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6. 3. 27. 22:37

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을 뒤에 업은 바이에른의 통치가 결국 티롤 민중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는 근대화와 세속주의로 포장된 바이에른의 정책이 결국은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탈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1809년 1월, 티롤 민중의 대표단이 비밀리에 비엔나를 찾아와 자신들이 계획 중인 반-바이에른 봉기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자, 그렇잖아도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 준비가 한창이던 오스트리아는 전쟁 선포를 결정하게 됩니다.  당시 비엔나 주재 프랑스 대사가 파리로 보낸 보고서를 보면 '1805년에는 비엔나 궁정만 전쟁을 원했을 뿐, 군대도 국민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궁정, 군대,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한다'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전쟁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전쟁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809년 2월 8일이었습니다.  이어 2월 12일 휴가 중이던 장병들에게 복귀 명령이 내려졌고,  동시에 카알 대공에게는 전군에 대한 총사령관(Generalissimus)직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황실 군사 위원회(Hofkriegsrat)의 의미없는 긴 회의와 간섭으로 인해 신속하고 효율적인 작전을 펼치지 못해 패전했던 지난 경험에서 배운 바가 있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전군이 동원되어 9개의 정규 군단과 2개의 예비 군단이 편성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지 않는 비독일권 지역에도 의용병(Freikorps, 자유군단) 모집이 요청되었습니다.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닐 뿐더러,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의 흥망을 걸고 하는 대규모 사업이었습니다.  개인이 관광 여행을 떠날 때도 가용한 여비에 맞춰 행선지와 시간표를 세심하게 짜는 것이 상식인데,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한 목표와 그를 이루기 위한 세부적인 계획이 있어야 했습니다.  과연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지휘하게 된 카알 대공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





(보헤미아의 위치입니다.  현재의 체코 지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카알 대공이 원했던 것은 지금의 체코 지방인 보헤미아(Bohemia)에 주력을 집결시킨 뒤, 거기서부터 중북부 독일을 관통하여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크게 남북으로 양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적을 완파하기 위해서는 분산시킨 뒤 각개격파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카알 대공은 그렇게 할 경우, 역시 나폴레옹에 대해 이를 갈고 있던 북부 독일의 프로이센도 용기를 얻고 반나폴레옹 봉기에 동참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카알 대공은 쉴레겔(Karl Wilhelm Friedrich Schlegel)이라는 철학자에게 의뢰하여 "독일 민족에 대한 호소문"을 작성하여 휘하 병사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호소문에서 카알 대공은 이번 전쟁이 단순히 라인 연방국가들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침공이 아니라, 프랑스에게 정복당한 독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며, 오스트리아는 라인 연방내 독일 선제후 국가들의 주권이나 독립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쉴레겔의 초상입니다.  젊은 시절 무신론자였던 그는 나이가 들면서 강경파 카톨릭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원래 이번 전쟁에 반대했던 카알 대공이 그래도 전반적인 판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오스트리아군 단독으로도 잘만 한다면 라인 연방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독일 지역을 일시적으로 장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웅대한 나폴레옹 제국의 일부 군단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스페인에 묶여 있다고 해도, 조만간 나폴레옹이 정예 병력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올 것이 뻔했습니다.  제5차 대불동맹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무대인 독일 전장에 실제로 병력을 투입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 뿐이었는데, 과연 프랑스군 전체와 맞서 싸울 역량이 오스트리아에게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 앞에 엎드려 있던 독일 각국의 봉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를 위해 나폴레옹에 대한 원한이 큰 프로이센 인근으로 전장을 정한 것이고, 그 일대의 독일 민족에 대한 민족 감정에 호소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츠 1세의 동생으로서 황제의 권위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었던 카알 대공에 대한 견제는 여전해서 그가 완전히 100% 자신의 뜻대로 전략을 펼치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지휘권을 카알 대공에게 넘겼다고 해도 여전히 군 작전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던 황실 군사 위원회(Hofkriegsrat)의 귀족 꼰대들은 카알 대공의 작전 방향에 태클을 걸었습니다.  군사 위원회의 귀족들은 두가지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먼저, 역시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 쪽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남부 오스트리아에 요한 대공이 거느린 군단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카알 대공이 보헤미아로부터 중부 독일을 침공할 경우 천연적 장애물인 도나우강에 의해 카알과 요한의 양군이 크게 양분되는 불리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그렇게 중부 독일로 진격할 경우, 카알의 주력군과 비엔나와의 교통로가 지나치게 길게 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붉은색 선이 도나우강, 영어식으로는 다뉴브강입니다.  도나우강은 독일 남부에서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세르비아를 거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사이를 거쳐 흑해로 흘러가는 유럽의 큰 강입니다.  바이에른의 수도인 뮌헨은 도나우강 남쪽에 있습니다.)



