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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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저, 린제이 & 보고시안: 오늘의 에세이-물리학자들도 역시 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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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31.

 

물리학자들도 역시 철학자들이다

Physicists Are Philosophers, Too

 

―― 빅터 스텐저(Victor J. Stenger), 제임스 린제이(James A. Lindsay) & 피터 보고시안(Peter Boghossian)

 

2012년 4월에 이론물리학자, 우주론자이자 베스터셀러 작가인 로렌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는 "물리학은 철학과 종교를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는가?(Has Physics Made Philosophy and Religion Obsolete?)"라는 제목으로 <<애틀랜틱(The Atlantic)>>의 로스 앤더슨(Ross Anderson)과 가진 인터뷰에서 강하게 재촉받았다. 이 질문에 대한 크라우스의 답변은 철학자들을 낙담시켰는데, 그가 "과거에 철학은 내용을 갖춘 분야였습니다"라고 발언한 뒤에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철학은, 불행하게도, 제게 "할 수 없는 자들이 가르치고, 가리칠 수 없는 자들이 체육을 가리친다"는 우디 앨런(Woody Allen)의 농담을 상기시키는 분야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철학 분야는 과학철학인데, 제가 말할 수 있는 한, 과학철학자들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다른 과학철학자들뿐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물리학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그래서 저는 그것이 꽤 전문적이기 때문에 다른 철학자들이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그것을 정당화하는지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들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런 긴장이 발생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권리를 전적으로 갖고 있는데, 과학은 진보하고 철학은 진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해 말에 크라우스는 <<가디언>>의 온라인 잡지 <<옵저버>>에서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와 우호적인 토론을 가졌다. 과학에 대한 대단한 존중을 나타내며 "우주에는 물리적 과학의 질료 외의 질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크라우스와 대부분의 다른 물리학자 및 우주론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바지니는 크라우스가 "과학의 제국주의적 야심들 가운데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불평했다. 바지니는 "결코 과학적이지 않는 인간 실존에 관한 몇 가지 쟁점들이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예를 들면, 나는 단순한 사실들이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에 관한 쟁점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크라우스는 그것을 전적으로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대답할 수 있는 의문들과 대답할 수 없는 의문들"을 구분하며, 대답할 수 있는 의문들은 대체로 "과학으로도 알려져 있는 경험적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도덕적 의문들에 대해서 크라우스는 그것들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를 둔...이유"로 해명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바지니는 어떤 "사실적 발견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도대체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크라우스는 바지니의 입장에 공감을 나타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철학적 논의가 다양한 중요한 방식으로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사실들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실들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적 탐구를 거치는 것이다."

 

크라우스에게 편지를 쓴 터프츠 대학교의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을 비롯한 저명한 철학자들이 <<애틀랜틱>> 인터뷰에 화가 났다. 결과적으로 크라우스는 2014년에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이라는 제목으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발표된, 자신의 입장에 대한 더 신중한 해명을 작성했다. 그 글에서 그는 그 자신의 사유의 풍성함에 대한 철학의 기여를 더 후하게 평가했지만,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거의 굽히지 않았다.

 

"현업 물리학자로서...나는,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나와 함께 논의한 대부분의 동료들 가운데 대부분은 물리학에 관한 철학적 사변이 특별히 유용하지는 않으며, 물리학의 진보에 거의 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챘다. 심지어 올바르게도 과학철학으로 불를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여러 분야들에서 나는 물리학자들의 성찰이 더 유용하다고 알아챘다."

 

철학을 경멸하는 점에 있어서 크라우스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혼자인 것은 아니다. 2010년 9월에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과 레너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v)는 학술계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신랄한 말을 표명했다.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들은 이렇게 적었다. "철학은 죽었다." 그 까닭은 "철학자들이 과학, 특히 물리학의 최근 발달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인간의 지식 탐구에 있어서 발견의 햇불의 담지자들이 되어 버렸다."

 

