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6. 7. 18. 00:01

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의 제2차 빈 점령과, 티롤 민중의 반-프랑스 봉기까지를 보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바로 나폴레옹과 함께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주연을 맡은 카알 대공이지요.  란츠후트 일대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준 눈부신 기동전 때문에 보헤미아로 쫓겨 달아난 이후, 카알 대공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  그리고 왜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의 뒤를 쫓지 않고 빈을 점령한 것일까요 ?


나폴레옹도 처음에 카알 대공의 뒤를 쫓을 것인가 빈을 점령할 것이가를 두고 잠깐 고심했습니다.  원래대로의 스타일로 나갔다면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의 주력부대의 뒤를 쫓았을 것입니다.  그의 전략의 핵심은 적의 요충지 점령이 아닌, 적의 주력 부대를 격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4월 23일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영어로는 라티스본 Ratisbon)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탈진으로 인해, 즉각적인 추격을 포기한 이후에는 두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빈 점령 쪽을 택하게 됩니다.


첫째, 항상 그렇지만 보급이 문제였습니다.  현지 조달을 기본으로 하는 프랑스군의 특성상, 지속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적의 큼지막한 보급 창고 점령이 필수였는데 그 중 가장 큼직한 무기고와 식량 창고, 그리고 탐욕스러운 장교들과 병사들의 약탈 욕구를 채워줄 재물들이 간직된 곳이 바로 빈이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적에게 넘어갈 물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철수하기 전에 빈의 식량과 무기, 각종 재화를 모두 파괴하거나 반출시키는 것이 상식이겠지요.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국, 그것도 수도의 시민들 상당수를 아사시킬 수 있는 그런 조치를 취할 정도로 악랄한 정권은 아니었고, 또 기차도 없던 당시의 수송력으로는 주민들과 그들이 가진 식량을 소개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바로 다음 해인 1810년 영국군의 웰링턴 공작은 포르투갈 북부에서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서 그런 초토화 작전을 실제로 수행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이 영국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전략으로 인해 포르투갈 민간인 5만명이 그 해 겨울 아사했는데, 이는 당시 포르투갈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거주하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한꺼번에 비우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빈에 돌아온 뒤에도 프랑스군 점령 하에서도 '난 나폴레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장렬히 죽지 않은 수많은 빈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가가 빈 시민을 버린 것이지, 빈 시민들이 왕가를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둘째, 무엇보다 나폴레옹은 휴전과 화친을 원했습니다.  보헤미아의 깊은 숲 속으로 탈출한 카알 대공의 주력부대는 적어도 6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이들에 덧붙여 각지에서 증원될 오스트리아군을 합하면 적어도 10만이 넘는 오스트리아 야전군과 대결해야 했는데, 그런 대전투는 승패를 떠나 무의미한 유혈 참극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심지어 그의 친우인 란조차도 '보나파르트의 야심 때문에 프랑스 젊은이들이 개죽음을 당한다'라고 비난했고 또 그것이 사실이긴 했습니다만, 나폴레옹도 피에 굶주린 미친 놈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헤미아의 울창한 숲 속에서의 위험천만한 전투를 하기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오스트리아가 굴복하고 화평을 청하기를 원했습니다.  


단, 그 화평의 댓가는 반드시 두둑한 전쟁 배상금을 포함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가 풍요로운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세금을 과중히 걷을 수 없었고, 결국 그러자면 전쟁 비용은 반드시 적국이 치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특히 바로 직전까지 반쯤 치르다 돌아온 스페인 전쟁 때문에라도 더욱 그랬습니다.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언제나 두둑한 전쟁 배상금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는 빈손이었습니다.  이 끈질긴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굴복이라는 것을 몰랐고, 굴복하지 않은 적에게서는 받아낼 배상금이 없었던 것이지요.  덕분에 나폴레옹은 1809년 당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빈을 점령하면 오스트리아에게 좀더 강하게 협상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780년 주조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탈러 Thaler 은화입니다.  eBay의 사진인데... 약 23달러 밖에 안 하는 것이... 보존 상태에 비해 가격이 너무 싸네요.  아마 복제품일까요 ?

