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보궁 2015. 6. 21. 18:44

 

 

천안 아산 출신 인물들 - 이순신 유관순 박문수 김시민 조병옥 이동녕 이순신 장영실 맹사성 홍대용 포토로그

2012.07.0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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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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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박사

맹사성

김옥균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인물들 다 어디가고 돈독 오른 사람들만 남아 있는가.

조병옥(趙炳玉 1894~1960)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유석(維石), 인원(仁元)의 아들. 천안(天安) 출신. 1909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 1914년 졸
업과 동시에 도미(渡美), 펜실베니아주 킹스턴시의 와이오밍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18년에 졸업, 이어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韓人
會)·흥사단(興士團) 등 단체에 참여, 독립운동에 종사했으며, 1925년 콜롬비아 대학
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이 해 귀국, 모교의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좌익(左翼)
교수를 배척하고 사직, YMCA 이사(理事) 및 신간회(新幹會)의 재정총무를 역임했다.
1929년 광주 학생운동(學生運動)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2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의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내고, 1937년 수양동지회(修
養同志會)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송진우(宋鎭禹)·장덕
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 미군정청(美軍政廳)의 경무부장(警
務部長)으로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힘썼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유엔 한
국대표 등을 역임, 1950년 6·25 사변 때 내무부장관 으로 있으면서 대구(大邱) 방위
전선에 진두지휘를 담당했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의 의견 충돌로 사직, 이
후 반독재(反獨裁) 투쟁의 선봉에 힘썼다. 1954년 제3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 1955
년에는 민주당(民主黨) 조직에 참가하여 최고의원이 되고,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피
선, 야당을 영도했다. 1958년 다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도미,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가료중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출신.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시위운동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川〕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수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본관 연안(延安). 호 석오(石吾). 자 봉소(鳳所).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國務領),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楊宇朝)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삼일운동때의 순국처녀,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을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을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김시민] -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홍대용] -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1. 김시민(金時敏) (1554∼1592)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중 가장 크게 왜군을 섬멸하여 제일차 진주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중의 명장이다. 임진왜란 중에 관군과 의병이 활약으로 여러 곳에서 왜병을 무찔러 크게 이긴 전쟁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과 충무공 김시민의 진주대첩을 삼대 승리로 손꼽는다. 그 중에 왜병을 2만명 이상이나 도륙한 진주대첩은 왜추 풍신수길이 펄펄 뛰며 놀라게 한 대승리이다, 이 진주전을 지휘한 명장 김시민 장군이 바로 우리고장 출신이다. 장군은 고려시대 몽고와 연합하여 일본 원정할 때 고려측 도원수인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손이며 기묘사화때 조광조 선생을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옥고를 치른 강직한 학자인 구암 김충갑 선생의 셋째 아들로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명종 9년에 태어났다.

장군의 관향(貫鄕)은 안동이며 자를 면오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의 제목으로 자랐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병정놀이를 좋아했으며 동네 큰 아이들이 많이 있으나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휘하에 넣어 복종하게 하는 억지가 있었다. 장군이 8살 때 길가에서 마을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고 놀았다. 이때 마침 원님행차가 지나가려 하는데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소년 하나가 나서며 "아무리 병정놀이라고는 하지만 대장이 군졸을 지휘하는데 진중을 마구 지나갈 수가 있는가"하며 목검을 짚고 호령하였다. 이때 군졸별매가 "네 이놈 사또 행차인데 어린놈이 앙탈이냐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하며 호령하니 "내 놀이 대장이긴 하나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하며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어린 대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하며 길을 비켜 지나갔다. 마을에 들려 대장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니 김충갑 선생이었다. 원님은 "저 귀여운 아드님이 큰 재목으로 성장할 것입니다."하며 극구 칭찬하였다. 그 원님도 사람의 싹을 알아보는 지인지감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원님을 말에서 내려 비켜가게 한 이 소년의 일화는 이밖에도 상당히 많다. 그 중 하나 더 소개하면 이 소년이 9살 때의 일이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동리 어구를 백진천이 굽이돌아 흐르고 있다. 이 백진천 천변에 바위가 있으며 물에 잠긴 바위 속에 큰 굴이 하나있다.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고 있었는데 수시 출몰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무기가 무섭다는 소문이 돌아 동리 사람들이 발길을 못하는 등 공포감을 자아내어 심리적 피해가 있어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이 이무기를 신성시까지 하여 고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를 퇴치할 궁리를 하였다. 그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 뱀을 쏘다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내가 동네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는 저 뱀을 잡아 보겠다고 결심하고 집안에 전해오던 활과 살을 가지고 이무기 바위 근처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무기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김소년은 다시 마을로 가서 동접 소년들을 데리고 바위 근처에 와서 그들에게 "너희들이 저 바위 위에 올라가 놀고 있어라, 그러면 이무기가 너희들을 해치려고 나타날 것이다. 그때 내가 활을 쏘아 이무기를 잡을 테다"하며 마을 소년들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소년들은 좀처럼 이무기 바위에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김소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내 동리의 우환을 덜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부터 활을 쏘아야겠다"하며 위협하니 아이들이 거역하지 못하고 바위에 올라갔다. 이윽고 이무기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 고개를 물위에 내놓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이때 아이들이 기겁을 하여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활시위 소리가 나더니 화살이 날아 이무기를 명중시켰다. 연거푸 화살이 날아 이무기를 드디어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무기 몸에서는 피가 흘러 냇물이 사흘이나 뻘갰다고 전한다.

