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6. 4. 17. 15:33

지난 편에서는 베르티에의 실수로 인해 다부의 제3 군단과, 르페브르의 제7 군단(사실상 그냥 바이에른군)만 만 전방으로 크게 노출된 위험한 상태로 오스트리아의 공격이 시작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나마 이 군단들도 넓은 지역에 걸쳐 크게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령 제7 군단도 1개 사단은 아벤스부르크(Abensburg)에, 다른 1개 사단은 아우(Au)에, 나머지 1개 사단은 란츠후트(Landshut)에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6개의 군단을 동원한 오스트리아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분산된 프랑스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 뿐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오스트리아군의 진격 속도가 역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카알 대공의 개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처럼 보급 부대를 과감히 생략하는 등 행군 속도의 개선을 꾀했습니다만, 그런 행군에 이미 숙련된 프랑스군에 비해 아무래도 초보인 오스트리아군은 부족한 바가 있었습니다.  둘째,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분산되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원래 카알 대공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작전을 펼친다는 평을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정보가 부족한 마당이다보니 더욱 조심스럽게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도나우강과 그 지류인 이자르 Isar 강, 레흐 Lech 강, 인 Inn 강의 위치를 눈여겨 봐두시기 바랍니다.  이때 당시 베르티에의 프랑스군 임시 사령부는 레흐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도나우뵈르트에 있었습니다.  지도에 나오는 지점인데 작은 도시라서 표시는 되어 있지 않네요.)



그래도 1809년 4월 10일 오스트리아군이 인(Inn)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한 이후, 불과 3일만인 4월 13일에 이자르(Isar) 강에 면한 란츠후트에 오스트리아 정찰 기병부대가 나타난 것은 꽤 괜찮은 성과였습니다.  다만 이 정찰 부대는 바이에른 부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을 확인한 뒤 곧 철수했고, 2일 뒤인 4월 15일에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드디어 란츠후트 남쪽, 이자르강 건너편에 나타났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5일 전에 파사우(Passau)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이는 하루 24km 정도를 행군한 것으로서,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개선된 것이고 거의 프랑스군에 맞먹는 진격 속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 Inn 강을 건너면서 시작되었고, 또 도나우 강변을 따라 시작되었다면 저 파사우 Passau 근처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파사우에서 란츠후트까지는 강변을 따라 가면 약 120km, 직선거리라면 약 80km 정도입니다.)



이렇게 나타난 오스트리아군은 아직 소수였으므로, 아직 이자르 강을 건너 바이에른군을 밀어낼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제5 군단의 전위 부대를 이끌던 라데츠키(Josef von Radetzky) 장군이 파견한 이 부대는 짐프셴(Joseph von Simbschen)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짐프센은 일단 바이에른 사단의 지휘관 데로이(Bernhard Erasmus von Deroy) 장군과 협상을 통해 란츠후트를 무혈 점령하려 했습니다.  이른바 대독일 민족주의에 호소한 것이지요.  그러나 지난 번에 이미 언급했듯이, 독일 민족주의가 제대로 깨어나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협상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15일 저녁이 되자 라데츠키 장군이 본대를 이끌고 도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무력으로 란츠후트를 점령할 병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 여기 나오는 라데츠키 장군은 요한 스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의 그 라데츠키가 맞습니다.  다만 이 유명한 행진곡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라데츠키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1848년 유럽 대혁명 당시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이탈리아군을 격파한 1848년 쿠스도자 Custoza 전투를 기리기 위해 작곡된 것입니다.  라데츠기 행진곡은 군대 행진곡이라기보다는 축제 행렬에 알맞을 정도로 경쾌하고 신나는 곡입니다만, 알고 보면 씁쓸한 배경을 가진 곡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 감상은 이 link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eab_eFtTKFs )



이자르강을 끼고 남쪽의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한 바이에른군의 처지는 당연히 매우 불리했습니다.  병력이 1개 사단 밖에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 지형 자체가 북쪽에서 지키는 바이에른군에게  불리했습니다.  란츠후트 시내를 가로지르는 이자르강에는 다리가 2개 있었는데, 이중 섬과 연결된 북쪽 슈피탈브뤼커(Spitalbrücke, 병원 다리)는 비교적 방어가 쉬웠으나, 남쪽 다리인 렌트브뤼커(Lendbrücke, 허리 다리)는 강 남쪽에 있는 고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라서, 오스트리아군이 고지에 포병대를 배치하여 제압 사격을 할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위치였습니다.  게다가 이자르강 일대 자체가 평탄한 지역이라서, 다른 위치에서도 쉽게 도강이 가능하다보니, 언제 오스트리아군이 배후로 돌아들어 포위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현대의 란츠후트 지도입니다.  섬은 있습니다만, 과거 다리 이름은 찾아볼 수 없네요.)


