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사학의 얄량한 떡밥

대수맥 2009. 8. 17. 20:22

 

 

【앵무새 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4...반론


[앵무새 주장]


이유립은 1976년 10월 월간 [자유]지에 [이병도 사관을 총 비판한다] 제2편을 올렸습니다.   제목은 이병도에 대한 무슨 비판 같지만 내용은 자기가 쓴 [신시개천경본의神市開天經本義-신시개천경의 본래 뜻이라는 말]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럼 신시개천경이란 무슨 뜻일까요?   [삼국유사]에 고기古記란 이름으로 들어있는 단군신화를 이유립의 커발한개천각교-태백교(이유립이 이 종교의 교주입니다)의 경전으로 삼은 것이 바로 신시개천경입니다.   이유립이 올린 내용에 따르자면 이 [신시개천경본의]를 쓴 연도가 신시개천 5839년 즉 1942년이 됩니다.


그럼 1942년에 쓴 이글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요?   기껏 [삼국유사] 해설서에 불과하다면 말이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신시개천경본의]안에는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의 한 부분인 태백일사 등등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물론 [신시개천경본의]가 1942년에 쓰였다는 말 자체가 이유립의 허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유립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를 진행해 봅시다.


본래 이유립은 [환단고기]안에 [신시개천경](즉 삼국유사의 고기 인용분)도 집어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회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 <신시개천>이라는 항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그는 삼국유사의 [고기]를 [환단고기]의 줄임말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어봅시다.  


금서룡의 조작한 석유환국-그대로 번역한 [원문번역주 삼국유사]에서 이병도는 고기=환단고기의 전한 그대로의 환국을 빼어버리고 원문에 없는-일본인의 변조한 환인을 내세우면서 자신만만하게 특서하여 가로되...


애초에 금서룡이 본 [환국桓국]이 因의 오자임은 안정복이 밝혀 놓은 바니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이 문제에 대해 흥미가 있으신 분은 「우리 역사상 수천년래 최악사건」- 昔有桓國 [클릭]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이유립이 “고기=환단고기”라고 저렇게 적어 놓은 부분이죠. 


그런데 오늘날 환단고기에는 [삼국유사]의 “고기” 부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어찌되긴 어찌되겠습니까?   1976년에 가졌던 생각이 1979년에는 없어진거죠.   1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환인이 신으로 나오는 부분이 1979년의 이유립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구한 배달의 역사를 창조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죠.


경쟁자인 중국은 요임금 이전에 삼황오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은 기껏해야 요임금 재위 중에 임금이 되니 그 이전 세계가 아주 부족했던 겁니다.   그래서 앞에 보았던 [동양문명서 원론을 비판한다]에서는 대종교의 김교헌을 맹비난합니다.   이쪽 동네는 연대가 짧거든요.

  

[반론]


도대체 고기古記=환단고기라는 논제가 왜 저렇게까지 왜곡되어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며 읽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지럽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읽어보아도 <이유립>선생은 [석유환국昔有桓國-석유환인昔有桓因]의 조작 문제를 문제로 삼기 위해서 단지 古記=환단고기를 언급했던 것임을 정말 모르고 있는 건지?   그러니 어찌되긴 어찌되겠습니까?   이걸 모르고 헛말만 퍼뜨리는 사람들이 불쌍한 게지요.   이는 환단고기에 단군(檀君) 부분을 기술한 대목에서 필자(筆者)도 1회에서 반론을 제시한 바와 같이 초지일관 신인神人 단군檀君으로 단정하였던 <이유립>선생은 신화적인 부분으로 고기(古記)를 각색한 불승(佛僧) 일연(一然)의 입장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一然의 주장을 버린 것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단군(檀君) 기록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리라고 보았던 古記의 원문을 1976년까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그가 가지고 있던 여러 저본들을 근거로 삼아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한 태도라는 점을 망각한 소치라고 여겨집니다.   아래에 적시한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하>나 <환국본기桓國本紀>와 <신시본기神市本紀>가 엄연히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古記의 대목이나 그걸 원전(原典)으로 활용한 후래(後來) 문헌 그리고 古記와는 거의 동일하나 더 시원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였을 <조대기朝代記>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는데......그러니그런데 오늘날 <환단고기>에는 [삼국유사]의 “古記” 부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라고 괜한 호들갑이나 떨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6년에 가졌던 생각이 1979년에는 없어진 게 전혀 아니니 1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桓因이 神으로 나오는 부분이 1979년의 이유립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구한 배달의 역사를 창조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죠라는 어린애 장난 같은 유치한 주장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더구나 [신시개천경]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자니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어디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있는 듯하여 기가 막히지만 기왕에 펜을 들었으니 한마디는 하여야겠군요.


    - 우리 민족의 시원적 흐름을 구체화하고 현시화顯示化하는 가운데 계층적 체계로 설명하고 있는 저서著書가 바로 [규원사화]이다.   여기에서는 조판기肇判記-桓因의 世界*태시기太始記-桓雄의 世界*단군기檀君記-檀君의 세계로 일목요연하게 나누어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우리 민족 고래古來의 사유思惟를 설명하고 있다.

     - 이는 [환단고기]에서 그대로 다시 되풀이 되고 있는데 삼성기전三聖紀全 上*下-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단군세기檀君世紀의 체계로 韓민족의 혈통적 계보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이를 <태백일사>에서 거듭 환국본기桓國本紀-신시본기神市本紀-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로 엮어 풍부한 문헌사료를 언급하면서 조국肇國과 개국開國 그리고 입국立國의 사실을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들은 필자가 이 글의 말미에 따로 장章을 만들어 설명해주겠지만 [고기]라는 원전原典을 별도의 경로와 과정을 거쳐 입수하여 채록했음에도 [삼국유사]와는 아주 달리 두 저서가 기본적인 흐름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내용적인 일체성과 상호보완으로서만이 하나의 문맥이 완결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기록들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흐름과 민족의 맥 속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사고관思考觀을 일체화시켜 하나의 경전經典으로 묶은 것이 [신시개천경]이다.


렇게 내용과 기록이 하나로 합쳐지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직 이런 사실조차 모르는 까막눈만이 함부로 그런 추측과 억단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본래 이유립선생은 [환단고기]안에 [신시개천경](즉 삼국유사의 고기 인용분)도 집어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한 마디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함의 발로이며그래서 전회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 <신시개천>은 물론 <신시본기>까지 이런 사실들이 풍부한 기록으로 엄연하게 기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론 [신시개천경본의]가 1942년에 쓰였다는 말 자체가 이유립의 허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왜 그런 억측이 틀린지 아래의 글로 대신합니다.   계연수 선생이 5808년에 썼다 하였으니 이유립 선생이 그걸 입수한 해가 어느 무렵인지는 구태여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습니다.


     - 古記 인용의 시작은 저 一然의 <삼국유사>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을 한 책으로 묶어 <환단고기>라 이름하였다......신시 개천 5808년 즉 광무光武 15년의 신해辛亥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 유도遺徒 선천宣川 계연수인경桂延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또한 어째서 【애초에 그는 삼국유사의 [고기]를 [환단고기]의 줄임말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문제는 이유립이 “고기=환단고기”라고 저렇게 적어 놓은 부분이죠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였을까?   문제의 그 부분을 읽어봅시다. 


     ▶ 금서룡의 조작한 석유환국-그대로 번역한 [원문번역주 삼국유사]에서 이병도는 고기=환단고기의 전한 그대로의 환국을 빼어버리고 원문에 없는-일본인의 변조한 환인을 내세우면서 자신만만하게 특서하여 가로되...


아하!!! 이제 보니 문맥의 흐름이나 文句의 진의(眞意)도 잘 깨닫지 못힌 망발이로군요!   어쨌든 이 문맥의 핵심은 환국桓國-환인桓因의 망개(妄改) 부분입니다.   그리고 [고기=환단고기]라는 文句는 <삼국유사>에서 원래 말하려는 古記의 桓國 원문(原文) 부분과 <환단고기>의 환국본기나 신시본기 등에서 같은 내용으로 되풀이 언급한 桓國 부분이 전한 그대로의 桓國을 빼버리고...라는 의미를 이유립 선생은 말하려는 걸 정말 이해조차 못하는 건지????   누가 엉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건지 해괴함의 도를 넘어서는군요.


아울러 우리 역사에도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더 시원적인 흐름이 있다는 걸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아예 중국의 부뚜막에 올라 앉아 재롱을 떠는 강아지가 따로 없군요.   더구나 우리 인물들을 [사기공정史記工程]을 통해서 통째로 말아먹은 [삼황오제론]을 보란 듯이 내세우고 있으니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원......<삼황오제>의 출자出自 분석은 많은 문헌과 저술로서 널리 알려진 바 있으니 더는 설명을 약합니다.   다만 각종 고문헌과 기록으로 본 우리 역사의 일관된 기술 태도는 우리 민족의 분지(分枝)였던 <삼황오제>에 대칭되는 桓國-神市의 본가(本家)의 흐름을 설명하는 가운데 본류를 이어간 檀君의 개국(開國) 무렵이 지나(支那)쪽 分枝였던 요堯-순舜-하우夏禹의 첫머리인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는 걸 잘 설명해주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만 첨언합니다.


아울러 [악질식민빠]의 주장을 또 제시하는데 한마디로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논리를 억지로 꿰어 맞추고 예정된 결론을 유도하려는 고의적인 왜곡의 의도가 짙게 풍겨 나오는 군요.   즉 처음부터 [“자료 원전原典이 오로지 문정창이다” 라고 독단적으로 확정]-[문정창의 句文을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인용]-[그걸 나름대로 준비한 반증 자료로 부지런하게 논파]-[예정된 결론 도출]이라는 아주 악의적인 수법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는 아예 따로 [앵무새죽이기  보론補論]으로 설정하여 자세히 설명해드릴 것이나 조급해하지 마시고 여기에서는 전체적인 결론만 간략하게 논증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원문(原文)을 보지요.


