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5. 9. 22. 15:11

지난 편에서는 에브로(Ebro) 강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군과 대치하던 스페인의 3개 야전군이 나폴레옹의 공세 앞에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는 분명히 프랑스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투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으나, 그 결과는 과거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나 독일, 폴란드에서 보여준 전과에 비해서는 좀 급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적군을 단순히 패퇴시키는 것과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스페인 3개 야전군은 모두 궤멸을 피해 도주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투델라 전투에서 패퇴한 아라곤(Aragon) 군은 사라고사 포위전에 참전하여 몇개월 뒤 프랑스군에게 큰 시련을 줍니다.  같은 투델라 전투에서 별 전투도 없이 슬그머니 도주에 성공한 카스타뇨스(Castanos)의 안달루시아(Andalucia) 군은 일단 마드리드를 향해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도 바로 그 뒤를 쫓아 마드리드를 향합니다.






(부르고스에서 마드리드로 가려면 저 붉은색 지점 표시가 되어 있는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통해야만 합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부르고스에서 11월 22일에 출발하여 1주일만인 11월 29일에 소모시에라 입구에 도착합니다.)




(Anton Balazh 라는 그래픽 아티스트가 지구 지형을 과장시켜(해발고도를 15배로 뻥튀기) 해서 만든 지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스페인 중부를 가로지르는 과다라마 산맥이 한눈에 보입니다.  멋진 그림 소개해주신 bluewing님 감솨요.)


기세등등한 나폴레옹과 마드리드 사이에는 큰 방해가 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딱 하나,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들로 이루어진 과다라마(Sierra de Guadarrama) 산맥이 나폴레옹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지요.  당연히 이 산맥에도 통과할 수 있는 고갯길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북동부의 주요 도시인 부르고스(Burgos)와 마드리드 사이에는 오래된 대로가 있었는데, 그 길은 이 산맥을 소모시에라(Somosierra) 고개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갯길도 정상은 1400m 정도로 만만치 않았으나, 다만 경사가 완만해서 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평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약 3km의 좁은 길이 굽이치고 있었고요.

스페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낙오자를 내며 투델라에서 후퇴해온 스페인군은 마드리드에서 농성해봐야 얼마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투델라 전투 이전부터 와병 중이던 카스타뇨스는 지휘부에서 완전히 빠졌습니다만, 마드리드의 중앙 임시 정부인 훈타(junta)에서는 수천명의 병력을 보내 이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 지휘관으로는 산 후안(Benito de San Juan) 장군을 보냈습니다.  산 후안의 군대는 마드리드로 후퇴해온 정규군과 새로 모집한 신병, 그리고 주변에서 애국심 하나로 몰려온 자원병 등으로 이루어진 9천명 규모였는데, 전체적인 군기가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신이 내려준 든든한 보루인 소모시에라가 있었고, 그 위에 마드리드에서 가져온 16문의 대포가 있었습니다.  





(이건 사실 당시 소모시에라에 배치되었던 4파운드 포가 아니라 6파운드 포이고, 그나마 모형에 불과합니다.  4파운드 포는 당시 대포 중에서 가장 작은 구경이었습니다.)



16문의 대포 자체도 그다지 약한 포병 화력은 아니었습니다.  포병 연대 하나를 구성할 만한 전력이었지요.  특히 좁은 산길에서 16문의 대포에서 쏟아내는 포도탄(grapeshot)은 정말 사단 병력도 틀어 막을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고갯길에서 나폴레옹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길이 너무 좁아 포대를 넓게 설치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군은 어쩔 수 없이 2문씩으로 구성된 3개 포대를 고갯길의 굽이치는 곳마다 배치했고, 나머지 10문은 일종의 예비대로 고갯길 정상에 배치해두었습니다.  참호를 파고 흙을 쌓아 만든 나름대로의 보루로 보호된 각 포대는 약 4~500m 씩 떨어져 있었고, 당연히 주변에는 보병들을 배치하여 포병들을 엄호했습니다.  그러나 정규 전열 보병이 싸우기에는 장소가 너무 좁다고 생각되었는지, 이렇게 포병을 엄호하기 위해 배치된 약 3천~4천의 보병들은 주로 자원병 및 민병대들이었고, 정규 보병은 소모시에라와 마드리드 사이의 도로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단단히 한 스페인군 방어진 앞에 프랑스군 선발대가 나타난 것은 11월 29일이었습니다.  빅토르의 제1군단 및 베시에르의 황실 근위대를 데리고 부르고스(Burgos)에서 출발한 나폴레옹은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약 1~2만의 스페인군이 지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갯길 입구를 지키고 있던 스페인군의 전초 진지는 근위 기병들이 간단히 유린하여 지키고 있던 약 3백명의 스페인군을 쫓아버렸으나, 고갯길 정상 부근의 포대는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근위 기병대가 근처까지 올라가 보았으나, 화려한 기병들이라고 보루 속에 자리를 잡은 대포들이 뿜어대는 캐니스터탄의 세례를 뚫고 돌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군 포로로부터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지키고 있는 스페인군의 구성과 배치 현황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장애물이라는 점은 확실했으나, 그는 스페인군을 얕보고 있었고, 다음날 자신이 보병 연대들과 함께 도착하면 간단히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음날 7시에 화려한 군복을 입고 멋진 콧수염을 기른 프랑스 정예 보병 연대들이 도착하여 나폴레옹 관전 하에 8시부터 진격을 시작했으나, 확실히 지형의 유리함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일단 당시의 정석대로 보병들이 전열을 이루어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좁은 산길을 따라 전진하자면 필연적으로 긴 종대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종대는 고지 위의 스페인군 대포들의 밥이 되기 딱 좋았습니다.  스페인군이 배치해 놓은 대포는 비록 오렌지보다 조금 더 큰 4파운드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는 작은 경포에 불과했으나, 속이 쇳덩어리로 꽉 찬 4파운드짜리 포탄이 긴 보병 대오의 정면을 강타할 경우 한방에 십여명을 피떡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전열 보병이 아닌, 산개 대열로 싸우는 유격병들을 올려 보내야 했습니다.  묵직한 보병 대오의 돌격이 아닌, 이렇게 딱콩딱콩 총을 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유격병들로 유리한 고지에 진지를 파고 자리 잡은 적을 몰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사격을 주고 받는 동안 스페인 대포알은 차곡차곡 프랑스 유격병들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페인군의 깜찍한 4파운드짜리 대포알은 이 전투를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폴레옹이 서있는 근처까지 날아와 그 참모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던 나폴레옹은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일 전투 현장에 있었던 필립 드 세귀르 (Philippe de Segur) 소령의 시점으로 당일 전투를 보시지요.   아래 site에 실린 드 세귀르 소령의 수기의 일부를 제맘대로 약간 변형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virtual/c_somosierra.html