9살난 소년이 동네의 우환을 제거하고 사람들이 편하게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하찮은 미물 짐승을 신성시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는데 대한 경각심을 주어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소문이 인근 부락까지 널리 퍼져 큰 인물 났다는 칭찬 소리가 자자하였다. 장군은 문반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조국의 우환을 구하는 것은 무관이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아래 주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조 17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자 훈련원주부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장군이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 유사시에는 쓸만한 병장기와 쓸만한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않았다. 조선 왕조 창업 200년이 다가오자 조야가 모두 문약에 흘러 무사와 안일을 바랄 뿐 보국안민의 경륜을 펴고자 하는 이가 없었다. 태조 창업으로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 북변에 소규모의 침경을 받아 국경이 소란한 때는 여러 번 있었으나 백성이 모두 근심할 만한 국난은 아니었다.

이렇게 태평성대에 나약해진 군대는 국가의 위의를 갖추는 구색에 불과한 존재였다. 이를 본 김시민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이 해이합니다. 이 상태로 두었다가 국가에 변란이라도 있으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공손히 사뢰었다. 이 말을 들은 병조판서는 「그대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하며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다. 김장군은 사리를 따져 간곡히 건의하였으나 병판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김장군은 올바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젊은 혈기의 철없는 소리라 하여 도리어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며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나서 사직서를 써 던지고 훌훌히 일어섰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낙척하여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그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서 군기시 판관이 되었을 때 정승 이헌국이 공을 보고 「국가에 특이한 그릇이 되리라」하고 임금께 천거하여 말하되 「외부에는 보내지 말고 내직으로 머물게 하였다가 사태를 봐서 급한 대로 쓰소서」하였고 정승 정언신과, 중봉 조헌같은 분들도 「김 아무개는 적을 방어하는 지모방략이 명중에도 으뜸이다」라고 하며 천거하였다. 그후 1590년(경인- 庚寅)에는 진주 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진주 고을은 12년전에 공의 숙부인 제갑께서 진주목사로 와서 특수한 행정적 공로가 많아서 고을 백성들이 항상 사모하던차 그 조카가 판관으로 온다는 말이 전해지자 「김사도의 조카가 온다니 걱정이 없구나」하면서 모두들 기뻐하였다 한다.

공이 부임하여 행정의 공평정대 함이 먹줄과 같고 덕의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덕에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공이 부임한 지 2년후인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소서행장은 종의지. 평신조 등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바다를 건너서 곧바로 부산을 함락시켰다. 그 때가 1592년 4월 12일 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왜병은 다시 동래로 들어가서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그들은 승승장구하여 닥치는 대로 무찌르면서 노략질을 하는데 밀양 부사 박진이 중간 길을 끊으려다가 중과부적으로 막지 못하고 장수들이 모두 도망해 버려 그 흉봉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진주목사 이경이 마침 죽으니 순찰사 김성일은 공으로 하여금 "고을 일을 맡아서 목사의 직무를 이행하고 왜적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공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천여명을 수습해서 고양군수 이광악과 더불어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를 본 도순찰사 김수의 말이 「진양은 성지가 견고하지 못해서 지키기 어려우니 영산으로 가서 그곳의 싸움을 도우라」함으로 공은 경기병 천여명을 거느리고 영산으로가 작원에서 적을 맞아 싸워 무찌르고 도망치는 왜놈의 장수를 베어 죽였다.

그러나 전봉사 윤탁, 함안군수 류승인이 거느린 백여명이 다 죽었고, 류승인은 홀로 살아 남아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간신히 위험한 왜군 진중을 벗어나 공을 찾아 왔는데 공이 의복을 갈아 입히고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순찰사가 하는 말이 「적은 이미 고성 쪽으로 향했다 하니 속히 가서 막아 길을 끊으라」하였다. 이에 공이 관군과 김대명이 모집한 병졸을 거느리고 바로 달려 고성을 향해 가는데 적은 이미 유리한 지점을 검거하고 있어, 전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후퇴하여 진주로 돌아오니 이미 있던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 졌다가 공이 돌아옴을 보고 다시 모여들었다. 공이 다시 사졸과 더불어 사수할 계획을 세웠는데 사천을 점령한 적병이 진주를 범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전병사, 조대곤, 사천현감 정득렬, 칠원현감 이방좌, 함안군수 류승인 등으로 천여명을 거느리고 바로 성밑에 이르렀다. 적은 벽이 견고하여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진군하여 십수교에서 오리쯤 되는 곳에서 적을 만나 군사들과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을 수없이 죽였다. 적이 물러가기에 이를 추격하다가 돌아왔다. 이때부터 사졸의 힘이 배가되었다.

공은 모든 군사와 더불어 고성의 적을 칠 약속을 하고 정예병을 뽑아 진주의 남쪽 영선현에 진을 치고 진군으로 하여금 수건을 물게 하여 소리를 죽임으로서 적에게 발견됨을 피하고 대둔령을 넘어 새벽에 이르러 큰 고함을 지르고 활과 총을 쏘았다. 이리하여 적은 죽은 병사가 많아 부칠 곳을 찾지 못하고 달아나 병영으로 들어갔다. 공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포위하였지만 적들은 어두운 밤에 가만히 도망해 끝까지 섬멸하지 못하였으나 공의 뛰어난 전술은 적에게 널리 알려져서 김충무공이 지키는 지경에는 감히 왜병이 얼씬도 못했다.

