 과학적 실천들에 의해 제기되는 요구 조건들(발견되는 객체는 어떤 특수한 실험 시설의 "인공물"에 불과하지 않다는 요구 같은)도 실천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구성주의와 실천의 생태학 덕분에 스탕제는, 비판에 관여하지 않은 채, 말하자면, 다양한 실천들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초월적(선험적) 시각의 특권을 단언하지 않는 채, 다양한 과학적 실천들의 적실성과 한계들을 정위할 수 있게 된다.

 

<<코스모폴리틱스>>의 대부분은 갈릴레오에서 양자역학에까지 이르는 물리학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스탕제는 물리적 "법칙들"에 관한 문제에 집중한다. 스탕제는 특히 평형이라는 관념과 동역학적 체계들의 모형화를 고찰한다. 갈릴레오에서 시작하여 뉴턴과 라이프니츠를 거친 다음에 18세기와 특히 19세기 전체에 걸쳐서 물리적 체계들을 서술하는 수학적 이상화의 역능이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물리학자들은 단순한 조건에서 작동하는 모형들을 구성하는데, 예를 들면, 경사면을 굴러 내려가거나, 더 일반적으로 공간을 가로질러 운동하는 구체들을 서술할 때 마찰의 존재를 무시한다. 그 다음에 그들은 마찰 같은 "섭동"의 효과를 기본 모형의 사소한 수정으로 덧붙인다. 점진적으로, 더욱 더 많은 인자들을 그저 "섭동"으로 배제해야 하는 대신에 모형 자체 내에 편입시킬 수 있는 더욱 더 복잡한 모형들이 개발된다. 이런 모형들은 모두, 문제가 되는 체계들의 역사적 전개와 독립적으로, 어떤 순간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물리적 "상태들"을 가정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흔히 교란되지만 언제나 복귀하게 되는 평형이라는 기본 조건을 가정한다.

 

스탕제는 이런 성취를 과학적 상상과 발명의 승리로 찬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시에 스탕제는 그런 성취가 다른 물리적 및 과학적 영역들에 (은유적으로) 전이된 방식의 견지에서 이런 성취의 해로운 효과를 지적한다. 물리적 "법칙들"로 표현 가능한 모형들의 성공은 19세기 동역학이 관여한 특수한 종류들의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수학적으로 선형 방정식들로 다루어질 수 있는 유한한 상호작용들을 하는 힘들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동역학의 성공 덕분에 물리학자들은 동일한 절차들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타당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자체의 실험적 성공 분야를 넘어서 다른 영역으로 동역학적 모형을 확장한 이런 시도는 모든 물리적 과정들이 순간적인 "상태들"과 이런 상태들의 시간 불변적인 변환들로 유사하게 모형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을 낳았다. 말하자면, 모든 물리적 과정들은 결정론적 "법칙들"을 따른다는 가정을 낳았다. 이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섭동들"이 경험적으로 제거될 수 없을 때, 물리적 세계는 단순히 경험적인 관측 결과들에 선행하는 이상화된 모형에 따라 "실제로" 작동한다는 단언과 함께 이것은 우리 지식의 한계로 귀속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물리학은 경험적 관측에서 단순한 외양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본질에 대한 유사 플라톤주의적 신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오늘날 물리학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서술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강하게 장악한 이유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관념론, 동역학적 모형화를 그것이 적합하지 않는 영역들로 부당하게 전이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들은 시간의 명백한 비가역성과 닫힌 체계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무질서)의 증가를 우리 주관성의 인공물, 즉 우리의 무지(우리는 모든 원자의 물리적 상태에 관한 완벽한 총체적 정보을 입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런데 스탕제는 일반적으로 수용된 엔트로피에 대한 "통계적" 해석의 자의성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원자들의 상호작용들의 역사와 독립적인 모든 개별 원자의 위치와 경로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이상적인 상황이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물리학자들의 근본적인 가정에 의해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상적인 상황이 가정하는 "지식"을 획득할 경험적 가능성은 전혀 없더라도, 이런 이상적인 상황은 자연이 "실제로" 거동하는 방식으로 환기된다.

 

