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사학의 얄량한 떡밥

대수맥 2012. 3. 9. 17:41

 

외廆에게 귀순歸順한 왕준王遵의 후예後裔인(외廆는 그를 새로 설치한 낙랑태수樂浪太守로서 삼았었다.  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왕좌王左라고 해석해야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도 연燕은 왕王이 아닌 태수太守를 두었으며 낙랑군樂浪郡 참군사參軍事였던 왕준王遵이 대방군帶方郡을 이치移置하면서 대방태수帶方太守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각설却說하고 낙랑군樂浪郡 서현西縣을 취한 분서왕汾西王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통張統과 같이 모용외慕容廆에게 달아난 낙랑태수樂浪太守 왕준王遵이 자객刺客을 보낸 게 확실하다(連年不解는 1-2년이 아니다)  


결국 중토경략中土經略에 몰두沒頭하느라 [서성西城]에 머물렀던 후유증으로 왕王이 갑자기 죽자 오래 동안 비운 반도半島의 [동성東城]에서 초고왕계肖古王系인 비류왕比流王이 자리를 잇는다(여기에서도 분서왕汾西王의 아들이 나이가 어려 정식 계승繼承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추대로 올랐다는 복선伏線이 등장한다).  


분명히 두 왕王이 피살被殺되었으면 보복 형태의 어떤 움직임이라도 있었을 터인데 재위在位 동안 대방帶方이나 낙랑樂浪 등 중토中土에 관한 기록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비류계沸流系를 잇는다는 명분名分을 위해 [비류比流-뜻을 따르다*모방模倣하다*좇다]라는 왕명王名을 썼다.



바. 온조왕溫祚王 시기의 과장된 기록에 관한 진실



31년에 나라의 백성을 갈라 남부와 북부를 만들고 33년 8월에 동부와 서부를 다시 덧붙여 설치했다.  31年分國內民戶爲南北部...33年秋8月加置東西二部...<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



왕王 26년에 드디어 마한馬韓을 축멸逐滅하고 난 뒤에 남북2부南北二部로 나누었는데 이어 동서2부東西二部를 다시 설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백제百濟가 동쪽이나 서편으로 강역을 넓히거나 군사행동을 한 기록이 없다.   즉 온조溫祚는 시국처始國處인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서부西部로 획정劃定한 것이다.



왕은 동과 서에 있는 양 성에서 거처한다.  其王所居有東西兩城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


...왕은 동과 서의 두 성에 거처한다....王居東西二城   <신당서新唐書 백제전百濟傳>


...도성을 고마라 했다...號治城曰固麻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


...고마성에서 다스렸다...治固麻城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


...도성을 고마라고 하였다...號所都城曰固麻   <남사南史 백제전百濟傳>


도성을 거발성이라 하였다.  其都曰居拔城...<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


...도성을 거발성 혹은 고마성이라 했다...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


요서와 진평군을 같이 영유하였는데 스스로 백제군이라 하였다.   송서에 이르기를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에 두었는데 도성을 백제군의 거발성이라 불렀고 즉 진평성이 진평의 거발성이다...兼有遼西晉平二郡自置百濟郡宋書言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都城號居拔城則百濟郡即晉平而居拔城即晉平城也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반도半島에서 동서東西로 두 개의 왕성王都를 둔 일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족漢族들은 백제百濟의 도성都城을 두 개의 명칭名稱으로 혼란스럽게 기록하는 입장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가 중토中土와 반도半島의 양성兩城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이런 의문점에 대한 해답이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있다.



[대방고지帶方故地의 백제百濟]가 온조溫祚 이후에도 존재하였음을 추정케 해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는데 고구려高句麗에 밀린 부여夫餘 일파一派를 영향력 아래 두어 입지立地를 강화하고 백제계百濟系 부여씨夫餘氏를 올려 분치分治하였다.   이런 통치방식은 더욱 더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사. 근초고왕近肖古王 시기의 이해할 수 없는 기록들



왕王은 분서왕汾西王의 아들이었던 계*설*글契이 비류왕比流王시기에 요서遼西에서 웅거雄據하고 있던 시기에 비류比流가 죽자 계왕契王과의 왕위계승전王位繼承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마침내 분리되었던 두 백제를 경영하는 자리에 오른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기록 속에 은유적으로 보인다.



1) 고이왕古爾王이 개루왕蓋婁王의 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국인國人의 추대를 빌미로 삼아 왕위王位를 빼앗은 다음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사실로 볼 때 똑같은 과정을 거친 비류왕比流王이 과연 분서왕汾西王의 아들이 장성長成하자 약속을 지키는 선량한 마음으로 물려주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 기록이 주목된다.



봄에 가뭄이 들고 큰 별이 서방西方으로 흘러 떨어졌다.   여름 4월에 왕도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흑룡黑龍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春 旱 大星西流 夏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비류왕比流王 13년 조條>



아마도 이 무렵에 요서백제遼西百濟 세력과 반도백제半島百濟 집단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벌어진듯하다.   <큰 별은 주로 왕王을 상징>하니 이 때 계왕파契王派가 밀려 요서遼西로 이동한 것 같으며 흑룡黑龍은 이 충돌에서 근초고계近肖古系가 입지立地를 굳혔으므로 <왕도王都의 우물>로서 은유한 것이다.