그래서 함장, 지례, 선산, 김해, 창원, 진해에는 적이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진해에서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판윤 김수에게 보내서 행재소로 치송하였다. 평소태를 생포하여 행재소로 압송되자 조정 상하의 사기가 일신하여 우리도 왜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공은 이번 공로로 통정대부 진주목사에 제수 되었다. 이때 의병장 김면이 거창을 지키고 있는데 여러 방면에서 적의 합세 공격을 당하다가 공이 사기를 크게 올렸다는 말을 듣고 와서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이 청을 듣고 바로 정병 천여명을 인솔하고 거창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더불어 금산의 적을 격파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수십금을 베었으며 그 다음날에도 다시 나가서 많은 적을 사살했다. 이 전쟁에서 공은 발에 칼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김면이 공의 부상을 슬퍼하고 울었다고 전한다. 적이 대군을 몰고 다시 지레의 사랑암을 지나려 할 때 면이 달리는 말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공에게 하는 말이 「나라에서 특진으로 공을 대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쓰라는 것이니 이제 죽음으로서 생을 마칠 것이며 물러서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을 달려 적을 쏘아 죽이니 모든 군사가 소리치며 덤벼 적을 퇴각 시켰고 개령과 금산의 적은 공의 위풍만 듣고도 서로 뒤이어 물러갔다.

9월 24일에 이곳 부근 십여읍에 주둔하고 있던 적은 합세하여 세갈래로 부대를 편성하고 노현의 아군을 습격하였고, 창원부를 침범하여 부사 류승인이 재차 패하여 죽은자가 8,599여명이나 되어 군심은 실망이 가득했고 사민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적의 무리는 승세를 타고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쳐 왔다. 이리하여 11월 2일에는 함안을 함락시키고, 초3일에는 왜적의 선봉 기마병 수만이 길을 나누어 진부로 향해왔다. 적은 마령을 넘어 불천을 돌아 바로 진양을 무찌르려고 진주의 동쪽 봉우리 위에서 형세를 살피며 기치창검을 휘날리고 있었다. 적군은 김시민 장군을 꺾고 진양(진주)을 장악하여야 경상도를 지배하고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진주성 총공격이 개시된 것이다. 이때 공이 영(令)을 내려 말하되 「누구나 왜적을 보더라고 안본 체하고 탄환 하나 화살 한 개라도 헛되게 쏘지 말라」하고 적이 바로 볼 수 있는 곳과 또는 성안에서 통해 볼 수 있는 곳에 용대기를 세우고 많은 포장을 치고서 성안에 있는 남녀 노약자들에게 모두 남복을 시켜 군세의 웅장함을 보여주며 성세가 강함을 적에게 보였다. 또한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산 위에 올라가게 하여 바라본 즉, 왜적 수만명이 고을의 동쪽에 있는 임연대에 진을 치고 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1월초 6일 아침에는 일찍부터 적이 대탄으로부터 기마를 몰고 일시에 달려오는데 어떤 자는 긴 자루의 금부채를 휘두르고, 어떤 자는 흰 바탕에 황금색이 박힌 부채를 짊어지고 달려오며 또 갖가지 깃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쳐들어오는데 움직이는 그 광채가 귀신의 불 같이 반짝이었다. 갑주투구도 형형색색이어서 게우관을 쓰고 있는 자 피발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온갖 깃발을 등에 지고 오는데 그의 수효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침략해 오는 살기가 하늘까지 치솟고 기형과 이상이 사람의 눈을 놀래고 현혹하게 하였다. 이러한 부대가 세갈래로 오는데 한 부대는 동문밖 순천당에 진을 치고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부대는 개경문으로부터 동을 지나 봉명루 앞에 나열하고 또 한 부대는 향교 뒷산에서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 봉명루 아래에 있는 적으로 하여금 합세하여 한 진이 되고 그 밖에 각 봉우리에 둘러있는 적은 개미나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장왜(將倭) 수백 명은 모두 흑색 훗옷을 입고 쌍견마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응위해 섰고 흰 장삼 같은 옷을 입은 여인들도 쌍견마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순천당의 적의 수효도 수만 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포진한 적이 성을 향하여 일제히 총을 쏘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고 날아오는 탄환이 우박같이 쏟아졌다. 수십만의 왜병이 일시에 고함을 쳐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안에는 요동이 없으니 조용하기가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적의 세력이 누그러지고 태만해져 큰소리로 외치면 밤이 다하도록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날이 밝자 성밖에서는 왜놈들이 큰 소리로 「경성이 이미 함락되고 팔도의 병력이 모두 해산하였는데 이제 진주성만 포위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이냐? 속히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이제 개산 대장이 오면 너의 장수의 머리를 우리 깃대에 달 것이다」하고 외쳤다. 이에 성안 사람들이 분개하여 큰 소리로 꾸짖고자 하였다. 공이 이를 말리고 이튿날 대나무와 소나무 등을 베어 책을 두르고 성 위에서는 진천뢰와 같은 질려포를 쏘고 큰 돌멩이를 모았다가 성에 육박하는 적에게 굴리고 던져 적을 쳤고 도끼나 낫을 준비하였다가 산대를 배회하는 적을 파멸하였다.

또한 성안에서는 큰 가마솥을 준비하여 물을 끓여 적에게 뿌려 고개를 못들게 하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을 잡고 당기는 모양을 하게 하여 군대가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때 성밖에서는 왜놈들이 흙을 쌓아 올려 진루를 만들고 있었다. 이를 본 공은 친히 현자총을 쏘아 적을 연발 명중 시켰으니 적이 놀래어 물러갔다. 그 후 초8일에는 적이 다시 몰려와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방포를 하였다. 이때 공이 현자전으로 대항하였는데 그 위력이 어찌나 세었던지 죽편을 뚫고 다시 나무판자를 뚫은 후 적의 가슴에 꽂혀 절명케 하여 적들이 감히 산허리를 돌아 공격하지 못하였다.