바이에른군의 데로이 장군은 결국 란츠후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현명하게 판단하고, 단지 최대한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늦추되 여차하면 즉각 후퇴하여 병력을 보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두 다리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군을 막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예 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지에 포병대와 함께 위치시켜 후퇴하는 병력을 엄호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결정이지만 사실 매우 어렵고도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강을 중심으로 방어를 할 때는 좁은 다리를 지키기 위해 거기에 병력과 포대를 집중시키는 것이 상식인데, 아예 대포 대부분을 멀리 후방으로 빼내어 후퇴 엄호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휘관으로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이 많은 바이에른군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현장 지휘관이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이에른군을 지휘하는 프랑스군 수뇌부의 융통성과 합리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만약 프랑스 수뇌부가 낡은 교리대로, '상황이 어떻든간에 적으로부터 후퇴는 불명예스러운 배신 행위'라며 해당 지휘관을 처벌할 것이 뻔했다면, 현장 지휘관이 이런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이 두 다리를 왜 사전에 폭파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인데, 이 두 다리가 모두 크게 손상되어 오스트리아군 공병대가 이 두 다리를 수리하며 도강을 해야 했던 것을 보면 최소한 시도는 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날인 4월 16일 아침, 다시 협상을 시도하던 오스트리아군은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라데츠키 장군이 직접 병력을 지휘하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자신들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화력 지원도 막강한데다, 카알 대공이 아침에 막 도착하여 관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먼저 화력의 우위를 앞세워 오전 11시부터 격렬한 포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슈피탈브뤼커의 다리는 잘 버티어 주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맨몸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위치의 렌트브뤼커의 다리에서 바이에른군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이에른군을 몰아내고 오스트리아 공병대가 다리를 대략 수리한 것이 오후 1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이제 오스트리아군은 언제든 떼를 지어 강을 건너올 준비가 된 상태였는데, 여기에 한술 더 뜨는 일이 예상대로 벌어졌습니다.  즉, 이자르 강 상류, 약 20km 남서쪽에 위치한 무스부르크(Moosburg)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도강햇다는 소식이 바이에른군 지휘관 데로이에게 날아든 것입니다.  






(그렌저 Grenzer 부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넓은 영토 중 오스만 투르크와의 국경 지대에서 편성되고 운영되던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지역 민병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오스만 투르크와 오랜 기간 싸워왔기 때문에 그 잔혹성과 호전성으로 유명했고, 이들을 탐내던 나폴레옹도 1809년 승리 이후 결국 이 부대들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양도받아 자기 휘하에 편입시켰습니다.  다만 이들은 그 특성상 정규 전열 보병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인내심을 보여주지 못했고, 주로 유격병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이제 철수할 때라고 판단한 데로이 장군은 계획대로 강가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북서쪽 알트도르프(Altdorf)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비로소 전면적으로 도강을 시작했고, 라데츠키 장군은 즉각 바이에른 사단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그는 기병 대대를 우회로로 급파하여 철수하는 바이에른군의 측면을 돌아 그 뒤를 끊으려고도 했고, 또 오스트리아군 중에서 용맹하기로 손꼽히는 그렌저(Grenzer) 부대 10개 중대를 보내 그 뒤를 바짝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격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바이에른 부대가 나름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후퇴한데다, 역시 쾌속 추격에 나서기에는 오스트리아 보병 부대들이 너무 느렸던 것입니다.  이들을 따라잡은 것은 오스트리아군의 경보병, 유격병 역할을 했던 그렌저 부대였는데, 아무리 용맹한 그렌저 부대라고 해도 1~2개 대대에 해당하는 10개 중대 병력만으로는 사단 규모인 바이에른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중과부적으로 피해만 입고 물러서야 했고, 라데츠키는 추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란츠후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 제7 군단(정확하게는 바이에른군 1개 사단)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상자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작아서, 탈영병까지 합해도 바이에른군의 사상자는 총 168명,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96명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경우, 대부분의 전과는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올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적인 얼마나 느리고 서툴렀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도나우뵈르트와 란츠후트, 그리고 레겐스부르크의 위치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었던 침공 초기에 오스트리아군이 거둔 승리가 이 란츠후트 전투 하나 뿐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요 ?  그 대답은 이 전투 바로 다음날인 4월 17일, 프랑스군의 임시 사령부인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에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물론 그 남자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초반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여 순식간에 전황을 바꾸어 놓는지는 다음 기회에 보시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쿠스토차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흑역사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탈리아 장군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고 하지요.
 