철학이 더 이상 다룰 수 없는(도대체 그것이 다루었다면) 의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우주는 어떻게 거동하는가?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주는 창조자가 필요했는가? 호킹과 믈로디노프에 따르면 과학자들―철학자들이 아니라―만이 대답을 제공할 수 있다.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대중 과학 운동가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 이 논쟁에 합류했다. 2014년 5월에 너디스트(Nerdist) 팟캐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타이슨이 이렇게 진술했다. "여기서 제 우려는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자연에 관한 깊은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에게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왜 의미의 의미에 관여하고 있습니까?'" 그의 총체적인 메시지는 명료했다. 과학은 계속 움직이는데, 철학은 진창에 빠져 있고 쓸모가 없으며 사실상 죽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타이슨도 그의 견해에 대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그의 입장은 2010년에 하워드 대학교에서 개최된 포럼에서 그가 출연한 비디오을 관람함으로써 대단히 명료해질 수 있는데, 그 포럼에서 타이슨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함께 출연했다. 타이슨의 주장은 직설적이고 크라우스에 의해 표명된 것과 동일한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철학자들은 세계에 관한 지식은 순수한 사유만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타이슨이 설명했듯이, 그런 지식은 안락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사람에 의해 획득될 수 없다. 그것은 관찰과 실험과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뿐이다. 예전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도 "안락 의자 철학자들"에 관한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도킨스는 타이슨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자연 선택이 현장에서 연구하며 자료를 수집한 두 명의 자연학자, 즉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1992년에 <<최종 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에서 노벨 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철학에 반대한다(Against Philosophy)"라는 제목이 붙은 한 개의 장을 수록했다. "수학의 터무니없는 유효성"에 관한 노벨 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의 유명한 주장을 언급하면서 와인버그는 "철학의 터무니없는 무효성"에 관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와인버그는 철학 전체가 아니라 과학철학을 일축할 뿐인데, 과학철학의 난해한 논의들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실증주의 철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둘 다의 발달 초기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실증주의 철학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그런데 와인버그는 실증주의가 이로움보다 해악을 더 많이 끼쳤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입자 위치와 운동량 같은 관측 가능량들에 대한 실증주의적 집중은 파동함수를 물리적 실재의 표상으로 간주하는 양자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가로막았다."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실증주의자는 19세기 말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였을 것인데, 그는 원자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물질에 관한 원자 모형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우리는 주사 터널링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으로 원자를 볼 수 있지만, 우리의 모형들은 여전히 쿼크 같은 보이지 않는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다. 물리학자뿐 아니라 철학자들도 실증주의를 더 이상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그래서 좋든 나쁘든 간에 그것은 물리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관찰이 자연 세계에 관한 지식의 믿음직한 유일한 원천이라는 크라우스와 타이슨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물리학자들은 도구주의에 경사되는데, 도구주의에 따르면 이론들은 관찰적 진술들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며, 예측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그런 개념적 도구들은 쿼크 같은 관측할 수 없는 객체들을 포함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최근까지 물리학과 자연철학 사이에 어떤 구별짓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밀레토스의 탈레스(대략 서기전 624-546)가 일반적으로 서양 전통의 최초 철학자뿐 아니라 최초 물리학자로도 여겨진다. 그는 신화를 언급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자연적 설명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탈레스는 지진이란 지구가 물에 놓여 있으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을 순수한 사유가 아니라 관찰로부터 추론했는데, 땅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 위의 배들은 흔들린다고 관찰된다. 지진에 대한 탈레스의 설명은 올바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지진이 삼지창으로 바닥을 강타하는 포세이돈이라는 신에 의해 초래된다는 신화보다 개선된 것이었다.

 

탈레스는 현대 천문학자들이 서기전 585년 5월 28일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났다고 추산하는 일식을 예측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탈레스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모든 물질적 실체들이 단일한 원소적 성분, 즉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물을 원소로 간주한 점에 있어서 탈레스는 (터무니없지는 않게도) 틀렸지만, 탈레스의 제안은 보이지 않는 정신을 환기하지 않은 채 물질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최소한 서양에서는, 최초의 기록된 시도를 나타낸다.

 

탈레스와 그를 좇은 다른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물질일 뿐이라는 현재 물질 일원론(material monism)으로 불리는 실재관을 신봉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물리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인데,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모든 관찰들을 성공적으로 서술하는 그들의 모형들 속에 초자연적 요소들을 도입할 필요성을 전혀 찾아내지 못한다.

 

타이슨이 언급한 균열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물체의 운동을 서술하는 원리들을 도입한 후 17세기에 물리학과 자연철학이 별개의 분과학문들로 갈라지기 시작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뉴턴은 이전에 케플러가 발견했었던 행성 운동의 법칙들을 제일 원리들로부터 유도할 수 있었다. 1759년에 핼리 혜성의 귀환을 성공적으로 예측한 것은 목격한 만인에게 새로운 과학의 거대한 힘을 예증했다.