2) 근초고왕近肖古王은 2년 동안 정식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지 못했다는 게 통설通說이다.   요서遼西의 혼란을 아울러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진다.  


3) 이상한 점은 다른 왕王과는 확연하게 즉위卽位 후 20년간의 행적行蹟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뿌리 깊은 요서백제遼西百濟 족단族團과의 앙금을 원만하게 해소解消하기 위해 중토中土의 안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도론半島論]에 충실했던 편찬자編纂者들로서는 이런 기록들이 전혀 이해가 불가능하고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고의로 빼버렸을 듯하다.


4) 이런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난다.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인물로 인정되는 왕王이 그 시기에 반도半島의 정사政事를 외척外戚인 진정眞淨에게 오로지 맡겨둔 다음


  백성들이 진정眞淨의 행위에 매우 원망하였다는 사실을 특기特記하였음에도 그 후 어찌되었는지? 기록조차 없으며 왕王 또한 그걸 알면서도 어떠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무렵 왕王은 한성漢城에 머물지 못하였으며 그럴 겨를도 없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후의 친척으로 성품이 패악스럽고 어질지 못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까다롭고 잔소리투성에다가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狠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근초고왕近肖古王 2년 조條>



5) 이런 상황에서 왕권王權 안정의 명분名分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혈통血統의 정통성이 필요했고 결국 [초고왕肖古王]의 직계直系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6) 이윽고 정세情勢가 안정되어가자 먼저 백제연합군百濟聯合軍 편제編制를 포함한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그 위엄을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誇示하는데 갑자기 눈에 뜨일 만큼의 강력한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면서


  강대국强大國 고구려高句麗를 제압하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을 패사敗死시킬 정도의 위세를 보이는 가운데 군사대국軍事大國으로 부상浮上하는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중토中土에서의 실전實戰 경험이 풍부한 요서군遼西軍은 고구려高句麗와의 대전大戰에서 큰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겨울 11월 한수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는데 깃발들은 모두 황색을 썼다.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 조條>


겨울에 왕은 태자와 함께 3만 정예병으로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왕 사유가 힘껏 싸워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죽자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 麗王斯由(釗)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 조條>

 


7) 정치권력의 집중을 이루어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토대로 권력기반을 강화한 다음 연합된 왕실王室의 권위權威를 세우고 정통성正統性과 신성성神聖性을 강조하기 위해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국초國初부터의 역사와 선대先代의 왕실계보王室系譜를 국가적 차원에서 일정하게 정리해 문자文字로 기록하도록 하는 사업을 완성한다.   단일왕통單一王統의 역사편수작업歷史編修作業이 이때에 진행된 것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가 나라를 연 이래로 문자로서 일을 기록한 것이 없었는데 왕은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박사인 고흥을 얻어 서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한번도 다른 책에 나타난 적이 없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 조條>



아. 동성왕東城王 시기의 북위北魏 기록에 대한 진실



현現 사학계史學系에서 가장 논란論難이 많은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다름 아닌 북위北魏와의 전쟁 기록 문제인데 이는 백제百濟의 중토中土 경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사記史는 이제 여러분들조차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참고로 원문原文 그대로 수록收錄한다.



1) 제1차 전역戰役  AD 488


보기步騎 수만을 거느리고 침입한 위군魏軍을 동성왕東城王이 친히親히 출전出戰하여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부여고夫餘古*건위장군建威將軍 부여역夫餘歷*광무장군廣武將軍 부여고夫餘固와 양무 등을 보내 영격迎擊하여 대패大敗시킨다.


왕王은 남제南齊에 표表를 올려 전역戰役에 공功을 세운 장수將帥들에게 관작官爵을 줄 것을 요청해 이를 받아냄으로서 대방帶方 지역의 영유권領有權을 대외적으로 확실히 하였다.



위가 쳐들어와 백제왕 변도(모도牟都의 오기誤記이다)를 크게 무찔렀다.  魏虜征之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建康實錄 영명永明 2년 조條  AD 484>


(AD 488] 위魏가 군사를 보내와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동성왕東城王 10년 조條>



[전역戰役 후 AD 490년에 보낸 표문表文 내용]



[전반부 결문缺文]......공로와 근면함에 보답코자 실로 그 이름을 열거하여 보존하려 합니다.   가행영작장군 신 저근 등 네 사람은 힘을 다하여 충성함으로서 나라의 어려움을 떨쳐버렸으며 뜻과 용기에 과단성이 있고 명장의 위세에 견줄만  합니다.   국가의 성곽이며 사직을 지키는 견고한 보루라 할 만 하기에 공로를 논하고 노고를 헤아림에 있어 마땅히 드러내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전례에 의거하여 함부로 행의 직책을 임시로 주었습니다.  


