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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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오늘의 서평-분자적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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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3.

 

어머니 자연에 반대하는 생태학: <<분자적 레드>>에 관하여

Ecology against Mother Nature: on <<Molecular Red>>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2008년 11월 28일에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는 "기후 변화: 자본주의로부터 지구를 구하라(Climate Change: Save the Planet from Capitalism)"라는 제목의 공개 편지를 발표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어머니 지구는 아픕니다. ... 모든 것은 1750년 자본주의 체계를 탄생시킨 산업혁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백오십 년 동안 이른바 "개발된" 나라들은 오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화석 연료의 대부분을 소비했습니다. ...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어머니 지구가 존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원료가 존재합니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원천입니다.

 

볼리비아에서 모랄레스 정부에 의해 추구되는 정치는 오늘날 진보적 투쟁의 최첨단에 있지만, 그럼에도 인용된 글은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한계(그것에 대해서는 항상 실제적 대가를 치른다)를 극도로 명료하게 나타낸다. 모랄레스는 정확한 역사적 순간에 일어났던 타락(Fall)에 관한 서사에 의존하며("모든 것은 1750년 ... 산업혁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도, 이런 타락은 어머니 지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의 근원을 상실하는 것에 놓여 있다(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어머니 지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원천입니다"라는 이 문장은 우리의 목적은 "자연적" 균형과 대칭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격받고 거부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근원이 자연의 실질적인 "모성적"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머니 지구(그리고 아버지 천상)이라는 전통적인 성별화된 우주론을 삭제하는 근대적 주체성의 등장 자체이다.

 

생태학은 오늘날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전장들 가운데 하나인데, 생태적 위협의 진정한 차원들을 흐리게 할 일련의 전략들이 전개된다. (1) 단순한 무시. 이것은 열중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현상인데, 삶(자본의)은 지속되고 자연은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2)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3) 해결을 시장에 맡겨라(오염원들에 대한 높은 과세). (4) 초자아 압력. 거대한 체계적 조치 대신에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우리 각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재활용, 소비 축소 등)을 행해야 한다. (5) 아마도 모든 것들 가운데 최악의 것은 자연적 균형으로의 복귀, 즉 인간의 오만을 버리고 또 다시 우리의 어머니 자연의 착실한 아이들이 되는 더 수수한 전통적 삶으로의 복귀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자연이 인간의 오만에 의해 탈선되었다는 이런 패러다임 전체는 잘못된 것이다. 왜?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의 <<분자적 레드>>가 한 가지 대답을 제시한다.

 

생태적 위기의 핵심은 이미 마르크스에 의해 지적된 현상인데,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증대로 초래되는 이른바 "신진대사적 균열(metabolic rift)"이다. 워크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은 바위와 토양, 식물과 동물을 때리고 구슬러서 우리의 공동 삶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분자적 흐름들을 추출한다. 그런데 그런 분자적 흐름들은 그것이 비롯된 출처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작업에 의해 초래된 그런 균열이 지구 생명의 바로 그 재생산에 위협을 제기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인류가 문자 그대로 지질학적 인자가 될 때, 우리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한다.

 

인류세는 일련의 신진대사적 균열인데, 여기서 분자는 인간을 위한 사물을 제작하기 위해 노동과 기법에 의해 차례차례로 추출되지만, 쓰레기 생산물은 순환이 자체적으로 갱신할 수 있도록 되돌아가지 않는다.

 

워크는 점점 커지고 있는 이런 균열의 행위자를 역설적인 술어, 즉 "탄소 해방 전선(Carbon Liberation Front)"이라고 부른다. "탄소 해방 전선은 화석화된 탄소의 형태를 취하는 모든 과거 생명을 찾아내고, 캐내며,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연소한다. 인류세는 탄소에 관련된 것이다". 인류세에 관한 이런 관념의 바로 그 핵심에는 한 가지 역설이 존재하는데, 인류가 매우 강해져서 모든 지구 생명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 바로 그때에 인류는 한 종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연에 미치는 자체의 영향이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되어서야, 즉 안정한 자연이라는 배경에 대해서 작동하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인류는 대주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균열"과 교란된 "순환" 같은 관념들은 자체의 대립자에 의존하는 듯 보이는데, 순환이 완결되고 균형이 재확립되는 사물의 "정상적인" 상태의 견지에서 바라보면, 인류세는 그저 인간 종을 이런 균형에 다시 정착시킴으로써 극복되어야 하는 듯 보인다. 워크의 중요한 업적은 이런 경로를 거부하는 것인데, 그런 균형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자연 자체는 이미 불안정하며, 거대한 어머니로의 자연이라는 관념은 신성한 대타자의 다른 한 이미지일 뿐이다. 워크의 경우에, 나는 대악당 가운데 한 사람인데, 내가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색적 유물론의 "모든 낡은 악덕"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자연을 대타자의 최근 상징으로 일축하는 그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에 동의한다.