나폴레옹이 뜯어간 전쟁 배상금은 두고두고 독일, 특히 프로이센에게 깊은 원한으로 남아 있었나 봅니다.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완패한 프랑스에게, 프로이센은 무려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습니다.  이 금액은 1807년 프로이센에게 나폴레옹이 부과한 전쟁 배상금을 당시 인구와 비례하여 책정되었다고 하는데, 프랑스는 절치부심하여 이 막대한 금액을 2년만에 갚아버려 독일을 경악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빈을 점령하고나서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아무런 화평 사절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에 대해서 크게 당황했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1805년에 빈을 점령했을 때도, 오스트리아는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혼구멍이 난 뒤에야 화평을 청한 바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을 믿고 그렇게 버텼는데, 이번에는 의지할 대상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필요한 것은 두번째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였고, 러시아군도 없는 전장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상황에 있는 동안, 카알 대공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  4월 23일 도나우강 북안으로 도강한 이후, 카알 대공 및 그의 주력 부대는 도나우 강 좌안, 즉 북쪽에서 사실상 뚜렷한 목표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뒤를 쫓지 않고, 도나우강 우안에 아직 남아 있는 힐러(Hiller) 장군의 부대를 추격하며 빈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카알 대공은 그 추격을 방해하거나 요격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원래부터 이번 전쟁에 그렇게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외에는 동맹국도 없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을 이길 승산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애써 편성한 9개의 정규 군단과 2개의 예비 군단을 재정난 때문에 해산할 지경에 이르렀고, 또 스페인 전쟁과 티롤에서의 반란 움직임 등으로 인해, 놓지기 너무 아까운 기회가 되자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전쟁에 찬성한 것이었지요.  이렇게 혹시나 하고 시작한 전쟁이 4월 19일~23일의 란츠후트 기동전에 의해 초전박살이 나자, 유리 멘탈로 악명 높은 그는 대단히 큰 실망과 체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어차피 이제 이길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이쯤에서 적당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년전에 했던 것처럼 구차하게 바리바리 피난짐을 꾸려 머리에 이고 피난길에 나선 합스부르크 왕가는 의외로 결연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카알 대공 휘하에 야전군이 남아 있는 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는 일은 없다며 수백년간 중부 유럽의 패자 노릇을 한 관록의 기개를 보여주었지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런 의지를 접하게 된 카알 대공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전략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위위구조(圍魏救趙)라고, 중국 전국시대 손빈이 위나라의 공격을 당하는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조나라가 아닌 위나라에 쳐들어간 것과 유사한 전략이었습니다.  즉, 빈의 탈환을 위해 빈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었고,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빈에서 스스로 물러나올 수 밖에 없도록 그의 약점을 건드리자는 것이었지요.  카알 대공은 그 약점으로 도나우 강변의 주요 도시인 린츠(Linz)를 선택했습니다.





(린츠는 도나우 강 남단의 도시인데, 나폴레옹 당시에도 이미 북안까지 확장된 상태였습니다.  북안 지역은 우르파 Urfahr 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현대 오스트리아 지도입니다.  도나우 강변의 린츠와 빈의 위치를 보십시요.)



