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5. 12. 28. 00:01

지난 편에서는 무어 경의 영국군이 느릿느릿 갈팡질팡하는 사이, 나폴레옹이 독수리처럼 영국군을 향해 달려드는 상황을 보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폴레옹에게 파리로부터 밀린 편지들이 일시에 도착하면서 영국군의 운명을 판가름짓게 됩니다.  그 우편물 속에는 나폴레옹의 충직한 정보원 노릇을 하던 라발레트 공작(Antoine Marie Chamans, comte de Lavalette)과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보아르네(Eugene de Beauharnais)가 보낸 편지들이 있었는데, 내용은 한마디로 오스트리아가 대규모 병력에 동원령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스페인은 어디까지나 유럽 서쪽 낙후된 귀퉁이에 불과했습니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곳은 어디까지나 인구와 돈이 집중된 중부 유럽 무대였지요.  오스트리아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이제 그의 프랑스 제국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한겨울 스페인의 산악 지대에서 무어 경의 영국 원정군을 궤멸시키는 것은 영국에 대한 그의 증오심을 조금 달래주는 정도의 일이었으나, 관록의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한판은 그의 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물어 뜯어봐야 별로 살도 붙어있지 않을 영국군을 포기하고, 파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영국군을 잡기 위해 동원했던 병력 중 상당수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그 뒤를 끝까지 추격하는 임무를 술트의 군단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의아함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이 사건의 발단은 일시적으로 고립된 술트의 군단을 무어가 치겠다고 덤볐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술트의 병력 1만6천보다 영국군의 병력이 훨씬 더 많아서, 영국군은 거의 3만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국군을 술트의 군단 하나만 동원해서 추격한다 ?  이건 아무리 영국군을 얕본다고 해도 너무 심한 불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고, 그런 결정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월 초까지 영국군의 뒤를 추격하면서 매서운 추위 속 척박한 스페인 산악지대에서 그의 휘하 병사들이 얼마나 심한 고생을 하는지 몸소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진격해 들어올 때와는 달리 후퇴 길에서는 군기가 무너져 내려 스페인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대하는데다, 거기에 덧붙여 많은 낙오병이 생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이 12월 31일 그의 형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중이야.  모두가 그들을 혐오하더군.  그들은 주민들을 막 대하고 때리기까지 하는데다, 모든 것을 다 약탈해가거든.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을 가라앉히는데 있어서, 영국군을 투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진정제가 없는 것 같아."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지요.  반대로 말하면 궁해지면 인의고 정의고 나발이고 없다는 뜻입니다.  뒤에도 보시겠습니다만, 영국군에게 염장 쇠고기와 럼주 보급이 딱 끊어지자, 영국군의 군기는 완전히 붕괴되어 스페인 주민들에게는 산적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군의 기록에도, 영국군이 마을에 접근하면 스페인 주민들은 먹을 것을 감춰놓고 모두 숨어버렸고, 그것을 본 영국 병사들은 더욱 화가 나서 스페인 주민들을 마치 적국 주민 다루듯 마구 약탈하고 마을을 파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국군 낙오병들은 이런 프랑스 용기병들이 주워담았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군도로 무자비하게 베어넘겼습니다.  프랑스군도 포로를 잡을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영국군의 뒤를 추격하다보면 영국군 낙오병을 떼거지로 주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굶주림과 피로로 이미 죽어가고 있거나, 반대로 술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병사들과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낙오병은 한겨울에 이들을 추격하느라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 용기병들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습니다.  길가에 널린 여자와 아이들은 대개 그냥 무시되었고, 이들도 대부분 한겨울 황야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은 이미 반쯤 무너져 내린 영국군을 추격하는데는 술트의 군단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너무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보급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산적떼와 거지떼 중간 정도로 전락해버린 영국군이, 후퇴하는 길의 모든 식량을 샅샅이 긁어먹으며 후퇴하고 있다보니,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보급을 현지 약탈에 의존해야 했던 프랑스군은 이미 영국군이 훑고 지나간 길을 뒤따라 가느라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면 더 큰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라이플맨 해리스의 회고록'이라는 책입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전자책을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 표지에 그려진 저런 사격 자세는 머스켓 소총을 든 전열 보병에게는 매우 해괴한 자세였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사정은 이 정도까지만 보시고, 다시 영국군의 사정으로 되돌아 가시지요.  무어 장군이 퇴각을 시작한 이후로, 영국군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병사들은 그냥 영문도 모르고 180도 선회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서둘러 가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 끝까지 살아남아 나중에 런던 소호 거리에 구두방을 차린 라이플병 해리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병참부의 짐마차가 진흙탕에 빠져 뒤짚어지자, 병참부 장교들이 그 짐을 건질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마차를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이 영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해안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그냥 평소보다 행군 속도가 빠르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밤에도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행군을 하기도 했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주린 배로 밤을 세워 행군하던 병사들 중 낙오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전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후퇴할 수는 없었으므로, 추운 겨울 밤에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마을이나 수도원 건물 등이 나오면 그 건물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12월 29일 새벽, 해리스가 포함된 라이플 연대 병사들이 어느 수도원 건물의 차가운 마루바닥에 누운지 1시간도 안되어, 대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 건물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 용기병들이 "비켜 비켜 ! 적이다 ! 라이플 연대 비켜줘 !"를 외치며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라이플 병사들 위로 고삐를 잡고 말을 끌고 나온 것입니다.  어리둥절했던 라이플 병사들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자신들이 건넌 뒤 다리를 폭파했던 그 강을 프랑스군 경기병대가 여울목을 찾아내 건너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이플 병사들도 졸린 눈을 비비며 우르르 그 뒤를 따라 나갔는데, 프랑스 경기병들과의 전투는 순수 기병들끼리의 강렬한 충돌이었습니다.  라이플 병사들은 후방에 열을 지은 채 기병들의 충돌을 구경만 했는데, 결국 숫자가 훨씬 많았던 영국군 용기병들과 경기병들이 프랑스 경기병들을 밀어냈고 프랑스군은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라이플병 해리스가 목격했던 베나벤테 (Benavente) 전투였습니다.  





(이번 편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들입니다.  가볍게 한번 봐두시기 바랍니다.  맨 아래의 살라망카는 맨 처음 무어 장군이 호기있게 출발했던 곳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기록을 보면 평소 철제 칼집과의 마찰 때문에 무디기로 악명 높았던 영국 기병대의 군도가 이때는 대단히 날카로왔는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여 프랑스 기병들의 팔을 단칼에 절단해버리기도 하고, 프랑스 기병의 머리를 내리친 경우 적병의 정수리부터 거의 턱까지 쪼개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런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생생한 회고록은 그 신뢰성을 어느 정도 의심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가령 해리스의 회고록에는 저 베나벤테 전투는 한밤중 어둠 속에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아침 9시가 훨씬 지난 시간대에 벌어졌습니다.  하긴 전혀 현장 수기록이 없이 수십년이 지난 뒤에야 기억에만 의지해서 쓰다보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 베나벤테 전투는 양측 사상자가 각각 50명 정도씩 되는 소규모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장군들 중 하나였던 르페브르-데누에트(Charles Lefebvre-Desnouettes)가 차가운 강물 속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 고위 장군 중 희생자는 또 있었습니다.  며칠 뒤인 1월 3일 벌어진 카카벨로스 (Cacabelos) 전투에서,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의 토마스 플렁켓(Thomas Plunket)이라는 라이플병이 베이커 라이플(Baker rifle)의 원거리 저격으로 프랑스군의 콜베르(Auguste François-Marie de Colbert-Chabanais) 장군을 초탄 명중으로 사살한 것입니다.  플렁켓은 쓰러진 장군을 도우러 온 부관까지 그 다음 사격으로 즉사시키는 위력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그 저격 거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만, 일설에는 무려 600 미터가 넘는 거리였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당시 입증된 머스켓 사거리인 80 미터는 물론이고 베이커 라이플의 일반적인 유효 사거리 200 미터를 훨씬 넘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제가 군대에서 쓰던 M-16 A2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460m 정도입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장거리 저격의 희생자가 된 콜베르 장군의 초상입니다.  이 양반은 전사할 때 고작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개선문에 이 양반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르페브르-데누에트와 같은 고위급 지휘관이 포로가 된 것은 영국군의 사기를 꽤 높여 주었습니다.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싸움을 못해서 후퇴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알고보면 이건 오히려 영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뒤를 쫓는 프랑스군은 르페브르-데누에트 같은 거물급 인물이 비교적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직접 최전선에서 칼을 뽑아들고 싸을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르페브르-데누에트 장군의 초상입니다.  이분은 결국 비고 항에서 영국군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까지 끌려갔고, 1811년까지 거기서 자유로운 가석방 상태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하릴없이 지겨운 포로 생활을 하던 이 양반은 그만 신사로서의 약속을 깨고 탈출, 프랑스로 돌아와 영국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원정 및 워털루에도 참전했다가 나중에 왕정복고가 된 뒤 사형 언도를 받은 그는 수백명의 보나파르트파를 이끌고 미국 알라배마에 농업 이민을 떠났다가 결국 실패한 뒤, 특별 사면을 받고 귀국하다 그만 아일랜드 인근에서 난파되어 허무하게 묵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그에 비해 경험도 부족하고 정신 상태가 글러먹은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가령 긴 후퇴길 중 차가운 냇물을 건너게 되자, 어떤 장교는 지친 병사를 불러 세워 자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바지가 젖는 것이 싫었던 것이지요.  이 장교는 그렇게 강을 건너던 중,  엄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크러포드(Robert Craufurd) 장군의 눈에 띄는 바람에 그대로 물 속에 내려지는 봉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국군 지휘부의 무능함은 이미 전군을 이런 위기로 몰아넣은 것 자체에서 잘 드러납니다만, 후퇴가 시작되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겨울철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후퇴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몰랐던 것인지, 보통 부대를 따라다니던 병사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을 그대로 동반시켰던 것입니다.  

