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6. 3. 2. 22:20

1809년 1월, 스페인에서 도주하는 영국군을 쫓던 나폴레옹은 라발레트 공작과  양아들 외젠 보아르네 등 심복들이 보내온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가 대규모 병력 동원에 들어가는 등 중부 유럽에 전운이 감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심상찮은 분위기는 작년 바일렌에서의 참극 이후 공공연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을 충격에 빠뜨린 소식은 그것이 아니라, 파리에서 정치적 음모가 진행 중이고 그 주동자들이 다름아닌 자신의 권력의 양대 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주인공들은 바로 푸셰(Joseph Fouché)와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으므로 나폴레옹의 빛나는 승리나 영광과는 무관했지만, 나폴레옹의 권력 그 자체에는 란이나 마세나, 다부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들이었지요.  





(나폴레옹의 경찰 책임자인 푸셰입니다.  나폴레옹의 영광에는 수하 원수들의 공이 컸지만, 나폴레옹의 권력 유지에는 이 사람의 공로가 제일 컸습니다.)



먼저, 푸셰는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 책임자였습니다.  원래 카톨릭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던 촉망받는 학생이자 교수이던 푸셰는 일찌기 계몽 사상에 빠져든 뒤,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열혈파였습니다.  처음에는 온건파인 지롱드(Girondes) 파에 속해있었으나, 그들의 미적지근한 태도와 추진력에 실망한 그는 급진 자코뱅(Jacobins)에 가입한 뒤, 그야말로 날개단 호랑이처럼 활약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국왕의 처형에도 찬성한 시역자들의 하나였습니다.  다소 지나친 감이 있던 그의 열혈 혁명 정신의 악명을 드높인 사건은 1793년 말 리옹 반혁명 반란 사건이었습니다.  그 곳의 반혁명주의자들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고 온 푸셰는 정말 무자비한 처형으로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한번은 60여명의 반란자들을 줄줄이 묶어 세워 놓고는 그 앞에서 포도탄을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푸셰는 이 포격으로 반란자들이 만화나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깡그리 순삭되기를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희한하게 비효과적이서 이 60여명의 사형수들은 즉사하지 않고 팔다리가 절단되고 창자가 흘러나오는 등 끔찍한 부상만 입은 채 신음과 비명을 질러대어, 한폭의 지옥도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리옹에서 약 2천 명을 처형하면서도, 그는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반역자들의 피가 자유의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라며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후렴구 중 "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 라는 부분의 해석은 대충 "(적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의 밭고랑을 채우자 !" 정도입니다.)



그는 나중에 공포의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하며 제거 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나, 몸을 숨긴 채 그의 실각을 위해 열성적으로 공작을 펼쳐 결국 테르미도르(Thermidor) 반동을 통해 로베스피에르마저 단두대로 보내는 등, 아슬아슬하지만 끈질기게 권력의 중앙부에 남았습니다.  그러다 1799년 그는 마침내 그의 적성에 가장 잘 맞을 뿐만 아니라, 그를 프랑스 권력의 핵심에 올려놓는 직업을 갖게 됩니다.  바로 파리 경찰 장관직이었지요.  그는 광범위한 비밀 첩보 조직을 이끌며 파리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정치적 음모를 꿰차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런 그에게 자연스럽게 보나파르트를 앞세운 쿠데타 음모자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과 푸셰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성공적인 브뤼메르 쿠데타 뒤에는 푸셰의 정보 조직이 있었습니다.





(남자라면 쿠데타지요 !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입니다.)



이후 통령 정부를 거쳐 제정이 수립되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도 푸셰의 비밀 경찰, 비밀 정보 조직은 나폴레옹의 권력 유지에 매우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혼란스러웠던 혁명 정부에 질린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와 더불어, 자신의 독재 정치에 방해가 되는 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한 언론의 탄압과 감시부터 시작하여, 주요 인물들의 약점이 될 스캔들 수집에 이르기까지 푸셰의 비밀 정보 조직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정적이 될 만한 인물들의 동향 사찰은 푸셰의 주요 업무 중 하나로, 특히 여배우들의 침실은 무척 중요한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그런 약점을 쥐는 것이 매우 유용했거든요.  나폴레옹이 황위에 오른 이후 더 이상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 기도나 그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푸셰의 비밀 경찰 덕분이 컸습니다.





