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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푹스: 인터뷰-양자 실재에 관한 사적인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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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7.

 

 

양자 실재에 관한 사적인 견해

A Private View of Quantum Reality

 

―― 아만다 게프터(Amanda Gefter) & 크리스토퍼 푹스(Christopher Fuchs)

 

크리스토퍼 푹스는 물리학을 "스토리텔링과 방정식 쓰기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으로 서술한다. "마지막까지도 둘 가운데 어느 것도 독립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상 보스턴 소재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물리학자인 푹스는 전해줄 급진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큐비즘(QBism)으로 불리는 것이고,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옛날에 파동 함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 저쪽에 존재하는 물리적 체계의 상태를 완전하게 서술한다고 했다. 파동 함수의 모양은 어떤 관찰자가 물리적 체계에 관해 수행할 어떤 측정들의 결과들에 대한 확률들을 암호화하지만, 파동 함수는 자연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다.

 

그때 푹스가 등장했다. 칼턴 케이브스(Carlton Caves)와 뤼디거 샤크(Ruediger Schack)와 더불어 그는 파동 함수의 확률을 베이즈적 확률, 즉 체계에 관한 주관적인 믿음의 정도로 해석했다. 베이즈적 확률은 측정 결과에 대해 내기를 거는 사행성 마음가짐, 즉 새로운 데이터가 밝혀질 때 갱신되는 마음가짐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푹스는 파동 함수는 세계를 서술하지 않는다―그것은 관찰자를 서술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양자역학은 사유의 법칙이다."

 

양자 베이즈주의(Quantum Bayesianism), 또는 현재 푹스가 부르듯이 큐비즘은 양자 이론의 가장 난해한 불가사의들 가운데 많은 것을 해결한다. 예를 들어, 양자 체계가 다중의 동시적 상태들에서 단일한 현실태로 불가해하게도 천이하는 악명 높은 "파동 함수의 붕괴"를 생각하자. 큐비즘에 따르면, 파동 함수의 "붕괴"는 관찰자가 어떤 측정을 행한 후에 자신의 믿음을 갱신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이곳에 있는 어떤 입자에 대한 한 관찰자의 측정이 저쪽에 있는 어떤 입자의 파동 함수를 붕괴시키는 불가사의한 원격 작용은 그렇게 불가사의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데, 여기에서 행한 측정은 그 관찰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와 접촉한다면 그 입자의 상태를 추측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 행한 첫 번째 관찰자의 측정이 두 번째 관찰자가 저곳에서 행할 측정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파동 함수는 체계 자체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각 관찰자는 나름의 파동 함수를 갖는다. 내 파동 함수는 당신의 파동 함수와 일치할 필요가 없다.

 

양자 입자는 일단의 가능한 상태들에 있을 수 있다. 관찰자가 측정을 행할 때 그는 순간적으로 파동 함수를 한 가지 가능한 상태로 "붕괴시킨다". 큐비즘은 이런 붕괴가 불가사의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관찰자의 갱신된 지식을 반영할 뿐이다. 그는 그 입자가 측정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그는 안다.

 

양자 기묘성에 대한 해석들의 바다에서 큐비즘은 홀로 헤엄친다. 전통적인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자를 관찰되고 있는 것을 관장하는 물리학의 법칙들과 상이한 법칙들에 의해 관장되는, 파동 함수를 붕괴시키는 불가사의한 역능을 갖춘 채, 아무튼 자연의 외부에 서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첫 번째 관찰자를 관찰하기 위해 두 번째 관찰자가 동반하기 전까지는 상황이 아무 문제도 없다. "다세계" 해석은 우주와 우주의 모든 관찰자가 결코 붕괴되지 않는 단일한 거대한 파동 함수로 서술된다. 물론,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도중에 만나는 모든 갈림길―매 번의 동전 던지기,매 번의 결정, 매 순간―에서 파동 함수가 갈라지고, 그래서 우리도 갈라지는데, 우리가 도대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모든 것을 집합적으로 행했거나 행하지 않은 셀 수 없이 많은 판본들의 우리 자신들로 분리된다. 일단의 무한한 평행 실재들이 파동 함수 붕괴를 피하는 데 치르야 할 대가로서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봄 해석(Bohmian interpretation)이 존재하는데, 그 해석은 우주에 퍼져 있고 우주 속 만물을 결정론적으로 관장하는 유도력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세계에 더 구체적인 실재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실재는 영원히 과학적 탐사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런 해석들은 모두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파동 함수를 다수의 관찰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서술로 간주한다. 반면에, 큐비즘은 파동 함수를 단일한 관찰자의 주관적 지식에 대한 서술로 간주한다. 그것은 모든 양자 역설을 해소하지만, "실재"라고 불릴 무언가의 사소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다. 또 다시, 그것은 지금까지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항상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단일한 객관적 실재는 환영이다.