프랑스군은 저 머나먼 라인강변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맹국인 바이에른 접경에서부터도 꽤 깊숙히 진격해온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현지 조달을 기본으로 하는 프랑스군이라도 보급 및 연락선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쉽게 보이듯이, 린츠는 빈과 바이에른 중간 지점에 위한 교통의 요지로서, 이 곳의 교두보를 오스트리아군이 장악한다면 빈의 나폴레옹은 후방을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린츠에 방담(Vandamme) 장군의 제8 군단을 보내 점령해 놓고 있었습니다.  단, 제8 군단은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군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규모인 1만명을 좀 넘는 정도로서, 군단이라기보다는 사실 1개 보병 사단에 기병 사단 1개를 붙여놓은 2진급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군단으로도 5월 4일, 이곳을 지키던 오스트리아 리히터(Joseph von Richter) 장군의 지역방위군(Landwehr)을 격파하고 린츠의 도나우 강 남북 양안을 확보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방담 장군은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때부터 민간인을 약탈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군인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러나 악명과 실력은 또다른 문제라서,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가 보여준 프라첸 고지 점령전은 확실히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도, 엉뚱한 곳으로 향하던 그루시 장군에게 '빨리 나폴레옹과 합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루시가 방담의 말을 들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요?)



5월 7일, 카알 대공은 끝까지 항전한다는 마음을 굳히고 보헤미아의 부드바이스(Budweis, 체코어로는 České Budějovice 체스케 부데요비처)를 떠나 나폴레옹의 위협에 직면한 빈으로 향하면서, 보헤미아를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lowrat) 장군의 제3 군단에게 린츠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원래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임무는 카알 대공이 아끼는 보헤미아를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도 사실 프랑스군이 아니라 작센(Saxon)군으로 이루어진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도 프랑스-오스트리아 두 강대국의 싸움판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고생이 많은 사람들이었지요.  규모도 크지 않았던 작센군은 이때 사실상 전 병력을 탈탈 털어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만들어 보내느라 정작 본국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텅빈 작센 본국은 또 엉뚱하게 제롬 보나파르트의 신생국 베스트팔렌 왕국군이 동원되어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지키는 소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 약소국들의 설움이었지요.






(부드바이스 Budweis의 모습입니다.  아마 이 이름을 듣고 버드와이저 Budweiser 맥주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텐데, 맞습니다.  그 맥주 상표명은 이 도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1870년대에 독일에서 아돌푸스 부쉬(Adolphus Busch)라는 사람이 보헤미안 스타일의 라거 맥주를 유행시키면서 이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 약 2만은 나름 자신만만하게 린츠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느렸고, 또 어이없이 분산되었습니다.  부드바이스에서 린츠까지는 약 95km,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평균 행군 속도인 하루 20km로 약 5일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린츠를 면한 도나우강 북안에 나타난 것은 5월 17일, 무려 10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나마 이들은 분산하여 진격한 뒤, 목적지에 동시 도착하여 집중 공격을 퍼붓는다는 콜로브라트의 그럴싸한 계획에 따라 3개 그룹으로 나뉘어 진격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계획은 그럴싸 했으나, 이들은 베테랑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따로 도착하여 따로 공격을 시작했고, 1만도 안되는 방담의 병력에게 차례차례 각개격파를 당했습니다.  그나마 제일 나중에 도착한 3번째 부대는 이미 상황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전투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릴 정도의 엉망인 작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가 일방적인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난 것은 나폴레옹의 치밀한 포진 계획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는 베르나도트에게 작센군으로 구성된 제9 군단을 린츠의 도나우 강 바로 상류에 위치한 파사우(Passau)에 주둔하여 유사시 린츠를 지원하도록 했는데, 덕분에 콜로브라트는 방담 뿐만 아니라 베르나도트의 병력까지 상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도 왼쪽 상단의 부드바이스에서 왼쪽 하단의 린츠까지의 거리와, 린츠에서 비엔나까지의 거리를 보십시요.  분명히 부드바이스-린츠 사이의 거리가 훨씬 짧은데, 콜로브라트가 아무 전투 없이 그 거리를 행군하는데 10일이 걸린 반면, 프랑스군은 린츠에서 빈까지 힐러 장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7일 밖에 안 걸렸습니다.)