(1800년 12월, 극장으로 가던 나폴레옹의 마차를 노린 폭탄 테러인 생-니케즈 Saint-Nicaise 가의 음모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나폴레옹은 자코뱅파를 의심했으나, 푸셰는 끝까지 이를 왕당파의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해 자코뱅 출신인 푸셰가 결국 옛동료 감싸기에 나섰다는 의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앙기엥 Enghien 공작 사법 살인 사건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문제는 푸셰의 역할과 위치가 너무 중요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2인자를 키우는 성향의 지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제1통령 시절에 한차례 푸셰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경찰 총책에서 물러나게 한 바 있었습니다.  결국 황위에 오르면서 그를 다시 경찰의 수뇌로 앉히기는 했습니다만, 푸셰에 대한 나폴레옹의 불신과 견제는 계속 되었고, 푸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탈레랑입니다.  나폴레옹이 로마 교황청과 정교 협약을 맺고 실로 오랜만에 성당에 나와 예배 의식을 치를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의식 행위를 제대로 할 줄 알았던 사람은 푸셰와 탈레랑 뿐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이 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합시다.)


푸셰가 음지에서 국내의 정적들을 상대하는 왼쪽 날개라면, 탈레랑은 양지에서 외국 왕가들을 상대하는 오른쪽 날개였습니다.  탈레랑은 원래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 즉 구시대 지배층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장군들을 배출하는 귀족 가문이었는데, 그는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라 부득이 군문 대신 가톨릭 교회를 택해야 했습니다.  20세 중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주교(bishop)라는 고위직에 오른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금수저 계급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푸셰와 가진 공통점은 카톨릭 교육을 받았다는 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계몽 사상에 심취한 깨시민이었다는 점이었지요.  금수저 계급, 즉 제1 신분의 사제 계급으로서 1789년 삼부회(Estates-General)에 참석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의 사제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혁명 발발 1주년 기념식이었던 시민 연맹 축제(Fête de la Fédération)를 그린 그림을 보면, 가운데 서서 혁명 지지를 맹세하는 라파예트(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 후작과 함께 오른쪽 구석에 당시 주교였던 탈레랑이 보일 정도로 그는 중요 인물이었습니다.  인권 선언의 저자 중 하나가 탈레랑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1790년 열린 
시민 연맹 축제 Fête de la Fédération 모습입니다.  가운데 선 군복 차림의 남자가 라파예트 후작이고, 오른쪽 끝에 주황색 주교 복장을 한 사람이 바로 탈레랑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만들어진 헌법 수호 뿐만 아니라, 국왕에도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온건파에 속했습니다.  그런 그가 혁명 초기의 대혼란과 공포 정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운이었습니다.  1792년 9월, 그가 평화 협상을 위해 영국에 가 있는 동안 혁명에 비협조적인 귀족들과 사제들이 대량으로 학살되는 9월 학살 사건이 있었고, 온건파이자 귀족 출신에 고위 사제이던 그에게도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여 4년 후인 1796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스펙이 좋고 실력이 있던 그는 테르미도르 반동 후 외무부 장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796년~1997년에 이루어진 보나파르트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과정을 보고 나폴레옹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보나파르트가 이집트 원정에서 복귀한 이후, 탈레랑도 보나파르트를 앞세워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한 주동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독재 정치 하에서 꾸준히 외무부 장관을 맡아 프랑스의 국익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유서 깊은 유럽 왕가들과 대화를 하려면 제대로 교육받고 교양을 갖춘 귀족 출신의 실력자가 필요했는데, 탈레랑만한 적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1801년 교황청과 정교협약(Concordat)을 이끌어 낸 것도 그였고, 1802년의 아미엥(Amiens) 조약을 완성한 것도 그였습니다.  중부 독일의 군소 선제후들의 영토를 통폐합(mediatization)하며 라인강을 프랑스의 자연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것은 루이 14세 이후로 프랑스의 지상 과제 중 하나였는데, 이를 이룩한 것도 탈레랑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상실된 영토에 대한 보상으로 라인강 동쪽에 새로운 영지를 독일 선제후들에게 할당하는 과정에서 그는 선제후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착복하는 현실 감각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 탈레랑은 나폴레옹과 슬슬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탈레랑은 아우스테를리츠 이후 얻은 유럽의 질서가 프랑스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전후 오스트리아에 대한 가혹한 조치에 반대했습니다.  탈레랑의 주장은 나폴레옹이 거기서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이라는 사내의 야망은 탈레랑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이어 벌어지는 전쟁에 모두 반대표를 던졌고, 그런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나폴레옹은 기고만장하여 부정적인 탈레랑의 도움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외교 중 가장 중요한 무대였던 틸지트(Tilsit) 회담에서 탈레랑은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그의 역할은 나폴레옹에게 애걸하다 거절당하고 흐느끼는 프로이센의 루이즈 왕비를 위로하는 것에 그쳐야 했습니다.  