바라건대 은혜로서 가상하게 여기어 임시한 바를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작장군면중왕 저근은 시대의 급무에 조력을 다하였으며 아울러 무공도 뛰어나기에 이제 행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임시합니다.   건위장군팔중후 여고餘古는 약관의 나이로 보좌하며 충성된 공적이 일찍이 널리 알려졌으니 이제 행녕삭장군 아착왕으로 임시합니다.  


건위장군 여력은 충정과 정성이 서로 어울리매 문무의 공덕이 함께 드러나니 이제 행용양장군 매로왕으로 임시합니다.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시대의 급무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국정을 크게 베풀었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불사후로 임시합니다.   신이 보낸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 및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 등 세 사람은 지조와 덕행이 맑고 밝으며 충정과 정성이 이미 알려졌습니다.  


지난 태시(AD 461-AD 471) 중에 송의 조정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갔었으며 지금 우리 백제국의 사신으로 임명하매 거듭되는 험난한 여정을 무릅쓰고 다니며 좋은 결과에 이르도록 하니 마땅히 작위를 올리고 삼가 선례에 의거하여 각기 행의 직책으로 임시합니다.  


더욱이 오묘한 은택과 영험한 안식은 만리 밖에서도 바라는 바인데 황차 천자의 뜰에 가까이 있으면서 어찌 은혜를 입고 의지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살피시고 특별히 가상하게 여기시어 정식으로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달은 변방의 임무에서 그 정성이 일찍이 널리 알려졌으며 공무에 힘써 노력하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임시합니다.  


양무는 지조와 덕행이 많고 전념하여 공무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임시합니다.   회매는 뜻을 지키매 빈 구석이 없고 힘써 좋은 결과에 누차 이르니 이제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임시합니다.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동성왕東城王이 관작官爵을 내리고 남제南齊에게 이를 인정해주도록 요구한 부분>



[표문表文에 대한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조치措置]



조서를 내려 허락하여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고 태수로 제수하였다.   백제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사신 겸 알자복야 손부가 천자의 명으로 모대에게 죽은 조부 모도의 관작을 답습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르기를 “오호라 오로지 이 시대에 충절을 이어받아 멀리까지 정성을 들어내니 큰 바닷길은 삼가 맑으며 선물의 맹세는 쇠퇴한 적이 없도다.   통상의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 위업을 삼가 이어 받았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서를 내려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모대를 이제 조부 모도의 관작을 답습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고 즉위의 인장과 인끈 및 옥과 구리와 호랑이 가죽과 대나무로 된 네 개의 책자를 내리노라.   백제왕이 이를 공경하여 삼가 받으면 또한 경사스럽지 않겠는가?”       



2) 제2차 전역戰役   AD 490



백제百濟와 남제南齊와의 동맹同盟을 와해瓦解시키기 위한 공작工作으로 AD 489년 8월 위魏 고조高祖의 특사特使 형산邢産과 후운소侯靈紹를 남제南齊의 무제武帝에게 보내 화호和好하여 AD 490년 4월과 11월에 서로 사신使臣을 교환해 화평관계和平關係를 확인 한 후 북위北魏는 10만 대군(大軍-남제南齊 기록은 수십만)을 몰아 백제군百濟軍을 공격하였다.


[1차 회전會戰] 참패慘敗의 보복報服을 위해 다시 수십만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내침來侵한 위군魏軍을 당시 중토中土에 머물고 있던 동성왕東城王의 지휘아래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 사법명沙法名*안국장군安國將軍 피중왕辟中王 찬수류贊首流*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 해례곤解禮昆昆*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 목간나木干那를 보내 맞아 싸우게 하여 대패大敗시키고 수만 명을 참수斬首한다.


백제百濟의 출진出陣은 국가의 성수聖數를 기반으로 한 [5군제五軍制]로서 대왕大王을 중군中軍으로 하여 4왕四王과 후侯가 전후좌우前後左右 4군四軍의 편제編制가 된 진영陣營을 유지하며 공격과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두 번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압도적壓倒的인 승리勝利를 얻자 이런 전과戰果를 적은 국서國書를 북위北魏와 화친和親하고 있던 남제南齊에게 보아란 듯이 표문表文으로 보내면서 동시에 또 우격(羽檄-격문檄文을 말한다)까지 각 나라에 보내어 위세威勢를 과시誇示하였다.



[AD 490] 위魏나라 오랑캐가 기병騎兵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百濟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將軍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昆*목간나木干那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昆木干那率兵襲虜軍大破之   <남제서南齊書 영명永明 8년 조條>



[2차 전역戰役 후 AD 495년에 보낸 표문表文]



우리 백제국은 예로부터 봉함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내려준 부절과 도끼를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① [지난번 저근 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 받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우리나라와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庚午年(AD 490) 험윤(獫狁-북위北魏를 낮춘 말이다)이  ②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핍박하며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역습하여 토벌케 하여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처럼 들이치니 그 공격하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으며 흉리匈梨의 선우는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적들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서 쫓아가 머리를 베니 엎어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조용하고 평온한 것은