양자역학에서도 유사한 문제점들이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 비결정성의 붕괴 전에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마라는 보어의 금지 명령에 만족하지 않는데, 그들은 총체적인 결정론적 지식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수용할 수 없고, 그래서 여러 세계에서 "숨은 변수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기묘한 가설들에 의지한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를 좇아서 스탕제는 양자역학에서 비결정성과 측정의 문제 전체는 그릇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이, 이를테면 우리가 입자들과 갖는 상호작용과 독립적인, 모든 입자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우리로 하여금 갖지 못하게 원칙적으로 금지한다(우리는, 예컨대, 전자의 위치를 아는 것과 그것의 운동량을 아는 것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스탕제는 양자역학에서의 우리 지식의 한계가, 예컨대, 다른 사람이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바에 대한 내 지식의 한계보다 사실상 더 크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에 의해 부과된 한계에 좌절하고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오로지 "법칙들"에 따른 세계의 전적인 결정 가능성과 전적인 인식 가능성이라는 그들의 이상적인 가정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앞의 두 문단의 내 요약은 사실상 스탕제에게 몹쓸 짓을 해버렸다. 내가 스탕제의 분석을 칸트적 방식으로, 즉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성찰로서 재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탕제의 경우에, 그런 선험적 비판 행위가 바로 그녀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인데, 그런 비판은 또 다시 근대주의적 합리성이 그것과 상이한 주장을 제기하는 실천을 규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탕제는, 구성주의와 실천의 생태학을 통해서, (들뢰즈를 좇아서) 전적으로 내재적 비판으로 불릴 수 있는 것, 즉 그것이 변화시켜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실천의 장 내에 처해 있는 비판을 제시하려고 한다. 스탕제는 1980년대에 공동 연구를 수행한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작업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것을 예시한다. 대부분의 경력 동안 프리고진은 "시간의 화살"―사건들의 시간적 비가역성―을 물리학의 기본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받게 하려고 노력했다. 문화 연구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비판적 목적을 위해 프리고진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스탕제는 프리고진이 물리학과 화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들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그런 식으로 "시간의 화살"을 명확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난점들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주류 과학자들이 여전히 프리고진을 비주류 인물로 간주하는 한, 그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탕제는 과학 사상의 혁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창발과 복잡성 연구의 최근 발전을 강조하지만, 많은 과학 비전문가들이 이런 과학적 결과들을 증거로 떠벌림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공표하는 뉴에이지 풍이거나 고(高)이론적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데, 이런 경향은 실제적 실천들이 제기하는 요구 조건과 그것들이 부과하는 의무들과 더불어 실천들의 생태의 내재성 안에 머무는 것 대신에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과학적 연구를 "이론"으로 번역하는 것과 일종의 칸트적 비판에 관여하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코스모폴리틱스>>가 내게 남기는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어떤 종류의 칸트적 비판을 환기시키지 않은 채(그저 스탕제의 주장들을 요약하려고 할 떄에도 내 자신이 불가피하게도 유혹에 빠지게 되듯이), 이 모든 문제들을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에 관한 의문이다. 이 의문을 거꾸로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칸트적 비판(칸트가 이성 자체의 허세를 제한하기 위해 합리성을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제일 비판의 선험적 변증법으로 되돌아가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이 여타의 주장들에 대한 근대주의적/과학적 비난에 반대하는 스탕제의 견해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스탕제의 해설에 따르면, 특히 뛰어난 근대주의적 태도는 데이비드 흄이 신학과 사변 철학을 불에 태워버린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궤변과 환상만"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의 이율 배반과 배리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태도를 형성하는가? 나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자 미해결 문제라고 간주하는데, 그것에 관해 나는 이제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탕제의 결론에 관한 다른 한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칸트적 비판에 관한 의문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탕제는 (이 책의 마지막 절에서) 우리로 하여금 "관용을 그만둘 것"을 재촉하는데, "관용"은 바로 "우리"(과학자, 세속적 근대주의자들 일반)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다른 세계관들을 용인하는 생색 내는 듯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스탕제의 견해는 급진적으로 민주주의적인데, 과학은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협상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이 (그저 "묵인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려되고, 그래서 서로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스탕제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일례를 들면, "케네위크인(Kennewick Man)"―1999년에 워싱턴 주 컬럼비아 리버 근처에서 발견된 9000년 전 두개골―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을 생각하자. 과학자들은 그 유해를 연구하기를 바라는 반면에,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들은 그 유해를 제대로 매장하기를 바란다. 대체적으로 미합중국 언론은 그 논쟁을 우리의 지식 저장량을 증가시키고 싶은 합리적인 욕망과 두개골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족들의 비합리적인 원시적 "믿음" 사이에 벌어지는 것으로 표현했다. 스탕제는 그런 불공평한 구별짓기가 바로 과학적 제국주의의 일례이며, 그리고 공히 특수한 이해관계이자 정치적인 과학자와 원주민 집단들의 주장들을 동등한 기초 위에서 협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인데, 그 상황은 합리성과 미신 사이, 또는 "지식"과 "믿음"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로 서술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스탕제(그리고 라투르)는 빅 사이언스뿐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 세속적 자유주의의 기본 가정들도(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비판은 지젝과 바디우 같은 사상가들이 지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자유주의적 "관용"(다국적 자본의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 사실상 실질적인 의문들이 제기되지 못하게 막고, 그래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방식에 대한 거부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또 다시) 이제야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한 또 하나의 큰 쟁점인데, 장래의 블로그 글에서 이것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스탕제에 대해서 나의 진짜 의문은 이렇다. 오늘날 미합중국의 근본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도들을 다루는 경우에, 스탕제와 라투르의 반근대주의적 정언 명령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하는가? 과학이 주장하는 배타적 진리에 대한 권리의 특권을 박탈하고 다른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주장들을 민주적으로 인식할 필요성은, 예를 들면, "지적 설계"나 창조론의 주장들을 전적으로 존중하여 진화 이론의 주장들과 같은 발판 위에서 협상하게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가?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편협하기 때문에 그들을 묵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말했듯이, 종의 진화를 부인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것과 유사하다―둘 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에―고 말하는 것이 먹힐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고 깨닫는데, 권리를 빼앗긴 원주민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과 나 같은 부류들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내 생각에 나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어떤 집단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런데 내 경우에 이것이 정말 난문이 제기되는 지점인데, 스탕제가 매우 강력하게 비난하는 자유주의적 "관용"에 비해서 스탕제의 논증이 갖는 장점에 대해 정말로 확신하지 못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