[해당 기록 부분 예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부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이 애지중지하는 화하인(華夏人)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남선>이 적시한 바대로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해당 기록에서 아주 간명한 명문(名文)으로 나온 [석유환국昔有桓國]의 존재는 시전 상송(詩傳 商頌)의 구절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 현왕(상商의 시조 설契)환발 수소국시달 수대국시달 玄王[桓撥] 受小國是達 受大國是達 현왕이 환에서 나와 작은 나라를 얻으매 능히 잘 다스리고 큰 나라를 얻어서도 또한 잘 다스리시다.   <시전 상송>


참고로 <최남선>이 해제(解題)를 붙여서 간행한 [삼국유사]에는 桓因의 因자를 [國안에 士]로 인정하여 이를 桓國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전하는 문헌기록들이 비록 엉성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방대한 고조선의 역사적 진실을 매우 요령 있게 응축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를 밝혀볼 수 있는 다른 여러 주장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 ...단군문제 따위는...문적(文籍)의 유무 급 농담여하(有無 及 濃淡如何)로서 그 성립이 흔들릴 것이 아니라 초문적적(超文籍的) 곧 민속상 실증(民俗上 實證)의 유무 급 능부여하(有無 及 能否如何)만으로써 그 운명이 좌우될 것입니다.  <1928  322P>

     -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단군이 그들의 말대로 역사적으로 명확히 논증되기 어렵다하더라도 종교적 방면에 있어서 오랜 근거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1925  60P>

     - 神話는 원시인의 종교*과학*역사를 총괄한 존재이다...신화의 일면에는 분명히 후세의 이른바 역사이며 최초 사회에서는 확실히 신화를 역사로 하여 국가성립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다...특히 어떤 민족도 태고의 사실은 신화로서 전승된다.   <1954>

     - 우리 고대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인 神話가 오랜 옛날부터 지식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래서 문자기록의 위에서 뽑혀버림을 당하여 없애다가 다 없애지 못한 단편잔재(斷片殘在)가 약간 처량하고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온통 다 없어지지 아니하고 요만큼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요.   더욱 유감스러움은 무론(毋論)입니다...<1939  35P>


그는 이런 관점에서 <삼국유사>의 고기운(古記云)에 보이는 신괴(神怪)한 내용이야말로 단군신화가 원시조국에서 개국에이르는 시대의 역사를 알려주는 순수한 산물임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역설하였습니다.   만일 신괴(神怪)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내용이라면 그 자체가 후세(後世)의 조작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 古記를 인용한 神話는 권력의 기원과 신정(神政)의 내용을 내포한 천자강세설화(天子降世說話)와 태양토템과 곰토템이 결합된 토템기원신화라고 해석한다.  

     - 이를 더욱 발전적으로 접근하여 문헌학을 넘어 인문학*인류학*샤머니즘까지도 종합한 분석으로 신화적인 기술들이 토테미즘을 뛰어 넘어 영웅(神人*天王 등)의 시대를 표현한 일종의 원사(原史)이며 천제자(天帝者-上帝)는 사실적인 신정(神政)을 이끌던 고군장(古君長)의 칭호(稱號)이고 <단군고기>에 나오는 규범적 호칭(呼稱)과 지리*역사들은 모두 확실한 전래적傳來的 근거가 있음을 강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최남선]은 <고기古記>의 기록에 나오는 桓國의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태영>박사에게 수차에 걸쳐 의논했듯이 이미 환인(桓因)이라 망개(妄改)한 <경도제국대학본>을 무시하고 桓國이라 기록된 <정덕본>을 기필코 찾아보려는 자세를 초지일관 고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승휴>는 김일연(金一然)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제왕운기]에 기록한 단군의 일을 읊은 대목의 본문과 주석에서 고기(古記)라 하지 않고 근호국사방채각본기여부수이전취재 謹○國史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취載라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본기(本紀)를 인용하여 <상제환인-本紀曰上帝桓因有庶子曰 雄云...본기왈상제환인유서자왈 웅운>으로 표기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입니다.



[각 저서별 원문原文 비교표]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서울대 규장각 도서관 소장 정덕본>


※ 일부러 이 저본을 서두에 올린 이유는 해방 후 문교부편수관*고등고시 위원을 역임하고 동국대*단국대에서 재직한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씨가 일제 치하에서도 은밀하게 소장했다가 광복 후에 조국(祖國)에 바친 정덕본 1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헌의 모든 문장구조는 금서 룡 본(今西 龍 本)과 동일하면서도 전혀 어색하게 [國]을 [因]으로 고친 흔적이 아예 없다.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최남선 본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삼국유사 교감연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 발행한 서울대본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士)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한국고대사자료집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因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금서 룡이 영인 발행한 경도제국대학의 삼국유사 정덕본>

[삼국유사] 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因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리상호의 북역北譯 삼국유사 정덕본>


[환단고기] (단락1) 석유환국중부차서언초환인거우천산...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옛날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환인이 천산에 머무르시어...<삼성기전 하>

            (단락2) 조대기왈 시인다산핍우기생도지무방야서자지부유대인환웅자탐청여정기욕천강개일광명세계우지상시안파견편시금악삼위태백이태백가이홍익인간...朝代記曰 時人多産乏憂其生道之無方也庶子之部有大人桓雄者探聽輿情期欲天降開一光明世界于地上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白而太白可以弘益人間...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에 환웅이라는 대인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삼위*태백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태백일사 신시본기>


※ <최남선>이 말했듯이 정사류(正史類)의 지극히 간략하고 간결하게 기록한 부분의 전문(全文)은 우리 민족문헌사료에서 여러 고전(古典)을 빌어야만이 비로소 완전하게 전체의 얼개를 맞추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역사문헌을 많이 기록하여 남긴 문화민족입니다.   AD 1123년 송(宋)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왕실의 도서관에 소장된 수 만권의 장서를 보고 놀라워한...臨川閣 藏書至 數萬卷 叉有淸燕閣 亦實以經史子集四部之書 임천각 장서지 수 만권 차유청연각 역실이경사자집사부지서>기록이 있습니다.  <고병익>은 <심지어 宋나라는 고려高麗에서 자기네의 없어진 책을 구하려고 했을 정도였다-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5P>라고 말한다.


두 번째 의문은 상기(上記)와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조선조 史書가 일관된 입장으로 단군조선을 소략하게 언급하는 가운데 이견(異見)이 많은 [석유환국(인)昔有桓國(因)] 부분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인용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그 이외의 부분은 별로 이견이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기에 발생하였을지도 모를 무언가 야릇한 상황이 감지되는데 이미 일연(一然)의 원본을 불교적인 색채로 각색하려는 후일의 어떤 시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1) 저술 무렵이 불교를 국교로 하여 왕성하게 꽃피우며 국가 통치 이념이나 민간 사조(思潮)의 흐름을 철저히 지배하던 고려 시대에 더욱이 불교 고승(佛敎 高僧)이 기록한 史書이다.

     2) 내용을 살펴보아도 불교적인 색채로 설화 구조를 탈바꿈시키려는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는데「삼국유사」에서 [석유환국] 주(註)의 <위제석야謂帝釋也>에 맞추기 위한 [因]으로의 변개(變改) 부분이나 묘향산의 비정 기록과 단군(檀君)도 단군(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도 이를 은연중에 뒷받침해준다.


※ 우리가 스스로의 민족사적 체계로 숭배하는 천인 환인(天人 桓仁)-천왕 환웅(天王 桓雄)-신인 단군(神人 檀君)에서 桓仁을 법화경(法華經의 최고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으로 분장시켜 놓고 곰과 범의 설화구조 안에서 단군이 출생한 것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이로서 단군마저 불교의 교리인 <중생구제衆生救濟*탐구인세貪求人世*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고취시키는 인물로 활용하는데 저술목적을 두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 [석유환국昔有桓國] 다음에 <위제석야謂帝釋也>를 군더더기처럼 주(注)를 단 것은 후세의 승려(僧侶)들이 불교적인 색깔을 입히기 위한 의도요 <금묘향산今妙香山>은 고려왕조의 유신(儒臣)들이 단군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오인한 탓에서 비롯된 첨주(添註)이다.   <문정창>


이어 관찬사서(官撰史書)나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의 기술 태도를 잠깐 살펴봅시다.   얼핏 보아도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는 뚜렷한 기준이 감지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原本] 고기운古記云 석유환국昔有桓(口안에 王) (위제석야謂帝釋也) 서자환웅庶子桓雄...


[帝王韻紀] (동국군왕개국연대 東國郡王開國年代) 초유개국계풍운석제지손명단군 본기운 상제환인유서자왈웅 初有開國啓風雲釋帝之孫名檀君 本紀云 上帝桓因有庶子曰雄    (후조선後朝鮮) 조시기자주호원년 祖是箕子周虎元年......


※ 삼국유사의 고기古記와는 달리 본기本紀를 인용했음을 알려준다(혹 단군본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삼국유사*응제시주보다 차이가 있다.


[世宗實錄地理志] (평양부 平壤府) 단군고기운 상제환인유서자명웅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名雄......


※ 제왕운기와 거의 동일하다.


[應制詩註] (명제십수 시고개벽동이주 命題十首 始古開闢東夷主) 증주增註  고기운 상제환인유서자왈웅 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曰雄......


삼국유사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東國通鑑]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기자조선)  운운...

