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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2007. 2. 21. 13:13
"추사체는 '천재'가 아닌 '시대'의 산물이다"
특집_추사 인식의 진실과 허구: (5)18세기 예술품 시장의 형성과 추사
2006년 02월 19일 (일) 00:00:00 강명관 부산대 edit@kyosu.net

▲추사 김정희, 학위유종 ©
어떤 글씨도 추사의 글씨 옆에 두면 빛이 바랜다. 추사체는 워낙 독특한 것이다. 해서 추사는 천재다. 천재는 시대를 초월하지만, 또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추사체의 천재성에 대해 나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천재를 낳았던 그 시대에 대해서만 조금 언급할 뿐이다.


‘阮堂集’은 法帖과 碑拓에 대한 풍부하고 예리한 비평문을 남기고 있다. 법첩과 비탁에 대한 비평은 추사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문집에 더러 보이는 바, 이것은 서예 특유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다른 예술, 예컨대 문학과는 달리 서예는 조형예술이기 때문에 조형물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예는 고전적 모델을 臨摹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모델이 갖는 조형의 眞/假, 善/不善은 서예비평의 핵심 사안이 된다. 한국 書藝史에서 모델에 관한 비평은 17세기 이전에는 흔하지 않다. 대체로 18세기 이후의 현상이다. 추사의 글씨와 서예비평도 18세기 이후 동아시아 예술품 시장의 형성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임병양란 이전, 즉 17세기 이전 중국 예술품의 수입 경로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혀진 바 없다. 서화의 수입이 없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이후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중국-조선의 문인 예술가가 중국 현지에서 접촉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예술품의 수입과 중국 문인 예술가들과의 본격적인 접촉은 淸의 치세가 안정기에 접어든 18세기 이후다. 청은 중원으로 들어온 이래 각지의 반란을 평정한 뒤 천하의 통치에 자신감을 얻기 전까지 조선사신단의 북경 시내 출입을 금했다. 18세기 중반이면 이 금령이 느슨해진다. 1765년 홍대용이 入燕한 뒤 북경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당시 청은 康熙→雍正→乾隆으로 이어지는 치세의 절정에 올라 있었으니, 그 자신감이 금족령을 완화시켰던 것이다.


청은 중국 지식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全唐詩’, ‘古今圖書集成’, ‘四庫全書’ 등과 같은 거대한 총서 시리즈의 편찬을 추진한다. 이 편찬 작업의 영향은 深大하고 다양하였으나, 예술품 시장의 형성을 촉발시켰다. 중국 각지의 서적이 북경에 집적되었고, 그 집적을 맡은 書籍商의 집합처인 琉璃廠은, 서적은 물론, 문화예술품 시장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던 것이다. 홍대용은 북경의 유리창과 隆福寺에 형성되어 있었던 거대한 서적 시장과 예술품 시장을 둘러본다. 유리창의 서적 시장을 그는 책의 바다(!)에 비유한다. 약간 뒤에 입연한 박제가는 시장에 쌓인 골동과 서화를 보고는 “찬란하게 빛나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충격을 토로했다.


홍대용은 유리창에서 嚴誠, 潘庭筠 등 중국 문인들과 접촉한다. 이 접촉을 실마리로 삼아 뒷날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이 중국 문인들과 만나 토론과 담소를 나누었고, 급기야 중국 문인지식인과의 접촉이 유행처럼 된다. 추사가 阮元, 翁方綱 등 중국 최일류의 석학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홍대용이 만든 실마리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북경에 형성된 예술품 시장과 중국의 문인지식인과의 접촉, 이 두 가지가 궁극적으로 추사와 같은 천재를 낳은 배경이 된다.


유리창은 조선의 학문과 문학예술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좁은 공간은 18세기 이후 조선에 막대한 서적, 서화와 골동품을 공급하는 국제적 시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입연하는 사람들, 즉 사신과 역관들을 중심으로 중국 서적과 예술품의 구입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특히 서울에 世居하면서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京華世族들에게 중국의 서화, 골동품을 구매, 축적하는 것은 생활문화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광통교 일대의 모습 ©

유리창은 조선의 예술품 시장 형성을 자극하였다. 19세기의 자료에 의하면 광통교 일대에 서화를 판매하는 상설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상설공간은 적어도 18세기 후반까지는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예술품 중개상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광통교 일대의 질 낮은 서화보다는 보다 고급한 작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있었다. 추측컨대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서화, 골동품과 국내의 제작품, 국내 컬렉터들의 소장품이 재거래되는 경우에 개입했다.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은 18~19세기 서화열풍


북경과 서울의 예술품 시장의 성립은, 서화 수집에 열광하는 컬렉터를 낳았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컬렉터는 金光遂(1696-?)다. 김광수를 시작으로 서화 컬렉터가 簇出한다.  예컨대 李夏坤·南公轍·徐常修·洪良浩·沈象奎 등이 그들이다. 이하곤과 심상규는 각각 宛委閣과 嘉聲閣 등 서화만을 전문적으로 수장하는 공간을 갖추고 있기도 하였다. 김광수 이후 이들은 직접 입연하거나 혹은 역관 등의 대리인을 통해 서화를 구매하였고, 때로는 중국 문인지식인들과의 교우를 통해 기증받기도 하였다. 이들이 앞에서 지적한 전형적인 경화세족이다.