카알 대공이 손빈 흉내를 냈던 이 린츠 전투가 오스트리아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난 것은 콜로브라트의 무능함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크게 보면 결국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은 전장의 신이었고, 그를 야전에서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불굴의 카알 대공은 그것을 해냅니다.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전에, 다음 편은 프랑스군 최고의 사나이, 장 란(Jean Lannes) 특집을 짧게 꾸며 보겠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국가를 마치 개인의 소유처럼 운영했네요
요즘 다음 블로그가... 올릴 때 자꾸 글 일부가 잘려 없어지네요. 다시 수정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란 특집이군요! 사라고사 전투에서 예고하셨을 때부터 기다렸습니다.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2년만에 배상금을 다 갚아 프로이센의 독일제국을 경악하게 만든것은 프랑스 자체의 자원도 많았지만 로스차일드가의 보이지 않는 조력(?)이 더 컸다고 하던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저도 잘....ㅎ
오오오 버드와이저의 이름이 저기서 나왔군요 ㅎㅎㅎ 합스부르크 왕가의 저때 모습은.. 무능하지만 왕족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은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 ㅋㅋ 흥미롭네요
오늘도 훌륭한 글 감사드립니다. 담에 장란 이야기에 뒤이은 나폴래옹의 패전인 아스펀 에슬링 전투가 시작되겠네요.
장 란 너무 좋아요.. 헉헉
감사합니다...

Maria Theresa thaler 가격이 $25-$300 사이로 천차만별이네요.... 신용이 든든한 기관을 통해서 구입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복제품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 않을까.... 혹 운이 좋아서 정말로 진품을 싼 가격에 살 수도 있겠지만요.... 전쟁동안 채권을 얼마나 어떻게 발매를 했는지 궁금하네요....
다음이 드디어 장 란 특집이라는 것은ㅠㅠ


이번 전쟁의 주인공(?) 카알 대공 특집 차례는 언제 돌아올까요?
린츠하니 콧수염 총통이 생각나는군요
며칠씩 기다리는 보람이 있는 글들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글은 항상 훌륭합니다만...꼭 빨갱이를 살해한 국군을 비꼬는 듯한 내용이 들어가 있어 불편합니다. 반대로 보면 북한은 황해도에서 우리 정부에 협력한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비극이지요...
잘못한건 잘못한거죠.
인민군도 그랬는데 어떠냐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고 보이네요.
방담은 드레스덴 전투 이후 무리하게 추적하다 한군단 날려먹은 그 장군인가요? 여기랑 워털루에서는 제 몫을 했군요.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은 지휘가 진짜 왜 이렇게 허접한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음이 다 나오네요. 아무리 출신 위주의 지휘관 임명을 한다고 해고 귀족자제분들은 기초적인 군사지식도 안쌓나봐요? 어떻게 도시에 틀어박힌 수비군을 상대로 그 앞에서 합류도 못하고 각개격파 당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

1500년 전의 삼국지 시대나 로마 시대 지휘관들 병력 움직임이 훨씬 그럴싸한 것 같아요.
오스트리아 군이 무능했다기 보다는 나폴레옹과 휘하의 방담의 방어와 위치 선정이 좋았다는 점이 원인이 아닐까요? 제대로된 우주 방어는 아무래도 공격자 입장에서는 부담이니까요.
비밀댓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위의글 삭제하고 2문장만 남길께요.

-나시카님 " '난 나폴레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장렬히 죽지 않은 수많은 빈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나폴레옹시대 역사와관련된내용도 아니고 민감한주제를 너무쉽게 이야기하는거같아 불편합니다. 이런행동말아주세요
빈 수복후에도 빨갱이로 몰리지 않은 빈시민들...
비교 되네요!
그게, 총력전 개념이 아직 확립이 안된 시기라서 가능한 것입니다. 중세 이후 유럽의 소왕국, 공국들은 병력규모부터 상대 국가를 멸절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피지배층의 민족의식이 옅었으며, 같은 크리스트교라서 문화도 공유했으니까...