[東國史略] (단군조선 혹 前조선) (단군 성환씨 檀君 姓桓氏...)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지유구종이只有九種夷)유신인有神人(환인지자환웅桓人之子桓雄)강降...(기자조선) 주무왕극상기자솔중국인오천입조선 周武王克商箕子率中國人五千入朝鮮 ...

[東史簒要] (단군조선) 동방유구종이초무군장유신인강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기자조선) 주무왕벌주봉기자우조선 周武王伐紂封箕子于朝鮮...

[東史補遺]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고기운古記云 석유환국昔有桓(國안에 二)(제석야帝釋也) 서자웅庶子雄...

[東史綱目] (기자조선) 자성명서여은주지친척야子姓名胥餘殷紂之親戚也...기자불인주지석주지조선무왕문지인이조선봉지箕子不忍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

[東國文獻備考]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지유구종이只有九種夷) 유신인강有神人降...(기자조선) 기자성자씨휘서여 箕子姓子氏諱胥餘...운운...

[海東繹史] (단군조선) ...단군조선환웅자천신환인지자야강檀君朝鮮桓雄者天神桓因之子也降...(말미末尾 箕子언급) ...복생서대전운기자주지조선무왕문지인이봉지연칙기자지전지유조선지칭 伏生書大傳云箕子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封之然則箕子之前知有朝鮮之稱...(기자조선) 기자자주친척야箕子者紂親戚也...운운...


위 관찬사서(官撰正史)나 사찬 유가사서(私撰 儒家史書)들의 서술체계를 보면 한결같이 [단군조선]-[기자조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단군조선기(檀君朝鮮記)의 내용도 앞서 말했듯이 <존명사대尊明事大>의 편찬 원칙에 충실하게 부합시키면서 그 무렵에도 동시적으로 출현한 우리 민족사서의 내용을 따르되 환국(桓國)부분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환인-환웅-단군의 행적을 백안시(白眼視)할 수는 없어 수록하되 지극히 소략(疏略)한 설명을 바탕으로 신화적*불교적으로 윤색한 의미만을 취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각 史書들의 기술형식이나 내용이 조선왕조의 저술원칙인 일정한 틀과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史書類(제왕운기*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上帝환인-神人환웅]의 입장을 기술하면서 우리 도가사서(道家史書)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한 天帝환인-天王 환웅-神人 왕검의 흐름을 무시하지 않는 자세도 함께 보입니다.   다음은 원전이라 볼 수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나는 대목들입니다.


     - 인간 세상에 대한 桓雄의 의지 부분을 모두 소략(疏略)하거나 삭제했다.

     - 환웅의 뜻에 대한 환인의 반응부분에서 <제왕운기>외는 모두 생략했다.

     - 천부인天符印의 사여賜與부분에도 모두 이유와 내용이 줄어들거나 천삼인天三印 등으로 표현하여 의미를 흐려 놓았다.   다른 史書에 동일 기록이 있기에 망정이지 이 부분만 전래傳來되었다면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간단치 않다.   天符印 3개가 아니라 天三印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크게 왜곡될 수도 있다.

     - 솔도삼천率徒三千에서는 桓雄을 생략하거나 귀(鬼-제왕운기)라고 표현하는 등 더욱 심하게 왜곡하여 민족 이동의 과정을 희석시켰다.

     - 桓雄이 자리 잡아 開國한 분명한 地名인 신시神市를 고의적으로 생략하여 신화적인 행위임을 은연중에 강조하였다.


※ <삼국유사>는 분명하게 [태백산정 신단수하太白山頂 神檀樹下] 다음에 [위지신시謂之神市]라 하여 입도立都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文句 가운데 [之]가 [太白山頂 神檀樹下]라는 장소를 말하거나 [雄]이란 인물을 지칭指稱하거나 어느 쪽이나 다 [神市]는 그것들을 다시 설명해주는 중요한 문자라는 점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유사>가 구태여 [謂之神市]와 [是謂桓雄天王也]를 이어서 기록한 까닭은 같은 사실에 대한 불필요한 반복 설명이 아니라 두 文句가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를 깊이 담고 기술되었다는 증좌이다.   [謂之神市]는 桓雄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던 桓雄의 나라에서 활동한 부분의 설명이요   [是謂桓雄天王也]는 후세後世인 檀君의 나라에서 桓雄을 시조始祖로서 존칭尊稱하였음을 이야기해주는 분명한 기록이다.   또한 문법적이나 문맥상으로도 [之]는 바로 앞의 [太白山頂 神檀樹下]를 받아야 하며 [是]는 [雄] 또는 [웅솔도삼천雄率徒三千...위지신시謂之神市-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열어 군장이 되고 조선의 개국시조인 단군을 낳은 인물로서 존칭을 받은 내용인]라는 전체 문장을 받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 桓雄의 이름에서도 모두 웅雄으로만 기록하거나 단웅檀雄이라 하여 단군檀君과 연결을 강조함으로서 의도적으로 桓國-桓因의 존재를 격절시켜버린다.   <응제시주>는 桓雄이라 했지만 다시 환桓을 단檀이라 한다하여 동일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 하지만 조선조 후반으로 내려갈수록 실록實錄의 기록에서조차 <삼국유사>의 기술태도를 따르려는 뚜렷한 자각이 보인다.   즉 桓因-桓雄-檀君<삼국유사>*桓因-檀雄-檀君<제왕운기>*桓因-桓雄(혹은 檀雄)-檀君<응제시주>*桓因(檀因)-檀雄-檀君<세종실록>*桓因-檀雄-檀君<성종실록>*桓因-桓雄-檀君(선조실록>*환인-환웅-단군(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의 흐름이 뚜렷하게 집힌다.

 

     - 太白山의 위치비정에서는 모두 묘향산妙香山으로 설명하여 은연중에 한반도 안으로 밀어 넣는 유교적 사관을 고수한다.

     - 桓雄이 인간세人間世로 나와 백성들을 통치*교화敎化한 내용을 <응제시주>를 제외하고는 생략하여 설화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 檀君의 말년末年 행적에 관하여 네 史書 모두 <아사달산에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하여 설화적 입장을 고수하는 유가*불가적 사관을 드러낸다.


기자(箕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모두 단군신화를 전하는 본문 내용과 관계없거나 분절分節된 형태(제왕운기가 대표적인 예이다)로 나오고 있는 사실로 보아 기자전설(箕子傳說)은 후대에 진하(秦夏)쪽 기록을 근거로 삽입한 경향이 뚜렷하게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원래 단군신화엔 箕子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또한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이 아무리 축소*생략해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근본적인 핵심들은 여전히 눈길에 잡히고 있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금방 단군신화(檀君神話)가 건국(建國) 사실만을 전하는 기록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개국설화(開國說話)가 아니라 민족국가의 형성과 관련된 더 나아가 조선(朝鮮)으로 대표되는 여러 작은 소국(小國)으로 이루어진 韓민족 고유의 동방대국(東方大國) 형성 이야기로 귀착되어지는 흐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유로 檀君이 국조(國祖)로 받들어졌고 단군묘(檀君廟)가 국가적으로 조영되었으며 민간신앙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神話가 역사적인 실마리를 잡으면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 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번 듣고 흘리거나 허황된 이야기라고 외면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귀결 될 수 있습니다.


     - 檀君과 기자箕子와의 관계 부분에서 지나支那의 격동으로 인한 동방계 東方系 유민遺民들의 도래到來 사실이 파악 가능하다.

     - 檀君이 다스렸다는 국가들의 명칭(시라*고례*남북옥저 운운)에서 桓國-檀國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 우리 민족에 대한 강역 추정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 단군계檀君系와 하백녀河伯女의 혼인으로 동부여왕 <부루>가 탄생했다는 서술에서 국가의 역사적인 맥을 가늠케 한다.



[마지막으로 머털도사님과 다른 한분의 [환국] 변개變改 부분에 대한 일문一文을 첨가합니다].



1. [昔有桓國]의 전수과정이 어떠했느냐를 당연히 봐야 하지요.   문장의 구조로 볼 때 만약 [桓因]이 원형(原形)이었다면 구태여 桓因을 [桓國]으로 고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桓國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桓因]으로 될 가능성은 매우 많습니다.   더군다나 [因]으로 되어 있는 판본을 보면 덧칠한 흔적이 확 표가 납니다.   이는 因이 바뀐 것이며 國이 원래의 단군신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지요.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찾아야 이 문제가 확실하게 결론 내려지겠으나...아직까지 그러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이는 머털도사님이 조금 모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필자筆者가 앞 선 글에서 설명하였음을 참고하였으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작정 [桓國]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어느 누가 보아도 [因]은 덧칠한 흔적이 확연한데 그런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桓國]이 맞는 것이지요.


2. 인쇄본에서 桓國으로 새겨 놓은 것이 미미한 실수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죠.   만약 미미한 실수라면 님이 이렇게 지리하게 반박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즉 桓國이냐 桓因이냐에 따라서 神話의 형태가 매우 달라지는데 그 무렵에 미미한 실수라서 그냥 넘어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다시 말하면 桓因으로 되어 있는 판본은 桓國을 고쳐 桓因으로 덧칠한 것인데...이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神話란 원래 그 시대 문화 종교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桓國이 桓因이 된 것이고 그 증거가 <국립중앙도서관 삼국유사 판본>에 정확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원형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행이도 덧칠되지 않은 판본이 남아 있죠.   그리고 그 판본에는 [桓國]이라고 되어 있으며 단군신화의 원형은 桓因이 아니라 桓國인 것입니다.   아래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삼국유사 다시 띄워봅니다.   누군가 읽으면서 因자가 이상해서 <口+土>로 빨갛게 적어놨군요.