"나는 쿠스토차와 아도와(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한 전투)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참고로 카포레토 전투는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의 데뷔전이라고 하지요.
오호라. 이제보니 2등이네요^^ 잘보고갑니다. 페북이있어서 빨리 보게되는거 같아요.
나파륜 황제가 도달햇군요. 이제 역전극을 이룰때가... 라기엔 초전에 프랑스군이 별달리 깨진것은 없어 보이는데요. 안습의 오스트리아군 ㅠㅠ(물론 좀잇다 나올 '그' 전투는 기대되내요)
라데츠키가 민족주의 광풍이 몰아치는 유럽에서 비인체제에 저항하는 이탈리아 - 정확히 말하면 사르디냐 왕국을 포함한 북이탈리아 - 를 탁월한 전술로 격파하여 북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는 하였지만 그로 인해 후세 사가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좀 아닌듯 합니다. 라데츠키는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서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오히려 칭찬받는게 맞지 않을까요? 물론 일제 점령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상 용납 안되겠지만...ㅎ
라데츠키가 욕을 먹는 이유는 이탈리아와의 전투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헝가리의 독립 시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행위가 많이 있었는데다가 라데츠키 본인이 오스트리아 인이 아닌 그에 복속되있던 크로아티아 인이라서 인것 같습니다.
저는 라데츠키가 체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
라데츠키 장군은 1차대전 때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전함 이름으로도 쓰였었죠.
일주일만에! 이럴수가?!

나폴레옹 전쟁은 기록이 참 많나봐요. 거의 현대에 일어나는 전쟁을 접하는 정도로 자세하네요. 고대 전쟁사도 기록이 이렇게 많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제목처럼 연재 속도가 파죽지세입니다 ㅎㅎ
즐겁게 잘 읽고 갑니다. 더욱 건승하세요~
지난번 글을 읽으면서 나폴레옹은 왜 늘 하던 대로 직접 와서 군을 지휘하지 않고 파리에서 명령서나 보내고 있었나 싶었는데, 그건 전쟁이 시작되지 않아서 그랬던 것 뿐이었던 모양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Victory and Glory: Napoleon이라는 보드게임 해보세요. 재미있어요. 보드게임으로도 있고 PC 스팀으로도 출시 되었습니다. 나시카님 글 읽으면서 나폴레옹의 심정에 상당히 공감가는 요소가 많고 나폴레옹 토탈워같은 게임보다 전투나 켐페인이나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예를 들면 후기 시나리오에서는 기병부족으로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 주력을 궤멸시킬 수 없었던 나폴레옹의 답답함이 그대로 나오더라고요.
귀에 익었지만 곡명(?)은 몰랐는데 라데츠키 행진곡 이었나요! 정말 군대 행진곡 이라기보단 그냥 퍼레이드 곡같이 경쾌하고 즐거운 리듬이어서 의외...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제 수준에는 어렵네요...
지도라든지 군사작전등...
남자분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호호...
오스트리아군 뿐 아니라 연재속도도 파죽지세이니 기쁘네요^^;;

라데츠키 행진곡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곡인데 배경을 알고선 엄청 놀랬었죠.
요한 스트라우스1세도 저 즈음해서는 거의 궁정 어용 음악가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이래저래 씁쓸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근데 나시카님 제가 어린시절 읽었던 위인전의 나폴레옹은 그 포병소위시절 먹을게 없어서 쫄쫄굶는 동생을 위해 소위입장에서는 엄청 중요한 시계를 팔아서 동생 빵을 사먹였다는데 진짜인가요?
항상 느끼지만 참 재미있게 잘쓰십니다. 빨리빨리 올라와서 더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