(이 그림은 전에도 소개해드린 바 있는 틸지트에서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그리고 루이즈 왕비와 빌헬름 프로이센 국왕의 모습입니다.  이제 보니 왼쪽 계단 위의 인물이... 오갈 데 없는 탈레랑이네요 !)



당연히 탈레랑은 스페인 침공에도 반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사업이 신통치 않게 돌아가자,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야욕이 이젠 프랑스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고 (매우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르푸르트(Erfurt) 회담에서,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넌지시 나폴레옹과 거리를 둘 것을 조언했고, 다른 통로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에게도 선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혹자는 탈레랑이 배신자라고 하지만, 그건 탈레랑 본인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비난이었습니다.  그가 충성하는 대상은 프랑스일 뿐, 나폴레옹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녕과 번영은 나폴레옹의 생사 여부와는 무관하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에게 새로운 동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로 푸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두 날개였던 이들은 정작 그동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아한 외교 책임자와 음흉한 비밀 경잘 수장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지요.  나폴레옹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둘 다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에도 프랑스의 안보는 물론,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자, 서로 생각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나폴레옹이 그 험하다는 스페인 전장으로 출정하자, 혹시라도 나폴레옹이 후사도 남기지 않고 전장에서 변을 당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의견에 일치를 보았고, 그 후임자로는 나폴레옹의 가장 가까운 인척이자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자신들이 조종하기도 쉬운 인물, 나폴리 국왕이자 프랑스 제일의 상남자 뮈라를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뮈라에게 이런 의사를 슬며시 떠보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나폴레옹은 제2인자를 두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밀 경찰과 외교의 수장인 이들을 감시하는 개인 정보망를 따로 가지고 있었고, 그 정보망이 1809년 1월, 스페인 어느 시골 농가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던 그에게 '푸셰와 탈레랑이 자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황제가 사고를 당할 경우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신들의 사전 계획이라고 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나폴레옹 같은 독재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몇 개월 뒤의 일입니다만,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군이 플랑드르에 상륙하여 제2 전선을 만드려 했습니다.  이때 푸셰가 국민 방위군, 즉 예비군 소집 명령을 내리면서, "비록 황제 폐하의 존재가 프랑스의 영광을 더 빛나게 해주기는 하지만, 황제 폐하 없이도 프랑스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자!"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적절한 격려사로 들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고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발체른에 상륙한 영국군은 대법국 황제 폐하 없이도 네덜란드 저지대의 모기들이 알아서 물리쳐 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들이 키워낸 이 두마리 사냥개가 주인의 발목을 물려고 자기들끼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분노에 가득차 대번에 파리로 귀환했습니다.  도착 당일 당장 푸셰를 소환한 그는 막상 그와 독대를 해보니 들이댈 구체적 증거도 없고, 또 뭐라고 그를 비난해야 할지 어정쩡 했습니다.  푸셰와 탈레랑이 나폴레옹 유고시의 후계자에 대해 쑥덕쑥덕했더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범죄 행위도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장 파리의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푸셰의 비밀 경찰 조직이 꼭 필요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푸셰에 대해서는 위압적인 태도를 보여주며 경고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불려나온 탈레랑은 다른 고위 장군들도 배석한 영접실에서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불벼락을 맞아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탈레랑의 죄목이나 모반의 증거 여부는 푸셰와 동일했습니다만, 1807년 이래 외무부 장관직에서도 이미 내려왔고 더 이상 열강들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 도움을 받고 있지도 않은 탈레랑은 푸셰보다는 더 만만했나 봅니다.  나폴레옹은 탈레랑의 지난 행적과 비리를 시시콜콜하게 들추며 (뒷끝 작렬!)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같은 방에 있던 장군들이 긴장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펄펄 뛰었으나, 의외로 탈레랑은 침착한 안색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나폴레옹은 탈레랑에게 "당신은 비단 양말 속에 든 똥.덩.어.리야 !" (Monsieur, vous n'êtes que de la merde dans un bas de soie !) 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썼는데도, 탈레랑은 안색이 조금 변한 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나폴레옹이 할 말을 다 한 뒤 방을 나가버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장군들에게 탈레랑은 차분히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C'est grand dommage qu'un si grand homme soit si mal élevé."  (이런 위대한 인물이 저렇게 버릇 없이 자랐다니 참으로 안타깝군요.)