   중요한 것은 <因자>의 <大자>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가 무엇이냐? 는 거죠.   <大자> 위쪽으로 점 두개처럼 생긴 <八자>가 보이죠. 이는 원래 글자가 <口+土>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大자> 오른쪽으로 <方자>로 추측할 수 있는 글자의 오른쪽 부분이 보입니다.   이는 [口+八+方]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바로 [國]의 이체자(異體字)입니다.   <정덕본>에는 [口+王]으로 되어있죠.   이 역시 國의 이체자죠.   따라서 桓因이 아니라 桓國이 맞다는 것입니다.


   ※ [口+土]는 因의 異體字가 아닙니다.   고려대장경 이체자 자전에서 확인해보세요.   일연(一然)은 불교도이었으므로 그가 썼던 한자(漢字)도 불교에서 쓰는 漢子였을 것입니다.   <口+土>는 불교식 음이 "국"입니다.   더군다나 덧칠하지 전의 글자를 [口+土]로 볼 근거는 전무합니다.   오히려 [口+八+方]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덧칠한 因의 <大자> 위쪽으로 <八자>가 보입니다.   [口+八+方]는 國의 이체자죠  <08.10.04 02:46>



민족고대사연구가이며 쑥담배연구가로써 삼국유사 번역자들에게 한마디 올립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 내용 중 석유환국(昔有桓國)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삼국유사 고본에서도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경제국대학교 1904년에 활자로 편집된 상*하 책자(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211)에서도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활자 편집하여 놓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삼국유사 번역자 책자 모두가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옛적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었었다.   일연대선사님께서는 桓國에 대한 설명하기를 桓國의 王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왕(帝釋天王)과 같이 능력이 위대한 桓國의 王이 다스리는 나라였다는 뜻을 삼국유사 번역자 모두가 전혀 모르고 일본 학자에 의해 국(國)자가 인(因)자로 왜곡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석유환인(昔有桓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桓國기록 문헌】


1. 삼국유사 황의돈 본(정덕본), 최남선 본, 송석하 본

2. 일본판 삼국유사- 1902년도 판 삼국유사(도쿄문과대학 본)*1916년도 판 삼국유사(경성조선연구회 본-1902년도 판 재발행)

3. 약천집 (남구만 저)

4. 해동악부 (이복휴 저)


[조선지초유환국朝鮮之初有桓國 기록]


1.수산집 (이종휘 저)

2.관암전서 (홍경모 저)



[앵무새 주장]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이미 앞의 글들을 읽은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도 역시 현존 [환단고기]와는 틀린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죠.   일단 이유립의 말이 사실이라는 개념 하에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신시개천경본의]는 1942년에 쓰여졌습니다.   이 시기라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시기입니다.   계연수가 만든 원본을 가지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죠.


두 번째 이 [신시개천경본의]가 실린 1976년이라면 [환단고기]를 잃어버린 시점입니다.   하지만 [신시개천경본의] 안에는 환단고기의 일부분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확실한 원전에서 베낀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정작 현존 [환단고기](광오이해사본이건 배달의숙본이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틀리다면?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반론]


어떤 사실을 가지고 논증하며 반론을 제시할 때는 단편적인 지식이나 편협한 사고관 그리고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가벼운 숫자 놀음으로 유도해서는 금물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논지를 1942년과 1976년에 의도적으로 맞추는 경박한 태도가 여실하군요.   먼저 아래 사실들을 정밀하게 살피고 사심 없는 생각으로 분석해보았다면 결코 이런 주장이 나올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앵무새의 주장]은 아래의 글을 읽다 보면 자연히 의문이 풀려질 것입니다.   특히 가장 깊게 고개를 갸우뚱거린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정작 현존 [환단고기](광오이해사본이건 배달의숙본이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틀리다면?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란 대목은 글의 후반부를 잘 정독하면 의외로 쉽게 해답이 나올 듯 하군요.  


     -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南과 北에서 모두 1남 5녀를 낳았다.   두 사람은 이유립선생이 41세*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越南)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선생이 3월에 혼자서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淸州)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나온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겨우 다시 남한으로 탈출한 이유립이 이듬해인 1949년에 서둘러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 이유립선생은 피난지인 금산(錦山)에서 화재를 당한 일 말고도 大田을 거쳐 성남(城南)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하게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머릿속에 이미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문헌일 가능성이 크다.

     - 아울러 大田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되면서 비로소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서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나라의 참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선생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 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하였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跋文)을 써놓았다.   이유립선생과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년도(年度)를 적어야 할 땐 桓雄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이란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시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 <전형배>씨를 비롯해 선생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影印)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선생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 가지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誤字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선생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서기 1979년)에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影印)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선생은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誤字)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 “한자漢字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誤字가 있는데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口頭)로 이러한 誤字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原文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誤字)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僞書)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유립 선생이 誤字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影印)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그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韓國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다시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 “선생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이런 연유로 볼진대 [환단고기]에는 분명 誤字가 있을 수 있다.   아무튼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南韓)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선생이 1949년 <오형기>씨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씨 필사본의 誤字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선생도 알지 못한 誤字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유립 선생의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 환단고기 수정 부분들]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선생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고 된 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기록들은 선생이 誤字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앵무새 주장]


그럼 틀린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인용의 부정확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밝히기도 하고 [밀기]로도 밝히기도 한 부분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달아 놓은 곳이 사실은 [밀기]가 출전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유립이 후에 생각나는대로 적어 넣었기 때문이지요.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고려팔관기高麗八關記)를 인용한다고 해놓은 부분을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찾아보면 그런 출전이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은 비슷한데 출전만 삭제한 것입니다(내용에도 물론 추가된 부분과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두 번째 글자들이 틀립니다.    [신시개천경본의]의 개마국蓋馬國이 [환단고기]에서는 개마국盖馬國으로 [개]자가 다릅니다.   보통은 蓋馬國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래된 기록 중에는 盖馬國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   이유립은 처음엔 별 생각 없이 蓋馬國으로 썼다가 [환단고기]를 낼 때에는 원형이라고 생각한 盖馬國으로 바꾼 것입니다.


[신시개천경본의]에는 역亦으로 된 글자가 [환단고기]에서는 혹或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해당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나라 이름도 틀려졌군요.


[신시개천경본의] 직구다국은 또한 구막한국寇莫汗國이라 칭한다.

[환단고기]       직구다국은 혹은 매구여국賣勾餘國이라 칭한다.


저 汗國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매구여로 바꾸어 놓은 모양입니다.   글자 한두 개 바뀌는 것은 오탈자라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전을 보고 쓴 나라 이름이 바뀌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보고 베낀 것보다 머리 속의 기억이 더 정확해서?


이외에도 徒를 移로 바꾼 것, 喫貪을 貪嗜로 바꾼 것이 있으며 [신시개천경본의]에는 있으나 [환단고기]에는 누락된 구절, 또는 그 반대로 되어있는 부분이 짧은 인용문 중에서도 허다합니다.


[반론]


출전을 바꾸었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이 기록 내용에 엄청난 작용을 할만큼 큰 작용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려면 제발 그 기록 내용을 함께 올려놓든지?   이건 참!   일방적으로 설명만 듣고 입을 다물라는 말인지...주장의 ABC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넋두리를 듣고 있으려니...참!!!!


먼저 출전(出典)의 문제인데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부분에서 밝힌 저본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따라서 이유립 선생은 이들을 모두 인용한 전체의 원전原典을 기본으로 [신시개천경본의]를 설명하고 있었으므로 저본을 밝힐 경우 [태백일사]로 통칭하였고 하나하나 인용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언급할 때에는 각각의 기록에서 분리되어 인용한 원출 저본을 말한 듯합니다.   그러니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밝히기도 하고 [밀기]로도 밝히기도 한 부분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달아 놓은 곳이 사실은 [밀기]가 출전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유립이 후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었기 때문이지요라는 주장은 그렇게 되는대로 선머슴처럼 언급하지 말고 좀더 깊이 헤아려보고 주장해주었으면 합니다.


[삼신오제본기] 표훈천사表訓天詞*대변경大辯經*오제설五帝說(주注 포함)*전傳으로만 기록


※ 앵무새가 말한 <고려팔관기>의 경우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에는 [經 즉 대변경]으로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라고 적시하고 있다.


[환국본기] 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

[신시본기] 진역유기震域留記*삼성밀기三聖密記*조대기朝代記*대변경大辯經*삼한비기三韓秘記*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두 번째...기왕에盖馬國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라 하였으면 그 기록을 적시해 주어야지 왜 그런지 환히 밝혀줄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필자가 누누이 말했듯이 이런 억측은 정말로 [우리말소리 값]이나 이를 [음차音借 또는 훈차訓借]하는 비교언어학적인 방법이나 기본적인 분석모델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무지를 드러낸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 [개]는 우리말 [해]의 고어古語인 [가]에서 나온 소리 값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음차音借는 매우 많다(개盖*개蓋*계啓*계癸*기冀*기岐*해亥*해解*해奚).   따라서 개蓋와 개盖는 우리말 [해]를 음사音寫한 것이며 모두 같은 용례로 사용되므로 거론해 볼 一考의 가치조차 없다.