 

또한 큐비즘은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새로운 일단의 의문들을 제기한다. 파동 함수가 한 관찰자를 서술한다면, 그 관찰자는 인간일 필요가 있는가? 그 관찰자는 의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개일 수가 있는가? ("개는 파동 함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푹스가 말했다. "제길, 저는 34살이 되어서야 파동 함수를 붕괴시켰습니다.") 내 파동 함수가 당신의 파동 함수와 일치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동일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양자역학이 외부적 실재를 서술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하는가?

 

푹스는 이런 의문들과 씨름하는데, 흔히 이메일의 형태로 자신의 사유를 헤쳐 나간다. 이십 년 동안 푹스는 이메일들을 일종의 지하 문서로서 양자 물리학자와 철학자들 사이에서 회람된 거대한 문서―그는 그것을 지하 출판물로 부른다―로 편찬했다. 2000년 5월에 발생한 화재로 자신의 로스 알라모스 집을 잃은 후에 푹스는 그것들을 과학의 프리프린트 사이트 arxiv.org에 대규모의 논문으로 게재함으로써 보존하기로 결심했는데, 나중에 그 논문은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 의해 500쪽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두 번째 지하 출판물은 13년 후에 2,300쪽의 분량으로 배포되었다. 그 이메일들은 푹스의 탐구 정신과 다채로운 성격을 드러낸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이 서술하듯이, "크리스 푹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이 그를 만들어내는 데 성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큐비즘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궁극적으로 푹스는 단일한 의문, 즉 푹스의 스승이었던 저명한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가 제기한 것으로 유명한 의문―왜 양자인가?―을 해결하기를 바란다. 즉, 세계는 왜 양자역학의 기묘한 규칙들에 의해서만 서술될 수 있는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

[...]

 

퀀타 매거진(Quanta Magazine):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리학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불신 때문에 물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푹스: 어린 시절에 저는 대단한 과학소설 팬이었습니다. 저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고 우주 여행이라는 착상을 정말 즐겼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듯 보였습니다. 우리는 달에 갈 것이고, 그것은 첫 번째 단계일 뿐이고, 과학은 한계가 없으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스타 트렉(Star Trek)>>에서 행해지는 것들―행성에 가고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내며 모험을 한다―을 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물리학과 우주 여행에 관한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항성들 간의 거대한 거리 떄문에 우주 여행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때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저는 존 휠러와 블랙홀과 웜홀에 관해 알게 되었고, 웜홀이 속도 제한 문제를 극복할 방법이 될 수 있거나, 또는 타키온(tachyon)으로 불리는 이국적인 입자를 사용하여 속도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에 대한 메시지는 물리학이 우리로 하여금 항성에 닿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일종의 농담으로서 저는 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물리 법칙들 때문에 우리가 항성에 갈 수 없다면, 물리 법칙들이 잘못 되었음에 틀림없다!

 

당신은 결국 존 휠러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텍사스 대학교에 간 처음에, 제가 수 년 전에 읽었던 사람, 즉 존 휠러가 실제로 그 대학의 교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서 그가 발표한 더 최근의 논문들 가운데 몇 편을 읽었는데, 거기서 그는 "법칙 없는 법칙(law without law)"에 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휠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결국 유일한 법칙은 아무 법칙도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물리 법칙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물리 법칙은 가변적이며, 가변성(mutability) 자체가 물리학의 원리입니다. 휠러는 지금까지 초월당하지 않았던 물리 법칙은 전혀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해했고, 물리 법칙들이 어떻게 잘못 되었음에 틀림없는지에 관한 제 농담을 떠올렸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사실상 아무 물리 법칙도 없을 것이라는 이 관념에 엄청나게 끌렸습니다. 법칙 대신에 무엇이 있는지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법칙이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항성에 이르는 뒷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물리학 강좌를 수강한 적조차 없었습니다.

 

당신의 논문들 가운데 한 편에서 당신은 에르빈 슈뢰딩거가 우리의 실재 개념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영향에 관한 글을 적었으며, 우리가 주체―말하기를 수행하는 사람―를 포함하지 않은 채 실재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역사적 우연이라고 언급합니다. 당신은 그리스적 사유의 주문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슈뢰딩거는 그리스인들이 우리에 대한 일종의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에 관한 사유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인식하는 주체"를 세계 속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세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큐비즘은 양자역학이란 우리가 없는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런 계보에 대항합니다. 그 대신에 양자역학은 바로 세계 속 우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론의 주제는 세계 또는 우리가 아니라 세계-내-우리, 즉 그 둘 사이의 접면입니다.