-----------------------------------------------------------------------------

황제께서는 몽브렁(Montbrun) 장군과 베르티에(Berthier) 장군의 부관인 피레(Pire) 대령을 불러 자신의 친위대 소속인 폴란드 경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 돌격은 스페인 포병과 보병의 집중 사격으로 인해, 시작하자마자 돈좌되고 말았다.  피레 대령이 돌아와 기병으로 이 고갯길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황제께서는 그만 폭발하시고 말았다.  황제께서는 말 안장 머리를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셨다.  "뭣이라 ?  불가능하다고 ?  난 그런 단어는 모른다네 !  내 폴란드 기병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어 !"  근위대 지휘관인 왈데(Walther) 장군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그의 근위 보병들이 고갯길 양쪽의 가파른 경사면 양쪽을 기어오르고 있으니 곧 스페인 방어진의 측면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언을 드렸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이 진언을 무시하시며 계속 화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셨다.  "말도 안돼 !  뭐라고 ?  내 근위병들이 농부놈들에게 막혀 전진을 못해 ? 저 무장 강도놈들에게 ?"  황제께서는 곁에 서있던 나를 돌아보시며 명령하셨다.  "즉시 가서 내 폴란드 기병들에게 돌격을 명하게.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포로로 데려오라고 해 !"

나는 바위 뒤편에 모여 있던 폴란드 기병들에게 가서 그 지휘관인 코르지에툴스키(Korjietulski)를 찾았다.  "폐하께서 돌격을 명하시네.  그것도 당장."  마침 곁에 있던 몽브렁 장군은 내 말을 듣고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두손을 번쩍 들어올려보이며 눈을 치켜떴지만, 감히 황제의 명령에 토를 달지는 못했다.  그러나 피레 대령은 좀더 거침이 없었다.  "그건 불가능하다니까 !"  나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말씀은 이미 폐하께도 드렸지만, 들으려 하질 않으십니다."  피레 대령도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좋아, 와서 직접 보라고.  지옥불로 단련된 악마 본인이 와도 저 속에서 버틸 수는 없어 !"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위 뒤의 엄폐에서 걸어나와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바윗돌이 빽뺵한 계단식 극장 같은 협곡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리켰다.  그 정상에는 16문의 대포가 왕관처럼 자리잡고 있었고 20개 보병 대대가 협곡 위쪽의 정면과 측면에서 머스켓 사격을 해대고 있었는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협곡을 따라 나있는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 외에는없었다.  

"상관없습니다."  나는 외쳤다.  "폐하께서 저기 계시고 저것들을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중대장, 가세.  잘 될 거야.  소대별로 진격한다, 전진 ~!"

내가 칼집에서 군도를 뽑아들자마자, 폴란드 기병들은 종대를 이루어 돌격을 시작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질주했는데, 나는 최전방 약 10마보 정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자세로 함성을 지르며 달렸다.  이 함성은 곧 터져나온 적군의 사격과 그로 인해 내 주변을 휙휙 지나가는 총알과 포도탄을 좀 잊어보기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  우리의 돌격 속도가 대단했기 때문에, 난 우리의 용감성에 놀라 적군의 조준이 흔들릴 거라고 살짝 기대했다.  그들의 대포와 총검 사이에 뛰어들어 난장판을 만들어놓을 시간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다 헛된 희망이었다.  적군의 조준이 너무 정확했던 것이다 !  말발굽이 일으키는 소음과 수많은 총 소리에도 불구하고 난 내 뒤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말과 병사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난 패배를 직감했다.  호기에 찼던 우리의 함성 소리는 쓰러진 폴란드 기병들의 비명 소리에 묻힌지 오래였다.  난 감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내 뒤의 참상을 보게 되면 이대로 주저 앉을까봐 겁이 나서였다.   나와 내 말도 여러번 총에 맞은 상태였다.  