로 사법명 등의 하늘을 누르고 땅을 뒤엎는 전략전술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이를 표창해 주고 드러내어 후세에 길이 남도록 칭송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시하고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피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으며 ③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데다 또한 누선을 쳐서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원하건대 천자의 은혜로 특별히 가상하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백제가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및 겸참군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색 그리고 행양무장군 진명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번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백제국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작을 올려주어야 함에  ④ 각기 행行으로 임명하여(임시로 동성왕이 관직을 판단했다는 말로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는 말임) 임시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동성왕東城王이 관작官爵을 내리고 남제南齊에게 이를 인정해주도록 요구한 부분>



[표문表文에 대한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조치措置] 



이에 남제南齊는 “조서詔書로서 허락하고 나란히 군호君號를 하사下賜하였다”라고 <남제서南齊書>는 기록하고 있다.



[필자筆者의 도움말]



여기서 주목할 점들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AD 488] 그리고 [남제서南齊書-AD 490]의 기록 태도와 년대年代 차이差異와 관련하여 매우 면밀하게 검토해야할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시사점示唆點들을 감안할 때 두 사서史書의 기록은 결코 중복된 기술記述이 아니다. 



1) 가장 먼저 한인漢人들은 심지어 발해渤海에 뜬 사실조차 [부해浮海*도해渡海]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는 전혀 그런 기술記述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 허락한 직책職責과 관련한 지명地名이 광양(廣陽-북경北京 동북부 상곡上谷지방)*조선朝鮮*낙랑樂浪*대방(帶方-대방고지帶方故地)*광릉(廣凌-양자강楊子江 좌안左岸 능무진현陵武進縣)*청하(淸河-산동반도山東半島 임뢰臨瀨*창읍昌邑 지방)*성양(城陽-동청주東靑州) 등으로 이 전역戰役으로 과거 백제百濟의 영역을 대부분 회복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3) 위 번호 부분의 기록 내용으로 보아 백제百濟는 북위北魏와 한번 싸운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1차와 2차의 장군將軍 이름들이 다르고 위魏가 회개하지 않고...라는 말을 하고 있으며 굳이 목간나木干那는 앞서의 군공軍功이 있으며...라는 강조를 한다).  


그리고 왕王은 극히 담담하게 <험윤獫狁이 병사를 일으켜...>라는 표문表文으로 시작하면서 병력兵力에 대하여 부풀리지도 않고(오히려 남제서南齊書가 수십만이라 표현하고 있다) 전역戰役 상황을 과장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신뢰감信賴感을 더해준다.


4) 이때 백제百濟가 북위北魏를 물리치고 회복한 지역에 왕王과 후侯의 작위를 주며 百濟의 인물을 파견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과 면중왕面中王*매라왕邁羅王*피중왕辟中王*불중후弗中侯 등의 작호爵號가 보이는데


  백제百濟의 임명한 신하臣下들에게 남제南齊가 왕王의 관작官爵을 두말없이 인정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④ 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굳이 동성왕東城王이 요구한 작위爵位이었음을 보아 그것은 백제百濟에 꼭 필요한 관작官爵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5) 또한 이들이 임지臨地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실직實職이었음을 알려주고 왕명王命에 의해 전공戰功에 따라 영지領地를 이동하면서 통치했음을 보여주는데 임지臨地의 이동은 토착화土着化를 막기 위한 조치였음을 추정케 한다.


※ 굳이 사법명*찬수류*저근(웅진熊津 천도遷都에 공功이 큰 조미걸취의 조미씨족氏族이며 조미를 저로 표기했다)*여력*여고 등 왕王의 칭호稱號를 쓰는 장수將帥가 필요한 이유는 중토백제中土百濟를 용이하게 지배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이들은 총독總督과 같은 역할을 하고 <해례곤*목간나*여고> 등은 [불중후*면중후*불사후]로서 중토경영中土經營을 보좌補佐하면서 낙랑樂浪*조선朝鮮 등의 태수太守들을 그 아래에 거느리는 가운데 각 지역을 실제로 통치했을 터이니 이들의 입지立地를 내외內外에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남제南齊의 그들 지역 영유권領有權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위魏가 군사를 보내와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동성왕東城王 10년 조條>



그런데도 우리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러한 사실을 단 한 줄의 <짤막한 외마디> 소리로 끝내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2. 백제百濟의 중토경영中土經營을 인지認知하고 있는 한족사서漢族史書들의 기록.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백제百濟를 언급한 사서史書 가운데 [주서周書]가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사실이며 <그 기원起源이 부여夫餘의 한 갈래이다. 出者夫餘別種>라는 이전以前의 설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구대仇台가 시조始祖임과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 대방帶方이다.  有仇台者始國於帶方]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편찬編纂 성격은 <백제전百濟傳>이 포함된 [이역전異域傳 서문序文]이 잘 밝혀주고 있다.   즉 전사서前史書들의 내용을 두루 참조參照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대同時代의 자료를 빠짐없이 검증檢證하여 기록하려는 편수태도編修態度가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其四夷來朝聘者 今並紀之於後 道路原根物産風俗 詳諸前史或有不同 斯皆錄其當時所記 以備遺闕云爾...<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41 이역상異域上 서문序文>



이는 편찬編纂 내용에서 보여주는 백제百濟에 관한 매우 풍부한 기록을 살펴보아도 상당한 지식知識과 견문見聞을 기반으로 기술記述했음을 알게 해준다.   나라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과 규모에 관한 상세한 기록내용이 이를 직접적으로 입증立證해주며 더욱이 구대仇台에 대한 국가적인 숭배崇拜와 묘사廟祠에 대한 언급은 결정적이다. 