 

세계 속 우리 자신에 관해 생각하지 않은 채 세계에 관해 생각하는 습관이 우리 몸에 대단히 깊이 배어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게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대단히 절대적인 듯 보여서 아무도 의문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세계의 특징들―을 의문시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초기 문명들에서 사람들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어떻게 구별짓는지 전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둘을 분리하는 관념이 일단 발판을 확보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해야만 하고, 과학은 객관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렇게 되었고,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큐비즘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큐비즘은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그 느낌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와 더불어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했고, 그래서 큐비즘은 한 걸음 후퇴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정말로 어떤 궁극적인 한계도 없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우주를 원한다면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갔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큐비즘은 어떻게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까?

 

그것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은 물리 법칙들은 "저쪽에" 있는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물리 법칙들은 우리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에 관한 우리의 최선의 표현, 가장 포괄적인 진술입니다. 빛의 속도가 궁극적인 속도 한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윈주의적 진화를 거쳐서 우리 뇌가 더 커진 것과 꼭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단게로 진화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물리 법칙들의 변화"라고 부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주를 변화될 수 없는 견고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대신에 방법론적으로 우리는 정반대로 가정해야 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그것을 형성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있고, 우주는 변화될 수 있으며, 그리고 우주는 우리에게 반작용을 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얼마나 세게 반작용을 가하는지 인식함으로써 우리 한계를 이해할 것입니다.

 

확률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확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확률 이론에 관한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서문에서 브루노 데 피네티(Bruno de Finetti)는 모두 대문자로 이렇게 적습니다. "PROBABILITY DOES NOT EXIST(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확률이 플로지스톤, 마녀, 요정의 길을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이 양자 이론은 확률의 견지에서 세계를 서술한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그것을 세계 자체가 확률론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간주했습니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의 시대에 확률은 주관적 진술―당신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지식을 수량화함으로써 관리할 수 있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의 어느 시점에 확률이 객관적인 듯 보이는 방식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들―열 같은 것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통계적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양이 확률론적 고찰 때문에 생성되며, 그리고 그것이 객관적이라면, 확률도 역시 객관적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양자역학이 등장했습니다. 코펜하겐 집단은 양자역학은 완전한, 완결된, 닫힌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흔히 그런 이론의 모든 특징들은 자연의 객관적 특징이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양자 상태가 확률을 부여한다면, 그런 확률도 자연의 객관적 특징이어야 합니다. 반대편 진영에 양자역학은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서 확률을 서술할 때, 그는 그것을 불완전한 지식, 주관적 상태에 관한 진술로 해석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당신은 객관적 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확률은 추측하는 행위자 없이 세계 저쪽에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확률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은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한 서술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납득했다고 합시다. 이제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일단의 입장들이 있습니다. 베이즈주의 통계학자 I.J. 굿(Good)에 따르면 46,656가지 변양태가 존재합니다. 양자 베이즈주의에 관한 작업에 착수했을 때 우리는 확률에 관해 E.T. 제인스(Jaynes)의 입장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입장은 확률이 우리 머리 속에 존재한다―내 확률은 내 머리 속에 있고, 당신의 확률은 당신 머리 속에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지만, 당신의 확률이 근거하고 있는 정보와 동일한 정보에 내 확률이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의 두 가지 확률 할당은 동일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정보에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46,656가지 변양태들의 스펙트럼에서 이 입장은 "객관적 베이즈주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스펙트럼의 반대 극단에 브루노 데 피네티가 있습니다. 그는, 내 확률은 내 경험에 근거하고 있고 당신의 확률은 당신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내 확률과 당신의 확률이 일치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에, 즉 확률을 사행성 마음가짐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의 사적인 사행성 마음가짐 전체를 내부적으로 일관성 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것으로 그렇게 해야 하고, 당신은 당신 것으로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것이 피네티가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뜻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뜻으로 말했습니다.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자. 확률이 대체로 내 머리 속에 있지만 확률을 여전히 세계에 정박시키는 어떤 여분의 규칙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그 닻을 제거했습니다.

 

결국 제 동료 뤼디거 샤크와 저는,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제인스와의 유대를 끊고 데 피네티의 방향으로 더 움직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제인스는 데 피네티를 놀림감으로 만든 반면에, 우리는 사실상 그것이 실제 해결책이 놓여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자 베이즈주의에서 큐비즘으로 이름이 바뀐 때는 언제입니까?