적의 보루에 30마보 정도 접근했을 때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난 우리의 우측 골짜기 뒤에 비스듬한 사선으로 배치된 적 보병 2개 대대를 지나쳤다.  내 기억에 이름이 루돌프스키(Rudowski)였던 장교 하나만 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 친구도 다른 기병대원들처럼 엄청난 거구였다.  그는 아직 말에서 떨어지진 않았으나 이미 반쯤 죽을 정도로 부상을 당한 상태라서 비틀거리고 있어서 언제 낙마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닌 말을 돌려 보려 했으나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내 말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스페인 병사들이 나를 붙잡으려 승리의 환호를 지르며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난 땅 위에 뛰어내려 젖먹던 힘까지 내보려 했다.  기병 중대 거의 전체가 길 위에 즐비하게 뻗어 있었다.  총 6명의 장교 중 3명은 이미 죽었거나 치명적 부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었고, 다른 3명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40명의 부사관과 창기병들이 죽거나 길 위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12명은 부상을 입었으나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20명만 부상을 입지 않고 멀쩡했는데, 이들은 부상 입은 동료들을 부축해서 후퇴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남은 것은 어린 나팔수 한 명 뿐이었다.  이 불쌍한 아이는 총알이 빗발치는 한복판에 그냥 서있었는데, 그의 중대원들이 당한 참변 때문에 울고 있었다.

-----------------------------------------------------------------------------


드 세귀르 소령에 따르면 이 돌격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 돌격에 스페인군이 정신이 팔린 사이 프랑스 보병들이 스페인군의 대포를 내려다보는 정상을 측면으로 기어올랐고, 또 폴란드 경기병들과 근위 기병대들을 올려 보냈기 때문에 결국 이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담은 매우 부적절한 것입니다.  가짜거든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많은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돌격을 주도했던 것은 드 세귀르 소령의 수기에도 이름이 Korjietulski라고 '잠깐' 등장하는 기병 중대 지휘관 얀 코지에툴스키 (Jan Kozietulski)입니다.  드 세귀르 소령도 11월 30일 아침에 소모시에라에서 부상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이 양반은 이 유명한 돌격 이전의 정찰 활동 중 부상을 입어서 후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폴레옹 퇴위 이후 씌여진 'Victoires et Conquetes' (승리와 정복)이라는 책이 씌여질 때 공저자로 참가한 드 세귀르 소령이 이 유명한 사건을 자신의 공적으로 슬쩍 바꿔 넣은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인들로부터도 '육군 회보만큼 진실되다'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Bulletin de la Grande Armee 입니다.)




당시의 공식 기록은 어땠을까요 ?  당시의 공식 자료인 프랑스 육군 회보 (Bulletin de la Grande Armee)에는 전혀 엉뚱하게도 몽브렁(Louis-Pierre Montbrun) 장군이 이 돌격을 지휘한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병대의 최고 지휘관이 몽브렁 장군이있으니 회보 작성자가 그냥 그렇게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몽브렁 장군 본인은 그렇게 보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드 세귀르 소령은 당시 현장에 직접 있었던 사람들과 당일 접촉이 있었을 것이므로, 저 생생한 전투 묘사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가령 드 세귀르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스페인군의 16문의 대포는 모두 하나의 진지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증언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4문씩 4개 포대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고도 했지요.  이렇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역사의 기록은 왜곡되고 부정확하기 쉽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써놓은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서로간의 이야기가 다르다보니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프랑스 제3 공화국의 대통령까지 역임한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조차도 이 돌격은 몽브렁 장군이 주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제가 많이 참조하는 미국인 역사가 슬로안(Sloan)의 나폴레옹 전기에 따르면 이날 소모시에라에서 폴란드 기병대가 자욱한 안개를 틈타 기습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 포병들은 고작 1방을 쏠 시간 밖에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꼭 그랬던 것 같지 않습니다.




(역사학자가 대통령이 되다 !  아돌프 티에르의 사진입니다.)



위키와 http://www.napolun.com 등 몇몇 사이트에 소개된 스토리를 종합하면 대략 이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보병을 측면으로 올려보냈고, 그 진격이 지지부진하자 그 전황을 경기병에 의한 돌격이라는 의외의 수단으로 돌파해보려고 결심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말이 많습니다.  애초에 그런 좁은 산길을, 그것도 이미 기습 효과가 사라져 적의 포병들이 조준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병들을 줄지어 올려보내는 것은 부하들을 사형대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실제로 이 돌격에 참여한 기병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초 당시 전술에 대해 나폴레옹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나폴레옹이 알아서 잘 했겠지요.  어쩌면 당시 안개가 자욱했다는 점을 나폴레옹이 노렸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계곡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50보 밖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거듭된 포격과 사격으로 흑색 화약 연기까지 가득찬 상황이었으므로 최소한 연막 효과가 있었으므로 어쩌면 기병들의 과감한 돌격이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돌격은 많은 희생자를 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좁은 산길로 기병대를 돌격시키는 것은 대포알이 빗나갈래야 빗나갈 수 없는 과녁을 들이미는 것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왜 하필 폴란드 경기병대를 콕 찍어서 올려보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르막 비탈길을 잽싸게 올라가려면 덩치 큰 흉갑기병(curassier)이나 총기병(dragoon)이 아닌 작고 날랜 말을 탄 경기병(husaar)이 제격이었는데, 폴란드 경기병들은 중세 시대부터 유명했으니까요.  하지만 알고 보면 경기병이니 엽기병(Chasseurs-a-Cheval)이니 하는 구분은 19세기 초반이 되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구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폴란드 경기병들 외에도 근위 엽기병들이 있었고, 이들 장비의 차이점은 군복과 안장 장식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굳이 경기병이라고 폴란드인들을 콕 찍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 폴란드 기병들은 뛰어난 승마 솜씨로 유명하기는 했습니다만, 폴란드인들이 뭐 몽골 기병도 아닌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탄 것도 아니었고, 또 나폴레옹이 애지중지하던 근위 엽기병들도 당연히 말을 잘 탔기 때문에 근위대로 뽑힌 고수들이었습니다.




