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가득찻잔

자유인 2007. 2. 21. 13:10






김양동 - 서예전각가





19세기 조선후기의 예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은 한국 서예사의 상징적 대명사와도 같은 추사 김정희(1786~1956)이다.

완당이 그가 어떻게 했길래 19세기 한국예사에 한획을 그으면서 변혁의 회오리를 불러 일으켰던가 하는 점을 오늘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완당론을 썼다. 그러므로 본글은 필자의 견해라기 보다 앞서 연구한 분들의 내용을 차용하고 간명하게 요약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글의 주지인 한국 인장사에서 완당시대 인장계를 분명한 자료와 문헌에 의해 확연하게 들어나게 됨은 처음이 될 줄 믿는다.



정희그러면, 완당의 영향은 그가 학문과 예술에서 무엇을 성취함으로써 끼침을 이룬 것인가. 그것을 요약해 보자.

첫째, 완당은 2,3세기에 걸쳐 출현할까말까하는 예술적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둘째, 천재와 대가는 다르다. 천재는 하늘이 낳아 준 것이나, 대가는 노이대성(老而大成)하는 것으로서 그 성격은 추사지재(地才)적인 것이다. 그런데, 완당은 천재성을 지녔으면서도 고희의 생애를 살았다. 그것도 십수년은 생의 고통을 맛본 유배생활을 함으로써 그의 천재성과 지재성은 극적 결합을 한다.

원당의 작품에서 법고이능전(法古而能典)한 것은 그의 지재적 측면이며, 지변이창신(知變而創新)한 모습은 그의 천재적 측면이다. 그리고, 법고이창신(法古而創新)한 것은 그의 지재성과 천재성이 상교(相交) 융회(融會)하여 빚어진 결과이다.


이와같 은 정신과 경험을 근간으로 삼은 완당은 다음과 같은 예술의 업적을 성취하였다.

① 청대의 석학 옹방강(翁方網)과 원당의 교류로 고증학과 금석학에 눈을 뜨게 되어 북한산 비봉(碑峰)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게 되었고,「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논문을 저술함으로써 최초로 금석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동서법을 이루었다.

② 해박한 서화이론을 바탕으로 이 땅에 근대적인 성격의 서화평론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개창하였다.

③ 예술가의 근본인 독창과 개성으로서 기존에 대한 모방과 답습에 저항하고 혁파하여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④ 금석학과 고증학을 통하여 깊이있게 깨닫고 문자학과 진한서법(秦漢書法) 및 印에 대한 지식은 우리 나라 인장발전의 기틀을 여는데 공헌하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글들을 통해서 볼 때, 완당과 완당일문의 인장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그 시대의 전각(인장)계를 살피는데 미흡한 감이 있다. 그것은 중국과 달리 조선 시대의 인장은 인장을 새긴 사람이 측관(側款:인장의 옆면에 연도와 새긴 사람의 이름 등을 새겨 넣는 글)을 하지 않은 결점이 있어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었다.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문헌을 참고 하는 과정에 완당시대에 독보적인 전각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자료를 발견하였다.



귤산의「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하였다.「김석경이란 사람은 루각동에 사는 사람인데 추사의 문에서 나왔다. 그는 철필(전각)을 잘하여 당시 사대부이 도장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나(귤산)도 각인을 시킨 것이 많은데 석묵서루(石墨書樓:옹방강)의 법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이나 기이한 법은 없다. 후에 오소산 규일이 있었다. 그는 석묵법(옹방강의 각법)을 깊이 터득 하고 권돈인과 추사의 문하에 왕래하면서 그 전각법이 더욱 빛을 띠우니, 궁궐의 여러 각은 대게 오소산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소산의 각은 처음은 순수하고 귀중한 맛이 있어 점입가경이었다. 차차 숨은 것을 찾아 따르니 각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하길 10년이 못되어 오소산은 눈이 멀었다.

중국의 주소백은 손수 각한 것을 나에게 보내왔기에 나도 권돈인이 구하는 예서법으로 주소백의 각법을 답습하여 권도인에게 보였더니 그가 크게 놀라면서 근세의 훌륭한 솜씨라고 하더라. 권돈인이 나에게 재료를 주어 각을 부탁하고, 또 소산으로 하여금 소백의 인을 조각하도록 하여 그것을 중국에 사신으로 떠나는 인편에 부쳤더니, 소백도 자신이 조각한 印모두를 찍어 보냈다.