나폴레옹을 놀라게 했던 '파리에서의 정권 전복 음모'는 결국 이런 식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도 없었고, 처벌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음모에 불과했거든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독재자 나폴레옹이 괜시리 화들짝 놀랐던 것이지요.  




(실력도 중요하고 야망이나 운도 중요하지만 결국 금수저에게는 못 당하는 법이지요.  진정한 승리자 메테르니히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동이 의외의 결과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기는 했습니다.  푸셰와 탈레랑이 나폴레옹의 후사에 대해 쑥덕거리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을 떠난 11월 초부터였고, 이런 움직임은 이미 탈레랑과 선이 닿아 있던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인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에게 곧 포착되었습니다.  메테르니히는 프랑스와의 결전 분위기가 무르익던 1808년 말 오스트리아 궁정에 이 소식을 들고 찾아갔고, 거기서 탈레랑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전달했습니다.

1) 파리는 나폴레옹을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2)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해도 러시아는 에르푸르트 조약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다
3) 프랑스의 정예 병력은 모두 스페인에 파병되었기 때문에, 중부 유럽에는 힘의 공백이 존재한다


3번 항목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나, 2번 항목에 대해서는 탈레랑의 이중 행위가 작게라도 분명히 영향을 미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1번 항목의 경우, 완전히 틀린 정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매우 과장된 것이었는데, 어찌 되었건 메테르니히가 물고 온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게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뛰어들 용기를 주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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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속도가 오스트리아급이라는 말씀에 욱해서...(농담이고... 면목이 없어서...) 원래 의도했던 것의 절반 가량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먼저 포스팅합니다.  앞으로는 긴 것 한편을 2~3주마다 올리지 말고, 짧게짧게라도 좀더 자주 올려볼까 생각 중입니다.  요즘 제가 노쇠했는지 예전처럼 에너지가 안 나오네요... 아이구 삭신이야...


헉! 내가 1등이다
너무 심하게 말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연재를 기다리는 많은 분들을 대신하여 말씀드린다는게 이런 파장을 가져올거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별 말씀을요. 제가 생각해도 요즘 너무 게을러졌습니다. 그리고 무플보다 더 마음이 찢어지는 악플은 없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몸부터 생각하세요 ㅜㅜ
그나저나 필리버스터도 중단되었다는디 테러방지법안 통과되면 이글도 다 지워지는거 아님끼 ㅎㄷㄷ
몸은 괜찮은 것 같은데 정신 상태가 문제인 듯요.
만화든 글이든 모아서 보는 게 재미있지만 기다리는 게 힘들죠... 쓰고 그리는 건 더 힘들고... 수고하셨습니다.
헉 내가 이등이다! 정말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자주 연재해 주세요^^
어유... 평일날 올려주시다니 이런 횡재가.. 재밋는 포스팅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탈레랑도 나파륜 폐하의 쌍욕에 부글부글 끓엇을듯 하군요. 다만 사리판단이 빠른 사람이라 겉으론 표출하지 않고 행동으로 표출한듯 합니다;;
나폴레옹은 스탈린이나 히틀러에 비하면 권력장악 과정이나 유지 과정이 뭔가 굉장히 어수선하네요. 음모 유출에 거의 날림이었던 쿠데타도 그렇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것도 살짝 아마추어같은 느낌? (...)

히틀러 같으면 부하끼리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도록 만들어서 충성경쟁 유도했을 테고, 스탈린은 숙청으로 싹 갈아업고 신과 같은 권력을 얻었는데 말이죠. 당대회 하면 스탈린 연설 뒤에 자기가 먼저 박수 그치지 않으려고 몇 분동안 미친듯이 억지웃음 지으며 손뼉에 불나라 박수치는 당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죠 ㅋㅋㅋ 스탈린이었다면 푸셰나 탈레랑은 불온 발언만 해도 유능함은 상관없이 진작에 굴라그로 끌려갔을 것 같은데...