     - 구막한국寇莫汗國의 [구막]은 우리말[구마*고마]이다.   한국(汗國)은 말 그대로 한(汗-大君長)이 다스리는 후국(侯國)이란 뜻이다.   아울러 매구여국賣勾餘國의 [매]는 우리말로 [물水]을 의미하는 [미*밀*마]와 넘나든다.  그리고 [구여]는 말 그대로 [구려]인데 여기에서 [여黎*餘)는 우리말 [가마*고마]의 차음(借音)이다.  그 때문에 우리 민족을 “밝고 환하다”는 [구환九桓]과 더불어 “거룩하고 신성한 천손족天孫族”이라는 [고마*가마]의 뜻인 [구여九黎*구려九麗*구여九餘]로 동의이사(同意異寫)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 지어진 이 小國들은 모두 환국연방(桓國聯邦) 12國 가운데 들어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모양인가?   그리고 이 사람은 혹시 정말로 우리말소리 형태나 우리말의 음차(音借)나 훈차(訓借) 용례(用例)를 전연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러니 【저 汗國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매구여로 바꾸어 놓은 모양입니다라는 어이없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런지......


고사서(古史書)를 집필하거나 필사(筆寫)하는 가운데 크게 내용상의 변경이 없거나 전혀 의미가 달라지지 않으면 자구상(字句上)의 변경과 생략은 비일비재한 현상이라는 게 통설이다.   이 사람은 이런 일들이 무슨 중대한 사건이라거나 엄청난 내용상의 변개(變改)가 발생하여 명백히 위서(僞書)라고 인정할만할 증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참으로 내가 더 어리둥절해진다.


     - 정사류正史類를 비교해보아도 일정한 글자를 동일한 내용의 다른 글자로 바꾸거나 일부 문자를 생략하기도 한다.   단군관계 기사가 들어있는 <삼국유사*응제시주*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를 보아도 동일한 원전에서 채록한 근거가 뚜렷함에도 [名단군-曰단군]으로 [於나 也 같은 어조사]를 생략한 사례들과 비슷한 경우를 보여주는 구문들이 많이 보인다.   문맥의 흐름이나 집필하려는 전체 구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따라서 역(亦-또한*모두)으로 된 글자가 혹(或-혹은)으로 넘나드는 사례나 끽탐喫貪(탐하여 먹다*마시기에 좋아하여 탐하다)을 탐기貪嗜(탐하여 즐기다*좋아하여 탐하다)로 바꾼 용례는 모두 그런 의미로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 위 구절과 같은 사소한 변경과 생략은 찬자(撰者)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서 필사본(筆寫本) 자체의 내용까지 크게 바꾼 건 아니라고 모두 인정한다.   이는 [환단고기]의 필사과정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인데 왜 정사류正史類는 괜찮고 [환단고기]는 이를 위서僞書의 근거가 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진대 근거로 제시한 [개-蓋*蓋] 등등은 전혀 언어학적인 분석태도의 기본을 결여한 경망함이다.   모두가 우리말 소리 값을 한자차용(漢子借用)하거나 비슷한 기록내용일진대 동의이자(同意異字)로 통용된다는 걸 망각한 소치이니 애써 할말도 없다.  



[앵무새 주장]


월간 [자유]지는 중앙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 모두 비치되어 있는 공개된 자료이니 누구든지 찾아가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 말에 무슨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는 몰라도 다짜고짜 욕이나 하실 분들이라면 그 시간에 도서관을 찾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그동안 이유립이 어떻게 [환단고기]의 기초를 만들고 그것을 주물럭거렸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정도만 해도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20세기에 날조된 책자를 들고 [민족의 성전] 운운하는 분들에게 깨달음이 찾아가기를 간절히 빕니다.


[반론]


여기서 필자(筆者)는 이쯤에서 과연 [앵무새]가 이유립 선생이 필사(筆寫)한 [환단고기]의 분량에 대해서 정확히나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내가 알기로는 번역서만 해도 거의 300P에 육박하니 원본 필사(原本 筆寫)에 기록된 한자(漢字)나 구절(句節)의 분량은 얼마일까?   그런 부분에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오탈자(誤脫字)는 과연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그것도 오탈자로 말미암아 문헌 기록의 핵심이나 내용이 뒤바뀌는 게 정말로 있는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글의 전체 흐름과 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단지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아주 작은 구절의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예시를 드는 것도 모자라 마치 이것이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과 문맥을 완전히 뒤집는 듯하게 침소봉대하여 독자(讀者)의 초점을 흐리고 핵심을 비껴가며 오판(誤判)을 하도록 은근히 현혹하는 수법은 여전한듯합니다.   그래서 위에서는 애써 힘을 빼가면서 예시로 든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래야만이 손에 쥐어주어야 아는 어린애처럼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옳지 않은 비교분석 태도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듯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이 사람이 주장한대로의 上記와 같은 극히 일부분 그것도 전체를 뒤바꾸거나 허물만큼의 중차대한 근거를 가지고 [환단고기]가 창작으로 만들어졌다든지 기초부분부터 모조리 만들고 전체의 문맥을 주물렀는지?   아울러 차마 낯이 뜨거울 만큼 중대한 부분에 왜곡이나 하자(瑕疵)가 있어 위서(僞書)라는 핵심적인 증거 사료가 되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더욱 명백하고 공정하며 근거있는 답변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 주장대로 이유립 선생이 고친 글자가 원래 언급한 글자와 전혀 해석이 다르거나 문맥이 아주 달라지게 하는 엉뚱한 내용인가?

     - 이유립선생이 과연 그런 부분을 고의적으로 감추거나 아예 모르는 체 하였는가?  


※ 이는 다른 여러 가지 정황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후일 [광오이해사본]이나 [배달의숙본]을 후학後學들에게 설명하고 해석해 줄 때에도 일일이 기억을 되살려 틀린 부분을 수정해주고 원전(原典)의 구문(句文)과 다른 대목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고쳐주는 태도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 고치거나 자구字句를 바꾼 부분이 관련 구절句節의 내용이나 해당 구문句文의 전체 흐름을 뒤바꿀 만큼 아주 중차대한 대목이었는가?

     - 마지막으로 틀린 글자나 문구文句로 인하여 언급하고자 했던 전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저서著書의 문맥이나 흐름이 뒤바뀔 정도로 심각한 오류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환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學界)의 쟁점토론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환단고기]가 부분 가필(加筆)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僞書)는 아니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환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加筆)된 부분은 대일항전과정(對日抗戰過程)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대전(大田)에 거주하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만으로서는 전적으로 위서(僞書)라고 단정 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길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인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선생은 생전에 어렵고 어두운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칩거하는 와중에 많은 책을 썼으며 그로 말미암아 현재에 이르러서는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평주評註-이유립의 환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선생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선생이 부분 加筆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加筆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古代史書)를 대표하는 <서경書經*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加筆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靑)나라 고증가(考證家)들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는 있겠지요?   그러나 加筆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환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자멸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위서僞書 논쟁에 대한 쓴 말 한마디]


이 세상의 무수한 역사서들이 편찬자의 숨은 의도에 따라 일부는 윤색되고 일부는 진실로 채워져 있다는 평범한 상식을 자각한다면 [환단고기]가 만에 하나라도 일부 첨삭*윤색된 일면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책 내용 전부를 가타부타 없이 무조건 위서(僞書)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소위 고구려*백제*신라의 정사(正史)로 정평이 나있는 <삼국사기>라는 것도 僞書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고 또한 중국의 25史라는 것 역시 僞書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신화적 사건이 상당 부분 나타나고 중국의 25史에도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논리에 앞서 민족의 일원이라면 이민족(異民族)의 史書가 아닌 우리 민족의 史書에 대해서는 일단 먼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해야 하며 단지 그것의 진위를 밝히려는 고증의 노력이 뒤따르면 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고증해보는 노력은 비켜두고 그 동안 배워온 얄팍하고도 잘못된 지식에 터를 잡고 앉아 막무가내로 僞書라고 매도하는 것은 양식 있는 학자의 자세라고 결코 볼 수 없다.   결국 [환단고기]에 대해 일부 가필*윤색된 부분만 유독하게 확대하거나 곡해하여 책 전체를 僞書로 몰고 가는 일부 국내학자들은 반민족적 역사가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호머>의 [일리야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기사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30년이 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유적을 발굴해 냈던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리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신화와 전설을 살아있는 역사로 바꾸어 놓았던 바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인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시금 [환단고기]를 대할 필요가 있다.



[이 장章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들-필독必讀]

- 고기(古記)인용부분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檀君이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기록들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古記]의 편린(片鱗)과 <제왕운기>에서 들고 있는 <本紀>의 내용이다.   두 기록은 檀君과 이전 사회를 거론한 것으로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기록으로 공인되어 있는 정사류(正史類)이며 桓國과 檀國의 의문을 풀 수 있는 핵심 고리인바 檀君의 존재를 아주 명백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서 우리 민족 先史 탐구의 출발점을 만들어 준다.   아울러 민족 사서류(史書類)로서는 가장 두드러진 문헌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그리고 <단기고사>이다.   이 史書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와 <삼성기三聖記> 그리고 <밀기密記>가 모두 [古記]에 전거를 두고 있음은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사례분석과 비교 문헌적 고찰을 통해 입증한바 있다(古記-조대기-태백일사*古記-구삼국사-동명왕편과 제왕운기*古記-삼국유사-응제시주)


이어 분석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이다.   이 문헌은 본격적인 실록형(實錄形) 기술태도를 보이면서도 <고기>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어 설화(說話)와 사실의 층위(層位)를 넘나들고 있다.  