초10일 사경이 되자 적군 수만 명이 별안간 육반전으로 동문시성을 향해 쳐들어오는데 긴 사다리를 메고 오는 놈, 방패를 지고 오는 놈, 또는 향교의 제기를 뒤집어쓰고, 혹은 멍석을 잘라서 머리에 쓰고, 시석을 피하면서 삼층가면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높이 들고 수만의 군사가 돌진하면서 총을 쏘는데 총알이 비오듯하고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이때 공은 동문 북격대에 있으면서 태연한 자세로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큰돌을 굴리며 화철을 던지고 혹은 끊인 기름을 마주 붓고, 혹은 끊는 물을 들어부으니 적이 화철을 밟고 활의 세례에 맞으며 불과 돌에 맞아 죽으며 머리가 타고 이마에 화살을 입은 자 수없이 많았다. 동편에서 이렇게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 부대는 북문 밖으로 돌격해 오는데 비호와 같아서 막을 자 없었다. 이에 공이 전만호, 최덕량, 군관 이술 신사복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막게 하였다. 적군은 다시 동문으로 진을 옮겨 격전했지만 얼마 후에 적세가 크게 무너져 물러갔다. 이때 패전한 왜병 우시등원랑은 그렇게도 참혹한 패전을 분개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도중에 죽었다 하였다.

이 대첩이 진양만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 호남, 호서의 내포가 모두 안전하였고 국가 중흥을 위한 군량과 무기가 모두 호남, 호서에서 반출되었으니 이야말로 국운의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진주전에서 왜군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제1차 진주전의 보복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진주전의 전황은 경황 중에 자세히 기록해 둔 사람이 없어 조정에 바로 알려지지 않아 처음에는 전공을 사실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차차로 참전자들의 단편적인 기록이 수집되어 백년 후에야 참다운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단편적인 기록들이 수효에 있어 좀 과장된 점이 없지 않다. 만산 편야 덮어 오는 적을 수십만으로 표현한 것은 무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일 왜군 측 기록은 2만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였으니 이 기록대로만 하더라도 왜군의 최대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김시민 장군의 진주전이 임진전란 중에 제일 큰 전승인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경상감사 김성일의 장계에 의하여 가선대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진주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공이 승리를 거두던 날, 성안을 순회하면서 검시를 하는 중 왜적 한 놈이 쌓인 시체 속에 숨었다가 총을 쏘아 공의 왼쪽 이마에 명중되어 곤양군수 이광악에게 적을 방어할 계획을 지시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관사에 와서 누워있던 공은 벌떡 일어나면서 「내가 적탄을 몸에 지니고 죽을 수는 없다」하며 나무못으로 빼게 하고 아우 시양을 불러 「네가 나의 일을 맡아 군무를 대행하다가 후임자가 오거든 발상하라」 이르고 눈을 감으니 향년 49세이고 임진 12월 26일이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선조께서는 크게 애통해 하였다. 공이 크게 승리를 거둘 때는 경상도가 다 흩어져서 당시의 광경을 본 사람이 없어 분명한 기록이 없었으며 행재가 멀고 길이 끊어져서 장계가 조정에 올라가지 못했다. 그 충렬의 실적과 공훈을 자세히 올리지 못하여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난이 끝난 후 13년인 을사에 와서 임진년의 공신을 책훈 할 때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 2등에 상락군을 봉하였다. 그후 전승의 실적이 나타남에 따라 백사 이항복의 말이 임진왜란에는 김시민의 공이 제일 크다고 칭찬하며 이정암과 동등하게 포상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였다.

이정암은 임진왜란때 문신으로 개성방어에 공을 세운 사람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의 공로가 바로 전해지지 않아 이정암과 동등한 공로로 평가한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담 김시양은 당시의 삼대첩에서 노량의 이순신 다음으로 높은 공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혹은 김시민의 진주의 공이 이충무공 이상의 공이라고 찬양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에 의주까지 몽진하여 천리 밖의 진주 일을 자세히 듣지 못하여서 1등으로 책훈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다.

후일에 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하여 오다가 110년만인 숙종 조에 와서 비로소 영의정인 녹천, 이유의 장계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상락부원군에 봉하게 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와 시장이 내리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의 책훈공신 18명중에 최고의 증직이 내린 것이다. 김시민 장군의 공적이 그때서야 인정을 받게된 것이다. 따라서 부조의 대우에도 마음을 써 김공의 부친 김충갑은 보조공신좌찬성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조부 김석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또한 논공행상이 숙종때 이루어진 관계로 이미 세월이 흘러 당시 김시민 장군의 후손은 고손 김가교의 생존시였다. 다정다감한 숙종은 김시민 장군의 전공에 깊은 감명을 받아 후손에까지 은전을 베푸니 김시민 장군의 자제 김치는 이미 행직으로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 뽑히어 본인의 현직으로도 족한 분이며 손자 김득신은 우리나라 8대 문장으로 손꼽히는 대문장가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방랑을 좋아하여 벼슬이 높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김득신을 안풍군으로 습봉하고 가선 대부로 증직하였다. 만약 일찍 선조대에 논공행상이 제대로 이루어져 숙종때 재론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4대 습봉의 영전이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는 특별 사면권을 주는 철권을 내려 후손을 더욱 돈독히 예우하였다. 국가의 공신을 이렇게 예우한 사례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리고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을 연상하는 이가 많으나 충무공은 무인으로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받쳐 헌신하신 분에게 내리는 시호로 조선시대에 아홉 분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므로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김시민등으로 바로 호칭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후세 사람들이 김시민 장군의 공적을 흠모하여 사우를 여러 곳에 세웠는데 진주의 충민사, 괴산의 사우, 목천의 사우등인데 목천사우는 훼철된 후 오늘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0여년전부터 윤치영을 회장, 김재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어 독립기념관에 어록비를 세우는 등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 중에 있다.