가. 북조北朝를 비롯해 다른 문헌文獻에 등장하는 기사記史들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자 머물렀다.   동명의 후예로 구대가 임망을 얻어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취했다...渡浿帶二水至彌鄒忽居之...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 조條>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구원을 청했는데 앞서 그의 딸인 보과를 맞아 사위와 같은 처지로서 돕지 않을수 없다 하고 병을 보내 구했다...한과 맥인이 쳐들어와 왕이 나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해를 당해 죽었다.  元年 高句麗伐帶方帶方請救於我先是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故曰帶方我舅甥之國不可不副其請遂出師救之...十三年秋九月漢與貊人來侵王出禦爲敵兵所害 薨.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책계왕責稽王 조條>


당의 장군 고간 등이 4만으로...대방을 침공했다,  12年9月唐將軍高侃等率蕃兵4萬到平壤深溝高壘侵帶方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文武王 조條>


왕이 고구려 반중叛衆을 거두어 백제고지를 차지하고 있자 당 고종이 대노해 말갈과 함께 이를 토벌하려고 석문의 들에 군사를 보내 둔영屯營시키었는데 왕이 의복과 춘장 등을 파견해 대방의 들판에서 방어토록 했다.  王納高句麗叛衆又據百濟故地有之唐高宗大怒遣師來討唐郡與靺鞨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營於帶方之野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



위의 기록을 보면 참으로 이상스럽다.   여러 기술記述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전혀 다른 결론結論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① 백제百濟의 시국처始國處는 [대방고지帶方故地]이고


② 백제百濟가 별안간 대방왕帶方王의 딸을 부인으로 맞는가 하면 대방帶方에 칩입한 고구려高句麗를 막는데 지원을 해주고 있으며

 

③ 고구려高句麗를 멸滅한 뒤 AD 671년 당唐과 신라新羅가 뜬금없이 대방帶方에서 싸우고 있다(到平壤深溝高壘侵帶方).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같은 시기를 기록한 부분에서는 당군唐軍과 고구려高句麗 부흥군復興軍의 안시성安市城과 백수산白水山 전투 기록만 보이고 현現 사학계史學界가 맹신盲信하고 있는 반도半島 평양平壤과 대방帶方 지역 침공은 어디에도 없는가 하면

 

④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의 기록(AD 674)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데 <신라新羅가 백제고지百濟故地를 점령했다>는 내용으로 기술記述했다.



결국 이 기록들은 고구려高句麗가 망한 뒤 신라新羅가 발해만渤海灣의 중토中土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아야 설득력을 가진다.   즉 [백제고지百濟故地=대방고지帶方故地=신하新河 지역=요서遼西 지방]이란 등식等式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한 마디로 같은 지역임을 표현하는 <대방帶方=석문石門=석성石城=백제百濟의 고지故地>는 모두 [요서遼西] 지방인 것이다.



진한은 처음 6나라에서 12나라로 나누어 졌는데 신라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 나라는 백제 동남쪽으로 5000리에 있고...辰韓始六國稍分十二新羅其一也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高句麗百濟接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위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옥저로 달아나 돌아올 때 남은 사람들을 신라인이라 했는데 그래서 그곳은 백제에 속한 옥저*불내*한예의 땅으로 화하*고구려*백제인이 섞여 살았다. 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者遂爲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


...백제는 옥저를 망한 뒤 그 경계에서 나라를 세웠다.沈欽韓曰沃沮自魏後不復著蓋百濟立國於其境而沃沮亡矣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 집해集解 주석註釋>



신라新羅에서 서북으로 5000여리에 있던 백제百濟는 바로 [요서遼西의 백제百濟-대방고지帶方故地*백제고지百濟故地]일 수밖에 없으며 이 무렵엔 가라加羅가 이미 백제百濟의 부용附庸이 되었으므로 [南北與高句麗百濟接]이라 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 백제百濟가 정착한 지역(소서노召西奴 세력)인 대방고지帶方故地를 굳게 지켜나간 잔류세력殘留勢力으로서 명맥命脈을 유지하기도 하고 강성할 때는 주변지역을 수복하여 압도하기도 하였다(...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 이런 점에 비추어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서도 미상지(未詳地-자세하지 않은 지명地名)로 표현된 관미성關彌城이야말로 백제百濟가 처음 자리를 잡은 미추홀(나라의 성지聖地인 미추홀彌鄒忽의「彌」)을 지켜주는 중요한 관문(關門인「關」)이 되는 이 부근의 요충성(要衝城인「城」)임을 알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백제百濟의 요서경영遼西經營]이 남조南朝의 사서史書에만 기록되어 있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북조北朝]의 사서史書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비록 명시明示한 점과 행간行間으로 읽어낼 수 있는 차이는 있지만 그 실례實例를 살펴보기로 한다.



