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故鄕)♡

멋진그대™ 2008. 9. 26. 20:51

 

 

  

 아침 밥 먹기 전, 집 앞에서 동쪽 묘복산(개동산), 상서산을 바라보고 찍었다. 저 멀리 말치재 너머 번암 마을에 하늘이 열리는가 보다... 경지 정리 하기 전이었다면 논배미들이 사다리꼴로 층층이 보여 들녘 풍경은 꽤 멋졌으리라. 사진 가운데 보이는 음영이 경지 정리로 인한 흔적으로 내 자랄 때의 추억을 가로막고 있다. 

가을까지 뻗치는 따가운 여름 햇볕을 물리치려는 비가 어제부터 내리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지난 밤 겨우 간지럽게 비를 내려주다가 아침나절 운무가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꼬락서니다.

 

 

 동네 한가운데서 찍다 : 활짝 개인 이 날(9월 21일) 오후 3시경, 상서산과 사계봉이 저멀리 보인다.  전신주 따라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는데..

 

 

 마을 남쪽, 남원 가는 721지방도로.. 차로 한 20~30분 가면 남원시내다. // 아숩따.. 어릴 때 키 맞추고 놀던 추억의 코스모스.. 신작로에 핀 코스모스는 고향의 가을을 느끼게 하는 추억의 한자락... 차에서 내려 담았어야 하는데..  저기 자동차 위치쯤에 가서 마을 전경도 찍고, 마을 사진 찍은 김에 동북쭉 팔공산도 낑궈줬어야 하는데..^^ 

 

 

늦은 성묘 차 들러서 촉박한 시간으로, 그리고 사진 찍으러 간게 아니어서 띄엄띄엄 사진을 찍다보니 아쉬움이 많다. 관향()·에 실제 처음 들르는 조카를 위하여 우리 종씨 제각과 정황선생 신도비에 데려가 보여주고 사진을 담았다. 사계봉 서쪽, 마을 앞 조마그한 안산 너머에 있다.(산서면 봉서리 소재)

 

 창원 정씨 제각

 장수군에서 발간하는 '유헌집'에 뭐라고 씌여 있던데 생각이 안난다..정황선생의 제실이라던가.. 정황선생 5세손이 지었다는 것이랑...(유헌: 정황 선생의 호. 游軒)

 

 

 ▲정황선생 신도비(丁熿先生 神道碑) : 비의 총 높이는 535cm인데 지대석(地臺石) 40cm, 귀부받침 58cm, 귀부(龜趺) 82cm, 비신(碑身) 195cm, 이수(螭首) 160cm이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신도비(神道碑)는  정황을 기리고자 1743년(영조 19)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권상하(송시열의 首弟子)가 지었다. (밑에 큰 사진있음)

 

 ▼ 신도비 안내문

 안내문의 내용이 극히 년대기적 서술로 '왜?'가 없다. 그냥 높은 벼슬하다가 당파싸움에 희생이 되어 귀양 가 죽었다는 밖에 없다. 어떤 인물이기에 5m가 넘는 비석을 세워 이 분을 기렸는지 알려주고자 이유가 없다. 옛날에는 2품 이상의 고관이나, 공신(功臣)이나 석학(碩學)등에 대하여는 왕명(王命)으로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는 안내문만 봐서는 요즘 부자들이 비석을 높이 세우는 것이랑 달리 느껴지지 않는다.

선생은 아래 상자 글에 보듯이 도의정치에 입각해 바른 말만 하다가 실세들에게 밉보여 36세 젊은나이부터 13년 동안 귀양살이 하다가 4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분이다. 

사후 복권되어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배향되고 두 번에 걸쳐 벼슬을 주고(추증) 시호(諡號)까지 내려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원(伸冤)을 풀어주고 사자(死者)에까지 벼슬까지 주어  자손에까지 명예를 살려주는 걸 보면, 보면, 현실 정치에선  잠깐 반대파에 의해 내쳐졌어도 결국은 그른 걸 그르다 말하는 언로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 멋진그대 Blog **

 

정황(丁熿) (1512∼1560) : 조광조의 문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황은 국가에 하나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강력히 말하여 꺼리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들추어내는 것을 강직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명성을 떨쳤는데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라 하였다.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 때의 기록이다.

 

유헌 정황 선생은 윤원형일파(소윤파)의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약방제조에 가서 임금에게 올리는 약을 시음하여 소윤일파를 감시하였음으로 이때부터 소윤파의 기피 인물이 되었다. 인종임금이 1545년 7월 1일 승하하시자 문정태후(文定太后)가 수렴청정을 하여 인종대왕의 국장을 간단히 하려 할 때, 도의 정치를 주장하는 유헌 정황선생이 역대 국상의 제도와 예법을 들어 그 불가함을 극간하였으니 조정의 중신들마저 윤원형일파의 세도가 무서워 입을 벌이지 않고 국장행사를 일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인 유헌 정황 선생만이 상소하여 불가함을 논박하였다. 뒤에 성균관학사(成均館學士) 윤결(尹潔)이 계속 상소하여 가로되 "큰 행세를 하는 신하가 오직 정황 일인밖에 없나이다(大行之臣 惟丁 一人而己)"하였으니 당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는 짐작할 수가 있다.


정황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을사사화)으로 유배길을 떠나 13년여의 유배생활 끝에 배소 거제에서 1560년 49세로 졸하였다. 선조 즉위 후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상소에 의하여 복권되어, 이후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140년이 지난 숙종 34년(1708)에 좌의정(左議政) 이유(李濡)의 상소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으며 충간공(忠簡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임실에 위치한 영천서원은 숙종 때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안처순(安處順)을 주벽으로 하여 정환(丁煥), 정황, 이대유 등이 배향되어 있다. [ 장수문화재 - 정황선생 신도비 발췌 ] 참조: 장수의 정황신도비

 

이미지 출처: 장수의 정황신도비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ssms10/1v60/99

 

 

정황선생 후손이 계신지? 유배지 거제도 신현읍 계룡산 아래 소개 할 수 있는데..(거제향토사학자)
지금도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종택과 후손들이 있습니다. 丁씨 집성촌입니다. 유헌 할아버지가 거제도로 유배된 것만 알고 있었는데 혹시 거기에 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지요? // 2008년에 장수문화원에서 <국역 유헌집>이 발간돼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