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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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설득하는 객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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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4.

 

설득하는 객체들

Persuasive Object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오늘날 인문학에서 비판 이론을 수행하는 것의 많은 어려움은 우리가 결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며, 그리고 이런 일들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설계 사무실을 방문하여 건축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진지한 정보기술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내가 보고 듣는 것에 놀란다. 그들은 내가 확실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을 사물들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들은 때때로 매우 아름답고 해방에 요긴한 것이고, 때때로 심란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 내 친구이자 기술이론가인 히더 윌체(Heather Wiltse)는 우리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망치를 기술의 범형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과장이지만 과녁을 멀리 벗어나지 않은 진술이다). 여전히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삶의 모든 양상에 영향을 미치지만 다소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술들은 우리의 삶에 매우 잘 통합되어 있고 솔기가 없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설득하는 객체들이다. 나는 설득하는 객체들에 대한 탐구가 <<존재 지도학(Onto-Cartography)>> 이후에 겨냥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존재자들에 대한 수사법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언어 속에서 만나는 그런 종류의 수사법이 아닌데, 이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언설 행위 덕분에 우리가 어떤 믿음을 공유하거나 일체감을 발달시킬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설득하는 객체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거나 정말로 주목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행위를 특수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정향함으로써 설득한다. 그것들은 내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중력"으로 불렀던 것을 실행하는데, "중력"은 기호, 객체 그리고 물리적 객체의 특징들의 층위에서 실행되는 역능을 가리키는 데 내가 사용하는 이름이다.

 

우리 일행은 스웨덴의 우메아 시에서 어느 밝은 저녁에 설득하는 객체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시내 음식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 우리는 한 아름다운 공원에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가야할 거리가 바로 우리 앞에 있었지만, 그 오솔길은 정반대 방향으로 굽이져서 우리를 도착해야 하는 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길은 일종의 설득하는 객체였다. 우리는 가파른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원하는 거리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인데, 특히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가능한 한 저항이 가장 작은 방향을 따라 나있는 길을 따라 가게 되었고, 공원 전역을 한가롭게 거니는 운명―나는 이것을 반은 농조로 말한다―에 처해졌다. 그것은 마치 그 길이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고 우리 일의 목적성을 거부하며 공원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도록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담론적 내용 또는 믿음을 주입함으로써 이런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움직인 길을 따라 홈을 만듦으로써 행했다.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실행하지만―여기서 기술 결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다.

 

그것이 내가 그 술어를 사용하는 특정한 의미에서 중력과 관련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런 설득하는 객체를 따라 그냥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출 수 있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언덕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은 우리를 어떤 특수한 방향으로 밀고 있다. 이런 기계들, 이런 설득하는 객체들은 전부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 길은 우리 나름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공원을 즐기도록 부추기는 기계이다. 예를 들면, 내가 구글 검색을 할 때, 내가 보는 링크들의 목록은 정확히 동일한 검색에 대해 여러분이 보게될 목록과 다르다. 그 목록은 나의 과거 검색 역사뿐 아니라 나의 지리적 위치에도 의거하여 어떤 종류의 알고리즘에 의해 수집된다. 결국 그런 링크들은 나를 어떤 특수한 경로를 따라 정향한다. 사실상 나는 링크들을 선택하지만, 지젝이 말하곤 하듯이, 나의 선택 범위는 이미 선택된 상태이다. 우리는 설득하는 객체들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 채 살아가면서 시공간 풍경의 대안적 배치들을 거의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식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다양한 사회적 패턴을 강화하는 모든 종류의 미묘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를 정향하고 있다. 신흥 기술에 대한 지식 없이 어떻게 우리는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어느 정도로 우리는 의미를 설득하고 해체할 뿐 아니라, 삶, 생성 그리고 운동을 위한 해방적 환경도 건설하는 정치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