...渡浿帶二水至彌鄒忽居之...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 조條>


대방고지帶方故地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 사이에 있다.   <자치통감資治統鑑>


옛 유성은 하간부 염산현 동편으로 70리의 다른 이름으로 유정성이다.  古柳城在河間府鹽山縣東70里一名柳亭城   <명일통지明一統志>



백제百濟는 [대방고지帶方古地]에서 건국建國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역을 반도半島가 아닌 중토中土로 설명하고 있음을 금방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저서著書들의 편찬자編纂者는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者遂爲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


沈欽韓曰沃沮自魏後不復著蓋百濟立國於其境而沃沮亡矣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 집해集解 주석註釋>



현現 사학계史學界의 말대로 옥저沃沮가 반도半島 북부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 시기 백제百濟가 그곳까지 진출하여 잡거雜居할 까닭도 없으며 그 지역을 점유占有하여 나라를 세울 이유도 없다.   따라서 옥저沃沮 등은 발해만渤海灣 지역에 있음이 뚜렷하다.



부여는 처음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가 쳐들어 와 부락들이 무너지면서 서쪽의 연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初夫餘居鹿山爲百濟所侵部樂(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儁...遂伐夫餘虜其王玄及部落5萬餘口而還皝以玄爲鎭軍將軍妻以女  <자치통감資治通鑑 영화永和 2년 조條  AD 346>


고구려와 백제와 우문단부 사람들은 중국이 아닌 곳에서 와 있으므로 언제나 돌아갈 생각만 간절한데 지금 도성안에 10만의 호수가 넘으니 장차 나라에 큰 해가 될지 두렵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人皆兵勢所徙非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心今戶垂十萬狹溱都城恐方將爲國家深害   <진서晋書 모용황慕容皝 재기載記>



백제百濟가 반도半島에 있었다면 녹산鹿山의 부여夫餘를 공격하여 격파擊破했다는 이 구절句節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울러 모용황慕容皝의 전연前燕 도성都城 지역에 왜 백제인百濟人들이 우문씨宇文氏 및 단부인段部人들과 함께 있었을까? 



백제百濟는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천리千里 떨어져 있으며 소해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모두 산에 기거寄居한다.   <위서魏書 백제전百濟傳> 


 

북위北魏는 <AD 386년-AD 528년>의 나라로 한 때 백제百濟와 직접 격돌激突하여 그 무렵 서로의 강역疆域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 왕조王朝가 백제百濟를 고구려高句麗와 1000리 떨어졌으며(반도半島라면 서로 붙어있어야 옳다) 작은 바다(발해渤海)의 남쪽에 있다. 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반도백제半島百濟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구대...점차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 그래서 백제란 이름을 얻었다.  仇台...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


仇台...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



우리는 여기에서도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① 분명히 온조溫祚 세력이 아니다.   구대仇台로 표현된 비류沸流 집단이기 때문이다.  ② 건국建國 초初부터 바다를 제압制壓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제(百濟-비류족단沸流族團)는 뛰어난 선박제조船舶製造 기술과 항해술航海術을 지녔음을 앞서 말했다.


따라서 비류계沸流系 대방고지帶方故地 세력은 국초國初부터 발해渤海와 동해(東海-산동반도山東半島 앞바다)의 해상교통로海上交通路를 활용하여 반도半島 서남해안西南海岸을 해운海運으로 장악掌握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의 중추집단中樞集團들이 바로 주요 거점지배자據點支配者들인 담로擔魯이었으며 공교롭게도 [담로계擔魯系 지명地名]은 중토中土 동남과 반도半島 서남해안西南海岸 지역에만 몰려있다. [1]   결국 백제百濟는 비류沸流의 국가國號로서 시작된 것이다.


[1] 이 지명地名들이 다물계多勿系 분포分布와 거의 일치一致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다물多勿]은 비류국沸流國 송양松讓을 포용包容한 추모鄒牟가 그에게 내린 작위명爵位名이다.   그런데 비류沸流는 소서노召西奴가 비류국沸流國의 우대優台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다.



해마다 4번 시조인 구대의 묘에 제사를 드린다.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


도읍에 시조인 구대의 묘를 세워 해마다 4번 제사를 드린다.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



아주 중요한 기록인데 모두 북조北朝의 사서史書들로서 가장 백제百濟를 잘 알고 있었던 입장에서 국성(國城-나라의 도읍都邑 성城)에 시조始祖로서 모시는 구대仇台의 묘廟를 종묘宗廟로 세우고 해마다 4번 정성을 모아 제사祭祀를 지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왜 <김부식金富軾>은 다른 제사祭祀는 언급하면서 이 기록들을 통째로 빼버렸을까?



