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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2009. 9. 3. 16:09

<오마이뉴스>는 광복 64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또는 재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 네 분을 선정하여 이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대상자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 신규식 선생,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상설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 당시 최고령 투사였던 강우규 의사와 일제하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 김시현 의사 등 네 분이다. 집필은 역사소설가 김갑수 씨와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 씨가 맡았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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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국사범’이랄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갖은 고문과 악행을 자행했다. 최근 재심을 통한 명예회복 움직임이 일고 있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경우 일경에 체포돼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였고,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하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7개를 잘라내기도 했다. 또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경의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가 돼 평생 앉은뱅이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총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항일투사가 있다. 그 가운데 여섯 차례, 기간으로 16년에 걸친 감옥살이는 일제하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돼서였다( 나머지 한 차례, (수감 기간은 약 8년)는 해방 후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였다.) 이런 그를 두고 혹자들은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김시현(金始顯) 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말년의 김시현 의사


김 의사는 ‘거사-체포-투옥-석방’을 수 차례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때까지 변절하지 않고 일관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 김 의사의 항일투쟁 행적에 문제가 있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해방 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해방 전후를 일관하여 투사의 삶을 살았다.

김 의사는 1883년 독립운동가의 본산이랄 수 있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김 의사를 기억하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는 먼저 그의 ‘혀짧은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이는 김 의사가 일경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혀를 깨물러 발음이 부자연스런 데서 생긴 것이다. 김 의사의 원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김 의사를 수사하던 일본인 검사가 “(너의 독립운동은)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자 아예 호를 ‘하구(何求)’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식인 출신 투사... 의열단 사건으로 5년여 옥살이

김 의사는 항일투사 가운데 지식인 출신이다. 2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 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투쟁 대열에 들어섰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에 참여해 군자금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로 침투하였다. 이로부터 시작된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 망명은 쉼 없이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되었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 김 의사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첫 감옥살이였던 셈이다. 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김 의사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 반려자인 ‘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는데, 상하이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정식 결혼하였다.

의열단은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를 기획하였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통해 총독부 청사, 동척, 매일신보 등을 폭파하고 총독부 고관 등을 처단할 계획이었다. 2월초 김 의사는 톈진에서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단재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등을 전달받았다. 그리고는 평소 자신을 추종하던 황옥(黃鈺) 경부(警部, 현 경정)의 도움을 받아 이를 국내로 반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였다. 일행 중에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복역기간은 5년 5개월)받았다. 이른바 '의열단 사건'(또는 ‘황옥경부사건’)이다.

'의열단사건'으로 구속돼 5년 5개월 감옥을 살고 나올 당시의 신문 보도 내용


한편 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 투옥 생활의 연속이었다. ‘황옥경부사건’으로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김 의사는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 지도부와 재결합하였는데, 당시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김 의사는 베이징 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동지와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가 살인미수혐의로 체포돼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 9월 출옥 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김 의사는 역시 항일투쟁과 뒤이은 피체, 구속, 그리고 감옥생활을 다시 반복하였다. 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구금돼 있었다. 이후 경성 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 의사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 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베이징 헌병대에 다시 체포된 김 의사는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 의사는 일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하 항일투쟁, 이승만 정권에선 반독재투쟁

한편 해방 후 김 의사는 1950년 5·10선거에서 경북 안동 갑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일제하 항일투사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김 의사는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다시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백골단 등을 동원해 각종 테러를 자행하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특히 김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죽음이 이승만의 지시로 이뤄졌다고 믿고 응징할 생각도 같이 갖고 있었다. 

1952년 6월 25일, 피난지 부산에서 6·25 기념식 및 북진결의대회가 열렸다. 김 의사와 모의한 유시태는 모자 속에 권총을 숨긴 채 행사장에 들어거 이승만 대통령 저격을 시도하였으나 권총 불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공범' 김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복역 만7년 10개월만인 1960년 4월 28일 석방되었고, 두 달 뒤인 6월 25일 특별사면 되었다. 김 의사는 1966년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경북 예천 선영에 마련됐다.

4.19혁명 당시 고교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가 평생 ‘동지’라고 부른 아내 권애라 여사 역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 여사는 개성 호수돈여학교 재학 중 3·1의거에 참가,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 후 이화학당을 졸업 후 상하이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93년에 타계한 권 여사는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다.

한편 김 의사는 뚜렷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이승만대통령 암살미수사건’ 전과 때문인데, 관련 규정에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 받을 수 없다’고 돼 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씨는 생전에 “부친의 이승만 전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라고 필자에게 밝힌 바 있다.

일제 때는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하다가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냈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다시 근 8년을 감옥에서 보낸 김시현 의사. 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은 곡절 많은 우리 현대사의 한 봉우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한 실정이다. 실정법의 틀에 갇혀 한 치의 노력은커녕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게 우리 정부당국의 오랜 버릇이다. 이제 그의 고난과 역경의 삶을 기록하려는 사람도 없다. 낯선 이름이 돼버린 그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다. 그의 이야기는 다만 시리고 아픈 개인사로만 구전(口傳)돼 통한과 울분을 자아낼 뿐이다.

【대한민국정부 출범이후~2020年헌정사상 가장중요한 사건】
●내용:
[인성환*김성호*허정욱*최승권*정다운*단경수*유금순]일당은
일제시대[일본국을 국가]라 주장하고 인정하라고,
일제시대[순사]를 주장하고 인정하라며,
일제시대[일본천황의 왕권정치]를 해야된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을 추행하는 강력범죄조직입니다. -이상-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분은 가까운군부대나 국방부[군법원]
국가보훈처 [감사원] 금융감독원 보건소나 식품의약품안전청
대법원이나 가까운지방법원에 문의하시거나 헌법재판소
가까운지방정부 시*군*구청에 문의 또는 삼성그룹전계열사
각사업장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끝=

◇작성자 : 위대한국민(달롱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