 

스스로 교정하고, 스스로 균형을 잡으며, 스스로 치유하는 생태에 관한 세계관에 여전히 숨어 있는 신은 죽었다 ... 인간은, 인간이 교란할 것이지만 어떤 과잉으로부터 그저 물러서 있음으로써 결국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전일론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순환의 배경에 대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전경에 나와 있는 그런 상징이 더 이상 아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 신, 남성적 이성의 죽음 후에 우리는 자연 여신의 죽음도 시인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 없이 지내는 것, 그리고 기본적 은유로서 항상성을 갖춘 생태 없이 지내는 것은 신이 죽은 후에 다시 한 번 사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자연 자체를 결코 만나지 못하는데, 우리가 만나는 자연은 항상 이미 인간의 집단 노동과 이루어지는 대립적 상호작용에 포획되어 있다. 그런데 둘째, 다루기 힘든 자연(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전부)로부터 인간의 노동을 분리시키는 간격은 축소시킬 수 없다. 자연은 추상적인 "물자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노동 속에서 만나게 되는 저항하는 대항력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개입에 의해 교란되는 안정한 자연이라는 허구는 우리가 가능한 한 멀리 우리의 활동으로부터 물러서 있다면 다가갈 수도 있는 접근하기 어려운 이상으로서도 잘못된 것이다. 자연은 이미 자체적으로 불안하고 어긋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어떤 작용들을 멈춘다면, 생태는 교정되어 항상성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맞지 않을 것이다. ... 불안정한 자연만이 존재한다면 어쩔 것인가...

 

노동과 다루기 힘든 자연 사이의 균열은 자연을 영원히 불안정하게 만드는 자연 자체 내부의 균열뿐 아니라, 인류 자체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균열에 의해서도 보완되어야 한다. 근대성에서 폭발하는 이 균열은 "세계에 대한 감각과 세계에 관한 관념 사이의 분리"이다. 우리는 이 균열을 전통적인 인간주의적-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즉 "고등한" 이론적 활동의 살아 있는 집단적 실천으로부터의 "소외"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살아 있는 실제적인 현실 경험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것으로 격상될 수 없다는 사실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근대 과학과 기술의 교훈이 놓여 있다. "비인간" 영역(양자 진동의 장이 대표적인 예이다)은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 아래에 놓여 있는데, 과학적 이론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입자 물리학의 이런 기묘한 세계는 "인간 지각의 문턱 아래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서술할 언어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현실의 일부로서의 이 기묘한 세계에 관한 적절한 감각-경험이다. "탄소 해방 전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데, 그것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현재 지구 전체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매우 방대한 기술과학적 장치를 통해서만 창조될 수 있는 지식"이다. 여기서 또한, 바그너(Wagner)가 서술했듯이,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으로 치유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유일한 비판적 주장은, 워크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은 여전히 그가 "공유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래서 무엇이든 그것의 계기의 모든 자동화는 소외를 물신화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특수한 관념, 특수한 사랑 또는 특수한 노동의 물신을 만들 때 우리 종-존재는 공유된 삶에서 상실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중의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첫째, 공유된 삶의 그런 교란, 어떤 관념, 소중한 것 또는 과업에 대한 그런 집중이 바로 바디우(Badiou)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 단절들을 소외의 사례들로 일축하기는 커녕, 그것들을 부정성의 힘의 가장 고상한 표현으로 찬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예컨대, 양자 우주의 비인간적인 분자적 층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바로 우리의 공유된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그런 단절을 전제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헤겔적인 역설을 다루고 있다. 해겔은 "몰적(molar)" 추상화 행위―어떤 상황의 복잡성을 그것의 "본질", 그것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환원시키는 것―를 오성의 무한한 역능으로 찬양한다. 정말로 힘든 일은 상황의 복잡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세부 내용 대신에 본질적 형식을 볼 수 있도록 그 상황을 사정없이 단순화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서로 싸우는 미시 집단들이 아니라 계급들을 보는 것이고, 심적 상태들의 흄적 흐름이 아니라 주체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적 형상 또는 패턴이 아니라 실재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주체성의 공허는 풍부한 "내면 생활"에 의해 알기 어렵게 된 실재계이고, 계급 적대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에 의해 알기 어렵게 된 실재계이다.