(경기병은 그 화려한 군복 때문에 겉멋이 든 많은 귀족 자제들이 가장 선호하는 병과였습니다.)



그것보다는 이 폴란드 기병들은 바로 작년에 근위대에 들어온, 근위대 중에서는 가장 값싼 미숙련 병사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대부분의 병사들이 프랑스어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라는 점도요.  그리고 당시 나폴레옹이 생각하고 있던 기병 돌격은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병들 중에서 이 수백명의 폴란드인들은 가장 싸게 먹히는 대포밥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나폴레옹이 폴란드인에게 돌격을 명한 것은 그들이 피떡이 되어 흩어져도 가장 덜 아까운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나폴레옹이 거느렸던 군대에는 프랑스군 외에도 라인 연방 소속의 독일인 부대와 이탈리아 왕국의 이탈리아인들, 폴란드인들, 심지어 이집트 출신의 마멜룩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폴레옹이 폴란드인들을 좀더 특별히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수세에 몰렸던 1813년 말, 군수품 공급이 딸렸던 나폴레옹은 최후의 수단으로 독일 및 이탈리아 등 소위 동맹국 병사들의 무장 해제를 지시했는데, 이때도 폴란드군은 무장 해제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는 폴란드인들의 충성심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러시아,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인들이 프랑스군에서 복무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조국이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완전 멸망한지 2년 뒤인 1797년부터였습니다.  이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혁명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로 모여든 젊은이들 수천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파리에 일종의 폴란드 망명 정부 같은 조직이 있었는데, 이 조직을 이끌던 폴란드 망명 귀족 다브로프스키(Jan Henryk Dabrowski)가 프랑스 총재정부를 설득하여 이들을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군사 조직으로 편성한 것이 1797년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점령 지역인 북부 이탈리아에서 보나파르트와 인연을 처음 맺었습니다.  이때는 철천지 원수인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으므로 폴란드군의 사기는 높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지휘 하에 연전연승했으니 더욱 그랬겠지요.  그러나 제1,2차 대불동맹전쟁이 모두 프랑스의 승전으로 끝나고도 폴란드의 독립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서, 자유 폴란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자신들이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제2차 대불동맹전쟁 당시 로마에 입성하는 자유 폴란드군의 다브로프스키 장군입니다.  이때가 자유 폴란드군의 전성기였지요.)



이런 생각은 나폴레옹이 1802년 잔존 폴란드군을 카리브해의 생 도밍그(Saint Domingue, 오늘의 아이티)로 보내면서 극에 달합니다.  전에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당시 생 도밍그는 생-투베르튀르가 지휘하는 노예 반란이 한창이었는데, 그를 진압하라고 자유 폴란드군을 보낸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들과 함께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던 부대들을 골라 생 도밍그로 보냅니다.  당시 카리브 해는 총알보다 치명적인 황열병의 위세가 대단했으니까요.  다른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폴란드인들을, 자유를 위해 싸우는 흑인 노예 진압을 위해 보내다니 이건 해도 너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갈 곳이 없었던 폴란드군 5천여명은 카리브해로 가야 했고, 여기서 이들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전투로도 많은 수가 죽었지만 황열병 때문에 더 많은 수가 죽었고, 결국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400~500명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폴란드 독립을 위해 총을 들었던 제1차 자유 폴란드군은 사실상 해체되고 맙니다.

그러나 결국 제3차 대불동맹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프랑스는 폴란드의 적국들과 총검을 맞대게 되었고, 폴란드인들은 다시 프랑스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1807년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폴란드로 진입한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주며 폴란드인들의 독립 의지를 절반 정도만 채워줍니다.  대신 많은 젊은이들을 병정으로 끌고 가고, 또 프로이센에게서 전쟁 배상금으로 받은 불량 채권을 폴란드인들에게 떠넘겨 현금까지 강탈해가지요.  나폴레옹에게 폴란드는 프랑스말고는 달리 선택할 동맹이 없는, 궁지에 몰린 약소국이라서 마음 놓고 이용해 먹을 대상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생 도밍그에서 서로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불쌍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장면입니다.  저 폴란드군의 독특한 모자는 쉽게 알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사정이 있다보니, 1808년 11월 30일 나폴레옹을 따라 소모시에라 고갯길 앞에 선 폴란드 기병들은 제1, 2차 대불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고참병들이 아니라 1년전에 프랑스군에 편입된, 비교적 신병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이 떠밀려, 자신들처럼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스페인군의 총과 대포가 기다리는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향해 돌격을 해야 했습니다.  드 세귀르 소령의 주장과는 달리, 이 죽음의 돌격을 지휘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코지에툴스키 대위였습니다.  이 양반은 당시 27세의 젊은 귀족 청년이었는데, 나폴레옹으로부터 이 자살 명령이나 다름없는 돌격 명령을 받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심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는 돌격하면서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합니다.