[단군세기] [古記云]  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有神 人之德遠近畏服年十四甲辰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混一九 桓神化遠 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在帝位九十三年壽一 百三十歲


위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대기>의 인용문에 <기후유호왈단군왕검其後有號曰檀君王儉>이란 대목에서 “기후其後”의 시점을 기준으로 [고기]의 기록을 옮긴 것처럼 보인다.   桓민족도 이제는 구환(九桓)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달리 <웅씨왕熊氏王>에 대한 기술(웅씨왕문기신성거위비왕섭행대읍국사 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웅씨왕]이 <삼국유사> 등 正史類에서 축약해버린 桓雄과 檀君 사이의 중간 역사를 복원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이런 기록을 담고 있음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의 다음과 같은 내용도 [고기]에서 유래한 것임을 추정케 한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山名曰不咸 今亦曰完達 音近也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以天王諭國人之意 戒之曰 父母可敬也 妻子可保也 兄弟可愛也 老長可隆也 少弱可惠也 庶衆可信也 又制醫藥工匠養獸作農測候禮節文字之法 一境化之 遠近之民 皆不相疑也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嘗百草制藥...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黎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바로 이 문장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후 웅녀군 위천왕소신 세습위비서갑지왕검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여기의 天王은 제1세 桓雄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상 桓雄部族과 熊氏族이 통혼(通婚)한 시점에 근접하고 있다.   때문에 ”爲天王所信이 의미하는 바는 <밀기>의 구절인 ”사일혈진 賜一穴塵 일위신계지맹一爲神戒之盟“이니 <태백일사>의 上記 문장은 진실을 보증한다.


<왕검王儉>이 된 熊女君의 후예(後裔) 가운데 <여黎>라는 사람이 있어 <단허檀墟>에 책봉되었다.   그 후 460년에 檀君이 熊氏王의 비왕(裨王)으로 등장하고 있다(유신인왕검자 대득민망 승위비왕 거섭24년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이 [24년]은 <단군세기>의 인용문으로 이미 살핀 [고기의 기록인 시위단군왕검재비왕위24년 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과 일치하므로 <단군세기>에 인용한 [고기]의 “무진당요시래자단국지아사달단목지허국인추위천제자 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는 또다시 진실성을 얻는다.   다음으로 <태백일사 신시본기>는 단군의 일대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蓋自神市開天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而始有檀君王儉 以熊氏裨王 遂代神市 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檀君朝鮮也


<삼성기>는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찬술한 두 저서가 전해지는데 내용을 보면 檀君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桓雄시대가 중심이다(안함로  桓因-朱蒙까지*원동중  인류 조상 나반那般-桓因-桓雄까지이며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도 수록).   따라서 이제까지의 추적과정을 통해 보건대 [고기]야 말로 안함로 저술본의 기술내용 범위와 동일했을 것으로 보여 지니 [고기]의 축약본(縮約本)으로 보아 무방하다.  다음의 기록이 그와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


[안함로 삼성기] 後神人王儉降到于不咸之山檀木之墟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承詔繼天而建極 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神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設都 阿斯達開國號朝鮮

[이암李嵒 단군세기] 戊辰元年大始神市之世四來之民遍居山谷草衣跣足至開天一千五 百六十五年上月三日有神人王儉者五加之魁率徒八百來御于檀木 之墟與衆奉祭于三神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巍蕩惟烈 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身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建邦號朝鮮


<단군세기>의 서술 부분은 [고기]를 인용한 것이다.   <삼성기>와 비교하면서 <기지其至> 이하 대목을 보면 명백하듯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문헌을 거쳐 채록한 두 저서는 동일 저본에 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문구상(文句上)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 단군과 조선 부분에 있어서 <삼성기>가 <단군세기>와 정합(整合)을 보인다는 것은 <삼성기> 또한 [고기]를 인용했음을 말해준다.


이런 사정은 다음의 [고기] 인용기록을 보면 더욱 명백해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고기] 原文의 전체적인 내용과 수록범위를 복원하는데 <원동중>의 것보다는 <안함로>의 <삼성기>가 한결 유익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안함로 삼성기]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群生命彭虞闢土地成造 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이암 단군세기] 於是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 羲典卦筮尤掌兵馬納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 之治熙洽四表


그렇다면 [고기]는 언제 성립되었을까?   추정컨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는 기술하였던 듯이 보인다.   그 단서를 <삼국사기 제2 근초고왕> 조條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의 저자(著者) 문제에 있어서는 고구려계(高句麗系) 인물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주몽설화>에서 해모수와 주몽을 부자관계로 설정했다는 저변에는 이미 종족과 국가의 맥을 이었다는 인식이 전제되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모수>는 단군조선을 이어 북부여를 건설한 인물이며 고구려는 三國 가운데 檀君의 맥을 이었다고 자인(自認)하던 나라였다.   따라서 환국-단국시대를 自國의 역사로 기록할 사람은 역시 고구려인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13년 조] [古記]云 百濟 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 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이상으로 단군설화와 관련된 [고기]의 추적을 면밀히 해보았다.   물론 그 핵심은 <삼성기>와 <조대기>이다.   <제왕운기*응제시주*세종실록 지리지-평양부>에 전하는 단군설화가 <삼국유사.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인바 아무튼 <삼국유사>만이 오랫동안에 걸쳐 단군설화를 전하는 최고의 문헌으로 관변(官邊) 역사학자들은 간주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로 비추어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어도 <삼성기>는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도 더욱 원시형태를 지닌 원전(原典)이며 이 두 문헌들에 비하여 <조대기>는 [고기]의 본문 내용을 가장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앞으로도 우리가 매우 유의해야 하며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기타 밀기密記*비기秘記]와 [고기古記]와의 문헌적 비교】


단군전후사에 관한 기록으로 [고기]와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서적으로 <밀기-三聖密記>와 <비기-三韓秘記>가 있다.   <삼성기>에 [고기]와 함께 <밀기>가 나란히 인용되고 있는데 모두 동일한 서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밀기>와 <비기>엔 공통적인 기술이 등장한다.   다같이 어떤 모종의 저본에서 발췌한 것이 분명하다.   <밀기>와 <비기>는 상이한 문맥에 일정하게 동일한 文句를 삽입시켜 놓고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한 책을 하필이면 여러 산만한 구절 중에서 꼭 짚어서 한 대목만을 베꼈을 터라는 추단이 거의 불가할진대 두 문헌은 결코 동일한 서책이 아니며 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저본(底本)을 인용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원동중 삼성기] [密記云] 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 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 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 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 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 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後有葛古桓雄與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神勇冠絶以銅頭 鐵額能作大霧造九冶而採鑛鑄鐵作兵天下大畏之世號爲蚩尤天王蚩尤俗言 雷雨大作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見炎農之衰遂抱雄圖屢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及 軒侯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三韓秘記 曰]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域外 後 有葛古桓雄 與神農之國 劃定疆界 空桑以東屬我 又數傳 而至慈烏支桓雄 神勇冠絶 其頭額銅鐵 能作大霧 造九治以採得 鑄鐵作兵 造飛石迫擊之機 天下大畏之 共尊爲天帝子蚩尤 夫蚩尤者 俗言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 見神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進據淮岱之間 及軒轅之立也 直赴涵鹿之野 擒軒轅而臣之 後遣吳將軍 西擊高辛 有功


헌데 이는 <밀기>와 [고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래의 구절은 모두 저자(著者)의 찬술(撰述)이 아니고 인용문이라는 것이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이맥 태백일사 환국본기] [三聖密記云] 波奈留山之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 國也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勾茶川國一群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勾牟額國賣勾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卑爾國一云豕韋國一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是也 天海今曰北海

[원동중 삼성기] [古記云] 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之國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句茶川國一羣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句牟額國賣句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禾卑 國(一稱豕韋國或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也天海今曰北海傳七世歷年三千三百一年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未知孰是


어떤 단일한 서책에서 같은 부분을 발췌한 듯한데 이점은 동일한 기술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文句를 쓰고 있음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실례로 환웅부족과 웅씨족의 통혼관계에 대하여 <밀기>는 역사 기록에 가깝지만 [고기]는 이미 설화(說話)의 성격(곰과 호랑이 운운*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볕을 보지 말라)을 보여준다.


[원동중 삼성기] [密記云] 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원동중 삼성기] [古記云]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二族皆得而食之忌三七日熊能耐飢寒遵戒而得儀容虎則放慢不能忌而不得善業是二性之不相若也熊女者無與爲歸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乃假化爲桓而使與之爲婚懷孕生子有帳


결론적으로 <밀기> <비기> [고기]는 동일한 문헌이 아니다.   그리고 주요 핵심은 단군전후사이다.   그러면서 <밀기>는 지시(指示)하는 문장으로 사건의 기록 자체에 보다 충실(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하려는 반면에 [고기]는 표현하는 문장(설화적-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으로 그 내용의 구성여부에 중심을 둔다.  


     - [고기]의 문장이 표현적임은 저자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랜 전승(傳承)을 통해 굳어진 일종의 서술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기]에서 발견되는 이런 점들은 <밀기>와 비교하여 오직 단일 층위의 전승에서 비롯될 수가 없다.

     - 두 서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저본의 성격과 전래과정에 일어난 맥락의 차이가 분명한데 <밀기>는 전승에 따른 내용의 굴절을 훨씬 적게 받은 방어적 형태의 저본을 토대로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고기]가 더 통속적이 유전 경로를 거쳤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단일 저본으로 추정되는 <밀기>와 <비기>의 문제이다.   문맥의 흐름과 전후관계에 주안점을 둔다면 <후유갈고환웅여염농지국획정강계우수전이유자오지환웅 後有葛古桓雄與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이야 말로  두 저서(著書)의 공통 된 기술의 모든 범위를 보여주는 핵심 구절이다.


     - 원동중의 <삼성기>에 실려 있는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갈고葛古-10대*치우蚩尤-14대 환웅이다.   때문에 동일하게 인용한 [우수전이又數傳而]란 文句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공동으로 취한 저본(底本)은 갈고-치우 사이에 3대를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공동저본은 분명히 편년체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그걸 축약하여 기술하면서 <우수전又數傳>이란 말로 대체한 것이다.