백제왕百濟王 여창(餘昌-위덕왕威德王)을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에 봉封했다.  <북제서北齊書 권8 무평본기 2년(AD 571) 정월正月 조條>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임치臨淄) 동쪽인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이 [동청주東靑州]이다.   백제百濟가 이곳을 점유占有한 까닭은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한족漢族과는 다른 옛 하인夏人들의 하어夏語를 쓴다고 언급한 여씨족단余氏族團의 근거지根據地여서 맥脈이 닿기 때문이었다.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여 열명의 신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국호를 십제라 했다....비류가 자살하여 후에 그의 신민들이 온조에게 귀화하여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沸流)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 조條>



위의 사실들을 간접적으로 입증立證해주는 우리 기록이다.   비슷한 국호國號라 해도 온조溫祚는 보필補筆을 받아서 [십제十濟]라 하였고 비류沸流는 백가百家가 해운海運을 장악掌握하여 [백제百濟]라 지었음을 알려주어 아주 다른 의미를 내포內包한다.

 


초기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백제란 이름을 얻었다.   진 때 구려가 요동을 영유領有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경영했는데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에 있다.  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晋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2郡(주석註釋  今柳城北平之間)   <통전通典>


요서遼西 백제군장百濟君長은 부여숭夫餘崇인데...<통전通典 권185 백제전百濟傳>


본거지가 강江의 좌우(左右-장강長江 하류인 진강鎭江과 건너편인 양주揚州)에 있었다...<북사北史 권94 백제전百濟傳>


백제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가 천 여리에 있으며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 있다.  百濟國其先出自夫餘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  <위서魏書 백제전百濟傳>


...장안에서 1200리 인 큰 바다 북쪽 작은 바다 남녘에 자리하고 있다....在京師東之1200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


서西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고구려) 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른다  西渡海至越州 北懷海至高麗 南渡海至倭(윌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니 회계 부근이 다 백제의 소유였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


동진*송*제*양 때 강좌에 백제가 웅거하고 중원을 차지한 후위에도 사자를 보내 봉을 받았다.  自晋宋齊梁居江左後魏宅中原竝遣使稱蕃兼受封拜   <주서周書 권49 백제전百濟傳>


북위北魏가 병력으로 백제百濟를 쳤다가 패敗했다.  魏遣兵擊百濟爲百濟所敗   <자치통감治通鑑 권136 영명永明 6년  AD 488>



그래서 결국 [주서周書]와 [통전通典]과 [위서魏書] 그리고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는 물론 [자치통감治通鑑] 모두가 위와 같이 결론結論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나. 남조南朝의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기사記史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를 밝혀내기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 하나는 가장 최초의 관련 사료史料인 [송서宋書] 기록의 당위성當爲性 문제인데 실제 사건이 있은 뒤 수백 년이 지난 다음이라면 왜곡歪曲과 첨삭添削 등 양상樣相이 달라지겠지만


송宋과는 특별히 활발한 사신왕래使臣往來가 있었던 백제百濟이었고 그 나라가 망한지 불과 10년이 채 안된 AD 488년에 <심약沈約>이 편찬編纂하였으므로 당시의 견문見聞과 지식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사료적史料的 가치價値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로 아래의 기록 때문이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영유하자 백제도 요서를 경영하였는데 백제는 진평군 진평현에서 다스렸다.  其後高句麗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송서宋書 백제전百濟傳>


진 말기에 구려가 요동을 약유하자 낙랑(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약유했다.  晋末驅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 <양직공도梁職貢圖>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점유하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晋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양서梁書 권54 백제전百濟傳>


(모도牟都의 아들 모태牟太 때)...얼마 자나지 않아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쇠약해진 것이 몇 년을 가더니 남한의 땅으로 옮겨 자리하였다.  尋爲高句麗所破衰弱者累年遷據南韓地   <양서梁書 권54 백제전百濟傳>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晋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이연수李延壽  남사南史 백제전百濟傳>


자세한 내용은 앞선 부분에서 기술하였으므로 생략한다.   그 대신 결락缺落 부분의 앞 대목에 관한 기술記述 내용이 최근 들어 동同 시대時代 다른 사서史書들의 기록에 의해 일부 보충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밝혀둔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백제전百濟傳>



□□□□□□□□□□ [보완補完한 대목] □□□□□□□□


백제와 변진의 나라는 진 시절에 일어나 번의 작위를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다스렸는데 고구려 동북쪽에 있다.  百濟弁辰之國起晋世修蕃爵 自治百濟郡在高麗東北   <남제南齊 소자현蕭子顯의 건강실록建康實錄 내용에서 보충補充>


같은 편찬編纂 형식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구려高句麗의 경우(출자出自 즉 원류기사源流記史-위치 기록-대중국관계對中國關係 기록 등 순서)처럼 결락缺落 부분엔 [요서경영기사遼西經營]과 전쟁기사戰爭記史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송서宋書]와 [남제서南齊書]를 비교하면 [남제서南齊書]가 <재요동지국在高麗東北*진평군晋平郡을 백제군百濟郡으로 기재記載>하고 있어 기본 사료史料 이외에 다른 문헌文獻이나 외교적外交的 접촉사료接觸史料들을 참고하였음을 알려주어 [요서遼西 영유領有]의 사실성을 확인해준다.  