 

이런 비판적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실재를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횡적 관계들의 두터운 연결망에 대한 분석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오염된 쓰레기장에서 행위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서술을 회상하라. 인간뿐 아니라 부패하는 쓰레기, 벌레, 곤충, 버려진 기계, 독성 화학 물질 등이 모두 나름의 역할(결코 순전히 수동적이지 않는)을 행한다. 이것은 고등한 심적 또는 생명 과정들을 더 낮은 층위의 과정들로 번역할 수 있다는 낡은 환원주의적 관념이 아니다. 요점은 고등한 층위에서 자체 층위의 독자적인 견지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대 로마의 몰락은 로마의 금속 항아리와 그릇에 함유된 납 입자들의 독성 효과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인종차별주의에 맞선 싸움도 "분자적"이어야 하는데, 인종차별주의가 어떻게 전위된 계급 투쟁인지 등에 대한 거대한 "몰적" 설명들에 그저 집중하는 대신에 인종적 대타자의 선망, 굴욕 등을 나타내는 미시 행위들(몸짓과 표현의 두터운 결)을 분석해야 한다. 오늘날 (거의) 모두가 사고방식이 열린 관용적인 자유주의자일 때, 인종차별주의는 바로 이런 분자적 층위에서 자체를 재생산하는데, 나는 아랍인, 유대인, 흑인 등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음식, 그들의 시끄러운 음악, 그들의 천박한 웃음 소리를 참을 수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 사이의 들뢰즈적 대립을 넘어서야 하는데, 궁극적으로 그런 대립은 현실적 생산성과 삶 경험의 분자적 층위와 관련하여 몰적 층위를 어두운 표상들의 극장으로 축소시킨다. 신진대사적 균열이 작동하고 "더 낮은" 분자적 층위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이런 분자적 층위는 매우 낮아서 거대한 "몰적" 정치 또는 사회적 투쟁뿐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경험 형태들에서도 지각될 수 없다. 그것은 "고등한" 이론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데, 약간 비틀면,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이르는 것은 가장 높은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물론 과학은 나름대로의 "분자적"인 물질적 기초, 즉 과학적 측정 장치들을 갖고 있다. 이런 장치들은 인간들에 의해 제작되고 우리의 일상적 현실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것들 덕분에 우리는 양자 진동에서 유전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체험적인 인간적 실재의 일부가 아닌 기묘한 영역들에 대한 접근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관련하여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 과학의 지각, 모형화 그리고 검증 양태들은 그것 자체가 인간 노동의 산물인 어떤 장치에 의존하더라도 인간 감각의 변수들을 벗어나 있다. 과학의 대상물은 인간 의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학은 어떤 주어진 유형과 어떤 주어진 시대의 사회적 조직 형태들의 제약을 받으면서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비인간적 실재의 비인간적 감각들을 추구하는 과학을 속박하는 족쇄이다.

 

이런 노선에 따라, 카렌 바라드(Karen Barad)가 보어의 장치 관념의 협소성을 지적한 것은 옳다. 장치는 독자적인 역사가 있고, 사회적 실천의 산물이며, 그런 것으로서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더 큰 세계를 굴절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인간(inhuman)과 인간 이외의 것(nonhuman) 사이의 구별짓기인데, 인간 이외의 것은 인간과 같은 층위에 거주하며, 인간들이 인간 이외의 사물과 과정들을 대면하는 일상 세계의 일부이다. 장치는 무언가 다른 것인데, 인간도 아니고 인간 이외의 것도 아니라 비인간이다.

 

비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을 인간에게 매개한다. 이것은, 인간 이외의 것에 관해 사전에 너무 많이 말하지 않은 채, 장치에 의해 생산될 수 있는 것―예를 들면, 입자 물리학―의 기묘한 이질적 성질을 보존한다.

 

요약하면, 장치는 인간에 내재적인 것, 즉 실재에 대한 인간의 생산적 및 과학적 개입의 산물인 동시에, 우리 현실의 일부가 아닌 실재계의 궤적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 그들이 대면하는 실재 그리고 실재에 침투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장치라는 삼자에서 정말로 기묘한 요소는 다루기 힘든 외부 실재가 아니라, 양 극단(인간적 실재와 비인간적 실재) 사이를 매개하는 장치이다. 장치 덕분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체험적 현실 범위를 벗어나는 실재계(양자 파동 같은)을 알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자연의 이상한 산물들로 현시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비자연적"(비인간적) 객체들(기계 장치, 유전자 조작 유기체, 사이보그 등)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인간 문화의 힘은 우리가 자연으로 경험하는 것 너머에 있는 자율적인 상징적 우주를 건설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지식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비자연적인" 자연적 객체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상징화"할 뿐 아니라, 내부로부터 자연을 탈자연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