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현대

자유인 2006. 9. 28. 17:51

암행어사제도의 탄생 배경

 

 

  어릴 적 춘향전에서 읽었던 이몽룡의 극적인 암행어사 출도! 암행어사의 출도로 모든 상황이 역전되고 가슴이 후련해진다. 옥에 갇혔던 억울한 백성은 풀려나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던 탐관오리는 옥에 갇히게 되고... 더욱이 TV사극에 등장하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는 늘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마감된다. 하지만 조선의 암행어사가 늘 그렇게 해피엔딩을 가져다 주었을까?

  조선왕조가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전국 8도와 부, 목, 군, 현 등 334개 구역으로 파견된 지방 관리들에 대한 감독과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완책이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관리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던 최우선적인 원인은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것이었지만, 전국의 지방을 감독, 감시할 만큼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발달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둘째는, 세종 때에 제정된 악법인 '금부민고소' 즉 역모사건이나 살인과 관련된 사건 이외에는 백성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한 법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은 백성의 보호보다 엄격한 신분제도의 확립을 더 중시한 사대부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법은 결과적으로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악법이었고, 당시 이 법에 대한 비판이 일자 세종 임금은 "어사나 내관의 파견으로 지방수령들을 감독, 감시할 수 있음로 백성들은 수령을 고소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이법의 폐지여론을 거부헀다. 그러나 실제로 암행어사가 파견된 것은 조선 중기인 중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왕조 초기만 해도 신권이 왕권을 다소 압도한 시기였으므로 지방 수령들의 통제까지 손을 뻗을 만큼 왕권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암행어사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방 관리들의 횡포를 감시하기 위한 암행어사 제도는 영조 때의 전설적인 암행어사 박문수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도 했고, 정조 때는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활약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한 채 부분적이고 부정기적인 부정척결에 그쳤던 암행어사 제도로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황해도 현감이었던 신붕년은 암행어사 출도를 하자, 관청의 문을 열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처럼 암행어사 출도를 전혀 겁내지 않는 현감들이 있었는가 하면, 암행어사를 매수하는 지방수령도 있었고, 심지어는 암행어사에게 역으로 으름장을 놓는 지방수령도 있었다. 이렇듯 암행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극심했던 당쟁의 역기능과 중앙정부에 만연된 부정부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암행어사가 지방수령의 비리를 적발해도 같은 당파인 경우는 당파의 결속을 위해 사건을 축소하거나 눈감아 주라는 당파 전체의 압력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명백한 비리의 증거를 확보하고 처벌하려는 의지를 가졌다 해도, 지방수령이 중앙정부의 실력자와 줄을 대로 있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앙의 권력자들이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집단적인 부패의 고리가 워낙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암행어사가 섣불리 이들의 비리에 손을 댔다가는 자신의 안전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암행어사 제도는 부정부패의 해결에 있어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변해갔고, 심지어는 정적 제거를 위해 악용되는 폐단까지 생겨났다. 특히 개혁군주였던 정조 사후로는 지방수령의 횡포에 대해 암행어사를 통한 해결에 기대하지 않게 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려고 들었다. 이로써 암행어사 제도는 완전히 무용지물로 전락했고 고종 때 암행어사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완전 폐지되고 만다.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한 채,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생겨난 좃너의 암행어사 제도는 사실상 절대로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해답이 아니었음을 그 결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잠깐 짚고 넘어가기 - 마패는 암행어사의 상징이 아니다.

 

TV사극을 통해 마패가 암행어사의 신분을 확인시켜주는 징표였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마패는 암행어사의 신분증이 아니었다. 마패는 공적인 업무로 출장을 가는 관리들이 역마를 사용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역마 사용권이었다. 관리들은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숫자만큼 역마를 이용할 수 있었다. 왕이 직접 내려주는 봉서가 암행어사의 임명장이었는데 겉표지에 '到南大門外開坼(남대문밖에 도착해 열어 보라)'이라고 씌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을 벗어난 후 봉서를 보도록 함으로써 암행어사의 임무와 암행지역이 사전 누설되지 않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04(1509년)/11/09]

이손(李蓀)은 아뢰기를,
"암행의 법은 성종조에 조익정(趙益貞)이 처음으로 아뢰어 행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는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다 검찰하는 법이니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