李廷燮은 “오늘날 사람들은 고서화를 많이 수장하는 것을 淸雅한 취미로 삼아 남에게 비단 한 조각이라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떳떳치 못한 온갖 수단으로 기필해 구해 농짝을 가득 채우고 진귀한 보배인 양 자랑한다”라고 지적하였으니, 경화세족의 서화 수장이 거의 광적인 유행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이런 열풍은 중하류층까지 번져나갔으니, 예컨대 추사의 제자였던 역관 吳慶錫은 天竹齋란 서화수장고를 갖고 있는 거대한 컬렉터였던 것이다. 심지어 안목 없는 장사치들까지 서화와 골동의 컬렉터가 되었다는 자료가 있으니, 18, 19세기의 서화 열풍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예술품 시장의 성립과 서화의 매매가 활성화되고, 컬렉터의 족출은 전에 없던 새로운 문화현상이었다. 서화시장의 성립은 서화예술에서 복잡한 비평적 문제를 産生하였다. 예컨대 “어떤 서화를 구입해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어떤 서화의 예술성이 뛰어난 것인가, 어떤 것이 진품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의 연쇄를 낳고, 나아가 어떤 그림과 글씨가 최고의 경지인가, 그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라는 창작론의 문제로 이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남공철의 문집의 ‘書畵跋尾’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서화에 붙인 방대한 양의 題跋을 모은 것인데, 여기서 그는 소장품의 내력, 진/가, 가치를 논한다. 서화비평문인 것이다. 이처럼 예술품 시장의 성립은 실로 조선후기의 서화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비첩학의 열풍과 금석학 발달의 상호 연관관계 주목


이제 글씨로 문제를 좁혀 보자. 김광수의 컬렉션을 접했던 서예가 李匡師(1705~1777)는 ‘圓嶠書訣’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金光遂는 옛것에 깊은 취미가 있어 (조선에서) 최초로 漢·魏의 여러 碑拓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즉 김광수란 컬렉터부터 시작하여 한·위 시대 古碑의 탁본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컬렉터들은 한·위 고비의 탁본 수집에 열을 올렸다. 고비의 탁본, 곧 碑拓이 서예에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즉 청의 강희·옹정·건륭 말기까지의 약 1백50년은 명 중엽 이래 유행하던 法帖을 근거로 하는 書法, 곧 帖學이 유행하였으나 19세기 초반에 와서는 碑拓을 모델로 하는 碑學이 발흥했던 것이니, 이 비학의 발흥은 18세기 이래 중국 학계의 金石學의 발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금석학의 발달은, 비탁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비탁은 결과적으로 서예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거의 동일한 움직임이 조선에서도 나타났다. 글씨 쪽만 본다면, 18세기 중반 이후의 이광사를 위시한 주요한 서예가들의 비평에 한·위의 글씨가 중요한 고전적 전범으로 의식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다시 추사로 돌아간다. 추사의 고조 金興慶은 영의정, 증조 金漢藎은 영조의 둘째 딸 和順翁主와 결혼한 駙馬이다. 추사의 가문은 전형적인 경화세족인 것이다. 경화세족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자라난 추사는 1809년 겨울, 아버지 金魯敬을 따라 入燕하여, 이듬해 정월 1810년 翁方綱과 阮元을 만난다. 25살의 젊은 추사의 학문을 접하고 78살의 老大家 옹방강은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 稱歎해 마지 않았다. 옹방강과 완원은 추사에게 그들의 희귀한 컬렉션을 보여주고 서예와 학문에 대한 談討를 그치지 않는다.

추사는 여기서 그의 서예에 대한 비평안을 넓히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추사의 글씨와 ‘완당집’에 보이는 그의 교만하게 비칠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서예비평은 그가 중국에서 눈으로 보았던 방대한 眞蹟에 근거하고 있다. 추사가 경화세족으로서의 학문과 교양, 그리고 예술에 대한 비평안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과연 옹방강과 완원과 접촉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들의 컬렉션을 볼 수 있었을 것인가. 요컨대 추사 글씨와 비평은 18세기 동아시아 예술품 시장의 형성과 중국 문인지식인과의 접촉이란 문화현상 위에 형성된 것이다. 추사의 예술은 시대와 유리된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추사를 논함에 있어 이 점을 다소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강명관 / 부산대·한문비평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여말선초 한문학의 재조명’, ‘조선후기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등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