잠깐, 병사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이라고요 ?  제 블로그에 오래전부터 출입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예, 영국군 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 군대는 원정시에도 병사들의 부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데려갔습니다.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식량, 급수, 위생 등이 모두 엉망인 전쟁터로 아내와 아이를 데려간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병사들은 못 데려가서 안달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따라 붙으면 신속한 이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군 당국에서는 나름 기준을 정해서 그렇게 동반하는 가족 수를 제한했습니다.  일단 아이가 둘 이상이면 무조건 제외되었고,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병사 100명당 6명의 부인만이 원정에 따라 붙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원정에 따라가겠다는 자원자가 많을 경우는 추첨이 이루어졌는데, 자원자는 항상 넘쳐 났으므로 추첨에 떨어진 부인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추첨장은 항상 통곡과 비탄이 넘쳐 흘렀습니다.  이런 공식 동반 가족 외에, 비공식적으로 재주껏 따라붙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유럽 군부대의 이동에는 이렇게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이런저런 상인들이 따라 붙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들을 보통 camp followers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하고 불편한 전쟁터에 못 가서 안달이었을까요 ?  이는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해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당시 영국 서민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비참했는데, 일반 사병의 사회적 계급은 거의 밑바닥이었으므로, 그 가족의 삶 또한 거의 밑바닥이었습니다.  또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도덕적 상황으로 볼때, 남편의 원정으로 잠시 헤어진다는 것은 사실상 영영 이별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송금같은 것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병사의 얼마 안되는 급료를 본국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낼 방법도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부대와 동행하지 못하는 부인들은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하든가, 더 심한 경우 창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고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찢어졌...을까요 ?  의외로, 역시 당시 사회 상황과 또 그 병사들의 출신 성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귀찮은 마누라와 징징대는 애들로부터 해방되어 새 여자를 얻을 희망에 부풀었던 병사들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인들도 분명히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연대의 당당한 구성원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연대가 바로 집이고 가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인들도 연대에 강한 애착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부인들은 부상병과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고, 또 전투가 승리로 끝난 경우, 시체와 부상병이 즐비한 전쟁터로 용감히 뛰어들어가 약탈품을 찾았습니다.  시체나 부상병이 가진 몇 안되는 동전이나 근사해보이는 군복, 돈이 될만한 검이나 피스톨 등이 대상이었는데, 자신의 장화를 벗겨가려는 이런 부인들에게 저항하는 적 부상병은 가차없이 부인들의 칼에 목이 따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억세고 거친 삶을 살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차라리 베나벤테 같은 주요 마을에 놔두고 오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프랑스군이 막장이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까지 막장도 아니었습니다) 적군의 가족을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장교들로서는 가족들과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병사들을 강요할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 혹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휘부가 지는 것입니다.  지휘부의 그런 어리숙한 판단 결과,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결국 굶주림과 추위에 낙오되어 황야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낙오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리스 일병의 회고록에는 여자와 아이들 뿐 아니라, 장교든 사병이든 건장한 남성들도 많은 수가 피로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몇몇 믿을 수 없는 강인한 여자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고된 후퇴 길 중, 어느 병사의 부인이 힘겹게 길을 걷다 결국 길 옆에 드러눕더랍니다.  그리고 그 남편인 병사도 그 옆에 주저앉고요.  그런 경우를 워낙 많이 봐왔던지라, 해리스 주변의 병사들은 '지친 부부가 이제 죽을 자리를 정한 모양이군' 하고 쑥덕거리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해리스는 그 부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다시 라이플 부대를 따라 잡아 대열에 합류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부인이 드러누운 것은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해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아이와 산모는 결국 영국행 수송선까지 무사히 집어탔고, 아이는 나중에 건강한 소년으로 자랐다고 합니다.



(당시 숀클리프 병영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영국 육군 병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영국군이 그 부인처럼 강인한 체력과 행운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병사들이 낙오되었고, 일부는 굶주림과 영국군의 혹독한 군기에 질려 일부러 대오에서 이탈하여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해리스가 소속된 제95 라이플 연대는 이런 낙오병이나 탈영병이 적은 편에 속했습니다.  일단 이들은 무어 장군이 영국 켄트(Kent)에 위치한 숀클리프(Shorncliffe) 병영에서 1803년부터 열심히 키워낸 경보병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 장군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에서, 경직된 전열 보병보다는 좀더 병사 개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경보병 전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훈련에 많은 공을 들인 바 있었습니다.  라이플 연대도 머스켓 소총보다 더 긴 사거리와 더 정확한 명중률을 가지는 베이커 라이플의 특성을 살려 2인1조로 산개하여 전투하는 훈련을 받은 부대였습니다.  따라서 그저 장교들의 호통소리에 따라 걷고 장전하고 대충 아무데나 쏘는 훈련을 받은 전열 보병에 비해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크로포드 장군도 제95 라이플 연대를 가장 위험한 후미에 배치하여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채찍질은 결코 빠따나 회초리질 같은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채찍질 도중 실제로 병사가 출혈 및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 경우에 대비한 규정까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규정이란 이미 죽은 시체에 대해 나머지 매질을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를 포함한 경보병 여단들은 영국군의 후퇴가 시작될 때 영국군의 선두 쪽이 아닌 후미 쪽에 위치해있었고, 무어 장군은 이 경보병 여단들을 그 위치에서 그대로 방향을 바꿔 포르투갈과의 국경 바로 위쪽인 비고(Vigo) 항으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무어 장군의 본대도 그 뒤를 따라 비고를 향할 작정이었으나, 나중에 보시듯 결과적으로 좀더 북쪽에 위치한 코루냐(Corunna, Coruña)로 향했지요.  이때 비고 항으로 향했던 경보병 여단들은 그래도 피해가 적은 편에 속했습니다.  이는 해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로포드 장군이 끊임없이 병사들의 대오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함과 동시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을 가하며 군기를 혹독하게 다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설할 떄 비아냥거렸다는 이유로 호완스 (Dan Howans)라는 병사에게 채찍질 100대를, 그것도 프랑스군이 뒤에 바짝 쫓아오는 도중에 전부대를 집결시켜서 차렷자세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집행할 정도의 강심장을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크로포드 장군은 매서운 인상을 가진 훌륭한 군인으로서, 걸핏하면 쌍욕을 퍼부었기 때문에 병사들로부터 검은 밥(Black Bob)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맹장이었습니다.  맹장 아래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채찍질 100대를 당한 호완스라는 병사도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100대를 다 맞은 뒤, 억세게 생긴 아내가 건네주는 외투를 피투성이 맨살 위에 걸치고 걸어나왔다고 합니다.  원래 채찍질은 10대만 당해도 등가죽이 홀라당 벗겨질 정도였고, 50대가 넘어가면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악랄한 형벌이라서, 100대의 채찍질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형 언도, 그것도 난자질에 의한 사형 언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등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호완스는 차마 자켓을 입지 못하고 외투만을 대충 걸친 것이었고요.  이렇게 강인한 병사와 그 아내가 결국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는 해리스의 회고록에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크로포드 장군입니다.  정말 매섭게 생기셨네요.  이 양반은 나중에 시우다드 로드리고 공성전에서 용감하게 앞장 서다가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비고 항으로 향한 영국군은 비록 많은 낙오자를 내기는 했으나,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큰 전투없이 영국 수송선에 기어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라이플병 해리스도 한때 낙오되었다가, 해안을 떠나는 거의 마지막 보트를 간신히 집어타고 영국 포츠머스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수송선에 올라탄 그날 밤부터 거센 폭풍에 휘말려 배가 거의 옆으로 기운 상태로 5시간을 표류했다고 합니다.  당시 허술한 목조 수송선의 수밀성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같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물고기밥이라고 다들 체념할 때 즈음 기적적으로 폭풍이 멎고 배가 평형을 되찾아 간신히 포츠머스 앞바다인 스핏헤드(Spithead)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씌여 있습니다.  해리스를 포함한 이들은 포츠머스에 도착한 뒤에도 약 5일간 선상에 머물다가 간신히 상륙 허가가 떨어져 맨발과 누더기 군복 차림에 떡이 진 수염을 한 거지 꼴로 절뚝거리며 상륙하여, 포츠머스 시민들을 경악시켰습니다.

무어 장군이 이끄는 본대는 좀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도착하는 마을에서 돈, 하다 못해 셔츠라도 벗어주고 빵과 와인을 샀으나, 점차 행군이 가혹해지고 돈과 옷가지가 떨어지면서 병사들은 노골적인 약탈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연히 받아야 하는 와인 또는 럼주 배급이 중단된 것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고, 이는 도착하는 마을마다 술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행패로 난장판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장교들은 병사들의 약탈과 낙오를 막아보려 나름대로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지치고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였고 또 이런 후퇴 상황을 처음 겪어보는데다, 바로 뒤를 프랑스군의 기병대가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뒷수습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위를 맡은 기병대 사령관인 파젯(Henry Paget, 1st Marquess of Anglesey) 장군이 약탈 행위를 하던 병사 3명을 체포하여 교수형을 집행하려다가 프랑스군에게 쫓겨 집행을 못하고 퇴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보급이 중단되고나니, 확실히 역전의 용사 프랑스군과의 질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장교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 짐승처럼 허우적거리는데, 똑같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우던 프랑스군은 노련한 장교들의 지휘 하에 영국군을 끈질기게 추격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정은 프랑스군에게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은 애초에 수송용 가축과 짐마차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무기와 탄약 등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 부족하기는 하지만 식량도 좀 있었고 지나는 길가의 스페인 마을들로부터 식량을 추가로 더 얻을 수 있었지요.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단기 섬멸전을 생각하고 길바닥에 나선 상황이라 아예 보급이 없었습니다.  진흙투성이의 빗길 속을 헤치며 추격전을 펼치다보면 군복과 군화, 말굽과 안장 뿐만 아니라 탄약과 무기 등에도 손상이 많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투라도 벌어지면 칼이 부러지고 총의 부싯돌이 깨지는 일도 많았고요.  프랑스군은 그런 것을 보충할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먼저 샅샅이 훑고 지나간 마을들에서는 정말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영국군이 퇴각하는 경로에서 한참 벗어난 마을까지 추가로 움직여 거기서 먹을 것을 약탈해와야 했습니다.  즉, 영국군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움직여야 했으므로 훨씬 피로도가 심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은 줄기차게 영국군의 뒤를 밟으며 낙오병 사냥을 계속 했습니다.