수백만명의 인명손실이 몇 년 내내 일어나도 국내불만이 심하지 않던 이차 세계대전과 달리 수 만명의 전사가 국민들이 느끼는 전쟁피로도를 심하게 만드는 것도 다르네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전후 민주.자유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거 같아요 불만이 많아보였다는건 불만의 자유를 어느정도 부여했다는 거니까요
히틀러의 경우 정권장악에 가장커다랗게 도움을 주었던 요소가 라디오 였습니다.
괴벨스가 이러한 라디오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지요. 신기술에 신전술에 항상관심이 많았던 히틀러도
괴벨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활용합니다.
도조히데키도 라디오를 매우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스탈린의 경우는 잘모르겠네요)

아무튼 나폴레옹은 히틀러나 도조히데키에 비해 국민선전수단이 적었습니다.(신문과 행사가 유일하네요)
원래 고대 중세에는 건축과 종교를통해서 국민선전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계몽시대에는 건축과 종교가 둘다 힘을 크게 잃고 출판물 하나만 국민선전수단으로 유용했지요.
당시 계몽시대에는 국민선전수단으로 쓸만한 수단이 고대중세나 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던게 한요인으로
볼수있겠네요.)
또하나의 요인을 꼽자면 스탈린과 히틀러는 집권초기에 경제성장률을 매우 극단적으로 높이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러시아의 경우는 그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함)(경제개발5개년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맨처음에 스탈린이 세계최초로 만들었습니다.->만주국 경제정책에 영향->대한민국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영향)

하지만 나폴레옹은 경제성장률을 극단적으로 까지는 못높이고 정복전쟁으로 어찌어찌 계속 파산만은 면하게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나폴레옹 정권자체가 히틀러나 스탈린에 비해 취약해지는 결과로 이어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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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더 붙이자면 그당시를 배경으로 한 유로파(전략시뮬레이션)같은 게임으로
프랑스로 플레이하면
돈이 부족함, 근데 적국은 많아서 병력은 많이 유지해야함->병력이 많으니 다른나라 정복해서 그돈으로
적자를 메꿈->그러면 반란이나 적국의 공격이 더 많아짐->당할수 없으니 병력을 더키움->적자가 또 늘어남
->그래서 또 정복전쟁으로 적자를 메꿈->적국의 공격과 반란이 또 많아짐->그래서 병력을 더키움
->무한반복으로 되거든요
결국 그러다 플레이가 망합니다(프랑스가 졌다!!) ㅡ.ㅡ(대신 영국은 돈이 많아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플레이할수 있습니다)

프랑스로 플레이할때 이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려면 어느정도 적정선에서 외국과 타협을 하고 군축을해서
재정을 안정적으로 해야하는데. 그 절충이란것이.. 이게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자꾸 안되더라구요...

위에 푸세나 탈레랑도 나폴레옹을 배신?해가면서라도 외국과 타협을 하려했던것이 이해가됩니다.
그게 프랑스가 살길이었으니깐요.
나폴레옹은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또 대국민 선전 활동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문과 회람 등과 같은 활자 뿐만 아니라, 비주얼적인 선전물, 즉 그림과 연극 등에도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http://ppss.kr/archives/46633 을 참조하세요.
그리고 나폴레옹의 독재 정권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은 역시 경제 안정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나폴레옹은 기존 교회 및 귀족들의 자산을 매각하고, 화폐 개혁과 중앙 은행 설립, 그리고 강력한 보호 무역정책을 실시하여 프랑스의 산업을 어느 정도 부흥시켰습니다. 가령 리옹의 비단 산업 등은 나폴레옹의 보호 하에 꽤 발전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경제 활성화는 결국 기술과 상업의 발달이 있어야 하는데, 해상 무역이 꽉 막히고 영국과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았지요.

원래 패전국으로부터 뜯어낸 전쟁 배상금은 그 패전국과의 전쟁에 쓴 비용을 충당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러시아 등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해 배상금을 타내지 못하자, 대륙 봉쇄령의 한계 속에서 나폴레옹의 재정은 급속히 나빠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세금을 높여야 했습니다. 이는 곧 실각으로 이어졌지요.
나시카님 고견을 들려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말한것은 히틀러와 스탈린과 비교해서인데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이 히틀러나 스탈린과 비교했을때 선전의 도구가 적었고 경제적성과도 적지 않았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아 물론 저의 추측일뿐입니다.)

아무튼 고견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기다리며 잘 보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마지막을 알기때문에 불안해요.. 벌써 몇 해동안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끝날까봐서 불안하기도 합니다.
제가 회사에서 짤리는 한이 있어도 도중에 갑자기 확 접지는 않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도중에 회사에서 짤리면 블로그질을 매우 열심히 할 것 같군요.
예상치도 못한 업로드인데요 ^^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수저론을 국가로 놓고 보면 영국만이 금수저쯤 될듯한데 그 밑의 수저는 결국 금수저를 이기지 못하는가요? 인간관계나 국가관계 모두가 만약 그렇다면 좀 씁쓸한데요?..
예외도 있긴 있어요

미국은 영국이김.(독립전쟁).