 

양자 베이즈주의는 너무 장황했고, 그래서 저는 그것을 큐비즘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큐비즘으로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은 그것에 더 많이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제 동료 데이비드 머민이 우리의 결론을 수용하지 않을 베이즈주의자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큐비즘은 양자 베이즈주의에 대한 약어가 정말로 되지 말아야 한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브루노 데 피네티를 가리키는 양자 브루노주의로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문제는 큐비즘의 형이상학에는 데 피네티조차도 수용하지 않을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완벽한 B를 찾아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그것이 너무 추악해서 당신은 그것을 대중에 공개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들 홈스 2세(Oliver Wendell Holmes Jr.)에서 비롯된 술어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bettabilitarianism(추측능력주의)"으로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루이스 메넌드(Louis Menand)가 말했듯이, "세계는 관절에서 느슨해진다"는 철학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당신 행위의 결과에 관해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 혼성어는 bet와 ability에서 유래합니다.] 저는 이것이 완벽하게 꼭 맞다고 생각하지만, 큐비즘이 양자 추측능력주의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저는 KFC가 행한 것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entucky Fried Chicken)을 가리키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KFC일 뿐입니다.

 

양자역학이 당신이 언급한 대로 사용자 지침서라면, 누가 사용자입니까? 아인슈타인은 관찰자에 관해 말했지만, 양자역학에서의 관찰자는 상대성 이론에서의 관찰자와 다릅니다.

 

언젠가 저는 철학자 로버트 디살(Robert DiSalle)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관찰자가, 말하자면, "다른 한 관찰자의 어깨 너머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에서 관찰자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어법을 좋아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이 관찰자가 보는 것을 취하고 변환 법칙들을 사용하여 저 관할자가 무엇을 볼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어는 실제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사이의 유사점들을 강조했고, 그래서 그는 아인슈타인이 왜 양자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문제들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큐비즘이 양자 측정 결과를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사적인 것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것을 봅니다. 이런 사적인 경험을 저런 사적인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변환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두 마음이 같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했을 때 그는 틀렸을 뿐입니다.

 

그것은,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이 서술한 대로, 세계의 질료는 마음 질료이라는 것을 뜻합니까?

 

큐비즘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말하곤 했듯이 세계는 "외부"의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지 버컬리와 에딩턴 같은 관념론자들이 말하곤 했듯이 세계는 "내부"의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의 질료는 우리 각자가 모든 살아 있는 순간에 만나는 것의 특질 속에 있는데,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며, 그 둘의 분리라는 바로 그 관념에 선행하는 질료입니다.

 

그래서 결국 객관성이 도입됩니까?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큐비즘을 세계 속 무언가, 즉 세계에 내재적인 것을 가리키기 위한 탐구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완결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은 단일 사용자 이론이지만,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당신은 우리 모두가 묻어들어가 있는 세계에 관한 무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양자역학을 단일 사용자 이론으로 간주함으로써 불가사의한 원격 작용 같은 많은 역설들이 해소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곤혹스러운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벨의 정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세계는 비국소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원격 작용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꽤 놀라운 큰 불가사의를 도입함으로써 한 가지 불가사의를 해결했습니다. 이런 비국소성은 무엇입니까? 제게 그것에 관한 완전한 이론을 주십시오. 그 대신에 제 동료 큐비즘주의자들과 저는, 벨의 정리가 정말로 가리키는 것은 측정 결과는 이미 저기에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주관적인 믿음의 정도에 관해 말하기 때문에 분과학문으로서의 과학을 포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기초적인 수수께끼들을 모두 해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해결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휠러의 질문입니다. 왜 양자인가?

 

왜 양자입니까?

 

저는 더 많은 감각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SIC(symmetric informationally complete measurement)―거의 bettabilitarianism만큼 나쁜 끔찍한 술어―로 불리는 아름다운 수학적 구조에 매혹당했습니다. 그것들은 보른 규칙[양자역학에서 확률을 생성하는 수학적 절차]을 다른 언어로 재서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데, 여기서 보른 규칙은 아무튼 가설적인 것들로 실재적인 것을 분석하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만약 당신이 양자역학의 진짜 메시지는 세계는 관절에서 느슨해지고, 세계 속에는 정말로 우연성이 존재하며, 세계 속에는 정말로 참신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점을 진심으로 수용한다면―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세계는 언제나 확률들에 관련된 것이고, 양자역학은 그것들을 연결시킵니다. 수학을 올바르게 하는 데 25년이 걸릴 것이지만, 25년이 지나서 이런 대화를 다시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