◐2. 김응명 일가

김응명은 자는 시보요 본관은 강릉이다. 목천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감역으로 출사하고 있었다.

부친 광렬은 이조참판으로 선조 임금을 호가하였다. 광열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장자는 철명이오 중자는 순명이며 끝 아들이 응명이다.

도중에 적을 만나 조관의 복장을 한 광렬을 보자 왜군은 살해하고자 하였다. 적수관원인 이들 문관출신 사부자는 대항할 길이 없었다. 적의 공격이 부친에게 향하자 철명과 순명이 아버지를 가리니 무도한 왜군은 삼부자를 일격에 살해하고 말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응명이 대항하자 왜군이 또 응명마저 죽이려 하였다. 이때 노왜가 만류하여 일가를 멸문하는 것은 병가의 꺼리는 바라 하였다.

살아남은 응명은 삼부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니 난시에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친 성씨는 남편 광렬의 흉사를 전해듣고 자결하여 하종 하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정유년이 되자 왜군이 재침하였다.

응명은 부친과 형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남원으로 향하였다. 도착해 보니 이미 남원은 함락되어 내외 접응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응명은 접응하는 세력이 없이 적을 치다가는 무고한 희생만 치르므로 의병을 거두어 돌아왔다. 정유재란은 남원을 고비로 왜군이 철군했으므로 김응명의 병정은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못하였다.

그후 응명이 고창현감으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리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충효열을 구현한 가문이라 하여 정문을 내리고 증직의 영전을 베풀었다.

응명은 자식을 잘 훈도하여 모두 문한으로 이름을 날리었으니 조카 외에 형 순명이 부제학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기종은 정묘호란 때 원수로 출전하여 큰공을 세웠으며 응명의 장자 익종은 광해군의 혼정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기개 높은 인물이다. 손자 만중은 세마로 학문이 높았다. 다음 차자 찬종과 손자 만강과 만정, 증손 일청, 현손 운경이 모두 사마 급제하여 진사 풍년이 들었다.

이 모두가 응명이 닦은 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향리의 부러움을 샀다.
※ 대록지에는 기종이 정묘호란 때 도원수라 하였으나 이괄 난의 종사관이 옳은 듯하다.

◐3. 김인복과 조계남

임진왜란의 7년 풍진에 공을 세워 각종 공신에 봉해져서 영예가 후세에 빛난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으나 대부분 현관이거나 양반 선비들이 녹훈되었지 간뇌도지(肝腦塗地)한 하졸과 이서와 백성의 진충보국한 공은 제대로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시대는 신분사회라 공적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신분을 기초로 하므로 같은 공적이라도 신분고하에 따라 상작이 달랐다. 천인이 큰 공적을 세우면 상훈이 고작 면천과 급복에 그치고 사인이 공을 세우면 작품을 내리며 사대부는 봉군하는 등 많은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한시대의 국난을 극복할 때 허구 많은 사서인의 희생이 뒷받침한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시 왜군은 동래에서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므로 주역이 현재의 충청북도를 통과하여 북상하였으나 우리 고장에도 왜군의 말발굽이 미친 곳이며 관군과 의려가 빈번히 왕래한 곳이라 군량의 조달과 통신의 편의를 조달하기 위하여 매우 소중한 지역이었다. 특히 정유재란 때는 우리고장 직산현과 평택사이에서 큰 전투가 벌어져 왜군의 예봉을 겪었으니 소사전투로 불리우는 큰 싸움이다. 육전에서 삼대 전첩으로 꼽히는 큰 승첩이었다. 임진 정유의 양난 때 직산현의 이서인, 김인복과 조계남이 난리가 일어나자 전후 좌우로 수응하여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인복과 조계남은 같은 이서 동료로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으며 두분 모두 지려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임진란에 수령 방백들이 난리가 나자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진 곳이 많았다. 그래서 수령들이 파직되는 사례가 많았으나 직산현감은 모두 큰 공적으로 영진 하였으니 이서인 김인복과 조계남의 도움에 힘입은바 컸었다.

김인복은 직산현에서 여러대 아전으로 복무한 세리 가문에서 태어나 숙명처럼 직산현의 아전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큰그릇의 제목이었으나 중인으로 태어나 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성실껏 소임을 다하여 능숙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임진년에 선조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신 후 수륙양로가 모두 적병에게 막혀 통신할 길이 없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장계를 의주행재에 올리고자 하나 적진을 뚫고 가서 진봉 할 만한 인물을 구하지 못하였다. 사람마다 두려워서 감히 간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마땅히 관원이 가야 하나 모두 그 소임이 자기에게 떨어질까봐 몸을 사리는 이도 있었다. 또한 이 어려운 일을 맡아 할만한 사람도 쉽게 물색되지 못하였다.

이때 동료 조계남이 김인복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향한 성의는 어찌 현우와 귀천의 사이가 있겠는가. 내 생각컨데 그대의 충성심과 용기로 보아 장계를 의주행재에 전달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으니 이번에 의주에 다녀옴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조계남은 이어서 그대가 의주에 가서 양호의 적정을 알려드리면 그 동안 고을 일은 내가 그대 몫까지 해낼 터이니 어서 떠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조계남의 간곡한 부탁에 감동한 김인복은 쾌히 응락하고 감사에게 의주 가기를 지원하였다. 감사 허욱은 김인복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자원하니 기쁜 마음으로 장계를 써 주었다. 김인복은 처음은 육로로 의주에 가려 하였으나 곳곳에 왜군이 흩어져 있으므로 갈 수가 없어 해로를 택하기로 하였다.