내가 주소백에게서 얻은 것이 수십방인데 모두 수작이다. 일전에 어서사귤산가오실(御書賜橘山嘉梧室) 8자를 소백이 조각해 줄 것을 원하였으나 그도 눈이 어두워 조각하기가 불가능해져 정학교에게 대신 조각하도록 하였더니 그 법이 오소산과 주소백의 여파에 가깝더라.」

이 글에서 발견된 새로운 사실은,

① 추사 문하에 김석경이란 전각가가 있었다는 사실.

② 김석경보다 뛰어난 오소산이란 사람이 추사와 권돈인의 제자로써 그 시대 전각의 명수였다는 사실.

③ 석묵서법(옹방강)을 평가의 준칙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④ 중국의 주소백과 전각 교류가 많았다는 사실.

⑤ 오소산 다음으로 전각을 잘 하는 사람이 정학교쯤이 었다는 사실.

⑥ 귤산 이유원도 전각에 손댔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보고 근역인수(槿域印藪)를 보니 김석경의 인은 없었지만, 小山 吳圭一의 印은 18과의 인영이 다행스럽게도 실려져 있었다. 소산의 각풍을 면밀히 검토하여 본 결과, 그는 진한인(秦漢印)을 법으로 도법은 절파의 절도법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소산이 각한 완당의 인장소산 오규일은 완당의 제자로서 이만큼 칭송받고 있는 전각가였으므로  완당과 권돈인 및 완당일문에 대한 전각은 당연히 그의 손에서 많이 이루어졌을 것임이 틀림없는 사실이겠으므로 조희룡, 허유, 김석준, 오경석, 조면호, 신헌, 민태호 등이 사용하던 전각을「근역인수」에서 비교 분석하여 본 결과, 장법과 도법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솜씨임을 느낀바 소산이 조각한 인장의 숫자가 많았음을 짐작한다.



완당시대 대전각가 소산 오규일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하는 점이 그 다음으로 궁금한 사실이었다. 「근역인수」에는자는 호태, 호는 소산, 본관은 해주인, 창열의 아들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고, 소산의 전항에는 그의 부 오창열의 인영 16과(모두 소산의 각풍임)가 수록되어 있으며 자 경언, 호 대산, 보관 해주, 관 과천현감, 필명이 유하니라(壺山外史)로 기록되어 있다.

출전이 밝혀져 있음으로 오창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살피고자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를 살펴 본 결과,「소년 시절에는 곤궁하고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초목과 새짐승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다. 늦게는 의약의 업에 정통하여 약원에 참여하였는데 임금의 총애가 높고 지극하였으니 며슬이 과천 현감에 이르렀으며 시를 잘 하였다. 두 번이나 중국에 들어가 유명한 석학들과 교류하였는데 그들이 조선 사람을 만나면 대산 오창열의 안부를 묻고 그의 시를 외우며 흐느껴 우는 자가 있었다. 시로써 의술을 덮어 가리우고 의술로써 시를 덮어 가리우니 그러고도 아울러 성상의 지우를 받았으니...... 아들 삼형제가 있는데 맏아들 규일은 철필(전각)에 정교하여 내부에 소장되어 있는 물건 중에는 그의 손으로 조각한 것이 많다. 지금 가각감(假閣監)의 벼슬에 있다.」

 




조희룡은 대산 오창열과 40년을 교유한 사이임을 밝혀 기록의 생생함을 더해주고 있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대산은 비록 中人계급이었지만, 시를 잘하고 의업에 뛰어나며 성상의 지우를 받았으니 완당이나 권돈인과 교우가 있음직하고, 따라서 그의 아들 규일도 자연스레 완당문하에 출입하면서 전각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또 대산은 두 번이나 중국을 다녀오면서 그의 아들의 심도 있는 인장학을 위해 필요한 서적 인보(印譜:인장을 찍어 모아 책으로 만들은 것)중국에서는 송나라의 선화 때 시작하여 원나라 때도 있었으나 전하는 것은 없고, 소산명나라의 유경 연간에 무릉의 고씨가 모은 집고인수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전함)등을 전해 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완당과 대산, 그리고, 소산 삼자의 관계는 서로가 벗과 아들의 관계로서 매우 돈독하였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애정이 가는 제자에게 완당이 서간을 쓰지 않았을까 싶어 완당집을 살펴 본 결과, 유배지 제주도에서까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간절한 가르침을 담은 글을 보냈던 것이 있었다.