"En avant, Vive l'Empereur!"  (전진하라 !  황제 폐하 만세 !)

그러나 실제로는 폴란드어로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Naprzod psiekrwie, Cesarz patrzy"  (돌격해라 개새끼들아, 황제가 보고 있쟎냐 !)

그리고 이들이 나폴레옹 앞을 지나갈 때, 나폴레옹은 이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도 전해지지요.

"Polonais, prenez moi ces canons !"  (폴란드인들아, 내게 저 대포들을 갖다 주게 !)






(Vive l'Empereur!  이 그림은 소모시에라가 아니라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의 것입니다.)




이 돌격은 드 세귀르 소령의 소설처럼 엄청난 피해를 폴란드 기병들에게 안겨다 줍니다.  폴란드 기병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리던 스페인 포병들은 대포알을 이들에게 선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대참사였습니다.  4열 종대로 달리던 이들의 선두는 말과 사람 구분없이 당연히 피떡이 되어 쓰러졌고, 뒤따르던 폴란드 기병들은 어쩔 수 없이 본능적으로 멈춰섰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물쭈물 해봐야 더 많은 포탄과 총알을 뒤집어 쓸 뿐이었지요.  곧 장교들의 호통과 독려를 받아가며 다시 돌격을 시작한 이들이 더 가까이 가자, 스페인 보병들의 머스켓 탄환들도 날아오기 시작했고, 더 많은 병사들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픽픽 쓰러졌습니다.  당시 대포는 아무리 빨라도 재장전과 발사에 2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오르막길이라도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3~400 m의 거리는 2분 안에 돌파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 전에 스페인 포병들이 몇발이나 더 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곧 폴란드 기병들이 보루를 뛰어 넘어 포대로 난입했고, 이들은 포병들에게 분노의 칼탕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포로는 잡지 않았는데, 기병들이 뛰어들자 용기를 잃고 개미새끼처럼 흩어진 민병대들과는 달리, 정규병이었던 포병들은 장전봉을 휘두르며 맹렬히 저항했다고 하니 어차피 항복할 의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120명 정도 밖에 안되는 기병 돌격에 스페인 보병들이 흩어진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안개와 화약 연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몰려온 것인지 몰랐다는 설도 있고, 그게 아니라 프랑스 보병들이 뒤를 이어 몰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소모시에라 전투의 모습입니다.  Lejeune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은 '포대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구두 명령이 하나의 포대였는지 4개 포대 전체를 뜻하는 것이었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1개 포대만 점령하면 되나요' 라고 황제에게 되묻는 것은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고, 또 막상 첫번째 포대를 점령하고 보니 나폴레옹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각 포대들이 대포 사정거리인 약 4~500m 씩 떨어져 있다보니, 첫번째 포대가 점령당한 것을 보고 저 위에서 내려다보던 두번쨰 포대가 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포대를 점령한답시고 거기 주저 앉아 있을 경우 결국 대포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폴란드 기병대는 사상자가 너무 많아 소대별 편성이 의미가 없어진 상태였으나, 뒤를 이어 올라온 니골레프스키(Andrzej Niegolewski) 중위의 기병 소대와 함께 숨돌릴 틈도 없이 다시 두번째 포대를 향해 돌격해야 했습니다.





(소모시에라 전투도입니다.  십자가를 들이댄 스페인 신부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Suchodolski 작입니다.)



이 두번째 돌격에서도 폴란드 기병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습니다.  전체 지휘관이었던 코지에툴스키 대위도 여기서 머스켓 총탄을 얻어맞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코지에툴스키는 다행히 죽지 않고 부상만 입었는데, 여기서 낙마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습니다.  여기서 죽지 않았다면 3번째 또는 4번째 포대로 계속 돌격하다가 결국 죽었을테니까요.  코지에툴스키 대위가 쓰러지자 제파노프스키(Dziewanowski) 대위가 뒤를 이어 돌격을 지휘했고, 결국 2번째 포대도 점령에 성공합니다.


3번째 포대를 향해 돌격할 때는 사람도 말도 녹초가 된 상태였을텐데, 이때쯤 해서는 폴란드 기병들이 거의 광분 상태였는지 환호성을 올리며 돌격했다고 합니다.  이 돌격에서 한 장교는 적 포탄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수박처럼 터져버렸고, 제파노프스키 중위도 다리에 총탄을 맞고 낙마하여 팔까지 부러지는 중상을 입습니다.  여기서도 비정규직이었던 스페인 민병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도주했으나, 정규직이었던 포병들은 대포를 지키려 끝까지 저항했다고 합니다.  원래 기/포/보병 중에서 포병대원들의 급료가 제일 많았고, 그에 따라 긍지도 가장 높았다고 하는데, 그것과도 상관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Michałowski 작의 소모시에라입니다.)