해로라 하더라도 큰 배로 편하게 의주에 갈 수는 없었다. 그만한 장비가 없을 뿐 아니라 해로에도 적군이 출몰하므로 우선 경양포에서 출발하여 작은 배로 섬과 섬으로 건너가서 강화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해로로 의주에 도달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의주에 이르러 장계를 탑전에 바치니 임금과 조정대신들은 감감하던 양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뿐 아니라 도주에 마련한 마랑까지 헌납하니 조정에서는 궁색한 판에 아주 반가워하였다.

이곳에서 마량이라 함은 말먹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리를 말하는 듯 하다. 옛적에는 마량이라 하여 겉보리를 거두는 일이 있었다.

선조 임금은 김인복이 도착함을 듣고 친히 인견 하시고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하여 상찬의 말씀을 내리고 직접 양호의 소식과 민정을 두루 물으시었다.

인복은 양호의 소식과 오는 도중에 겪은 일들을 소상히 아뢰어 참고하시도록 하였다. 선조께서 가상히 여겨 향역을 면케하시고 군자봉사를 제수하시니 크나큰 특전이었다. 김인복은 중인의 신분에서 품계를 가진 반열에 올랐으나 겸손한 본 마음은 항상 간직하였다.

그후 새로운 직책 때문에 향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의주에 머물러 복무하였다. 그러나 그 후 3년여의 세월동안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장계를 바친 후 삼 년 뒤에 군관이 되어 전라도 남해로 내려가 탐라도에 드나들며 활 재료를 수집해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직산현지에 따르면 선조 병신년(1596)에 남해현령 박대남의 군관이 탐라도에 가서 활 재료를 수집해 왔다고 하였다.

김인복이 군자봉사를 제수 받았으니 궁재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군자봉사는 종8품관이니 정6품관인 현령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리에 맡는 일이나 군관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가는 일이다. 어떤 일로 그의 휘하에 들어갔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장계를 봉정할 때 해로로 간 경험으로 미루어 제주도 해로를 이용하는 궁재수집의 소임을 맡긴 듯하다.

김인복은 낮은 품관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왜군도 일단 철수하여 군무가 한가로와 지자 꿈에도 그리던 고향 직산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선조 27년 정유(1527)에 향리로 돌아오자 이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번 정유재란은 임진년 침입 때와 달리 왜군은 호남 곡창을 욕심 내어 전라도에 침입하여 호남이 적의 철제하에 들어갔다. 남원에서 직산현 출신인 이덕회장군이 절사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서울까지 점령하지 못하였으나 삼남은 매우 소란하였다. 우리고장 직산현의 소사들에게 임진 정유의 3대육전으로 꼽히는 소사 전투가 벌어져 대승리로 장식하였으나 전쟁을 치른 직산, 평택 지방은 관가민옥이 모두 파괴되어 황폐하게 되었다. 이 소사 전투때 직산현을 위시한 인근 제읍에서 군량 조달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으나 직산 일읍은 좌우로 책응하여 궐함이 없었다. 이 모두가 김인복과 조계남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난리에 직산 고을은 왜적의 침공을 받아 공용문서가 모두 흩어졌다. 아무도 거두는 이가 없었다면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때 김인복이 집에 돌아와 있다가 이제는 이서는 아니지만 직접 나서서 흩어진 문서를 거두어 모으고 불탄 것은 두루 염탐하여 기록으로 남기니 직산일읍의 맥이 다시 이어졌다.

김인복은 왜란이 끝난 후에도 고향 직산에 살면서 향역을 면하고 품계를 얻었으나 항상 변함없이 옛 마음으로 향리를 위하여 헌신 봉사하였다. 김인복을 의주 행재로 보내고 직산현의 난리 뒤치닥거리를 혼자 맡아 한 조계남은 이 고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명문이었다. 조계남은 직산 조씨이며 백제 창업 공신 계백성 조성의 후예로 대대로 직산의 거족이었으나 조계남의 조부대에 이르러 가문이 영락하여 향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조계남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로 대성할 재목이었으나 세습제인 아전이 되고 말았다. 조계남은 충직한 성품이라 그릇이 맞지 않는 구실을 맡았으나 항상 충실하게 소임을 다하였다. 군자봉사 김인복과는 쌍벽을 이루는 명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왜군은 충북에서 경기도로 진입하여 서울로 진군하였으므로 천안, 직산이 주통로는 아니었으나 왜군이 간단없이 출몰하여 많은 곤혹을 치렀다. 이때 감사 허욱이 직산까지 와서 더 갈 수 없으므로, 삼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인재를 구하던 중 조계남의 천거로 김인복을 의주에 보내게 된 것이다. 조계남은 고향 직산을 지키며 최대 역량을 발휘하여 소임을 다하였다. 직산현은 삼로의 요충지로 왜군이 진퇴하는 길이 되고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 장졸이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본도의 순찰사와 병사와 삼남의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어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여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마다 조계남이 동서좌우로 뛰어 군량을 조달하고 숙영을 도와 전쟁 수행에 큰 기능이 되었다. 당시 전란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백성이 굶주리는 형편에 군량미를 내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므로 다른 고을의 관원과 이서는 강제로 약탈하다시피 하였으며 백성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두 감추어 군량미 조달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조계남은 비록 이서의 신분이지만 백성의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조계남의 말은 백성이 거절하지 못하여 당시 가장 어려웠던 군량이 조달을 무난히 해냈다.