전근대적인 체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중세의 문화가 곳곳에 많이 남는다는 얘기고요. 이는 전쟁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임에도 아주 많은 규칙들과 관습들을 지키려한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어차피 점령하면 자국민으로 편입시켜야 하니 불필요하게 민간에 피해를 주는 일은 피해야 했을 것이고 피지배층들도 전쟁이 일어나도 그냥 지도자가 바뀌는가 보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징병제를 도입한 역사도 얼마 되있지 않다보니...(물론 전혀 다른 오스만 제국이나 몽골제국 같은 외세의 전쟁과 같은 케이스는 좀 다른 양상이 발생했지만...)

문제는 이러한 양상이 뒤바뀐 현대전이지요. 총력전 개념이 투입되면서 모든 국가의 인적 자원이 전쟁에 소요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징병제 뿐만 아니라 민간 인력까지 군수품 생산을 해야 하니까..)여기에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인식이 되어 우리편 아니면 포용할 수 없는 적군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점 등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예전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민간인들 조차 가만 놔둘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린 것이고요.

(미 공군참모총장인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이를 잘 표현해주는 말을 한 바 있지요. "일본의 도시란 이런 모양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 65호나 63호 너트나 다른 잡동사니를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키타가와 씨가 그걸 정리해다가 공장으로 가져가는 거다.",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
-> 물론 이는 총력전에서 산업기반시설 같은 민간시설 또한 적의 전투력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그 파괴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뜻이지, 진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식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다녀도 된다는 류의 말이 아닙니다. 커티스 르메이의 저 얘기도 민간인을 폭격하여 괴로워하는 조종사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말이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기서는 프랑스군과 625 전쟁을 비교한게 아니라 오스트리아 왕실을 비교한 케이스인데 프랑스군을 논한 것은 뭔가 잘못 읽은 것 같습니다.
제가 글을 잘못봤네요. 죄송요. 무안하네요....ㅜ.ㅜ
저 말이 "빈 수복후에도 친일파라고 손가락질받지 않은 빈시민들" 이라는 표현이었어도 과연 마음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북한에 협력한 것이 "정부가 국민을 버린 것이지 국민이 정부를 버린 게 아니므로" 문제가 안 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문제는 아닙니다. 같은 논리로 "국민이 나라를 판 게 아니니까" 일제에 협력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한다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제를 옹호하고 친일파를 비호하기 위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라는 반응이 분명히 나왔을 겁니다.
"역사의 초기 상태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너무 커 그것을 극복할 방도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한 지도자가 달리 방법이 없을 때 그 어떤 편법을 쓰더라도 탓할수가 없는 것이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되지 그런때가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같은 논리로 알타리무님을 '미개하고 후진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잡아가두고 "북한 사람 백만 명을 죽여도 좋다는 소리를 그만둘 때까지" 사상교육을 시킨다고 하면 동의하시겠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밀의 자유론의 목적은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자유론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권력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론에 저 구절 자체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저런 내용은 사회계약이 존재하기 이전의, 문자 그대로 역사의 초기 상태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법질서와 같은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의 사회에 적용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해석이야 다양하게 할수있겠지요.
언제나 쓰시는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올리신 사진 중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 은화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홍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일종의 기축통화로 쓰였고, 그래서 영-프-이의 식민정부들이 해당 은화를 재발행해 현지 결제수단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습니다. 아마 이베이에 올라온게 가격도 싸고 보존 상태도 좋다면 해당 은화는 근대의 재발행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필자님의 블로그에 와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위키에서도 블로그에 링크를 해놓았더군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19세기 유럽을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자료를 소개해주시는 역량에 놀라웠습니다. 지식은 공유하는데 의미기 있음을 또 깨닫고 갑니다. 워낙 재밌게 읽은 터라 차제에 블로그의 글들을 다듬어 책으로 출판하시는게 어떨런지요. 분명 유의미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