고갯길 정상에 있던 마지막 예비 포대로 돌격해들어갈 때는 두번째 포대로의 돌격 때부터 합류한 니골레프스키 중위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결국 4번쨰 포대에 난입하여 끝까지 저항하는 포병들을 난도질하여 제압한 뒤, 비로소 뒤를 돌아본 네골로프스키 중위는 뒤에 있던 소콜로프스키 중사에게 '우리 애들은 다 어디에 있나 ?'라고 물었고, '다 죽었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영화라면 이제 배경 음악 깔리면서 자막이 올라가야 하는데, 전쟁은 영화가 아니다보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페인군은 주력을 오르막길이 아닌 능선 너머에 예비대로 배치해두고 있었습니다.  곧 스페인 보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고, 네골로프스키 중위의 말도 여기서 총에 맞고 쓰러집니다.  그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저항했던 모양인데, 그렇게 버둥거리는 네골로프스키 중위에게 스페인군은 머리에 총을 두방 쏘고 총검으로 5번 이상 찔렀습니다.  스페인군은 몇 안되는 잔존 폴란드 기병들을 쫓아버리고 4번쨰 포대를 탈환한 뒤 피투성이가 된 네골로프스키 중위의 주머니에 금시계나 은화가 없는지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도 Suchodolski 작의 소모시에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첫번째 포대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역시 내 작전이 먹혔어'라고 자화자찬을 하며 아껴 두었던 근위 엽기병(Chasseurs-a-Cheval) 등 후속 부대를 투입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폴란드 기병들이 자신들의 피로 닦아 놓은 3번째 포대까지 일사천리로 올라온 뒤, 마지막 4번째 포대가 재점령 당했다는 말을 쫓겨내려온 폴란드 기병들에게 전해듣고 다시 돌격, 최종적으로 재점령했습니다.  이때 스페인군의 대포는 침묵을 지켜 프랑스 기병들의 돌격을 쉽게 해줬는데, 이유는 대포를 쏠 포병들이 방금 전 전투에서 폴란드 기병들에게 다 살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어 프랑스 보병들도 정상에 올라와 점령을 확실히 굳혔습니다.  





(튈르리 궁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나폴레옹의 유명한 초상화지요.  나폴레옹이 입고 있는 군복이 근위 엽기병 Chasseurs-a-Cheval 연대유니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근위 척탄보병의 군복이네요.  Davout 님의 정정 고맙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정상에 곧 올라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 기병대원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에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올라온 정상에는 네골로프스키 중위가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  군의관에게 응급처치를 받던 그를 보고 나폴레옹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가슴에 달려있던 레종도뇌르 훈장을 떼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네골로프스키 중위는 부상이 너무 심했는지 이후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았고, 비록 프로이센 치하로 되돌아간 신세이긴 했으나 고향에서 70세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습니다.  

고지로 돌격한 폴란드 기병대의 수는 처음에는 125명, 나중에 합류한 기병들까지 합하면 400명이 넘었습니다.  당연히 피해는 처음 돌격한 125명 중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57명, 어떤 기록에는 1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고 합니다.  저 위에 묘사된 것에 따르면 막판엔 네골로프스키 중위와 소콜로프스키 중사 2명만 살아남은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그건 확실히 과장된 묘사이고, 또 드 세귀르 소령의 수기에서처럼 도중에 부상한 동료들을 부축하여 도로 산길을 내려간 병사들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들의 업적과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 '너희가 내 그랑 다르메 중에 가장 용감한 기병대다 !'라고 구두로 칭찬을 했을 뿐 아니라, 근위대 중 전체 폴란드 병사들을 모두 고참 근위대 (Vieille Garde, 영어로는 Old Guard)로 승진시켜주었습니다.  원래 근위대에 들어오는 것도 어려웠지만, 어떤 병사라도 시작은 반드시 신참 근위대(Jeune Garde, Young Guard)부터 시작하여 중간 근위대(Moyenne Garde, Middle Guard)를 거친 뒤에야 고참 근위대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1계급도 아니고 2계급을 특진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또한 나폴레옹은 다른 근위대로 하여금 이 돌격에 참여했던 폴란드 경기병대가 부대 단위로 지나갈 경우 부대 단위의 경례를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양반이 소모시에라의 영웅이자 훗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하는 코지에툴스키입니다.)



결국 소모시에라 전투의 영웅은 누구였을까요 ?  첫번째 돌격을 주도한 코지에툴스키 대위를 그 주인공으로 뽑는 것이 정설입니다.  특히 이 젊은 폴란드 귀족 청년은 나중에 러시아 원정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에게 달려드는 코작 기병을 막아내어 나폴레옹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때 코작 기병의 창에 부상을 입어 흘린 피가 묻어 있는 그의 군복은 오늘날에도 바르샤바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글쎄요, 이 소모시에라 전투에서 영웅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  나폴레옹이라는 야망가의 욕망에 희생된 피해자들만 잔뜩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돌격이 있은지 2일 뒤, 나폴레옹의 사령부로 부임하는 길이던 젊은 폴란드 귀족 장교 클라포프스키 (Dezydery Chłapowski)가 나폴레옹의 뒤를 따라 이 소모시에라 고갯길을 넘을 때, 아직도 길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폴란드 기병대의 참혹한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라티스본 전투에서 부상당한 나폴레옹의 맨 오른쪽, 터번을 쓴 시종 루스탐 오른쪽에 등을 보이고 서있는 폴란드 창기병이 클라포프스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관문을 넘은 나폴레옹은 거침없이 마드리드로 질주했고, 불과 하루만인 12월 1일에 이미 프랑스군의 선두 부대가 마드리드 외곽을 정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나폴레옹이 본대와 함께 마드리드 성문 앞에 당도했고, 곧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봉기의 기억이 생생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태세였으나, 정작 군인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항복 협상이 진행되던 12월 3일날 밤 마드리드 수비군은 프랑스군이 지키지 않는 쪽 성문을 통해 카스텔라 (Castellar) 장군의 지휘 하에 슬그머니 철수해 버렸습니다.  마드리드는 결국 다음날인 12월 4일 오전 10시, 모를라(Morla) 장군과 드 베라(Don de Vera) 장군이 나폴레옹 근위대 사령관 베시에르 장군의 막사로 나와 항복하면서 함락됩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스페인 임시 정부 측에 '너희들을 2개월 안에 정복해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친 바 있었는데, 불과 1개월이 약간 지난 뒤에 이미 마드리드가 함락되어 버렸니다.  이것으로 스페인에서 정규군과의 전투는 끝이었을까요 ?