     - <밀기>는 환웅-갈고-치우의 연속성을 <비기>는 복희-갈고-치우의 연쇄를 드러내는데 둘을 결합하면 환웅-복희-갈고-치우로서 <신시역대기>와 정합한다.

     - 아울러 <밀기>는 환웅시대에 관심이 있고 <비기>는 치우시대에 주안점을 둔다.   바로 <삼성기>와 <태백일사> 저자의 취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제 <밀기>의 <복희伏羲>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복희>는 제5세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밀기>도 <복희>의 이력과 후예들에 관한 기록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서 두 저서는 적어도 환웅시대에 대한 전 역사를 각각 기록했던 문헌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 까닭이 모두 어떤 동일한 저본을 서로가 임의로 축약하여 기술하는 가운데 별도로 성립하였음이 자명해진다.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密記 曰] 伏羲 出自神市 世襲雨師之職 後經靑邱樂浪 遂徙于陳 幷與燧人有巢 立號於西土也 後裔分居于風山 亦姓風 後遂分爲佩觀任己煊理缸彭八氏也 今山西濟水 羲族舊居尙在 任宿須句須臾等國 皆環焉


추측컨대 <밀기>와 <비기>가 고려시대에 저술된 단서가 보인다.   <태백일사>의 인용 서목(書目)을 보면 <밀기>는 <신시본기>까지 언급되며 고구려에 이르는 부분과 <고구려국 본기>에서는 <조대기>와 <대변경>이 주로 인용된다.   바로 [밀기]의 기록 내용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또한 <밀기>는 불교가 이미 유입되어 민속에 일정하게 유입되던 시점에 쓰여 졌음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맨 마지막으로 인용된 文句에서 밝혀진다.   <비기>는 <고구려국 본기>에 인용되었는바 당(唐)에 대한 언급으로 추정컨대 두 문헌의 성립은 고려시대의 어느 시기로 생각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今僧徒 混以帝釋稱壇 則非古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三韓秘記曰] 舊志云遼西有昌遼縣 唐時改遼州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원동중의 <삼성기>의 저본은 핵심 주제로 보아서나 자료적 한계로나 [고기]*<밀기>이다.   헌데 어느 서책에서 발췌한 것인지 도입부가 조금 이상하다.   이는 분명히 [고기]의 구절로 보여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뒤 따르는 문구는 [고기]로 여겨지는데 [고기]가 <桓國>에 이어 따로 <환인씨지국桓因氏之國>으로 고쳐 쓸 까닭이 없어 [고기]의 인용이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인거우천산득도장생거신무병대천선화사인무병 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擧身無病代天宣化使人無兵>에 대한 <桓因氏之國>의 기술 태도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원동중 삼성기]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它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禮則九桓之族皆其後也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擧身無病代天宣化使人無兵人皆作力自無飢寒傳赫胥桓仁古是利桓仁朱于襄桓仁釋提任桓仁邱乙利桓仁至智爲利桓仁或曰檀仁  古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 


<밀기>는 <桓國>에 대해서만큼은 [고기]와 저본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밀기>도 아니고 저자(著者)의 창작도 아니니 출전(出典)이 훨씬 복잡하게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눈길을 돌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를 보면 <오제설五帝說>을 인용하여 <오방五方의 사명司命>을 논하면서 다음의 단락이 이어진다.


[이맥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偶之處曰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日夢得神啓而自成昏禮明水告天而環飮山南朱鵲來喜水北神龜呈瑞谷西白虎守嵎溪東蒼龍升空中有黃熊居之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


바로 출처는 <오제설>이다.   이제 다시 역사로 들어가자.   <인류지조왈나반...천해금악삼위태백본속구환이개구황64민개기후야 人類之祖曰那般...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란 구절은 분명히 저자의 독창(獨創)이 아니다.  


     - 만약 그렇다면 <삼성기>의 오행설에 입각해 기술한 부분을 완벽히 배제하지는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著者가 특별히 오행설을 싫어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 더욱이 위 단락에서 <아이사타역칭사타려하야 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와 <천해금악삼위태백본속구환이개구황64민개기후야 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사이에 엄연한 단절이 보여 <오제설>이 제기하고 있는 文句가 아닌 <나반那般>의 일대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문맥구조가 올바르다.

     - 다시 말해 <阿耳斯它>와 <天海金岳三危太白>은 서로가 너무 돌발적이라 둘을 관련지어 줄 매개 사건이 필요하다.


따라서 <삼성기>와 <오제설>은 공통의 저본을 활용하였으되 [고기]나 <밀기>도 아닌 다른 신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추론케 한다.   우리는 다시 아래 문맥에 주목하게 된다.


[이맥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七月七日卽那般渡河之日也是日天神命龍王召河伯入龍宮使之主四海諸神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是也天河注曰天道起於北極故天一生水是謂北水蓋北極水精子所居也


<하백시천하인나반지후야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 하필이면 <나반>의 후예로 <하백河伯>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이 <나반설화>는 <하백족>이 주역으로 어느 시점에서 문헌 전승이 이루어졌고 위 단락은 그런 과정에서 모종의 원전(原典)으로부터 채록되었던 게 틀림이 없다.   물론 전거서적에는 <나반>의 출현*혼인*활동상*후예에 관한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천하(天河)는 천해(天海-천하일운천해금왈북해 시야 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 是也)로 구환(九桓)의 한 소재로서 언급되는 <나반설화>의 기원지이다.   바로 이쯤에서 또 하나의 설화가 주목된다.


[안함로 삼성기]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일강동녀동남800여흑수백산지지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와 나란히 언급된 <어시환인역이감군거우천계배석발화시교열식위지환국시위천제환인씨역칭안파견야 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가 핵심 포인트이다.   드디어 해답이 풀렸다.   즉 <안파견 설화>이며 기원지는 <흑수백산>이다.   그리고 <나반설화>엔 <천강天降>의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안파견설화>는 <천강설>에 기초를 단단히 박고 있다.   이제부터 이를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환웅설화]를 다시금 정독할 때가 되었다.


[원동중 삼성기] 桓國之末安巴堅下視三危太白皆可以弘益人間誰可使之五加僉曰庶子有桓雄勇兼仁智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可遣太白而理之乃授天符印三種仍勅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


여기에서 <庶子>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직계(直系)가 아닌 방계(旁系)로서 <서자부庶子府>를 담당했던 새로운 세력 탄생의 완곡한 어법이다.   즉 [환웅설화]는 原出地에서 분리되어 가는 같거나 서로 이웃한 지역 안에서 발생했던 국가와 세력의 교체나 부상을 의미하는 전승으로서의 역사이다.   지성의 산물인 문자에 의한 역사가 아니고 생활의 산물인 언어에 의한 실제 역사과정이다.


처음의 역사는 모두가 언어로 되어 있던 전승의 형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 본 3개의 전승은 <밀기> <비기> 그리고 [고기]가 제기하는 공통저본의 가장 처음을 구성했던 주요 핵심 형태이다.   이것들이 언제 어떻게 어떤 문헌들에 정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과정 속에서도 기록으로 탈바꿈되었기도 했지만 전승 자체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 확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런 정황을 실질적으로 추정케 하는 인용구문이 등장한다.   언어에서 회화로 그리고 회화에서 문자로 역사의 존재와 기술방식이 변화하였음을 적시한다.


[이맥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大辯說註] 曰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 有神市古刻 其文曰桓雄出獵 致祭三神 又曰大始傳古 只憑口舌 久而後 乃形以爲妓 又復妓變而爲之字 蓋文字之源 莫非出於國俗之所尊信也


<대변설>의 상기 지적을 사실로서 보여주는 저서(著書)가 <조대기>이다.   <발해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발해를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전승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와 <환국본기>에 인용된 <조대기> 문구(文句)의 현격한 차별성이 그 실례이다.


[규원사화]에 따르면 <조대기>는 <진역유기>의 저본이다(고유청평산인 이명자 고려시인 유지역유기3권 인조대기 비재아국고사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3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事-규원사화 단군기).   <태백일사>는 <진역유기와 조대기>를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동일 내용에 대하여 동시 인용한 경우가 없다.   이는 두 저서의 독자성을 밝혀주지만 두 저본의 내용이 대동소이함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좌이다.   따라서 같은 계통의 가장 마지막 필사본인 <규원사화>가 <태백일사>에 수록되어진 <조대기나 진역유기>의 단편(斷片)들에 대한 보충자료로서 읽혀져야만 사료 가치가 특별히 돋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진가성(眞價性)과 위력이 극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다.


     - 조대기의 성립은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발해사의 종말까지 기술하여 발해 멸망 시점이 기준임을 추정케 하기 때문이다.

     - 조대기의 아래와 같은 저자논변(著者論辨)은 저작 시기가 신라 말에서 고려 성립 이전임을 밝혀준다.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今夫究其源 則盖一源之祖也 然 地旣分東西 各據一方 土境逈殊 人煙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 狩獵採伐之外 曾無險陂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桓族之分遷該域者 垂涎而轉進 土着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 焉黨同讐異 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해석]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들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이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이지러질 일이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토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손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위 문구는 <조대기> 인용의 연속인데 저자(著者)의 주장일 수 없음은 내용이 이맥(李陌)의 시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주된 핵심이 환족(桓族)의 자아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먼저 직시(直視)할 필요가 있다.  


     - 필자(筆者)는 환족(桓族)의 기원인 환국桓國-환인桓因을 논의하고 현재를 반추하고자 문맥을 되돌린다(금부구기원 칙개일원지조야 今夫究其源 則盖一源之祖也).    이미 앞 문장에서 환웅桓雄의 치세*환웅부족과 웅녀족(熊女族)의 결합*신시神市의 문화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神市時代가 우리 민족문화의 황금시대임을 이미 역설하였다.