그러고 보니 영국은 저때부터 그후로 쭉 금수저네요.
금수저 흙수저는 국가 단위로는 좀... 제가 아름다운 프랑스에 태어났어도 흙수저라면 뭐 불행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개인이 잘 되어야지요.
저는 금수저 흙수저가 국가단위로도 적용이 될수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구와 영토가 넘사벽으로 강한나라의 역사와 인구와 영토가 넘사벽으로 약한나라의 역사는 틀릴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각해보시면 될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외세의 영향이 아주 없이 사나요?

어떤나라는 자원을 물고 태어난 금수저 국가도 많습니다. 자원없이 노오오력을 해야하는국가도 있구요.

금수저와 흙수저는 국가에도 해당됩니다.


또 프랑스에서 태어난 흙수저이야기를 하셨는데 같은 흙수저면 사하라이남의 아프리카국가또는 에디오피아나 소말리아에서 태어나는것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흙수저가 덜불행합니다. 최소한 에이즈걸릴 확률(사하라이남 에이즈보균자 최대20%로 추정)이 낮거나 굶어죽거나 내전으로 죽을확률은 적으니깐요.
영광의 시절이 끝나고 끝없는 추락으로 빠져드는 나폴레옹을 보니 가슴아프네요.

틸지트 조약시점에서 나폴레옹은 참 망하기도 힘들었는데.. 하지 말란것만 다해서 쩝..
저동네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면, 영국이 금수저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흙수저들의 생활은 어딜 가도 흙수저일 뿐입니다.

더불어 저 라파예트의 경우 '1차 세계 대전'에서 그 이름이 다시 한번 언급됩니다.(물론 이름만)
그나라 국민이 금수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영국이라는 나라가 주변국들에 비해 금수저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라가 금수저라고 국민이 금수저라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독립을 도와준 프랑스에 은혜를 갚는 미국인들...
특히 산업 혁명기의 영국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청 제국보다 평균수명 딸릴 정도로 열악한 게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국력 차원까지 그걸 비하시킬 일은 아니지요. 참고할 만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됩니다만.
한가지..조금 견해가 다른게
탈레랑은 끝까지 종교협약에 대해서 툴툴거렸다고 하지요.
왜냐면 진즉에 신앙심따위는 팔아먹은 부도덕한 주교주제에
제일 먼저 사제직을 내팽겨치고 결혼까지 한지라 이제 다시 카톨릭 교회가 부활하는 꼴을 못봐주겠던지
이런저런 딴지를 많이 걸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정교협약에서는 나폴레옹의 외삼촌 격인 페쉬 추기경이나, 방데 반란군 출신의 모리 신부 같은 사람들이 주도적이었다고 봐야할것 같은데요.
탈레랑이란 남자 통찰력이 장난 아닌데요.. 나폴레옹이 탈레랑의 조언을 들었다면 세계사가 바뀌었을듯..
나폴레옹은 자만심이 컸었네요. 프랑스에는 자기가 없으면 안된다는 ...결국 그 자만심이 그를 파멸로 이끈 원인중의 하나가 된건지도...?
잘 읽었습니다.
나폴레옹 이야기 뿐만 아니라 뭐든지 나시카님의 포스팅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건강 조심 하십시오(*^_^*)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쥔장님 마지막 문구에 가슴이 짠 ~~~ 합니다.
아직까지는 갠적 취미라고는 하지만 장문의 글이다 보니 한편 한편 쓰시는게 여간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심려되네요.
담편 글 들이 넘 기대되지만, 쥔장님이 스트레스 받아서 어느날 갑자기 연재 중단이라는 강수를 두시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공짜로 뇌가 호강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위로의 말씀을 보내드리는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 됩니다.
댓글 보고 이런저런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항상 유쾌하고 즐거운 글쓰기 하시길 소망합니다.
빌헬름 왕의 표정을 보니, 우째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미모의 연예인 아내를 야쿠자 두목에게 상납하다가 분을 못 참고 결국 그 야쿠자 두목(재일교포 출신이라던가요)을 살해한 양반의 일이 생각나는 것이.... 그러고 보니 프로이센도 결국 워털루에서 블리허 장군의 부대를 보낸 덕에.... 그것이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는 얘기가 생각나는 것이.... 한잔 하면서 읽다보니 별....
윤필용 사건 나폴레옹 버전인가요? 역시 독재자들은 권력문제에 아주 예민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