(마드리드의 항복 장면입니다.  Gros의 그림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마 잊고 계셨을 것 같은데, 약 4개월 전인 7월 말에 포르투갈에 상륙하기 시작한 영국군이 있었습니다.  신트라 협정에 대한 문책 때문에 웰슬리를 포함한 지휘관들은 줄줄이 본국으로 소환되었으나, 그 병력은 오히려 증강되어 약 3만의 군대가 존 무어(Sir John Moore) 장군의 지휘하에 마드리드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제 그가 가장 증오하던 영국군과 충돌 코스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과연 영국군은 바다에서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에 보시지요.


1등!
안녕하세요. 평소에 댓글은 안달고 공감만 열심히 누르는 열성독자? 입니다 ㅎ

갑자기 무슨 용기에선가 그림 설명이 다른거 같아서 댓글을 다네요.

나폴레옹이 튈르리궁에서 찍은? 초상화에서 입은 제복은 근위척탄병연대 제복이 아닌가요?

근위엽기병 제복은 밑에 라티스본 전투에서 입은 옷 같이 보이네요.

설마 제가 모르는 음모? 같은게 있는건 아니겠죠? ㅎ

평소에 다른 글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ㅎ
헐 그렇군요. 저는 사실 유니폼 구분 못 합니다. 찾아보니 blue with white facings and red cuffs 이므로 근위척탄병 제복이 맞답니다. 감탄했습니다. 수정할게요.
이번주엔 안올리셨나 했는데..
잘보고갑니다
영국인들이 도망가거나 방어진지에서 틀어박히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육상(!)에서 수만명이나 제발로 찾아오니 24만명을 가진 우리 황제께서는 정말 행복했겠네요
영국군과 나폴레옹이 지상에서 전투를 치르는 내용은 레미제라블에서 워털루 전투의 서술을 본게 다인지라 다음 글이 너무 기대되네요! 그 당시 전설적이던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와 싸우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홍차 맛은 어땠을지 궁급합니다.ㅎㅎ
예나 지금이나 힘이 있어야 한다는게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딱히 못난것도 없는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틈에 끼여 죽을맛인 현실이 정말 죽을맛이네요.. 오늘도 감사히 잘 봤습니다...^^
폴란드는 2차대전때도 영국에 이용당하더니 프랑스한테도 이용당했군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마벨룩과 맘누크는 다른 의미인가요? 오스만과 오토만 같이 발음만 다른건가요?
어차피 현지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쓰는 말이다보니 마멜룩, 맘룩, 마믈루크 등 표현이야 다양합니다만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저 위에 코지에툴스키의 이름처럼 영문으로도 표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19세기의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서막이군요
한가지 질문 : 이 당시의 선봉을 맞았던 병과는 보병중에는 척탄병들 아니었나요? 유격병이 쓰러 진다고 적혀 있어서 사소한 의문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또하나 질문 : 슬슬 노동법 개정에 대해서 글을 써주실 때가 아닐까 싶어 기대(?)하고 있습니다.
척탄병은 정예 부대라서 아껴서 쓰다가 결정적인 곳에 투입하거나 그랬겠지요. 유격병이 가장 맨 앞 줄에서 서는 것은 맞는데, 사실 그건 줄이 아니라... 낚시로 치자면 미끼로 치지도 않는 '떡밥, 밑밥'에 해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노동법 개정에 대해서는 이미 써놓은,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걸맞는 정부를 가진다' 외에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네요.
폴란드 창기병 묘사하실때는 왠지 강력한 정예병이였는데.. 여기선 그냥 처절하게 선두에서 싸우는 전선돌파용 고기방패군요 -_-;;
그나저나... 요새 너무 나시카님이 많이 달리시는거 같네요... 금방금방 따끈따근한 글 올려주셔서 좋긴 합니다.
아직 미국인데 할 것이 없어서 그래요. 여긴 관광할 곳도 없네요. 심지어는 페북질까지 하게 되더군요.
주변에 State park 이라도 둘러보고 오시지요? .... 가족없이 혼자 둘러보려면 더욱 쓸쓸하려나요?..... 아니면 저가 비행기를 타고 인근 대도시를 주말에 갔다 오는 것은 어떠신지요?
폴란드 창기병은 곡예에 가까운 마상 무예를 구사한다고 들었는데. 과장되었다고는 해도 상당한 공력이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남의 침략 전쟁에 이토록 기꺼이 희생을 치를 수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군기와 명령으로 이루어진다해도 쉽지는 않은거니까요. 나폴레옹의 용병술은 가히 최고의 경지라 할만하네요. 장병들의 충성심을 유도해내는 능력이 발군의 경지입니다. 나시카님 글이 자주 올라와 너무 좋습니다.건강하시고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글 즐감했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드려요.