     -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남”은 곧 “나”와 같다.   동족을 의미한다.   자아비판의 느낌이 매우 짙다(연 지개분동서 각거일방 토경형수 인연불통 민지유아이불식유야 然 地旣分東西 各據一方 土境逈殊 人煙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중국(仲國)과 서토(西土)가 극명하게 대비(對比)되는 부분이다.   서토(西土)란 말은 <상서尙書 주서周書 진서일중秦誓一中>에서 은(殷)에 대한 주(周)의 뜻으로 처음 쓰였다.  따라서 西土가 화하족(華夏族)의 나라임이 분명할진대 [중국仲國]이 어디인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신시神市를 계승한 후예들의 나라]인 것이다.   이를 <임승국>씨는 [서양인]으로 풀어 의미를 이상하게 만들었지만 틀림없는 [우리 신시족神市族]을 지칭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중국자 서토지보고야 옥야천리 풍기회창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 그런 중국(仲國)이 지금 西土에 의해 수탈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맥은 민족의 양심을 겨누면서 마친다(어시 언당동수이 이간벌서동 於是 焉黨同讐異 而干戈胥動 !).   “한 겨레로서 어찌 서로 칼을 겨누는가!”   민족 분열 시기가 아니고서는 결코 절규할 성질의 탄식이 아니다.


따라서 위의 문장구조로 보아 <조대기>는 발해 멸망-신라 멸망에 이르는 민족 분열기에 저작되었다.   아무튼 <조대기>는 [환단고기]에서 <태백일사>에만 직접 인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단군세기>의 著者도 [고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조대기>가 [고기]보다 훨씬 체제구성이 뛰어났던 정황이 엿보인다.   단군세기의 著者는 그러한 사실에 눈을 돌린 듯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단군세기>는 이암(AD 1296-AD 1364)의 말년인 AD 1363년에 저술이 완료되었다(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 凡三千六百十六年也 歲十月三日 紅杏村臾 書 于江都之海雲堂).   [무진기원설-단군기원설]의 본격적인 표현인 <단군세기>는 <이암>이 겪어오면서 통탄한 시대의 고민과 심정을 짐작할만하다.   즉 [단군기원설]은 고려의 북진책과 교감을 얻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 교차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단군기원설]은 더욱 성장하여 고착되었고 <북진책>은 아쉽게도 좌절되었다.   <이암>은 거기에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다.   그것이 바로 <단군세기>이다.   이런 모든 유전사서(遺傳史書)들을 하나로 묶은 [환단고기]의 진가(眞價)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우리 고대사기록으로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면 [고기]이고 전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다만 여러 인용 史書들에 편린이 남아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채록되었지만 著者가 직접 인용하였는지는 여전한 의문이다.   그들은 삼국 이전 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기]의 대부분은 그런 역사 기록이었기에 그들에게 유용한 사료로 그리 애용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미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문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구삼국사]이다.   따라서 그걸 충분한 자료로 삼았고 삭감이야말로 가장 필요조건이었다.


- 이규보는 말한다.  <김공부식중찬국사 파략기사의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意-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 뱡서幷書>  


삼국사기의 著者가 생략해버린 것들은 <구삼국사>가 기술하고 있는 <이규보>식 용어로 말하건대 “일상과는 크게 다른 사실 大異之事”였으며 그 내용은 그저 평범한 게 아닌 필자(筆者)가 앞서 비교문헌적으로 들추어낸 우리 민족사서의 비범(非凡)한 기록들이었다.


이러한 비범한 기록들을 처음으로 역사에서 배제한 이는 공자(公子)와 그의 시대였다(자불어 괴력난신 子不語 怪力亂神-논어 권4 술이述而 제7).   이걸 저들이 말하는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라 한다면 우리나라 史書에 유가적 합리주의를 가장 먼저 실현한 저작이 <삼국사기>라 볼 것이다.   때문에 <이규보>도 처음엔 이런 합리주의에 흠뻑 빠졌던 듯하다.


     - 세다설동명왕신이지사...복상문지 소왈 “선사중니 불어괴*력*난*신 차실황당기궤지사 비어조소설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僕嘗聞之 笑曰 “先師仲尼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 非吾曺所說(동국이상국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병서) 라 하며 동명왕 설화를 그저 웃어넘긴다.


그가 <구삼국사>를 읽게 된 때가 26살인 명종(明宗) 23년 4월(AD 1193)이었고 그로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의 사상적 전환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저작인 <동명왕편>을 필두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찬술되었음은  그를 정점으로 한 당시의 정서적 분위기를 짐작케 해준다.   실제로 이규보(AD 1168-AD 1241)*김일연(AD 1206-AD 1289)*이승휴(AD 1224-AD 1300)의 생몰년대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 급삼복탐미점섭기원 비환야 내성야 비귀야 내신야 及三復耽味 漸涉其源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동국이상국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병서)


<이규보>의 사상적 변화의 종점을 <일연>은 그의 역사의식 형성의 기점으로 받아들였다.   일연은 <삼국유사> 서문序文에서 이규보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을 넘어선 비범의 영역인정-그걸 인식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이해-이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관-지속적인 관심과 수용이라는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사유(思惟)의 단초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 대저 고지성인방기예악흥방 인의설교 칙괴*력*난*신재소불어 연이 제왕지장흥야...필유이어인자 연후 능승대변 악대기 성대업야 大抵 古之聖人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在所不語 然而 帝王之將興也...必有異於人者 然後 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무릇 옛날 성인들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시고인의로 교화를 펴실 때에는 괴력난신을 말한 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임금이 나실 때는 하늘이 주신 표시가 반드시 있어서 여느 사람과 다르셨다.   그런 후에 큰 변이 있는 때를 타고 새 나라를 세우는 큰일을 이룩하셨다.   (삼국유사 紀異 제2)


<일연>의 태도는 확고한 듯 보인다.   물론 불가적(佛家的)인 윤색은 논외로 한다.   이를 [유사적 관심遺事的 觀心]이라 칭한다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삼국유사>에 이르러 그 전형을 이루었으며 <제왕운기>로 계승되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적 입장은 우리 민족 사서류(史書類)에서는 공통적으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일관성 있게 지속되어온 사조(思潮)였다.


     - 연칙 삼국지시조 개발호신이 하족괴재? 차기이지소이점제편야 의재소언 然則 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所焉우리 민족이 세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기하게 나셨다는 이야기도 별다른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과 달라서 신기하게 나셨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이 글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유사적 관심]의 사유체계(思惟體系)와 사상의 영역은 [유가적 합리주의]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기름지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넓은 이해라는 새로운 역사관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진실한 역사의 맥을 찾아낼 수 있다.   후세의 불도승(佛道僧)들이건 스스로의 불교적 윤색이건 간에 그런 부분을 제외시키고 남은 대목에서 <김일연>이 말하고자 한 <삼국유사 기이 권1 고조선>이 가진 의미와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일연>이 인용하고자 했던 [고기]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각에서는 황당한 언어로 엉성하게 짜여진 그물이었다.   그 속에 담긴 비법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단군전후사]를 두고 오늘날까지 한편에서는 단지 神話라는 단어로서 그걸 못 박고 철저히 역사의 범위에서 배제시켜 왔다.   그러면서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역사로 환원하여 왔다.


그걸 가능케 한 고집은 실증적 세계관을 매개로 삼은 논리학과 과학이다.   그래서 한계는 늘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은 전혀 아니 아예 그걸 모르고 덮어둔다.   증명할 수 없는 대목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말하나 오히려 영원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요구해오는 탐구해야만 할 현실이요 사명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보다 풍부하고 관대한 사유(思惟)와 드넓은 사상적 포용이다.   그렇다고 실증적인 세계관을 포기할 까닭도 없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첨예한 역사전쟁의 국면에서는 오직 그것만으로써 모든 걸 맞추어 놓고 자만해야만할 여유가 없다.   우린 지금도 배고프며 또 나아가야 할 길이 멀어 한가하게 걸어갈 시간이 없다.




당신 덕분에 청청 스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쑥을 연초로 하는 제품을 연구하십니다. 속칭:고운맘
Joseph님/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어려운 작업을 같이 동참하시고 있음에 가슴이 푸근하군요. 많은 분들이 각자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힘을 기울이시고 있는게 너무 보기 좋아 제 글에 자주 인용하고 있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지요. 그 분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꾸지람은 달게 받아야겠지요. 반가워요.
대수맥님의 수고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대배달민족사 연구회 카페지기입니다.. 86년 4월 전형배 고성미 씨가 와서 선생님 돌아가셨다고 전하여...그들과 함께 내가 집을 모르니까 안내하러 온 것으로 기억남.. 화곡동 빈소에 갔습니다..무명의 사학자의 상가에 그런대로 조문객들이 모였더군요..거기서 양종현 씨를 처음 만났고..오형기 선생이 제문?을 한문으로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紫霞洞人님/ 고맙습니다. 제가 한 2주 동안 일이 바빠 못들렸네요. 그런 사연이 있는데 저들은 아예 귀를 막고 있군요.
월간 자유지를 본 때가 76년 부대 정훈실에서...늦은 나이에 간 군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지만...이 때 자유지에서 우선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글을 보고 머리에 번개 벼락을 맞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국민학교 때부터 고조선은 평안도 중심. 낙랑 현도 임둔,,,다 한반도라는 공식으로 배우고 그것이 중 고 대학까지 인이 박히도록 배우고 외우고 그랬던 것인데.....전에 신채호 선생의 글에서 얼핏 본 내용인데...자유지에 자세하게 고증하였더군요 박창암 장군과 교류는 그 때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