럼주가 끊기면서 점점 느슨해지던 영국군의 군기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베어드 장군이 영국군 증원군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진격할 때 11월 22일에 도착하여 1차 기지로 삼았던 아스토르가(Astorga)에서였습니다.  일단 여기서 숨을 돌리고 지붕 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영국군은 이 곳에서 로마냐 (Romana) 후작의 스페인군 잔존부대와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측 모두에게요.  예상대로 로마냐 후작은 무어 장군에게 '더 이상 꼬리를 빼지말고 여기서 자신의 부대와 함께 힘을 합해 프랑스군과 싸우자'고 간청했습니다.  실제로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합하면 비고로 먼저 보낸 경보병 여단들을 빼고도 3만에 가까왔으니, 1만6천에 불과한 술트의 군단 하나를 물리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정말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영국군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루라도 더 빨리, 그리고 한명이라도 더 많이 영국군을 영국 수송선에 싣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아스토르가의 성당 사진입니다.  아스토르가 같은 작은 도시에도 저런 거창한 건물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후퇴하는 마당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가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었던 영국군 지휘부는 아스토르가에 도착하자, 여기에 비축해 놓았던 것까지 합해 탄약과 각종 장비들을 대거 파괴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로마냐 후작을 격분시켰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스페인이 이렇게 나폴레옹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는 것은 영국 원정대가 지나치게 느릿느릿 전진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아예 스페인이야 어떻게 되든 나몰라라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치겠다는 것이 영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작자의 공언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스토르가에 비축해놓았던 머스켓 소총과 탄약, 각종 군사 장비들은 원래 스페인군에게 지원해주기로 했던 군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비들이 프랑스군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폭파하겠다는 것은 '영국은 로마냐가 이끄는 스페인 패잔병 따위는 믿지 않는다' 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는 행위였습니다.  

로마냐 후작을 격분시킨 것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이 폭파 작업에 들어가 여분의 화약이 폭음과 함께 대형 불꽃놀이를 일으키고, 또 각종 장비들을 불태우느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자, 그렇잖아도 사기가 떨어졌던 영국 병사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나마 남아있던 군기를 내팽개쳐버리고 거의 떼강도 수준의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병사들은 더 나은 숙소를 갖겠다고 스페인 병사들과 주먹다짐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술을 찾아서 아스토르가 주민들의 집을 무단 침입하고 주민들을 구타했습니다.  로마냐 후작은 공식 기록에 남기겠다며 이 와중에 형식을 갖춘 항의 서한을 무어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만, 어차피 영국군의 행패는 이미 무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영국군 장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스토르가부터 영국군은 군대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로마냐 후작은 무어의 영국군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이들과 결별하여 포르투갈 쪽을 향해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어차피 영국행 수송선에 로마냐 후작이 이끄는 부대가 탈 자리는 없었으니까요.

영국군의 군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럼주 배급 때문이었다면, 군기가 무너진 것도 결국 술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1월 2일에는 벰비브레(Bembibre)라는 마을에서는 병사들이 술집 술창고를 때려부수고 와인을 퍼마시는 바람에 난리가 났는데, 장교들이 수습하려 노력을 해봐도 이미 술에 취한 병사들에게는 전혀 명령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그 마을에 수백명의 술에 취한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고, 이들은 모조리 뒤따라온 프랑스 기병들의 무자비한 칼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군은 충분한 양의 술이 있는 마을마다 이렇게 수십 수백명 씩 희생자 아닌 희생자들을 내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군은 꼴 사나운 후퇴길에 그야말로 수천명을 흘리며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왜 영국군만 음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아니오, 영국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음주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가 답입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나 프로이센 등에 비해 나라 전체에 음주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병사 1인당 매일 와인 1파인트 또는 럼 1/4 파인트를 배급하면서도 만약 술에 취한 것이 발각되면 채찍질 형벌에 처해졌는데, 실은 장교들도 음주 문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무어 장군도 이렇게 한마디 남길 정도였습니다.  "병사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처벌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  장교들도 같은 죄목으로 채찍질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당 시 영국군의 사정이 얼마나 다급했는가 하면, 영국군이 이런 난장판을 벌이고 후퇴한 아스토르가에 나폴레옹 본인이 약 8만의 병력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 1월 1일이었습니다.  1월 2일 영국군이 술을 퍼마시며 퍼져 있던 벰비브레는 아스토르가에서 불과 4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라면 2일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은 바로 그 전날까지 약 300km를 10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30km씩 달린 셈이었습니다.  영국군도 후퇴할 때는 전진할 때보다 빨랐습니다.  이런 몰골로나마 영국군이 루고에 도착한 것이 1월 6일이었습니다.  벰비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곳이고, 이를 4일만에 주파했으니 하루에 30km 이상, 즉 프랑스군과 거의 같은 속도를 낸 것이지요.  보급도 포기하고 낙오병과 환자는 다 내팽개치고 달리니 확실히 더 빨랐습니다.  그래도 나폴레옹이 끝까지 따라 붙었다면 결국 따라 잡혔을 가능성도 꽤 컸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가 재무장에 나섰다'라는 편지가 날아온 것은 영국군에게 있어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각 지역간의 거리를 재가면서 당시 전투 기록을 보면,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를 실감하실 수 있습니다.)



루고(Lugo)에서 무어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가오는 술트의 선봉대와 맞붙을 용기를 냈습니다.  루고 인근의 지형이, 방어에 너무나 용이한 고갯길 2곳만 막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술트가 꼬리를 내리고 도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술트의 병력은 무어의 영국군보다 약했고, 더군다나 술트의 프랑스군도 힘든 추격 행군에 무척 지쳐 있었고 또 부족한 식량 조달을 위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무어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상황은 아니었지요.  술트가 꼬리를 빼자, 2일간을 이렇게 기다리던 무어는 프랑스군이 측면을 우회하여 자신의 뒤를 차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발을 다치거나 상태가 안 좋은 말 500마리를 도살하고 남는 탄약 수송차를 파괴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낙오병과 탈영병의 숫자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많았으므로, 더 먼 비고(Vigo)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보고 전령을 보내 더 가까운 코루냐(Corunna)로 수송선단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승선할 생각이었지요.  이렇게 루고에서 코루나로 가는 길에서 영국군은 다시 1천명 정도를 낙오병으로 상실했습니다.  다시 그 뒤를 밟던 술트는 그렇게 영국군이 흘리고 간 낙오병들을 사냥하며 착실히 전과를 올렸고요.




(루고에서 비고까지는 약 160km지만, 루고-코루냐까지는 약 90km로서 코루냐가 훨씬 가까왔습니다.)




(기원전 401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흑해 연안에 당도한 뒤 마침내 바다가 보이자 감격해 마지 않는 그리스 용병단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비틀거리며 영국군이 코루냐에 입성한 것이 1월 11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심정은 2천년 전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했다가 메소포타미아의 쿠낙사(Cunaxa) 전투에서 패전한 뒤 소아시아 반도 흑해 연안까지 강행 돌파한 그리스 용병대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용병대가 흑해 인근까지 도착하여 고개 정상을 넘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이들은 "바다다, 바다야 !"를 외치며 이제 살 길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1810년 1월 11일, 거지꼴로 코루냐에 들어온 영국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텅빈 항구였습니다.  영국 수송선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영국 원정군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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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성향이 마음에 안들면 자신이 블로그를 만들거나 방문안하면 그만이지 왜 남의 블로그에 주저리 주저리 자기 고집스런 논조를 설파하려 드는지 의아합니다.
제 경우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즐겨 읽다 주인장의 정치적 견해가 마음에 안들어서 발길을 끊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저하고 같은분 있내요..저도 그이유로 거기 발길끊음..
저도 링크타고 갔다가 발만 담그고 왔죠.
저두요..... 그런데 가끔은 다시 가서 훓터보고 오죠.... 내용들이 너무 좋아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정이 떨어지니 말걸음이 떨어지는 것은 역시 어쩔수 없네요.... ㅎㅎㅎㅎ
그런데.... 대사님의 서울시장 벅원순씨의 아들 병역에 관한 글은 괞찮았습니다..... 네! 저도 반공 우익 보수 쪽에 서 있습니다..... 몇년전 젊었을적에는 진보 야당쪽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부모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요...... 참 이상하네요....
드디어 오늘이 지나가면 2016년이네요~ 2015년도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2016년은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정원님이 말씀하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소수에 가까운 것 같고, 아마 유럽의 사민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을 사회주의 추종 세력으로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유럽에서 여론은 사민주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추세인 것은 맞습니다만, 사회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민주의 세력을 자본가들이 만든 체제와 타협을 하는 체제라고 비난을 가하고 있지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역시 사회제도와 사회적인 해결을 위한 이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동인도 회사와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였으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는 몰락한 제국인 오스트리아의 미래와 파시즘에 기반한 경제정책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 성장과 경기 변동은 기술혁신에 의한 창조적 파괴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펼친 오스트리아의 조지프 슘페터의 경우 아예 사회주의 개념을
생산수단 및 생산과정의 지배권이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속한 제도적 유형으로 규정하면서 그 출현과 작동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지요. 최근 신자유주의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 컨센서스 역시 권위주의 정부가 자리잡은 남미와 아시아 국가의 시스템 개혁으로 작동을 했었지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를 경험하였지만 인도네시아는 민주화를 한국은 시스템의 개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개혁의 결과였습니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통한 경제 발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GDP 당 R&D 투자에 있어 한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에서 1~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 실적이나 경쟁력을 따지고 보면 미국에 비해 뒤쳐지고 있지요. 규제 문제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경직적인 인사 시스템 (정확히 말하면 앞에서 언급된 프랑스 군과 정 반대되는 시스템)이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기에는 모호하겠지만 미국과 한국의 논문 심사 시스템을 비교해볼게요.