1808년이면 우리나라로 치면 정조 죽고 8년차 순조시대인데 그때즘 조선은 노론소론붕당이 아마도 프랑스와 스페인전쟁보다 더 치열한 붕당전쟁을 치르고 있었을 시기인데 위에서 보는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오늘 아침에 인쇄되어 나온것 같이 보이는 "육군 회보"라는 대국민 정치선전지가 발행되고 있었다니 역사적 정치적으로 동양과 서양은 참 언발란스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1808년이면 붕당보다는 극소수의 권력 독과점인 세도정치 시기지 않을까요 100년 후 조선의 운명을 보면 둘 다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붕당정쟁보다 권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권력남용의 폐혜가 더 심한 것을 세도정치가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00초에 대한제국의 수모를 100여년 전 유럽에서는 폴란드가 당하는 것을 언급해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미리 불을 지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당했던 대한 제국과 비슷하게(?)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에게 찢기었던 폴란드에 동정이 갑니다..... 항일 투쟁보다 훨씬 오래동안 더욱 많은 폴란드인들이 희생당하였던 것 같은데..... 참으로 지도자가 참으로 중요하군요.....
임진왜란 문경새재도 생각나고..... 만주의 독립군도 떠오르네요..... 폴란드 경제가 그리 좋지 않았을터인데 그렇게 많은 군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군요.... 한편으로는 일본의 통제가 정말 대단했었던 것 같네요..... 아니면 어짜피 착취당하는 농민들에게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지 않았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다분히 정치적 냄새가 풀풀 나는 글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지 않은 댓글이 달린 것도 신기하네요....
폴란드 사람들이 애국심과 힘이 넘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기력했다기 보다는 프랑스는 혼자서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를 이겼을 힘으로 폴란드를 지원 해줬다면 우리나라는 가까운 중국과 러시아가 영 힘을 쓰지 못해 제대로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서로의 차이를 만든 것이라 봅니다. 폴란드도 3차 대분할 이후 나폴레옹이 오기 전까지 지리멸렬하게 저항을 한 것을 보면 결국 우리와 폴란드간에 수준의 차이는 대동소이 했을 것니다. 많은 분들이 모두를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폴란드의 독립은 1차세계대전의 연합국이 도와줬다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러시아가 빌빌대서 한반도 정세에 별 영향을 못 미치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움을 받은 것을 보면 어차피 독립할 거 그간의 노력이 허무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나 폴란드나 자력으로는 독립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국가나 종족들과 달리 폴란드와 우리는 결국 자립을 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도 대세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그 중 안타깝게 실패한 이들과는 달리 우리나 폴란드는 비록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다른 나라들에게 완전히 먹힐정도로 작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결국 일본이나 나폴레옹 전쟁 후 러시아가 우리와 폴란드를 완전히 지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폴란드의 대응이 서로 다를지라도 그 만만치 않은 저력은 서로가 잘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앗 나시카님 이미지 올려주셨넹. ㅎㅎ
멋진 기병대 제복얘기 나오니까 처칠이 생각나네요.
아버지는 돈이 적게 드는 포병대에서 처칠이 근무하길 바랬는데 정작 본인은 말 관리하느라 돈이 많이드는 기병대로 가 버렸다고.... 젊은 시절의 처칠이 어떠했는지 볼 수 있는 단편인 듯.
알렉산더대왕의 2인자였던 에우메네스가 이런 말을 남겼죠

행운은 하찮은 마음의 소유자까지도 높여 주어,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어느 정도 위대하고 위엄 있는 용모를 갖추게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상하고 단호한 정신의 소유자는 스스로를 향상시켜 재앙과 악운의 시기에 더욱 돋보일 것이다.(에우메네스)

[출처] 플루타르코스의 명언|작성자 Quaking Grass

안티고노스에게 처형당하면서 자신 에우메네스는 무적이었으나 바보같은 은방패부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탄하던 것이 불현듯 생각나네요.

히스토리에라는 만화가 에우메네스를 주인공으로 연재중인데 재밌으니 함 보세요
지휘관이 병사들 생명을 너무 경시한 것 같습니다. 뒤쪽으로 보병이 올라가고 있으면 앞에서 시선만 끌어주지 자살돌격을 시키다니... 한니발이라면 부하들 이렇게 희생시키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
나폴레옹 시대 전쟁은 화기가 발달한 시대라 병사의 살상력이 한니발 시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고 그 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산개전투를 할 정도로 개인화기 성능이 좋지도 않았고요. 제가 나폴레옹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고대 전쟁의 장군이랑 비교하시는 건 좀 너무 가혹한(?) 처사 같습니다.ㅎ
기병한테 십자가 들이댄 신부님 그림 보면서 문득 양귀자 선생의 소설(유명한데도 제목이 생각 안 나는...) 한 자락이 생각나네요.

- 교회 신축 중에 다친 인부에게 제대로 보상해달라는 시위에 그 교회의 목사가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