따라서 직산 고을을 거쳐간 많은 조관들의 그의 인품에 크게 감동하여 「만산이 모두 고사목(枯死木)뿐인데 한 그루 푸른 나무가 있으니 바로 조계남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직산 고을의 관리 백성이 모두 피난하여 고을이 비어 있을 때도 조계남은 고을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한다. 이때 지인으로 있는 이응명과 관로 언향이 조계남과 함께 고을을 지켰다고 전한다. 한 고을에 허다한 선비가 있었지만 중인 신분과 이서와 지인 관로만 못하였으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인 이응명은 중국어에 능하여 명나라 장졸의 접반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였다. 훌륭한 민간 외교인으로 국난극복의 일익을 담당했다 할 수 있다. 또 한때는 현감이 관인을 잘못 간수하여 분실하고 말았다.

이에 조계남이 현감을 안심시키고 조정에 예물을 바치고 동인을 개주하여 현감의 문책을 모면하게 하였다. 이 관인은 한일합방으로 직산현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눈부신 활약으로 나중에 직산에 부임한 현감들이 공적을 인정받아 모두 영진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웃 고을 목천현은 상하수미가 맞지 않아 5대의 현감이 재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직되었으나 직산현은 여러 현감이 영진하여 큰 대조를 이루었다. 그 사실로 선조 24년에 부임하여 선조 27년에 홍주목사로 부임한 박선은 김인복이 의주에 가서 현감을 극구 옹호한 덕과 조계남의 유능한 보좌로 이룩된 영전이라 할 수 있다.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목사에까지 일약 승진한 것은 전시체제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에 부임한 이신의는 정유재란시 소사 전투를 겪고 난 후까지 재직하여 과만 후 일년을 연장하여 재임하다가 떠났다. 이 현감은 재직시 공로로 고을 선비들이 주선하여 선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조계남은 살아 생전에 아무런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후세에 복호의 은전을 입어 향직을 면하고 사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임진 정유왜란시에는 수많은 장수와 관원의 휘하에서 목숨을 바친 무명의 병사와 고심 전력한 분들이 허다 하나 양반 신분이 아닌 사람의 공적은 모두 인멸되어 상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김인복과 조계남, 이응명의 사적을 발굴하여 임진국난에 중서 신분의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음을 상기 하고자 하는 바이다.

◐4. 김충갑

김충갑은 안동김씨(구안동)로 자는 서초(恕初)요,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김충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래 큰 그릇이될 인물로 향리의 총망을 받았다. 차차 성장함에 스승을 택하여 학문을 닦았는데 처음에는 정암 조광조에게 사사하다가 정암이 기묘사화에 화를 입자 만년에는 퇴계 이황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다.
대록지에는 구암이 명종 계묘에 사마의 양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하나 사실은 중종 38년 계묘에 급제한 것이다. 구암은 젊어서부터 절의가 굳은 선비로 스승 정암에게 사사함에 이르러 더욱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면서 대의의 실천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정암이 중종 14년 기묘(1519)년에 남곤 심정의 모함으로 이상정치 실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이때 정암을 따르던 조신들과 학자들이 연루되어 혹은 사사되고 혹은 귀양하고 혹은 삭탈 관직을 당하였다. 스승과 어진 사람들의 참혹한 처형을 보고 가만히 있을 구암이 아니었다. 구암은 이때 젊은 시절이었으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백면 서생이었으나 정암을 구하는데 앞장섰다.

정암의 죽음에는 팔도 유생이 모두 칠기 하였지만 구암은 이들의 앞장에 서서 정암을 구하려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구암은 얼마 안되어 옥에서 풀려났으나 제척 인물이 되어 벼슬길에 나가기 힘들게 되자 향저가 있는 괴산을 오르내리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었다. 이때 옥에서 풀려나 괴산으로 가는 도중에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잣밭)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이곳에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이곳 잣밭에서 아들 김시민 장군이 출생했고, 역학자 김치가 손자로 태어났으며 천하 문장인 김득신이 증손자로 태어났으니 구암이 천안 잣밭에 주거를 정한 후 크게 대창 하였다하겠다. 구암의 형제가 5형제인데 이들은 천안출신은 아니지만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관으로 나아가 가문을 빛내었다. 구암의 직계 방계가 행직으로 대관은 없었지만 반열을 지키는데는 족하리만큼 대창하였다.

명종 1년(1546)에 구암이 별시에 등과 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해는 명종 즉위를 경하 하기 위하여 특별 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구암은 기묘사화 후 제척 인물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종 임금도 내심 조광조(정암)를 사사한 것을 후회하여 기묘 연루자의 추국과 제척은 중지하였었다. 그러던중 중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후 과거에 응시하여 괴원과 양사에 출사하였다. 괴원은 승문원을 말하며 양사는 사헌부와 사간원을 말한다. 괴원과 양사는 우선 학문이 높은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지조가 있는 선비라야 임명되는 곳이다. 그의 곧은 성미가 조정의 비리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여 평탄한 환로를 걷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므로 친정을 하지 못하고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승과를 회복하여 승려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명승으로 이름난 보우를 우대하여 자주 궁중 출입을 허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그래서 경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보우를 배척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곧고 굽힐줄 모르는 성리학자 구암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구암은 성균관의 유생을 인솔하고 보우 배척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미움을 샀으나 유학자간에는 이름이 높아져 사림의 중견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이 승하하고 중종의 아들이요, 윤임의 생질되는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불과 8개월에 돌아가고 그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연소한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래서 전술한 바와 같이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된 것이다.