반대 이유의 표현은 그럴 싸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 이유를 요약하면 간단했습니다.  중부 독일로 전군을 이끌고 쳐들어갈 경우 비엔나 주변이 텅 비게 되므로 겁이 난다는 것이었지요.  이는 낡은 교리에서 대체 벗어나질 못하던 연로한 귀족들의 망발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전쟁의 요점, 아니 나폴레옹의 승리의 비결은 적 주력군의 섬멸이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비엔나를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군을 격파해야 했고, 그러자면 오스트리아군이 원하는 곳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애초에 비엔나 방어가 목표였다면 카알 대공의 주장대로 전쟁을 안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안이었을 것입니다.  전장이 중부 독일이건 남부 독일의 도나우 강변이건 프랑스군을 격파한다면 비엔나 방어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또 어차피 비엔나 주변에 대군을 깔아놓는다고 해도 나폴레옹을 꺾지 못한다면 결국 비엔나는 함락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인강변의 자유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의 16세기의 모습입니다.  보방식의 별모양 해자와 성곽이 뚜렷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카알 대공의 원안대로 "독일 민족에 대한 호소문"을 잔뜩 인쇄하여 중부 독일로 쳐들어갔다고 해서 과연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모험이 성공했을 것이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고대 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만, 당시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족 국가라는 개념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지역이 어느 국가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몇몇 가문이 전쟁이나 결혼을 통해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독일어를 쓰느냐 프랑스어를 쓰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알사스-로렌 지방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독일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독일계 도시였으나, 대대로 자유 도시 상태를 유지하다 17세기에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로 병합되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 주민들은 순순히 프랑스 지배에 순응하면서도 독일어를 계속 사용했고, 프랑스 왕들에게도 그것이 전혀 거북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루제 드 릴(Claude Joseph Rouget de Lisle)에 의해 작곡된 것도 1792년 스트라스부르의 시장인 디트리히(Frédéric de Dietrich)가 주최한 연회석상에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클레베르(Kleber) 장군도 스트라스부르 출신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심복 부하였던 라프(Jean Rapp) 장군도 알사스 출신으로서 평생 독일어 억양이 잔뜩 들어간 프랑스어로 "Vive l'Empereur"를 외쳤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후를 그린 이 그림에서, 그림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오른팔을 뻗어 보이며 나폴레옹에게 뭔가 보고하는 사람이 라프입니다.  그 왼쪽에 있는 흰 군복에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러시아의 볼콘스키 대공인데, 라프는 이 사람을 포로로 잡아와 나폴레옹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독일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프랑스말고 독일계 왕족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시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일단, 독일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희박했습니다.  18세기에 근대적인 민족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독일 철학자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자신도 스트라스부르의 루터 대학에서 괴테와 함께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르더가 당시 다소 경멸받던 언어였던 독일어에 대해 긍지를 가지라고 독일인들에게 호소하기는 했으나, 정작 자신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여 고국인 프로이센의 친구들로부터 미움을 샀고 또 친프랑스파가 득세하고 있던 바이에른 왕국에서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분이 헤르더입니다.  저는 몰랐는데, 이분이 독일 민족주의의 시조라고 하네요.)