미국의 경우 한국의 대학과 같이 SCI라는 민간 업체가 작성하는 논문 통계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훌륭하다'는 게 객관적으로 증명되면 아무도 불만이 없죠. 미국 학계에서 승진을 심사할 때 제일 중요한 건 피어 리뷰(Peer Review, 학자들 간의 평가)이지 논문 개수는 따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 학계는 논문이 어느 저널에 실렸는지 SCI(Science Citation Index, 학술지의 영향력 지수)를 막 따지는데, SCI 리스트를 따진다는 건 우리 스스로 논문을 평가할 능력이 없다는 걸 자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은 그렇게 하기에는 우선 풀이 너무 작고, 서로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익명성이 보장이 안되며 선수층이 부족하고 스스로 평가할 능력이 조금 부족하니까 피어리뷰보다는 SCI 리스트로 평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업들도 정말로 객관적인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 왔으면 사람들이 수긍하겠는데, 그게 없는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어려우니까, 자꾸 말 많을 바에는 연공서열로 가게 되지요. 이게 신뢰가 부족한 국가와 높은 국가의 차이고 생산성의 차이로 연결되지요. 미국은 기업이나 대학에서 능력만 있으면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렇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는 능력과 생산성 위주의 지위 이동성이 높은 나라이지요. 한국은 아직 이게 안되기 때문에 R&D에 관심을 가져도 실적으로 연결이 안되는 겁니다. 축적의 시간 자체도 부족한게 있지만....

결국은 능력 위주, 생산성 위주로 가는 거고 그래서 프랑스의 시스템이 혁명의 불안정속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강대국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둔거고요. 영국과의 대결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영국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여자랑 문제나 일으키는 놈팽이 (넬슨), 근본도 모르는 하급 귀족 (웰링턴)이 아닌 발라클라바 전투의 카디건 경과 같은 사람이 지휘하게 엄격한 지위체계에 따른 인사시스템을 유지했어도 프랑스에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걸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말씀 굉장히 고맙습니다.
아 일단 사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를 말씀하시는것이 맞지요?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사회주의의 한종류입니다. 사회주의는 그종류가 매우 많지요...


그외의 말씀은 전부 수긍이 됩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역시 한때는 진보였지요. 전제왕정과 중상주의체제하에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것이니깐요.

"오스트리아의 조지프 슘페터의 경우 아예 사회주의 개념을
생산수단 및 생산과정의 지배권이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속한 제도적 유형으로 규정하면서 그 출현과 작동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지요"
이것 몰랐던 사실이네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업들도 정말로 객관적인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 왔으면 사람들이 수긍하겠는데, 그게 없는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어려우니까, 자꾸 말 많을 바에는 연공서열로 가게 되지요."
실제로도 제가 있던조직에서 본적이있습니다.

논문이야기는 정말로 고맙습니다.

"결국은 능력 위주, 생산성 위주로 가는 거고 그래서 프랑스의 시스템이 혁명의 불안정속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강대국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둔거고요. 영국과의 대결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영국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여자랑 문제나 일으키는 놈팽이 (넬슨), 근본도 모르는 하급 귀족 (웰링턴)이 아닌 발라클라바 전투의 카디건 경과 같은 사람이 지휘하게 엄격한 지위체계에 따른 인사시스템을 유지했어도 프랑스에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걸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제가 생각을 잘못한것 같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한가지 요인으로만 결정되는것이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퍼갑니다....
알콜중독충들이 나라 말아먹고 있는 건 토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똑같군요.
올한해도 수고 하셨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항상 건강하길 빌겠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이 동행(?)한 영국군 얘기는 흥미롭네요.
근데 병사들이 집에 송금을 할수가 없어서 부인과 애들도 따라다녔다?
그 경우에는 아예 병사집에 정부가 돈을 매달 지불하면 될텐데
당시에 송금을 쉽게하는 시스템이 없어서 병사가 집에다 송금을 할수는 없어도 정부에서 군대에 있는것으로 확인된 병사늬 집에 병사의 월급을 지불하면 되자나
근데 저기 병사들도 지금 한국군처럼 제대로 월급을 못받아서 송금할 돈도 없었으면 물론 소용없는거고
나시카님 글을 볼때마다 동양사 전쟁기록은 얼마나 숫자가 뻥튀기되어 있는지 재차 실감하게 됩니다. -ㅁ-..

1만명도 보급 못해서 허덕이는 19세기 vs 7세기에 요동으로 113만명을 보낸 수.

2~3배도 아니고 숫자가 10배 정도 뻥튀기된듯.
서양은. 밀을먹고


동양은. 인구부양능력이. 좋은. 쌀을주식으로했습니다. 동양인구가. 서양과비교해서. 매우높았습니다
중국역시기록도 과장같은것이 많지만

자국에게 불리하게 과장하지는 않습니다.

10만명 쳐들어가서 진걸 113만명 쳐들어가서 졌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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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나라의 113만 대군도 엄청 보급에 애를 먹었습니다. 전투병 113만명이외에 따로 2백만명의 치중대(군량수송부대)를 따로 동원합니다.

1명의 군인을 보급하기 위해서 따로 2명을 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급문제 때문에 수나라는 자충수를 두고 자멸하다시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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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시 수나라인구는 4천만 고구려 인구는 3백50만으로 추정됩니다.
(인구의 10%를 군인으로 쥐어짜는것은 고대에도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랬다가 졌을경우 그결과는
파멸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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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113만 전투병력 200만 보급병력은

그 어떠한 역사학자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국학자들도요.
정원/ 의심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본인이 안 믿는 거야 본인 마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본문 읽어봐도 아시겠지만, 단순히 사람을 더 많이 투입한다고 보급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야채님 말씀대로 수서에 적힌 113만이란 숫자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나라가 휘청이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막대한 인력을 갈아넣은 건 사실이겠죠.

그리고 기원전후한 시기 로마제국은 무려 30만의 상비군을 운영했습니다. 징집 농민들이 아닌, 국가가 급료와 퇴직금까지 책임지는 모병제로요. 단순히 동서양의 동원 규모가 다르다/동양쪽 기록이 뻥튀기다 라고 볼수만은 없을거 같습니다.
야채님 의심하는 학자들이 누가 있는지요? 혹시 관련자료나 서적을 안내해주실수 있습니까?
소개해주시면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정원/ 숫자를 깊이 연구할 만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것 때문에 책을 찾아보고 공부하실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역사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많이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Medieval Chinese Warfare'나 '전쟁으로 보는 한국역사' 등의 서적에서 상당한 의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Medieval Chinese Warfare 에서는 113만에 대한 보급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 참고문헌으로 논문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해당 내용이 특별히 깊이 연구할 만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서, 수군의 보급 문제를 다룬 논문은 사실상 Medieval Chinese Warfare 에 언급된 논문이 사실상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급이 가능했다는 반박 연구나 보급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후속 연구 같은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중국의 기록은 전과를 과장하지 않은 것을 보고 조조가 이상하게 여겨서 따로 불러서 물어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과장은 기본으로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또 정확한 숫자를 복원할 별도의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 과장해서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사서에 기록할 때는 또 정확한 숫자를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숫자들을 보고도 대충 그러려니 하고 적당히 넘기는 분위기입니다.

자기 나라에 불리하게 과장했겠느냐는 말씀에 대해서도 Medieval Chinese Warfare 에서는 "당의 역사가들이 수양제의 실패를 과장했을 것이다" 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굳이 그런 의심을 붙이지 않더라도, 중국사에서 패전에 대한 기록들에서 승전에 대한 기록들보다 특별히 적은 병력 숫자가 제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회의론에서 주로 언급하는 부분은 수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총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113만의 부대 이동과 보급 문제 쪽입니다. 대체로 옹호론 쪽에서는 수에 113만을 징집할 능력이 있었음을, 회의론 쪽에서는 보급할 능력이 없었음을 거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인구가 4천만 정도면 113만이 아니라 그 2-3배라도 동원은 가능하겠죠. 다만 얘네들 먹여살리는건 어쩌냐는 게 문제일 뿐... 113만이 과장이라도 양제가 보급한계치를 뛰어넘는 병력을 동원했고 그 땜에 말아먹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당 태종/고종은 고구려 정벌에 더 적은 병력만을 동원하는데,(태종은 30만, 고종은 10만 전후 × 여러차례로 알고 있습니다) 당의 인구파악/동원능력이 수보다 딸린다고 보긴 어려우니, 그 정도 숫자를 장기 원정 동원의 한계치로 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야채님 말씀 고맙습니다. 시야가 크게 넓혀진것같습니다. 나중에 그책을 읽어보겠습니다.

하지만 Highsis님의 10배 뻥튀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냐면 고구려원정실패후 수나라는 내란에 시달리다가 망했습니다.(고구려원정전의 수나라는 말레이반도까지 지배한 대제국이고 최대전성기였습니다.)

엄청난 인력을 쏟아붇고 진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정원 // 중국사 전공 역사학자인 교수님이 중국 역사책의 수치 엄청 과장되었다고 하시던데요.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엄청 많았다' 수준으로 받아들여야지 숫자에는 신빙성이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역사학자가 없다는 건 억측인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도 인구 3300만이고 러시아는 3500만입니다. 행정이 훨씬 발달되고 국민군의 소개로 병력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19세기 말에도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 프랑스인을 30만 정도 동원했었는데 1천 200년전 수나라가 113만이요? 보급병 200만 합쳐서 313만명이요?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데 역사학자라면 더더욱 믿을 리가요. 그 만큼 병력이 있다고 해도 잘 닦인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닌 요동으로 300만을 보냈다는 걸 어떻게 믿나요?

중국 사서는 사마천의 사기만 봐도 전국시대 인구 2천만에 병력이 500만이라는 등 숫자에 한해서는 신뢰가는 게 거의 없어요.

기원전 1천의 목야대전이 사기에 따르면 주나라 4만 5천이고 상나라 70만인데 주무왕이 천명이 자기에 있다고 연설하고 병력 보내니까 70만이 뿔뿔히 싸우지도 않고 흩어집니다. 말이 되나요?

명나라도 서류상 병력은 300만입니다. 그런데 이자성의 반란군에 대항해 수도를 지키기 위해 그 300만 명중 몇 명이 보였을까요? 1%도 안모였습니다. 서류상의, 기록상의 병력과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에는 천지차이가 있고 또한 그 동원 가능한 병력과 원정 가능한 병력에도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청나라가 몽골이나 티벳으로 대외 원정을 할때도 규모는 최대가 10만 정도였고 그것도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강희제-옹정제 두 역대 최고수준의 황제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아놓은 재정을 건륭제가 10만규모 원정을 반복하면서 다 까먹죠.