 

뉴턴 물리학의 성공은 시계 장치 우주, 또는 뉴턴주의적 세계 기계로 알려지게 된 철학적 입장에 대한 전망을 열였다. 이 도식에 따르면, 역학의 법칙들이 물질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특히 우주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신을 위한 자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수학자,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가 보여주었듯이, 뉴턴의 법칙들은 이전 역사 전체에 걸친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것들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플라스는 뉴턴이 거부했었던 급진적인 관념을 제안하게 된다. 물리적 우주를 이해하는 데에는 물리학 이외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시계 장치 우주는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무효화되었지만, 양자역학은 여전히 철학적으로 이해하기가 끔찍하게 어렵다. 물리학은 우주를 "이해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눈과 장치로 관찰하는 대로의 물질적 세계를 서술하는 데 물리학의 모형들이 여전히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20세기 초에 당대의 거의 모든 유명한 물리학자들―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발견들의 철학적 파생 결과를 고찰했다. 그런데 이차 세계대전 후에 물리학의 저명한 신세대 인물들―리처드 파인만, 머레이 겔-만, 스피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 등―은 그런 고찰이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알아챘으며,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두 시대 모두에서 예외적 인물들이 있었다)이 그들의 뒤를 좇았다. 그런데, 자인하지 않은 채, 신세대도 여전히 나아가서 철학적 신조들을 채택했거나, 또는 최소한 철학적 술어들로 말했다.

 

예를 들면, 와인버그가 "파동함수는 물리적 실재의 표상"이라는 양자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주창할 때, 그는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모형에 포함하는, 양자장 같은 인공물들이 실재의 궁극적인 성분들이라고 함축하고 있다. 2012년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고문에서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통(David Tong)은 와인버그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실험에서 실제로 관찰하는 입자들은 환영이고 그것들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물리학자들은 부정직하다고 주장했다.

 

"일상적으로 물리학자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전자나 쿼크 같은 이산적인 입자들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우리 이론들의 구성 요소들은 입자가 아니라 장들인데, 즉 공간 전체에 펴져 있는 연속적인 유체 같은 객체들이다."

 

이런 견해는 명시적으로 철학적이고, 그래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나쁜 철학적 사유에 기여한다. 사실상 와인버그와 통은 많은 이론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견지하는 플라톤주의적 실재관을 표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방정식과 모형들을 실재의 궁극적 본성과 일 대 일로 대응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평판이 좋은 온라인 <<스탠퍼드 엔사이클로피디어 오브 필로소피(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서 마크 밸러궈(Mark Balaguer)는 플라톤주의를 이렇게 규정한다.

 

"플라톤주의는 추상적 객체 같은 것들이 [궁극적 실재 속에]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여기서 추상적 객체는 공간 또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객체이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비물리적이고 비심리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주의는 현대적 견해이다. 플라톤주의는 명백히 플라톤의 견해와 중요한 방식들로 관련이 있지만, 플라톤이 여기서 규정되는 식으로의 이 견해를 승인했을지는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이런 의문에 관해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플라톤주의(platonism)'라는 술어는 소문자 'p'로 표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론물리학 모형들 내의 객체들이 실재의 요소들을 구성한다는 믿음을 가리키는 데 소문자 p로 표현되는 플라톤주의를 사용할 것이지만, 이런 모형들은 순수한 사유―대문자 "P"로 표현되는 플라톤주의이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 결과를 서술하고 예측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의 의미에 대한 사적 해석으로서 플라톤주의적 실재론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 이것은 감각 너머에 놓여 있는 실재와 인간들이 관찰 결과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인지적 도구들을 관련시키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모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모든 물리학자들은 이런 모형들의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실재에 대응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그런 모형들은 가속기 실험실의 바닥에 놓여 있거나 망원경의 초점에 놓여 있는(광자도 역시 입자이다) 입자 검출기에서 비롯되는 데이터와 비교된다. 어떤 특수한 모형이 어떤 식으로 실재에 대응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데이터―이론이 아니라―이다. 모형이 데이터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확실히 실재와 아무 관련도 없다. 모형이 데이터에 부합된다면, 그것은 어떤 관련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 그런 관련성은 무엇인가? 모형은 물리학 건물의 이론 구역에 놓여 있는 칠판 위에 휘결겨 쓴 것이다. 휘갈겨 쓴 것들은 쉽게 지워진다. 데이터는 그럴 수 없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고문에서 크라우스는 자신의 사적인 물리학의 철학에 담긴 플라톤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드러내며 이렇게 적고 있다.

 

"과학자들이 이런 근본적인 존재론적 쟁점의 어떤 판본도 다루겠다고 가정할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얼마간 신학적으로 고무된 일단의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최근에 내 책[無로부터의 우주(A Universe from Nothing)]에 대한 그런 철학자에 의한 한 서평.... 이 저자는 명백한 권위를 갖고서(놀랍게도 그 저자는 분명히 물리학의 어떤 배경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린 주장―물리학의 법칙들은 어떤 입자와 장들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공간 자체는 존재하는지 여부 내지는 더 일반적으로 존재의 본성은 무엇일지 결코 동역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을 제시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곡률이 있는 시공간 내의 현대 양자장 이론의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다."