생각해보면 근대적인 민족이라는 개념에 부합하려면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 상황은 이와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넓은 독일 땅에는 수많은 방언들이 있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보다 당시에는 방언이 매우 심했다고 합니다.  라디오는 커녕 기차도 없던 시절이라 타지방 사람들의 방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또 통일 정부가 없어서 관공서의 문서도 각 지방마다 다른 방언이 표준어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당시 각기 다른 지방의 독일인들이 서로의 방언으로 이야기할 경우 약 절반 정도만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아마 요즘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정도에 해당했던 모양입니다.  또 독일 전체가 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에는 카톨릭-프로테스트탄트 간의 분열과 갈등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북부에서 세를 넓혔고, 남부는 카톨릭 세력이 더 강했습니다.  여기에 17세기에 벌어진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에 파멸적인 물적, 인적 피해 뿐만 아니라 지역간에 장기간 계속될 반목과 불신을 낳았습니다.  





(흔히 이슬람을 종교적 이유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난폭한 종교로 매도하지만 기독교도 못지 않게, 아니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종교적 이유로 학살한 끔찍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은 1632년 그려진 30년 전쟁의 참상을 그린 것입니다.)




(1895년 독일의 종교 지도입니다.  분홍색과 자주색 등 붉은색 계열이 프로테스탄트 계열이 우세한 지역이고, 초록색 계열이 카톨릭이 우세한 지역입니다.  중북부는 프로테스탄트가, 남서부는 카톨릭이 우세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다보니, 북부의 작센과 남부의 뷔르템베르크 주민들은 서로가 같은 독일인이라는 공감대를 갖기가 어려웠고, 더 나아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한다는 대의를 함께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카톨릭의 맹주인 오스트리아군에게 북부 독일의 프로테스트탄트들이 협력한다 ?  그다지 있을 것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정작 이렇게 독일 민족의 각성을 기치로 들고 나온 오스트리아 제국이야말로,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많은 이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들고 나왔다는 점은 대단한 아이러니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꿈꿨던 독일 민족의 대오각성이 더욱 가능성이 희박했던 점이 또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민족이 일어나 뭉쳐야 한다는 생각은 재산과 지식을 갖추고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할 줄 알던 지식인 계층에서나 맴돌던 것이었고, 독일어 밖에 할 줄 모르던 독일 민중에게는 정작 그런 의식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당시는 계급 사회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동자 농민 계급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당장 먹고 사는 일이었는데, 하루하루가 힘든 당시의 서민들에게 프랑스와의 민족적인 대결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매우 희한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가 독일 민족의 각성에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이런 민족주의의 대두는 서민층이 아닌 지식인 계급이 이끌었습니다.  1813년 나폴레옹 몰락 시기에 편성된 뤼초프 자유군단(Lützowsches Freikorps)은 프로이센 장교인 뤼초프(Ludwig Adolf Wilhelm von Lützow)가 독일 전역에서 '독일 민족의 봉기'를 모토로 모집한 약 3~4천 규모의 의용병 부대였는데, 학생 등 젊은 지식인의 비율이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약 15% 정도였다고 합니다.




(1813년 예나 대학생들이 의용병으로 나서는 모습입니다.   현대 독일 국기는 이때 의용병으로 나섰던 독일 대학생들의 붉은 가장자리로 장식된 검은 군복, 그리고 황금색 단추 색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정설은 1848년 유럽 대혁명 당시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제 블로그가 1848년 대혁명을 넘어 1871년 빠리 코뮌까지 다루게 될까요 ?)