수양제의 113만을 믿는 건 수나라보다 인구가 10배는 많은 청나라가 1130만 병력과 보급병 2천만명을 몽골로 투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달라보이지 않네요. 제게는 상식적으로 이걸 믿는 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나라가 10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건 가능하겠죠. 근데 100만명이 먹으려면 현지조달은 대도시에도 인구가 몇 만조차 안되는 당시에는 말도 안되고 200만명의 보급인원이 필요합니다. 합쳐 300만명의 먹을 걸 가져오려면 더 넚은 지역에서 보급을 감당해야 할테고 그러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 기술적으로 당시 100만명을 해외원정하며 보급할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서양 고대사에서 페르시아군을 100만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거 믿는 서양학자는 거의 없죠.


지나가는 사람// 로마군 전군이 30만~50만이지 한번 원정에는 그 1/15정도만 투입되었습니다.
청나라가 몽골이나 티벳으로 대외 원정을 할당시는 청나라인구는 10배까지 안 많았습니다.

청나라인구가 그정도까지 많아지는것은 그후의 일입니다.

중국사서에 병력숫자가 과장이 많았다는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수나라 말기 인구 609년 4천 600백만
건륭 55년 1790년 인구 3억

몽골 원정 당시 인구 6.5배 차이 납니다. 6.5을 곱해서 청나라가 737만 대군과 1300만명의 보급인원을 몽골 고원에 투입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겠습니다. 청나라가 실제로 투입한 10만 군의 73배 수치군요.

나무위키에서도 '소수만 의문을 제기하고 학계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 의견으로'라는 식으로 고수전쟁의 숫자가 맞다고 억지로 써놨는데 이에 대해 의문 이상의 심도있는 연구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수서에 나온 숫자 외에 교차검증을 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국에서 자국 역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별로 없는 점도 고려해야 하고요. 세종대왕의 강제이주, 화폐개혁 실패, 부민고소금지법, 부정부패 감싸기 등의 실책에 대해 다룬 책이 별로 없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른 이소스 전투의 경우 플루타크와 아리안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군이 4만, 페르시아군이 60만이라고 했습니다만, 역사학자들은 진심으로 믿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다른 숫자 언급이 없음에도 현대 학자들은 보급의 어려움과 군대의 이동경로, 인구를 고려해 페르시아군을 5만에서 10만 사이로 잡으며 그 중 농민군이 아닌 정규군은 3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뒤이은 가우가멜라 전투는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군 5만에 페르시아군 100만이라고 적혔습니다만 역사학자들에 의한 현대추산은 마찬가지로 5만에서 10만 사이입니다.

서양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술가인 한니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전투에서 두배를 넘는, 세배 이상의 숫적 우세를 뒤집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서는 조조가 1만으로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10만을 격파한 것처럼 10배는 기본이요, 팽성대전에서는 항우의 3만 5천이 16배인 유방의 57만을 갈아버리더니, 월왕 구천은 5천으로 그 140배인 오나라의 70만을 무찔렀다니 단순히 과장했다기보다는 미친듯이 뻥튀기 되어있다고 볼 수밖에요. 아니면 한니발을 가볍게 능가하는 천재들이 십년에 한번 꼴로 중국대륙에서 튀어나왔거나요.

그정도로 뻥튀기된 일수 기록들은(고수전쟁) 병력 숫자를 정확히 몇 배로 곱해서 기록하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과장했다라고 보기보다도 숫자 자체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맞죠. 어느 쪽이 많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겠습니다만.
/하이시스님

나시카님 글을 볼때마다 동양사 전쟁기록은 얼마나 숫자가 뻥튀기되어 있는지 재차 실감하게 됩니다
> 하이시스님께서도 달아주셨듯이, 오래전 기록이면 동양이건 서양이건 과장하여 기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야채님의 지적처럼 지금와서 당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만큼 사료비판에 엄격하지 않은 학자들은 없지요.

로마군 전군이 30만~50만이지 한번 원정에는 그 1/15정도만 투입되었습니다.
> 원정군 투입 숫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생산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군인/전투보조원 동원 숫자가 중요하겠죠. 또 동원한 인력에 대한 급여 지급문제도 있고요. 로마제국은 30만에 대해 기본적인 의식주에 더해 급여와 퇴직금 지급을 책임졌고, 중국 등 동아시아는 세금의 일종으로 '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기본적인 의식주 외에는 국가가 책임질 의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병력의 동원도 가능은 합니다. 다만 보급문제가 걸릴 뿐이고요.
또 다키아 원정에 도미티아누스는 15만, 트라야누스는 19만을 투입했습니다.

제 의견은, 동양 측 기록은 과장/뻥튀기가 심하고 서양측 기록은 다 믿을만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다들 어느정도 과장이 섞였다고 보는 게 맞다는 거죠. (저도 양제가 113만을 다 동원했다고 믿지 못합니다. 증거가 없을 뿐이죠.) 유럽쪽에선 로마제국이후로는 통일제국이 없었기에, 또 대규모 병력을 징집하는 성향이 아니었기에 동원 병력이 적을 뿐이고, 동아시아쪽은 중국에 통일제국이 (항상은 아니지만) 존재했기에(게다가 이들의 중앙집권 능력은 굉장한 수준이었죠.) 동원 병력도 더 많은 것 뿐입니다.

서양 쪽 뻥튀기(?)의 예로, 1346년 크래시 전투에서 패전한 프랑스군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적게는 2만, 많게는 10만에 달합니다. 7세기 수나라와 14세기 프랑스의 인구수를 비교하면, 113만이나 10만이나 비슷비슷하게 뻥친거 아닐까 합니다.

그 외에 작은 오류로, 구천이 부차를 이길 때 동원 병력은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4만 9천이었고, 패배한 오나라 군대의 숫자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 하나, '사마천의 사기만 봐도 전국시대 인구 2천만에 병력이 500만이라는 등'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세가(혹은 열전)에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 기억엔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없는거 같아서요.
정원님
경제 시스탬으로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정치 시스템으로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해 쓰시기 때문에 혼란이 있으신거 같네요

나시카님은 사회주의자이기 보다 시민의 자기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좌파적(정치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우시고, 사회 시스템은 개인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고 그 사회 시스템은 그런 보장된 자유 속에서 태어난 각성된 시민 계층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지요.

사실 이념으로 무언가 나누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증진이라 생각하는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롤즈식 분배정의가 팔요허다고 생각합니다만...테블릿이라 길게 쓸수 없어 줄입니다
"경제 시스탬으로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정치 시스템으로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해 쓰시기 때문에 혼란이 있으신거 같네요"
정치시스템으로서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 경제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해쓰고 있지 않습니다.
제글의 어떤점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

공산주의와 별개로 ..
사회주의 시스템자체도 엄청나게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러비님에게 도리어 물어보고싶은데 좌파적(정치적) 자유주의자라는 말이 있습니까?
좌파라하면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정치관을 갖고 동맹을 맺은 사람인데...
현재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체제인데 자유주의체제와 좌파가 어찌 결합한단 말입니까?

"나시카님은 사회주의자이기 보다 시민의 자기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좌파적(정치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우시고, 사회 시스템은 개인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고 그 사회 시스템은 그런 보장된 자유 속에서 태어난 각성된 시민 계층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지요. "
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유란게 종류가 많습니다.
정치적인 자유를 나시카님은 중시여기겠지요.
그러나 경제적인 자유는요? 나시카님은 분명히
"부자들이 고생해서 부를 쌓았으니 그 부를 가져올려면 우리도 고생할각오를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에 사유재산의 보장 또한 분명존재하지 않나요?
"중소기업적합업종을 해야한다"
자유주의에 상거래의 자유또한 포함돼지 않나요??
나시카님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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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가 제한할수 있는 정도를 자유주의자들보다 높게 잡는경향이 있습니다.
특히나 국가사회주의자(스탈린주의, 주체사상)은 정치적인 면에서까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제한하는 방식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인면에서는 제한을 두지 않돼, 경제적인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을 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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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정치적인 자유는 당연시 여기면서도,,, 경제적인 자유의 중요성은 굉장히 간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요..(애초에 경제적인 자유의 중요성을 가벼히 여기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되었겠지만)

사람들이 그럼 저에게 산업혁명시의 영국처럼 그런 자유주의를 원하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저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어딘가가 최적점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중 어느쪽으로 더 이동해야하는가 하는점에서는 자유주의쪽으로 더가야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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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야기가 제가 설명 하는쪽으로 가는데...

다시 진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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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질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질렸습니다.

특히나 자기자신들을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자신의 상대방을 악(惡)이라 생각하는 태도에 질렸습니다.
자신들의 이론이나 방법을 유용성의 측변에서 보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내야할 절대선(善)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
질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시하신의견은 이러이러해서 잘못되었다라거나 이러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실현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이나중에 수정과 보완을 하면된다(어떻게 수정과 보완을 할것인지는 절대이야기안함)라는 식으로 얼어부리고
피해버립니다.

즉 자신의 생각을 잘못된것이 있으면 교체될수도 있다고 보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내야할것이며. 상황이 어떻든 현실이 어떻든 생각은 못바꾸겠고 무리수를 두던 말던 상황이나 현실을 강제적으로 내생각대로 끼맞추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웃긴것은 그러면서 자기는 손해를 크게 안볼려고 합니다.
(사실 나시카님이 이렇지 않다라는 이야기는 못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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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이런거죠. 전교조가 자신들의 사상에 맞추어 체벌을 없앴지만 체벌을 없앤만큼 학생폭력 및 범죄를 제어할수단으로 사법기관을 개입시켜야 하는데, 그것(사법기관개입)은 자신들의 손해가 올거 같으니까 그것은 기를 쓰고 막는거죠... 결국 제어할수단이 사라진 학생폭력은 흉포화 광폭화돼지요..
알몸졸업식 옛날에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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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기자신들의 방법을 절대진리나 선으로 여길까에 대해서는.... 잘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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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자신과 정치적인 성향이 틀리면 아예 블로그를 방문안하면 돼지 않느냐라고 말씀을 하시고
글을 이래써라 저래써라하는것은 오버아니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 다 맞습니다. 제가 오버를 하고 있는것인데...
사상의 자유가 있듯히 사상을 비판할자유도 있겠지만, 확실히 제행동은 오버가 맞습니다. 이제 왠만해선 진짜 진짜 덧글을 안달려고요(사실 하고싶은말 충분히 그즘 다한것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이후부터 쓰는 글은 나시카님하고 상관이 없는글인데요.... 여기 덧글에 과격한 진보?들이 가끔 오는것 같아 그들 보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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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선거에 졌다고 세상망한듯이 굴면안됩니다.
대한민국 망해라 난 집안에서 팝콘이나 먹겠다
와 선거졌다 대한민국정치수준이 글러먹었다
선거졌다 나이든 사람죽어야 대한민국정치가 바뀐다...