 

와인버그, 통 그리고 아마도 크라우스가 했듯이, 실재의 본성에 대한 물리적 이론들의 직접적인 플라톤주의적 대응은 문제점들을 수반한다. 첫째, 이론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우리는 양자장 이론이 언젠가 장(또는 그 점에 있어서는 입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더 강력한 다른 모형으로 교체될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둘째, 모든 물리학 이론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장 이론은 하나의 모형, 즉 인간의 고안물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형들이 작동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들을 시험하지만, 양자 전기역학 같은 예측력이 대단한 모형들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로 그것들이 "실재"에 대응하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것들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다. 궁극적 실재를 결정할 경험적 방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물리학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도구주의적 견해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이 궁극적 실재의 요소들을 구성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 견해에 따르면 실재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을 제약할 뿐인데, 그런 관찰 결과를 서술하기 위해서 이론가들이 발명하는 수학적 모형들과 일 대 일 대응 관계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모형들이 행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관찰 결과를 서술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행하는 데에는 형이상학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모형들의 설명적 특이성이 과학의 로망스의 핵심일 것이지만, 그것은 모형의 서술 및 예측 능력에 대해 보조 역할을 수행한다. 합의된 철학적 해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유용성 때문에 양자역학이 이것에 대한 최고의 사례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주의적 실재관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폄하하는 것은 부정직한 짓이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신조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역시 철학자들이 된다.

 

그런데, 많은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이 고안하는 법칙과 모형들의 수학적 요소들에 관해 마치 그것들이 우주의 구조에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말할 때 플라톤주의의 주변에 가까이 있지만,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실상 와인버그, 호킹, 믈로디노프, 크라우스 그리고 타이슨의 반대 의견들은 형이상학으로 더 잘 다루어지며,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그들이 윤리학, 미학, 정치학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도 인식론 같은 분야들에서 지속되는 인간 사유에 대한 주요한 기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크라우스는 이런 중요한 주제들을 약간 상찬하지만, 매우 열렬하지는 않다.

 

물론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대체로 우주론적 관심사를 염두에 두고 글을 적는데, 궁극적 기원에 대한 의문과 씨름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시도들이 그들을 침입하는 경우에 그들이 절대적으로 옳다. 형이상학과 그것의 원우주론적 사변들―철학으로 해석되는―은 중세 시대에 신학의 하녀로 간주되었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우주론적 쟁점들을 다루고 싶어하는 형이상학자들이 유용하게 기여할 만큼 충분한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우주론에 대하여 안락 의자 형이상학은 죽었고, 더 정통한 물리학의 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그리고 신학자들 외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크라우스는 가장 통렬한 비판을 과학철학에 겨냥했는데, 우리는 그가 형이상학의 어떤 양상들을 겨냥했었더라면 더 건설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라우스는 물리학이 철학과 종교를 쓸모없게 만들었는지 여부에 관해 <<애틀랜틱>>의 앤더슨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물리학이 철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우주론적 형이상학(그리고 창조자의 필연성에 호소하는 소멸된 칼람 우주론적 논증 같은 그것에 의존하는 종교적 주장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다. 우주론에 관한 그의 책을 다룬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감안하면, 확실히 크라우스는 우주에 관한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시도들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염두에 두었었다.

 

강단과 대중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철학의 분야들이 무엇이든 간에 형이상학은 그것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직접적입니다. 형이상학은 실재와 연결될 수 있다―실재를 정당하게 서술할 수 있다―고 공언하지만, 그러한지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급한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동일한 진영에 속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폄하하는 것이 옳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은 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첫째, 이미 강조했듯이, 모형들의 수학적 객체들의 실재성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둘째, 플라톤주의를 노골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관찰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단언할 때 자신들의 공언 속에 인식론적 사유를 여전히 적용한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플라톤주의를 분명히 거부한다. "실재에 관한 이론 또는 상 독립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물리적 이론 또는 세계상은 모형(일반적으로 수학적 본성을 지닌)이고 그 모형의 요소들을 관찰 결과와 관련시키는 일단의 규칙이라는 관념", 즉 그들이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신조를 승인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형이 실재적인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모형이 관찰 결과와 일치하는지 여부만이 의미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도구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확신하지 못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물리학자들은 관찰 결과에만 관여하며,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결과가 어떤 궁극적 실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그런 관찰 결과를 서술하는 모형이 정확히 실재에 대응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비록 그들의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일지라도 우리가 궁극적 실재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논의함으로써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철학자―최소한 인식론자―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한 견해들를 지닌 저명한 철학 비판가들은 모두 인간 지식의 원천에 관해 매우 깊이 생각한다. 즉, 그들은 모두 인식론자들이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자신들이 (대부분의) 직업적 철학자들보다 과학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순수한 사유가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은 철학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철학은 죽지 않았다. 그런 선언은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논증 같은 순수 사유 변양태들에 더 적절히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