결과적으로 카알 대공의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군사위원회의 참견에 따라 도나우강 남쪽으로 전개된 카알 대공의 침공군의 배낭에는 쉴레겔이 쓰고 카알 대공의 이름으로 인쇄된 "독일 민족에 대한 호소문"이 여전히 들어있었지만, 이를 보고 각성한 독일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프로이센이나 마클렌부르크에 그런 인쇄물이 뿌려졌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바이에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침공에 동원한 대규모 병력 규모에 바이에른이 화들짝 놀라기는 했으나, 바이에른은 훨씬 더 강력하고 믿음직한 라인 연방의 수호자 나폴레옹을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군사 위원회가 참견하여 만들어진 오스트리아의 전략은 3갈래로 공격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1) 약 18만에 달하는 주력부대는 카알 대공의 직접 지휘 하에 도나우강 남쪽으로 진격하여 그곳의 프랑스군을 격파한다
2) 요한 대공이 지휘하는 5만 규모의 부대는 나폴레옹의 양자 외젠이 지키는 이탈리아 왕국을 침공하여 원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던 베네치아 등을 확보한다
3)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휘하는 3만5천 규모의 부대는 나폴레옹이 동부 유럽에 앞잡이로 알박기 해둔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한다




(훨씬 뒤인 1841년 당시의 페르디난트 대공입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1805년 울름 포위전에서 마크 장군과의 불화로 말썽을 피운 바 있었는데, 4년 뒤에 벌어진 바르샤바 공국 침공에서도 소수의 폴란드군에게 쫓겨나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금수저 집안이거든요 !  군단 따위 몇개를 말아먹어도 책임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상당히 위협적인 이 계획에는 크게 결여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대군을 몰고 독일로 돌아온 뒤에는 어찌할 것인가라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대해 준비된 해답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일단 1차 목표를 달성한 뒤 상황을 보자는 정도였는데, 이는 신중함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였습니다.  이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프랑스군에게 한방 먹이고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자는 분풀이 계획에 불과할 뿐, 승리를 위한 제대로 된 전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정쩡한 계획서를 들고, 마침내 4월 10일, 오스트리아군은 1805년에도 건넜던 인(Inn) 강을 건너 바이에른에 대한 침공을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군도 나름의 문제를 안고 침공을 시작했으나, 이를 맞이할 프랑스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보시겠습니다.


오 1등이네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 카알 대공의 독일 민족에 대한 호소문이 훗날 비스마르크 시절의 소독일주의에 대비되는 대독일주의의 시초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항상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카알 대공의 호소문은 정말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냥 헛소리로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이번 글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읽다보니 나오더라고요. 위키피디아의 독일 민족주의 항목에서도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더군요.
하긴 오스트리아 제국 자체가 헝가리, 체코,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라는게 함정이라..
항상 화이팅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2등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난입만 안 하면 댓글 10개 정도로 조촐한 블로그에서 그런 등수놀이는 무리수...
웬일로 3등 ㅎㅎ
민족주의 내용이 흥미롭네요. 일본이 한때 부르짖었던 대동아공영권이 미친 소리였지만 먼 미래에는 당연한 것이 될까요? 교통통신의 발달과 경영(행정)의 효율화가 가속화된 먼 미래엔 지금보다 더욱 광역화된 정치결사체가 등장할 수 있겠네요(스타워즈에 나오는 은하의회처럼)
헐;;; 댓글 다는 사이에 ㅠㅠ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중국이 지금은 어찌보면 대동아공영권과 비슷한 열도선 전략을 가지고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죠.
극동은 대륙 세력(중국)과 해양 세력(일본, 필리핀 등)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영역이고, 과거의 역사나 가치관이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단일 결사체가 나타나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과거 냉전 시절에 동아시아에 NATO와 같은 집단 방위 체제가 구축되었어야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러한 조직 자체를 만들어내기 힘든걸 보면 앞으로도 무리라고 보고요. EU와 같이 무리 없이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되던 결사체 내에서도 EU 탈퇴를 외치는 정치인이 높은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정치 결사체 구축과 유지는 힘든 부분이 있겠지요.
요새 업뎃이 무척 빨라져서 행복합니다. 환절기인데 몸 조심하십시요
요즘 쥔장님이 대오각성(?)을 하셨는지 아니면 목마른 민초들을 어여삐 여기셨는지 업데이트가 자주 있습니다. 저희야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karl이 독일식 발음으로 "칼"인지 "카를"인지 "카알"인지 궁금한데 혹시 아시는분 댓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외국어 발음을 한글로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뭐가 맞고 뭐고 틀리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짧게 자주 올려주시니 더 나은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서양이 민족주의가 늦는다는점이 놀랍네요..
민족주의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민족 중심의 국가 건설이라는 모토는 시민혁명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계몽사상이 보급되면서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를 갖는 시민들 사이에 널리 확산된 것이 민족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시초는 시민 혁명기를 거친 유럽인 셈이죠.
음... 정치보다는 혈연적, 같은언어를쓰는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이요... 아마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타민목과는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던거 같은데.... 독일어를 쓰면서도 프랑스에 속해있는 우리로 말하자면 일본어를 쓰면서도 조선에 속해있는 혹은 그 반대인, 그런경우는 없잖아요...
조선사대에 함경북도에 재가족이라는 만주족집단이 조선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이들은 언어도 틀리고 문화도 틀렸습니다.
재가족을 재가승이라고도 부르기도합니다.
동일 언어를 쓰는 문화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해 민족주의라는 사상 비슷하게 연결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인쇄 자본주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책과 지식이라는 상품이 사람들에게 전파가 되어야 하는데, 근대 이전까지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지요.