사람들이 말은 안해서 그렇지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습니까? 왜 한심하게 보는줄 알아요?
아는것은 적은데 감정과 행동이 방방뛰는것같아 보여서 한심해보이는것입니다.


새누리당이 친일파후손이라고요?
민주당도 친일파후손입니다. 원래 민주당은 이승만이가 안끼워준 친일파(지주)들이 구심점이 되어 만들어진당이에요... 민주당 새누리 둘다 친일파 후손입니다.(마찬가지로 두군데다 독립운동을 한사람과 그 후손이 다있습니다)

새누리당이 병역비리의 온상이라고요.
김대중은 그럼 병역이행을 마친사람입니까?(목포해상방위대는 있지도 않는 조직이에요)
박원순은 자기아들주소를 몰라서 검사를 못받는다고 그래요?


재벌들세상이라고요?
그래요 재벌갑질은 질렸습니다. 잘못된거죠 고쳐야합니다. 그러나 재벌들만 갑질하는것이 아니라.
학급의 일진들도 갑질하고, 아파트 주민들도 경비앞에서 갑질합니다..
모두 갑질하는것이 잘못되었지요..

재벌들은 천하무적이라고요?
그런데 한국 재벌사같은거 공부해보세요 재벌들이 얼마나 많이 망했나.....
(보면 20년이상존속하는 재벌이 잘없어요....)
(그냥 기업은 5년이상존속하는 기업이 30%입니다. )

지금도 많이 망해요..
소식들었어요? 테슬라에서 4000만원에 전기차판다고 하는거
현대차도 장담못해요(기업미래를 그누가 장담하겠냐 만은...)


영남정치인이 영남만 발전시켰다고요?
경북에 가봐요 얼마나 못사는지...
경남은 분명발전히 많이 되었지요 하지만 일본인들이 경남이 일본에서 가깝다고 여기다 공단세워달라해서
위치가 거기선정된것도 커요...(대통령은 거의다 경북출신이었는데....)
진짜 지역편중으로 발전시킨것은 서울 경기지....


새누리는 부자들만 편들어준다고요
민주당집권때는 부자들한테서 뭐 뺏아서 뭐 했나요???
이거 설명해드리자면
자 아까 기업이 망하는것을 이야기드렸지요
어떤사람이 100만원 벌고 어떤사람이 1000만원벌면
1000만원버는 사람에게 돈많이 거두어서 100만원버는 사람에게 복지하면 그것으로 계산끝일것같지요
만약 그사람이 위험부담(즉 사업과 투자 및 기업경영)을 감수하고 돈을 번거라면...
그사람이 1/5 확률로 성공확률을 뚫고 1000만원버는거라면
이사람에게 800만원세금거두어가버리면 이사람 기업경영하겠어요?
확률따지면 200만원벌면 본전인데..
그러면 대한민국의 부자들이 망하는 가능성을 고려해서 사업의욕이 안꺽일정도로만 세금을 거두어야겠지요?
그런데 다른나라와 비교해서 우리나라가 부자들에게 세금 적게 거두는거 아니에요...
만약 설령 전문가들이 거짓말을 하는거라면 근거를 따져서 설명해야지
빼액~~~~ 어용이거든요 근거는 없거든요 그냥 어용이거듼요~~~ 빼액
하면 되겠습니까??
암튼 이미 부자들에게 거둘거 다거두고 있어서 민주당이 집권(김대중,노무현)때도 부자증세 서민복지
이런게 안되었던것입니다.
물론 그후에도 부자증세 서민복지 추상적인 구호만 외치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따져묻지않고
표주니까 민주당도 새누리도 복지코스프레하고 잇는거죠...


그외에도 많은데...

새누리찍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찍는거야 자기 찍고 싶은데 찍으면 그만인데...

새누리가 악이고 진보가 선이다 하면서 방방뛰어서는 안돼요.

진보가 새누리보다 조금 더 좋다 이래생각해야지..

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상은 절대선이고 세상이 거기에 동조안해준다고 방방뛰어서는 안돼요.

보기도 싫고 그사람 밑천도 뻔히 보일뿐더러...

그런사람이 애초에 민주주의란것을 하겠어요 자기가 절대선이고 다른쪽이 절대악이라고 생각하는사람이

다수결의 원칙이나 대화와 타협같은것을 하겠냐고요...

죽창들고 전경눈이나 찌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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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또 흥분을 하는데

며칠전 어떤 아주머니 글을 읽었습니다.

생활비가 모르자 빚을 얻어 썯는데 버는돈이 너무적어서 신용불량이 되었다고요

회생신청을 해서 절차를 밟고 있는데....

근래에 남편이 시위에 나가서 범칙금 300만원이 나와서(순수하게 시위만한것은 아니겠죠?)

생활이 너무빠듯한데... 걱정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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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면 어떤여고생은 프롤레탈리아 혁명을 외치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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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사람들은 이사람들 개인에게 가장 큰책임이있겠지만,

애초에 혹세무민한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감정에 취해서 추상적인 말들을 쏟아내던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사상의 자유도 좋다지만.

아니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자기블로그에 자기가 하고 싶은말쓰는것이 당연하지만.

나시카님 한국경제 정치 이야기하실때, 나폴레옹전쟁 역사글 쓸때 공부하시는 만큼 공부하시고

쓰는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경제나 정치가 나폴레옹전쟁당시보다도 훨씬더 복잡할텐데 말이에요)


전에 의료개혁에 관한글 쓸때, 어떤의사분이 자신의 모르는 분야를 쓰면 말을 좀 조심해야하는데라고

나시카님을 비판한글이 있었을때 저도 자기블로그에 자기가 쓰는것인데라고 무슨상관이냐고 글을 적은적이 있지만,


솔직히 글 쓸때 씨끄러운일이 많이 생기는것은 공부나 사색을 적게하고 쓴 이유도 큽니다.

정치이야기 써서 그런이유도 있지만.....

예를들어 단순한 전쟁사라도 고증이 틀리면 게시판 난리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전쟁에 관한 글에서 조용한이유는 나폴레옹전쟁이 한국사나 2차세계대전같이 인기가 없어서

아는사람이 많이 없고 또 나시카님이 국내블로거중에서는 나폴레옹전쟁에 대해서 가장 전문가이기때문에

조용한것입니다.

정치이야기쓰면 시끄러운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나시카님이 정치 경제에 대해 전문가수준이 아니여서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의 정치적주장으로 다른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려면 공부를 조금더 깊게 하시고 말씀 하시는것이

더 효과가 클거라 생각합니다. 글속에 간접적으로 암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주장을 전하려는 것보다는.
정원님 블락 안됩니까? 남의 블로그 와서 뭐하는 짓인지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음 본인 블로그에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젠 제가 지쳐서 여기 블로그를 이제 안올려고요...
대충 보고 휘익 지나가세요....^^

정원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댓글이 활발해 지는 것 같네요....
좌파적(정치적) 자유주의자라는 말이 있습니까? 좌파라하면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정치관을 갖고 동맹을 맺은 사람인데... 현재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체제인데 자유주의체제와 좌파가 어찌 결합한단 말입니까?

->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유주의가 사회정의를 보장해야 한다는 정치 사상이며,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기점으로 사회복지나 사회보장제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에 가까우나, 그러한 정책을 자유주의 안에서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로 분류되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고 정치적으로는 의회를, 경제적으로는 노동조합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사상인 사민주의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좌파 정부가 기존의 여당의 친기업 친시장 정책을 수용한 영국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 총리가 그러한 케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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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제적인 자유는요? 나시카님은 분명히 "부자들이 고생해서 부를 쌓았으니 그 부를 가져올려면 우리도 고생할각오를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에 사유재산의 보장 또한 분명존재하지 않나요?
"중소기업적합업종을 해야한다"
자유주의에 상거래의 자유또한 포함돼지 않나요??
나시카님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지난번 드래프트 데이 관련 글을 다시 봤는데 Nasica님은 중소기업적합업종에 대해 해야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판단을 명확히 내리지 않았습니다. 원 글을 다시 보셔야 할 듯합니다. 이미 정원님은 Nasica님의 성향을 미뤄 짐작하고 그에 대한 논리를 펴신것 같은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여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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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질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질렸습니다.

특히나 자기자신들을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자신의 상대방을 악(惡)이라 생각하는 태도에 질렸습니다.
자신들의 이론이나 방법을 유용성의 측변에서 보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내야할 절대선(善)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
질렸습니다.

-> 어버이 연합과 같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한 평가가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좌 우를 막론하고 이러한 태도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하지만 불행히도 정원님의 글을 볼 때 님도 그런 평가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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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이후부터 쓰는 글은 나시카님하고 상관이 없는글인데요.... 여기 덧글에 과격한 진보?들이 가끔 오는것 같아 그들 보고 글을 씁니다.

-> 굳이 Nasica님의 글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여기에서 장문의 연설을 토해내실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댓글에 대해 자신의 댓글을 정.리.하.셔.서 다는것이 맞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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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글 쓸때 씨끄러운일이 많이 생기는것은 공부나 사색을 적게하고 쓴 이유도 큽니다.

정치이야기 써서 그런이유도 있지만.....

-> 원래 정치 이야기는 시끄러운 겁니다. 그리고 글에 대해 시끄러운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 공부나 사색을 적게 하고 쓴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하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08.2.25자,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 토머스 프리드먼과의 인터뷰 기사 中

김=어떤 게 좋은 칼럼입니까.

프리드먼=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반응 중의 하나를 받는 칼럼입니다. 첫째, 독자가 ‘그건 몰랐네’라고 느끼도록 지식을 주는 칼럼. 둘째, ‘그렇게는 생각 못했네’라고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는 칼럼, 셋째,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생각을 당신이 제대로 썼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칼럼, 넷째, ‘당신과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어’라고 할 정도로 논란이 되는 칼럼, 다섯째,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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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폴레옹전쟁에 관한 글에서 조용한이유는 나폴레옹전쟁이 한국사나 2차세계대전같이 인기가 없어서 아는사람이 많이 없고 또 나시카님이 국내블로거중에서는 나폴레옹전쟁에 대해서 가장 전문가이기때문에 조용한것입니다.