또한 특별한 시사점示唆點으로 <在高麗東北>이란 구절句節에서 고구려高句麗가 당시 영정하(永定河-백제百濟 서남西南) 유역을 차지했다는 사실까지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다.


□□□□□□□□□□□□□□□□□□□□□□□□□□□□



[송서宋書]가 송宋이 망한지 10년도 안 되어 쓰여 졌으며 그동안 꼼꼼하게 적어 놓았던 서원徐爰의 구서舊書를 첨삭添削만 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그래서 AD 487-AD 498이라는 짧은 기간이 걸렸다) 비교적 신빙성信憑性이 있고


그 뒤로 [제齊*양梁]은 물론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여 채용採用한 사실을 결코 먼 산 보듯이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그러한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AD 377) 유주자사 행당공行唐公 락洛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며 유주치중幽州治中 평규平規가 한 말에 “북으로 오환과 선비를 거느리고 동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끌어당기면 무장한 군사가 50여만을 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04 열종 상지중>


고려백제가 강성할 때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남으로 오와 월을 치고 북으로 유주와 연과 제와 노를 위협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境)幽燕齊魯爲中國巨蠹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전崔致遠傳>



청장년기靑壯年期를 중토中土 왕조王朝에서 관직官職에 오르며 보낸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이 모든 사실史實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입장에서 그 무렵 사서史書의 기사記史를 종합하여 숙고熟考한 뒤 이윽고 [백제百濟의 요서경영遼西經營]을 인정한 것이다.



제4장  작호분석爵號分析으로 본 요서백제遼西百濟의 실재성實在性 증명



[연燕]   AD 355  榮州諸軍事征東大將軍榮州刺史封樂浪公高句麗王     (고국원왕故國原王)

           AD 395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AD 413  使持節都督榮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   (장수왕長壽王)

[송宋]     AD 420   使持節都督榮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麗王樂浪公   (장수왕長壽王)

            AD 422   使持節散騎常侍都督榮平二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   (장수왕長壽王)

[남제南齊] AD  494  使持節散騎常侍都督榮平二州諸軍事征東將軍高麗王樂浪公   (장수왕長壽王)

             


이후부터 위魏 시기에 걸쳐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의 작호爵號가 사라진다.   관작官爵의 인정에 있어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세력판도 변화 추세에 대한 뚜렷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진말晋末] AD 372   樂浪太守              (근초고왕近肖古王)

[남제南齊] AD 490   龍驤將軍帶方太守        (동성왕東城王 때 고달高達)

              AD 495   龍驤將軍樂浪太守        (동성왕東城王 때 모유慕遺)

[위魏]       AD 472   龍驤將軍帶方太守  (개로왕蓋鹵王 때 사신使臣으로 간 장무張茂)

[북제北齊]  AD 570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위덕왕威德王)

              AD 572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위덕왕威德王)

[수隋]       AD 581   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百濟王     (위덕왕威德王)

[당唐]       AD 624   帶方郡王百濟王                   (무왕武王)

              AD 641   柱國帶方郡王百濟王              (의자왕義慈王)



필자筆者가 앞선 [백제百濟의 요서경영遼西經營]이란 글에서 말했듯이 [대방帶方과 낙랑樂浪] 등의 주인主人이 당시의 정세변화와 정확하게 대응對應하여 [백제百濟의 고구려전高句麗戰 승리勝利 후後 고국원왕故國原王 ➡ 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百濟와의 전역戰役 승리勝利 후 개로왕蓋鹵王 ➡ 장수왕長壽王]


[동성왕東城王의 북위대첩北魏大捷 승전勝戰으로 인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위덕왕威德王]로 바뀌어가는 걸 알게 해준다.   그리고 북조北朝의 위魏와 북제北齊에 이르러서는 백제百濟는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고구려高句麗는 요동군공(遼東郡公-AD 435 장수왕長壽王에서 AD 566 평원왕平原王)으로  확실하게 나누어 정착시키고 있다.   사서史書 기록자의 이 지역 영유주체領有主體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을 엿보게 해주는 또 하나의 모범이다.


읽어봐도 내 머리로는 ㅎㅎㅎ 참 대단 하십니다
대수맥님 항상 건강 하십시요^^
이 글을 카페에 올려도 될런지요? 카페주소는 http://cafe.daum.net/mookto
링크를 달아 놓는게 정석이겠습니다만, 글씨체랑 띄어쓰기나 행간을 좀더 보기 편하게 조정해야하겠어서요;;;;
앵무새죽이기란 제목의 글은 웬만하면 다 올리고 싶습니다.
답변이 없으셔서 제 임의로 올리겠습니다. 게시한 해당글에 카페에 올린 글의 주소를 붙이겠습니다.
블로그든, 카페에든 거부의사를 밝히시면 바로 삭제조치 하겠습니다......마구 해버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