조선시대까지의 왕조 국가는 종교(유교 혹은 불교)의 힘에서 정통성을 찾았으며,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 안에서 소설과 신문에 힘입어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교나 불교의 시간관이 과연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과 어떻게 다른지는 솔직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시대의 열악한 출판문화를 감안할 때 '소설과 신문이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신분제 사회에서 과연 신분을 뛰어넘는 애국심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민족 활자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대중 민족주의의 경우 조선은 기존 지배층(양반)이 '보편 활자어'인 한문을 기반으로 한 지식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 민족주의'가 성장할 동력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기존 지배층에 도전하는 자본가도 없었고, '민족 활자어'인 한국어/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도 없었지요.

출판 자본주의의 성장은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민족국가의 공동체 의식 형성에 기여하는데, 이 경우 독일어를 쓰면서도 나는 프랑스인이다라는 의식이 고취되는 경우도 나타나지요. 독일어를 쓰면서도 프랑스에 속해있는 지역의 대표적 사례로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알자스 지방이 있지요. 실제 알자스 지역에서는 '마지막 수업'의 풍경이 펼쳐질 수 없었습니다. 알자스 지역은 원래 독일 쪽 땅이었고, 프랑스 영토가 된 뒤에도 계속 독일어를 썼으니까요. 알자스 지역에서 독일어를 썼다고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쓰던 말을 계속 썼을 뿐, 본인들이 프랑스인이라는 인식은 뚜렷했습니다. 훗날 세계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알자스 지역은 강제징집 등에 대해 더한층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고요.
어...저 죄송한데요. 왜 민족주의가 생성되는데 지식과 인쇄자본주의가 필요한지... 제가 이해 하기로 민족주의는
타 민족(혈연이든 역사공동체이던)에 대한 배타성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 임진왜란 이나
병자호란 당시만봐도 상당히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나 우리민족에대한 자부심으로 다른민족과 구별지었
다고 생각되는데... 이건 19세기나 20세기에 와서도, 같은종교를 믿는자들과 아닌자들, 아니면 같은 종족(이게
맞나?)과 아닌종족의 구분이라든지... 이런식으로 국가가형성된 사례가 많지 않나요? 조선도 귀화인에대해서
환향 -여 가 화냥년이 되었듯이 타민족과의 결합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었고, 이것이 우리는 니내와는
다른공동체이다... 뭐 이런식 아니었을가요? 뭐... 요세 러시아 민족주의나 중동에서 일어난는 일을
보면 이게 활자의 보급이나, 지식의 보편화보단 나는 너와는 다르다, 또는 우리민족은 너희민족과
다르다는 거에서 온다고 보거든요. 음... 글에 동어 반복이 많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1. 이전에는 보통 자신의 소속이 어느 국가라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1930년경에 폴란드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벨로루시와 접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폴란드 사람입니까, 벨로루시 사람입니까?' 라고 물은 대목이 나옵니다. 질문자가 들은 답변이 걸작입니다. 그냥 '우리는 여기 사는 사람들이다'였다는 것이지요.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는 인류는 인지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민족과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유니콘", "용" 등 본 적은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 표현, 인지, 신뢰하는 과정을 거치게된다는 것이지요. 지식과 인쇄 자본주의의 발달은 민족에 대한 의식을 공동체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지요. 가령 리옹에 사는 피에르라는 평민은 죽을 때까지 리옹을 벗어날 수 없어, 그가 사는 세상은 리옹 그 자체이고, 세상의 지배자는 교회에서 기도드리는 하나님, 세금을 내는 국왕 정도가 그의 인식의 범위에 있습니다만, 인쇄술의 발달, 지식의 확대는 리옹에 사는 피에르의 이웃 외에 마르세유에 사는 로랑, 파리에 사는 장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고, 그에 기반하여 프랑스인이라는 공동체주의와 민족주의를 부르는 것이지요.

