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방송/이 주의 말씀

벧엘 2014. 9. 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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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사렛교회의 구성원으로 60여 년 간을 지나온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나사렛교회가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쫓는 복음주의에 속하였고 또한 성서의 핵심 교리인 온전한 성결을 강조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선교적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나사렛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자랑이기도 하다.


나사렛교회란 나사렛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마 2:23). 예수를 믿고 따르는 나사렛사람들은 예수의 인격을 닮고 그의 가르침과 삶을 본 받아 성실하게 거룩을 추구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시자 브리지 박사는 나사렛교회를 아침에 솟는 태양으로 비유하였다. 21세기는 아침의 교단인 나사렛교회가 그 주역의 일부분을 담당하리라 믿으면서 자랑스런 나사렛사람들의 공동체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사렛교회는 1908년10월 8일에 미국 택사스주 파이롯 포인트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 말엽부터 불기 시작한 성결 부흥운동이 마침내 미국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 여파로

1)동부에서는 뉴욕을 중심으로 규합한 세력들이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1896,11,12) 를 형성하였다.
2)남부에서는 택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결교회(1904, 11) 가 조직되었으며
3)서부에서는 로스엔젤스를 중심으로 P. F. 브리지 목사를 지도자로 한 나사렛교회(1895,10)
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1907년 10월 10-17일까지 시카고에 모여 우선 동부의 오순절교회 연합회와 서부의 나사렛교회가 통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서적인 성결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의 교단으로 손을 잡고 오순절 나사렛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남부의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은 시종 방청객으로 참석하였다가 이듬해인 1908년 10월8-14일까지 택사스 파이롯 포인트에서 오순절 나사렛교회 대표들과 같이 총회를 열고 대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나사렛교회는 미국의 전역을 망라한 전국적인 교단으로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창기 나사렛교회는 피니스 F. 브리지(Fhineas F. Bresee), 씨. 비. 저니간(C. B. Jernigan), 씨. 더블류. 루스(C. W. Ruth)
그리고 에이취. 에 프. 레이놀스(H. F. Reynolds), 이. 피. 엘리슨(E. P. Ellyson) 목사등이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초창기 지도자들이 함께 갖았던 꿈은 웨슬리주의 전통안에서 믿는 자들의 성결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도모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후 1919년 총회에서는 35개 연회의 청원을 받아드려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교회라고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교단과 선교단체들 특히 영국과 카나다의 성결교회들이 가입하여 성결교단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었고 현재 전세계 119개 국가에서 강력한 성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1905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있 었는데 교단이 1908년에 오순절 나사렛교회와 합동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나사렛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나사렛교회의 역사는 미국 나사렛교회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나사렛교회는 1936년 동부연회 조선부에서 오사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장성옥(張聖玉)목사를 평양 신양리에 파송하여 최초의 나사렛교회를 한국에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울 영천에 또 하나의 나사렛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성결교회 제3차 총회가 1935년에 분열되자 거기서 이탈한 인사들이 1936년 11월 25-29일 까지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창립총회를 열고 "하나님의 교회 선언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홍파동에 김승일 전도사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교회가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개의 성결구룹들이 1948년 4월 사직동에 있는 정남수 목사 댁에서 미국의 나사렛 교회에 가입하여 이 땅에 진정한 성결 복음을 전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대한기독교 성교회(聖敎會)의 창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0월에 국제본부 극동담당 감독인 니스 박사가 중
앙위원회의 위임을 받고 내한하여 필동교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정식으로 한국 나사렛교회를 인정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조직을 보면 이사장에 정남수 목사, 총무에 서재철 목사, 재무에 안형주 목사, 신학교 책임자에 곽재근 목사, 서기에 승학수 목사 등이었다.

그 후에 한국 동란이 일어났고 많은 교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이 와중에 영천교회 담임목사인 승학수 목사 가족이 폭격으로 화를 입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정남수 목사는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 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많은 구제품과 선교 자금을 모금하여 어려운 교역자들과 교인들을 도왔고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4년 5월에 국제본부에서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로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오은수)를 파송하였고 서울 사직동에 건물을 매입하여 교단본부와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1954년 9월 14일에 그 자리에서 23명의 학생으로 한국 나사렛신학원을 개강하고 초대원장에 취임하여 사역자 양성에 들어 갔다. 그것이 오늘의 나사렛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교단은 1955년 5월에 영천교회에서 11개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개회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정식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감독에 박기서 목사, 총무에 조문경 목사, 재무에 김종수 목사가 취임하였다.
현재의 교세는 5개 연회에 250여 개교회 그리고 4만여명의 신도들이 나사렛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필리핀, 카자흐스탄, 타이완, 일본, 이태리, 오스트라리아, 중국, 애급에 1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나사렛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피니스 F. 브리지(Phineas F. Bresee) 박사와 한국에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정남수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열렬한 성결 부흥사라는 점과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가라는 점과 교단을 창립하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국제 나사렛교회의 창시자로 또 한 사람은 한국 나사렛교회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브리지 박사(Dr. B. F. Bresee,1838-1917 )