「모두가 군의 부친 편지 속에 다 말했으므로 별도로 체언을 하지 않겠네. 4개의 印을 찍은 印泥(인주)는 아직까지도 그대 흉중에 이 바다 밖의 메마른 사람을 두고 있음 듯하여 심히 감동스럽네. 印刻은 더욱 진전된 경지가 보이니 어찌 정수(程邃:1605~1691 금석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 전각, 그림에 두루 능통하다. 전각은 주문은 대전을 즐겨 쓰고, 백문은 한법을 연구하여 도법이 장중하다.흡파를 개척하였다.)이나 하진(何震:자는 주신, 호는 설어, 또는 장경. 완파를 개척하였다.)의 묘처에 도달하지 못하겠는가? 매 번 양문에 있어서 더욱 뜻을 드러내면 좋게 되겠네. 천리 밖이라 언어와 문자로서 자세히 언급해주지 못함이 지극히 답답하군. 완당(阮堂)이라는 小印을 하나 다시 새겨 인편이 되는대로 보내주면 고맙겠네.

근일에 자못 무전(繆篆)의 고법을 깨닫고 보니, 이것이 인전의 비법이로군, 대개 한인은 본시 모두가 무전의 구식인데 그것을 모르고서 印을 각하면, 비록 종정(鐘鼎:금속고기의 쓰여진 고문)의 고자(古字)라도 모두 옳은 것이 아닐세. 그대를 면대하여 이 생각을 헤아려 설명하여 그대로 하여금 다시 일경을 진취하게 하지 못함이 한이네, 만약 내가 그대에게 말하여 주지 않고, 전수해 주지 않는다면 이 일법은 마침내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니, 실 대산로 한탄스러운 바이네. 이것은 마음과 입으로 상대하지 않고선 문자로서 형용할 수가 없는데, 천리의 바닷길이 멀어 전할 수 없으니 답답해서 병이 될 것만 같을 뿐이네.」이 서간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몇가지의 사실이다.



① 소산 오규일은 완당의 유배지까지 印을 찍어 보내어 가르침을 받고 있고,

② 청대의 정수와 하진의 인풍을 완당은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③ 완당은 노쇠하여 자각이 어려우므로 제자 오규일에게 대각을 시키고 있는 것이 명백해졌고

④ 오소산의 주문은 의지와 취향이 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여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고

⑤ 완당은 인전의 비법을 한의 무전으로 보고 있으며

⑥ 그 당시 인각인들이 모두 한의 무전을 모르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소산 오규일에게 보낸 위의 서신은 완당의 전각관과 전각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지도방법을 분명하게 드러낸 점에 있어서 지금까지 완당의 전각에 대한 구구한 억측을 일소하게 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 한통의 편지로 완당의 전각세계를 확연히 알 수 있으며, 제자 오규일을 유일한 완당 전각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모든 것을 다 전수하고자 하는 피어린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완당으로부터 이토록 총애를 받고 있는 오규일의 전각 수준은 당대 최고수준의 대가였음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추사묵란(秋史墨蘭)의 최고 걸작 <불이선란:不二禪蘭>에「오소산견이호탈가소(吳小山見而豪奪可笑)」<오소산이 이것을 보더니호쾌하게 속기가 거삭되었다 함에 가히 웃을 만하였다>-(호탈을 '달겨들어 빼앗듯이 하다'로 풀이하지 않음은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로 보아서도 스승 완당의 소산에 대한 애정어린 인정과 소산의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문자지상또 권돈인이 소장했던 80과의 인존축(印存軸)에 완당이 수서로 제발한 글에서


「이것은 권돈인선생이 수장한 것이다. 한인도 있고 문삼교, 하진도 있으며 또 근세 사람으로는 동소야, 장성손, 유백린, 성발같은 여러 명각이 있다. 이 중에서 특출한 것은 호봉인인데 혼목고아한 맛이 가히 압권이다. 무릇 전각에 뜻을 두고자 하면 마땅히 법규를 지켜야 하니, 오군은 이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서 거의 삼매의 맛을 다 하였다고 하겠다.」여기서 오군이란 말할 것도 없이 소산 오규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완당은 중국 제명가들의 인존제발에 소산의 전각을 삼매의 맛을 다하였다고 극찬함으로써, 은근히 조선인의 자존과 훌륭한 제자를 둔 스승으로서의 기쁨을 함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글에서,

①東人의 나쁜 습관을 혁파하고,

② 창조와 개성의 예술세계를 전개하여,

③ 근대적 성격의 예술을 최초로 인식함으로써,

④ 中人계급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⑤ 19세기 예단에 르네상스적 변혁을 일으켰던, 추사시대의 전각계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소산 오규일이란 인물이 홀로 우뚝하였음을 논증하였다. 앞으로 소산 전각에 대한 발굴과 작품세계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 분석이 있어야 될 줄 믿는다.






출전 : 김양동 - 서예전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