-> 공부가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건가요? 앞의 주장이랑 많이 달라지네요. 그리고 우리가 나폴레옹 전쟁에 대해 문외한일지라도 이렇게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것도 정원님이 말씀하신 바와 많이 다른 이야기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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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야기쓰면 시끄러운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나시카님이 정치 경제에 대해 전문가수준이 아니여서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의 정치적주장으로 다른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려면 공부를 조금더 깊게 하시고 말씀 하시는것이 더 효과가 클거라 생각합니다. 글속에 간접적으로 암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주장을 전하려는 것보다는.

-> 정치를 전공으로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상식과 벗어난 법률이 탄생하거나 뻘소리를 내뱉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이 떨어져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걸까요?

이제 지쳐서 블로그에 안오는 것은 자유이긴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공부를 깊게 하라고 주장하기 전에 과연 나 자신은 세상의 모든 분야의 지식에 Nasica님의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지식 만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사상사는 어렵네요..제가 공부가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프리드먼=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반응 중의 하나를 받는 칼럼입니다. 첫째, 독자가 ‘그건 몰랐네’라고 느끼도록 지식을 주는 칼럼. 둘째, ‘그렇게는 생각 못했네’라고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는 칼럼, 셋째,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생각을 당신이 제대로 썼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칼럼, 넷째, ‘당신과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어’라고 할 정도로 논란이 되는 칼럼, 다섯째,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칼럼입니다"
칼럼이야기는 재미있네요.


-> 정치를 전공으로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상식과 벗어난 법률이 탄생하거나 뻘소리를 내뱉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이 떨어져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걸까요?
-->그사람들은 다른 문제가 있겠죠.. 하지만 nasica님의 경우는 현대사회와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에 비해
현대사회경제에 대한 공부가 매우 부족한것은 사실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나시카님의 공부가 모지라다는것은 현재사회와 경제에 국한된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며, 나시카님이 만약 현재사회아 경제이야기를 하고싶다면은 공부를 많이 하시고 해야 설득력이 있을것입니다. 아니면 저아닌 누군가로부터 반박이나 당하고, 그것을 제3자가 보고 나시카님의 주장과 반대입장으로 설득될것입니다. (솔직히 나시카 님의 앞의글뒤져보면 저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반박을 했는데, 추상적인 말로 회피할뿐 반박하는사람들한테 제대로 정론을 펼쳐서 설득시킨 사례는 없습니다.-현대사회경제이야기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렇게 할수도 있겠죠.내공부는 충분하다. 내말에 동조하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싫으면 가라.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이 세상에 변화가 없을것입니다. 선거를 하던 내전을 하던
상대편사람을 자기사람으로 설득해서 끌여들여야 이기지. 자기 좋다는 사람만 데리고 하면 현상유지밖에 안됩니다.
현상유지여도 난 상관이 없다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자기블로그에 온 사람들도 제대로 설득시키지도 못하면서,
아 선거라는 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고 내 이상은 훌륭한데, 사람들의 정치적인 수준이 높지 않아
내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가 돼지 않구나
스페인민중들의 낮은 정치적수준이 낡은 스페인정부를 세웠듯이 ..
아 대한민국도 그렇구나...
하는것은 nasica님 스스로가 문제가 있구요.

게다가 제가 nasica님이 자신의 정치적인 주장을 역사글에 넣었다를 실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부연하는데,
저기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현지보급(본문에는 지역을 훑었다)을 잘했다라고 일부러 표현을 해서
시민정신에 투철한 프랑스군이 상벌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영국군을 이겼다라고 서술을 했는데,
저기서 지역을 훑었다라고 표현한것은 정확히 약탈입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약탈을 많이 잘했기 때문에 영국군보다 뛰어난 기동을 보여준것입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와 영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도덕적인 이야기를 제처두더라도 군사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약탈하고 게릴라를 잔인하게 진압할수록 스페인 게릴라들은 늘어나고
영국군은 점점유리해집니다.(사실 저 전투는 장기적으로 보면 영국군의 패전이라고 부를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제가보기에는 자신의 정치적의도(사회주의적 방법)을 암시적이고 비유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역사글을 쓴것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쓸려면 암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쓰기보다 많은 공부를 하시고 그 누구도 쉽게 반박못하는 정론을 가지고 쓰는것이 스스로의 정치적주장을 함에 있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제가 이렇게 장문의 글을 썼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최홍락님이 저보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항상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보고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펼치려면 자기가 블로그를 파서 거기서 해라고 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공부좀 더 하고 아예 블로그를 열까 아예 인터넷방송을 할까 생각중입니다.(물론 본업으로는 못하고요)


아무튼 여러모로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대사회와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에 비해현대사회경제에 대한 공부가 매우 부족한것은 사실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나시카님의 공부가 모지라다는것은 현재사회와 경제에 국한된이야기입니다.
나시카님이 만약 현재사회아 경제이야기를 하고싶다면은 공부를 많이 하시고 해야 설득력이 있을것입니다. 아니면 저아닌 누군가로부터 반박이나 당하고, 그것을 제3자가 보고 나시카님의 주장과 반대입장으로 설득될것입니다.

-> 부족한 문제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로 봐야할 문제인 듯 합니다. 사실 현대 사회 경제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경제학에 대해서 완벽하게 안다고 할 수 없고, 설령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그걸로 현대 사회의 변화를 모두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Nasica님이 추상적인 말로 회피한다고 보시는 것은 자유이나 논박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고 그것을 능력이 없다고 매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글을 찾아서 읽어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한 배려를 가볍게 여기면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어느 친구를 그런식으로 섣불리 평가했다가 나중에서야 크게 깨달았던 실책을 경험한 바 있는데, 이번 글을 보면서 그게 생각이 나네요.
아는것도 하나도 없고 이해할 능력도 의사도 없이 내용이라곤 좌파우파 따지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의 댓글은 지워 버리는게 좋을듯..
제 경험상, 하지 말라는데 계속 하면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한번 반응해주면 자기들끼리 불러모아서 난장판을 칩니다. 제가 속했던 거의 모든 커뮤니티는 그런 사람들이나 모 사이트에서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다 붕괴되더군요. 과감하게 이런 행위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차단해버리시는 것이 나시카님과 이 블로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모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일까요? 누가 잘못하거 있는것일까요?

"현실적으로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잘못된것일까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제가 잘못된사람일까요?

차단할려면 하고 덧글지우면 지우세요... 뭔상관입니까. 저같은 사람말 무시해버리고 그것으로 끝내면 현상유지밖에 안되겠제요. 그렇게 현상유지하면 저랑같은생각을 가진사람이 아닌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데 저랑같은 정치적성향을 가진사람에게 유리하지요.


이세상에는 ""현실적으로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임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속는 사람보다 안속는 저같은 사람이 더 머릿수가 많습니다.

제행동은 단지 혹세무민에 속고 피해보는 사람에게 안타까워서 한행동입니다..(이렇게 쉽게 혹세무민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어린사람들이나 사회경험이 적은 주부들이지요)

대다수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안 속습니다.

그것이 새누리당과 보수가 계속 선거에서 이기는 이유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꽉막혀서 새누리당을 계속뽑아서
이기는것이 아니라)

특히 광우뻥 촛불시위이후로 안속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구요.

대한민국의 정치의식수준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현실적으로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망쳐놨고
그로인해 과학도 일으키지 못하고 개화도 못하고 일본식민지가 되어버린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보면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내세우는 사람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겠네요.

정말 제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난장판치는 사람들을 모두 차단시켰지요? 그중에는 나쁜놈들도
있엤겠지만 실학자도 있었는데요.

와 정말 자랑스럽다

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현실적으로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하는것을 비판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취급당한다니.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이런이야기한거 제가 처음이 아니에요
다른분들도 "(일반론적이야기로 가르치려든 다며) 노땅들이 하는 방식"이라던지 "(잘모르는 분야의 주제를 쉽게이야기한다며) 잘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한다" 라던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고 추상적인이야기뿐이다" "(좋은이야기만 하고 정작 손해보는 행동은 안할려한다며)이런말을 할려면 행동도 따라주어야하는거 아닌가요"
라는 덧글을 적은분들이 있어요 앞에 정치글 덧글에 보세요.

저만 특이해서 이런이야기 하는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도 저같이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특이한것은 남들은 한마디로 쿡 찌르고 그것으로 끝내거나, 아니면 속으로 생각하고 표현을 안하는데
주저리주저리 장황하게 덧글을 다는게 특이한거구요.

제가 하는 이야기자체가 특이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원님의 논리는 허수아비 때리기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주장하지도 않고 가정하지 않은 논리까지 가져와서 맘대로 반박하니 답답하네요 그리고 관련 주제의식이 있으면 본인 블로그를 통해서 표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군의 후퇴 과정과 상관없는 긴글을 보니 원래 글까지 훼손돠는 것 같습니다.
정원님은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바에 대해 정확히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사문난적입네 자화자찬을 하는 식으로 정신승리로 끝나는 걸 보니 배울 자세도 안되있고 더 발 전할 자세도 안되있는 것 같네요. 이기고는 싶은데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남들은 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네 당신의 논리는 틀렸네 하는 걸보니,지금까지 술취한 사람을 상대한 것 같아 참 허탈합니다.

사문난적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사문난적이 성리학에 반하는 논리를 공격하기 위해 딱지를 붙이는 행위라고 일컫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거 엄연히 왜곡된 표현입니다.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송시열의 경우 주자의 의심가는 문구에 대해 재해석을 하여 성리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윤휴 등을 비난하였을 때는 두 사람 간의 계파 간의 정치적 이슈가 원인이 된 것으로 송시열이 윤휴와 처음 의견 차이를 보인 시기에 송시열이나 기타 성리학자들은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칭하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이덕일이라는 유사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고 역사를 다 이해한 것 마냥 말씀을 하시는데, 본인이 말한 것처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서 그런 용어를 쓰면 웃음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뿌듯하면 안될일이고 부끄러워해야 정상입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글을 쓴 것이니까...