그는 1838년 뉴욕 프랭클린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아이오와로 이사하여 2년 뒤에 감리교 시골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후 25년간 이 지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으며 감리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광산업에 손을 댄 것이 실패하여 목회를 그만두고 1883년 칼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우연히 몇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회하던 중 그는 성결운동의 지도자였던 왓슨(George D. Watson)과 맥도날드(William McDonald)의 성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확실한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결운동의 일원으로서 전국성결연합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캘리포니아 지역의 성결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런 브리지의 열정적인 성결운동은 감독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브리지는 빚더미에 쌓인 조그만 시골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몇 차례의 이런 부당한 파송을 받게 된 브리지는 결국 1894년에 감리교회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잠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브니엘선교회(Peniel Mission)에서 일하다가 의사이자 목사였으며 남가주대학교의 전직 총장인 위드니 박사(Dr. J. P. Widney)와 함께 1895년에 로스엔젤스에 나사렛교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이 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나사렛교회가 남부지역, 동부지역의 성결단체와 연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의 나사렛교회를 형성하고 1908년에 초대 감독에 레이놀드 목사, 엘리슨 목사와 함께 선출되었다.

브리지가 지도하는 나사렛교회는 기존의 감리교회에서 성결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자 성결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초기 감리교회가 가졌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다. 19세기 말의 미국 사회는 도시화된 사회였고 따라서 수많은 도시 빈민문제가 발생하였다. 브리지 박사의 나사렛교회는 특별히 이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나사렛이라는 말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성결파 단체들은 그들의 분리 이유에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집회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 양로원, 긴급구조대 같은 것을 운영하였다. 즉 성결의 강조는 사회 개혁운동과 함께 나갔던 것이다. 브리지 감독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명을 다하고 1917년 월 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긴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을 마감하였다.

정남수 목사 (1895-1965)

그는 1895년 11월 9일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정용훈씨의 3남1여 중 막내로 태어 났다.
1907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다음 해에 안창호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도산선생이 일경에 피검되어 경성에 압송됨에 따라 상경하여 옥중에 있는 도산의 사식차입과 외부의 독립운동가 들과의 영락을 담당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0년 도산이 석방과 함께 미국 방명 길에 오르자 그와 동행하여 중국 청도와 러시아의 모스코바와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 뉴욕을 거쳐 로스엔젤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자 그 창립 단원이 되었고 그 후 독립자금 모금과 도산선생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25년에 에즈베리신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각처 천막부흥회에서 설교, 한국의 빌리 썬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26년에 감리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탠리 죤스 박사의 권유와 천막전도집회에서의 원조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7년에 동경음악전문하교 출신의 김경숙 양과 결혼하였고 성결교회 장막전도대 대장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6천명 수용의 천막과 트럭 그리고 7인조 악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를 비롯해서 만주 일대에 선풍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그를 가리켜 한국 부흥운동사에 있어서 제3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셩결교회 최고 이사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임명되어 교단 발전에 기여하였고 부흥전도집회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월간지 "성화"를 발간하였으며 설교집을 2권 발행 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반일 친미주의자로 지목되어 트럭과 천막 악기등이 압수 당하고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룬 후에 석방되었으나 심한 고문으로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통으로 지났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그의 활동무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으니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에즈베리신학교 동창들이 요인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나사렛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에 순수한 성결단체인 나사렛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옛 동지들인 하나님의 교회 지도자들과 당시 영천에 있던 나사렛교회 그리고 홍파동의 독립교회를 합쳐 1948년 봄에 성교회(聖敎會)를 창설하였고 그 해 10월에 내한한 극동 담당 니스 감독에 의해 정식 나사렛교회로 공인을 받았다. 그 후에 6. 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교회 재건과 구호품 수집에 주력하였고 1952년에 귀국하여 교회 재건과 교역자들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국제본부에 신학교 설립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한편 재단 설립을 서두르며 교단의 모양 갖추기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오은수 목사 내외가 1954년 5 월에 입국하자 그는 자기의 임무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그 해 8울 20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은퇴를 선언하였다. 1965년 7월8일 불덩어리 부흥사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남수 목사가 심장질환으로 소천하니 향년 70세였고 유족으로는 부인과 3남 1녀를 남겼다.

정남수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시작하여 열렬한 성결 부흥사로 한국의 뭇 심령들을 일깨우고 마지막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그의 임무를 마친 위대한 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