2. 임진왜란 관련해서 반론이 될만한 사례를 언급하도록 할게요. 임진왜란 때 한 의병장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 때 일본군 점령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는 것이었거든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중들이었다면 일본군에 저항하고 게릴라전을 벌여야 했을 텐데 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에 궁성 불태운 건 노비들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고요.

참고로 화냥녀 라는 표현은 귀화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때 끌려갔다 되돌아온 여자들 얘기이고요.

3. 중동의 이슬람주의 사례를 드셨는데, 중동 같은 경우는 하나의 국가와 민족이 기반이 된 것이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대결 내지는 종파 간의 대결일 뿐,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네요. 굳이 사례를 찾아본다면 쿠르드 족의 사례가 있긴 한데,...러시아의 민족주의는 요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꽤 깊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민족주의는 산업화시대의 산물이므로 탈산업화시대로 진입한지금부터 민족주의와 민족주의국가는 사라지겠지요. 일단 우리나라부터 다민족국가로 변하고 있지요
대동아공영권 또는 eu라는 지역단위국가나 국가연합이아닌. 국가자체의.힘이약해지는 방향으로 세계화가 진행될것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짧게 자주 올리신다고 하셨는데 긴글이 매주 올라오네요 매우 좋습니다 하핫
잘 읽었습니다~~^^
이런 한 때리고보자는 분풀이식 계획에 군사 천재 카를 대공이 순순히(?) 군을 이끌고 나간게 놀랍군요.

본인의 판단 미스인지,아니면 정치 싸움에서 밀린건지.


그리고 카를 대공이 맞나요 카알 대공이 맞나요?나시카님 예전 글을 검색해봐도 혼용되는 양상이라 뭐가 맞는건지;;
국립국어원 용례로는 독일 이름의 경우 카를 대공입니다. 물론 실제 발음하고는 상관 없고요.
제 귀에는 카알 쪽이 더 가까운 듯 들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JLQHCL7Zr8
유럽은 국가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하나의 종교권으로 이해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원래부터 그랬나보다는 지금은 어떤가가 기준이 되는 게 더 현실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지요.
4월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희망차게 보내세요.
재미있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세기에도 없었던 민족주의를 삼국시대에 대입해 신라를 민족반역자로 부르는 참신함이란...
좋은글 매번 잘보고갑니다
댓글도 매우 수준 높군요 댓글도 잘 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