그러고보면 "보편적인 도덕적명분을 가지고 세상을까고 "있어보이는"말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신은 고매한사람이요"라고 내세우는 사람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겠네요.

-> 앞에서 송시열을 예로 들었으니 계속 하건데 보편적인 도덕적 명분을 가지고 있어보이는 말을 했던 송시열은 대동법을 찬성하였으며,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군을 창설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엿죠. 청나라의 과학기술 도입 및 일본과의 교역확대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원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조선의 선비 계층이 그리 물로 보일 수준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문난적이란 표현은 어느정도 수준이 있는 상대에게 쓸 수 있는 말이지 본인이 이상한 정제되지 않는 화풀이, 분탕질을 해놓고 사문난적이란 표현을 쓰면 있어보일지는 몰라도 뭘 모르는 겁니다.

혹세무민에 넘어가는 사람들의 행동이 안타까우면 공부부터 더 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을 설득할 수준의 지식을 정제된 글로써 풀어낼 수 없는 지식수준으로 여기에 와서 누구에게 글을 쓰면 되네 안되네 하는게 더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사문난적에 대해 잘배웠습니다.
모르는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무식이 제 마음에 수치심을 주네요
오버해서 죄송합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아무리 포장을 한다하더라도 패배자입니다.
송시열이 그런 참신한 주장을 했더라도 왜 그것이 실현돼지 못했을까요?
바록 거기에 조선시대 선비를 물로 볼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세계관(사고방식체계)에 한계가 있었던것입니다.
대동법 과학기술도입주장 이런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이세상 어느민족도 서양과학기술을 보고 받아들이지 말자고 한 민족이 없었습니다.
흔히들 대원군 때문에 우리나라 개화를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대원군도 쇄국을 하면서도 과학기술도입을 위한 방책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대원군 실각후에도 우리나라에서 거금을 주고 외국인을 데리고오며 유학을 또한 보내며
서양과학기술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려했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아예 진도자체가 못나갔습니다. 반대하는사람이 있어 과학기술을 못받아드린것이
아닙니다. 다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싶었는데 아예진도조차 못나가고 실패하고 맙니다.
이실패를 보고 많은 개화론자들은 자괴감에 빠져 조선을 개화시킬려면
일본에 종속되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친일파가되어버립니다. (이완용이 그런 케이스죠)

그럼 서양기술을 도입하는 정책을 수립하느냐 마느냐 그것을 주장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이야기가
아니라는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핵심일까요? 사고입니다. 사고체계

왜 메이지유신지사들이 해외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막부를 부수었겠습니까?
막부는 적극적으로 개항을 하려했어요...
그래도 메이지 유신지사들이 부수었죠. 바로 구체제(막부중심의 일본 봉건사고체계) 자체를 부수어야 모든게 가능하다는것을 알고 있었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사대부와 조선의 선비들은 구체제(옛날 사고방식체계)를 존속시키며 과학기술을 수용하려했습니다.
(결과는 실패)
이것이 선비의 한계고, 선비를 물로 볼수 있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도... 우리나라도 발전하려면....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나, 486의 사고방식,
유교문화, 일본식 군사문화 및 관료주의도 다 부수어버려야겠지요....

제가 계속 nasica 님에 부정적인 글을 쓰는것의 이유가
예전에 486 486 그런이유가 사고체계자체가 옛날 사고체계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뭐 이야기 해봐야 끝도 없을것같고....

자신의 사고방식체계가 시대를 따라가게끔 계속 바꿀려면 본인 스스로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하는데
아예 자신의 사고방식체계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물론 여기계신분들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더이상 뭐 어쩌지도 못할것같고


그리고 조선시대의 선비이야기도 더 하고싶지만... 이제 여기블로그는 아예안들어올거라서...
덧글도 그만 달고싶네요...
혹시나 계명구도(鷄鳴狗盜 )라고

저 정원*이라는 사람이 개소리나 닭소리를 내고 있더라도

옛고사성어에 개소리나 닭소리를 내는 사람도 쓸데가 있다고 했으니

정원*란 사람의 말에도 건질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그리고 "그러면 뭐 어떻게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이야기야" 하고 호기심을 가지는 분들을 위해

tv 프로 하나 소개해드릴께요

kbs 명견만리 시리즈중 "일자리가 사라진다"편입니다. (2015년 7월 23일 방송)

http://onairkorean.tv/bbs/board.php?bo_table=streaming04&wr_id=9564

이것은 그냥 이상한 네티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국내유명대학교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니

신뢰를 가지고 들으실수 있을것입니다.

(이거 보고 여러분들의 사고체계에 충격이 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저 이제 이블로그아예 안들어올테니 저에 대한 덧글 달아도 저는 안봅니다.

혹시 항의글 같은거 쓰셔서 저한테 보여주시고자하시면

stockmornig@naver.com으로 메일로 보내주세요
대원군 실각후에도 우리나라에서 거금을 주고 외국인을 데리고오며 유학을 또한 보내며 서양과학기술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려했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아예 진도자체가 못나갔습니다. 반대하는사람이 있어 과학기술을 못받아드린것이 아닙니다. 다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싶었는데 아예진도조차 못나가고 실패하고 맙니다.

->실패의 원인을 짚어내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어리둥절해 하실 많은 분들을 위해 어리석지만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사상의 경직성 문제를 떠나서 조선의 경제적 수준이나 재정 수준이 그러한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조선의 경제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1609년 대일국교정상화와 1661년 청의 해금정책으로 조선은 일본과 청의 중계무역을 하며 수익을 거뒀습니다. 구체적으로 연 40척의 상선이 은, 동, 납, 유황들을 가지고 와 무명, 쌀과 교역해 갔으며, 17세기 왜관에서는 조선산 해삼, 인삼 등을 수출해 은, 동, 물소뿔을 얻고 이를 가지고 중국에서 명주실, 비단을 수입해 일본에 재수출함으로써 은을 결제수단으로 2~3배의 차익을 실현하였습니다.

그러나 1683년 청의 해금정책인 천계령이 해제되고 1687년 청일국교수립에 이어 1713년 중국 상인들이 대일 직접 무역을 개시하자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중국산 비단의 수입대체를 추진함과 동시에 아메리카산 인삼과 중국산 인삼을 도입하며 조선산 인삼의 수입대체전략을 실시해 조선의 중계무역은 쇠퇴하게 됩니다. 이에 18세기 대중 가삼수출에 이어 19세기 금광 개발 및 대중 금수출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비단의 수입대체를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조선의 경제는 침체기로 빠지게 되지요. 조선의 영정조시대의 르네상스 이후의 침체기는 이러한 배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원격무역 및 해상무역이 금지된 상황에서 원격지유통이 일본에 비해 낙후되었고. 그나마 개성 일대의 송상을 제외하고 대규모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선이 과거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절과 같이 관허 독점과 이권추구 행위가 만연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왜 메이지유신지사들이 해외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막부를 부수었겠습니까?
막부는 적극적으로 개항을 하려했어요. 그래도 메이지 유신지사들이 부수었죠. 바로 구체제(막부중심의 일본 봉건사고체계) 자체를 부수어야 모든게 가능하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 혁명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네요. 구체제의 타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의 구체제 타파를 위한 혁명은 오로지 혼란만 부른 것이다? 이게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는 겁니다.

일본의 경우도 조선과 같이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유지하여 조선에서 유입된 유교적 질서 체제를 사상 처음으로 구현한 무사 정권이었습니다만, (정원님이 그렇게 경멸하던) 산킨코타이 등 독특한 지방 영주 통제 정책으로 전국 단위로 발달한 상업이 뒷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관동지방과 동북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메이지 유신도 가능했던겁니다. 뒷날의 일본 제국군대의 태평양 전쟁 시기에 벌인 뻘짓을 보면 일본의 의식수준의 개혁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술취한듯 정제되지 않은 글로 누굴 설득하겠다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고 딱 술마시고 주정하는 투의 글이 이분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요. 나쁘게 말 안하려고 했는데, 저 자신이 소인배인지라...그렇게밖에는 표현이 안되겠습니다.
저 저격수 자세는 일본만화 진정남 나폴레옹 - 사자의 시대 에서도 나왔던 저격장면이네요...
언제 기회되면 진정남 나폴레옹 - 사자의 시대 한번 보세요. 북두신권을 쓰는 사나이에게 10만 대군을 주었으니 세계제폐는 당연지사 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ㅎㄷㄷ
그 다리위에 깃발들고 쳐들어가는 장면에선 맨손으로 적을 도륙... ㅎㄷㄷ
오늘부터 KBS2에서 BBC에서 만든 전쟁과 평화가 하네요. 그 뒤에는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기 다큐가 하고요. 꺄~ 엑스파일의 그 스컬리가 지금 나오네요ㅋㅋ 관심있는 분들은 지금 바로 채널고정을^^
스컬리가 전쟁과 평화에선 뭘로 나오나요?
저도 조금 봤는데, 무슨 러시아 귀부인으로 나오더군요. 처음엔 못 알아봤습니다. 많이 헬쓱해졌더라고요.
서양검 연구하시는분(http://zairai.egloos.com)께 물어봤는데,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기록을 보면 평소 철제 칼집과의 마찰 때문에 무디기로 악명 높았던 영국 기병대의 군도가 이때는 대단히 날카로왔는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여 프랑스 기병들의 팔을 단칼에 절단해버리기도 하고, 프랑스 기병의 머리를 내리친 경우 적병의 정수리부터 거의 턱까지 쪼개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기병의 1796 중기병도였다면 무게가 칼 끝으로 쏠려있어서 타격력이 강한 탓에 이부분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고요.
테블릿으로 써서 전에도 짧게 답글 달았는데...정원님 더 긴 말 안하겠습니다. 좌파적 자유주의가 성립 안되고,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된 자유민주주의를 저렇게 확신에 차게 단 하나로 대답허시는 분이니...(자유가 단 하나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며 시장경제질서도 자본주의만 뜻하는게 아닙니다)그리고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회국가 원리 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원님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모순되겠군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념에 가득찬 사람이 무식하면 가장 무섭다고..본인의 이야기는 아닐지 고민해보시길
일명 19세기의 덩케르크 철수작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