중종 년간부터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간에 반목이 심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하기에 이르러 윤임일파를 숙청하고 말았다. 이 사화를 을사년에 일어났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한다. 윤원형의 전횡은 사적에 전해진 폭관이었으므로 윤임이 자연 사림의 동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구암은 보우 배척뿐 아니라 을사당인의 배척에도 앞장서서 탄핵하였다. 당시 윤원형을 정점으로 하는 을사 당인의 세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데 구암은 을사당인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사서 청주로 귀양가게 되어 구암의 관로는 막히고 말았다. 또한 구암의 매서(누이동생의 남편)인 이휘가 을사사화때 직간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이휘는 대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으로 출사하였다가 윤원형 일파의 비행을 묵과할 수 없어 수렴청정 하는 문정왕후께 직간 하다가 윤원형 일파에게 몰려 화를 당하였다.
구암은 이휘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장송가 한수를 지어 시체옆에 놓았다. 그 장송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엇네 베엇네
낙낙 장송을 베었네
베지 않고 길른다면
기둥(들보)감으로 자랄텐데
장차 큰 집이 무너지면
어디 나무 있어 기둥으로 쓸고

구암은 매서 이휘를 큰 인물로 여겨 애지중지 하였는데 사화를 겪으니 크게 애통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구암도 을사사화의 억울한 선비를 신원 하고자 을사당인을 탄핵하다가 청주에 귀양 갔음은 이미 서술한바이다. 구암은 명종 시대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불운한 세월을 보내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유서의 은전을 입어 벼슬길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사간원 헌납은 청직 이지만 구암의 인품과 학문으로 보아 걸맞는 자리는 못되었다. 아마도 정암 조광조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또한 을사당인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현직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구암은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현의 잣밭에 우지한 것이 안동김씨 세거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구암의 후손뿐 아니라 일가 족척도 많이 목천현으로 이주해 왔다.

구암은 생전의 행직은 낮았으나 증직은 보조공신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증직의 이유는 자제 충무공 김시민이 부원군에 봉해졌기에 그 부친을 상락군에 봉했으며 충무공이 의정부 좌의정에 증직되었기에 좌찬성에 증진된 것이기는 하나 구암이 충주 향사에 모셔진 것만으로도 증직의 요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구암공이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결하므로 충주 선비들이 조정에 아뢰어 서원을 세우고 봉사(奉祀)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서원이 남설 되었다고는 하나 향사에 모셔진 인물이면 사표가 될만한 인물인 것이다.

◐5. 유몽인(柳夢寅)

유몽인은 관향이 고흥이고 영밀공 유청신의 후손이며, 사간 충관의 손자이고 홍여군 당의 아들이다.

유몽인의 자는 응문, 호는 어우당이며 때로는 묵호자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어우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일지십의 천재였다. 그는 일찍이 만권의 책을 읽었다 할만큼 무수한 책을 모두 읽었다. 책이란 책은 입수되는 대로 모두 읽어 백과전서적 박학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문에 능할 뿐 아니라, 해서 초서 예서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어우당은 당대의 기재로 알려졌다. 어우당은 일찍 진사과에 급제한 후 30세 되던 선조 22년(1589)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홍문관의 한림과 호탕을 거쳐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 삼사장관을 두루 거치고 도승지 한성좌윤(漢成左尹:서울시 부시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참판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을 지냈다.

어우당처럼 청직과 화직을 고루 거친 이도 드물다. 또한 팔도어사를 거쳐 세 번이나 명예 사신으로 가서 조선의 문화를 널리 소개하였다.

어우당의 경쾌한 시문은 명조야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우당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서 수학을 하였다. 우계는 어우당이 경솔하다 하여 항상 나무랐다 한다. 세월이 가는 동안 어우당의 재기와 우계의 침중이 잘 맞지 않아 우계는 어우당의 문하출입을 금하였다. 우계는 율곡과 더불어 정암 조광조의 뒤를 이은 기호학파의 종장으로써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우계문하에서 축출된 것은 어우당으로서는 치명적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어우당은 대북의 이이첨, 정인홍 등과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그래서 어우당은 세인이 중복으로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대북은 폐모론의 주동세력인데 어우당은 서인과의 대결에서는 대북과 같이 하였으나 폐모론에서는 이이첨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래서 중복이라 하게 된 것이다.

폐모론 때문에 이이첨과 사이가 벌어져 어우당은 이조참판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고승과 교류하여 시간을 보냈다. 이때 석씨의 사상을 익힌 것을 서인들이 정도를 일탈한 것으로 비방하였으나 어우당의 진면목은 학문의 세계가 무변 방대함을 인식한 선국적 안목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어우당은 이이첨과 사이가 멀어져 벼슬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과 폐모론에 반대했기 때문에 죄를 입지 않았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랑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류응시의 고변으로 역모에 몰려 피신하여 다니다가 드디어 체포되었다. 당시 문초관인 이원익 신흠 김사언등이 어우당을 구해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인 서인들의 미움을 사 구제되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어우당이 문초를 받을 때 문초관이 인조를 왜 적극적 자세로 섬기려 하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대신 지필묵을 요구하여 지필묵을 주었더니 시 한 수를 써 건네주었다. 이것이 유명한 「상부가」이다.

상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七十老孀婦」 칠십 늙은 과부가
「端居守空房」 단정하게 공방을 지켰네
「隣人勸之嫁」 이웃들이 개가를 권하니
「善男顔如槿」 선남은 용모가 근화같다네
「慣誦女史詩」 내훈을 습관처럼 외어 왔으며
「? 知任似訓」 임사의 교훈도 알고 있다네
「白首作春容」 흰머리에 화장을 하면
「寧不愧脂粉」 지분인들 부끄럽지 않으리오.

이글이 암시하는 뜻은 광해군을 섬기던 늙은 신하가 새 임금을 섬기려 아첨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우당은 광해군을 섬기던 의로 새 임금 섬길 마음이 없을 뿐 새 임금은 훌륭한 임금이라 추켜세웠다. 이 글은 양시의 뜻이 있어 아무도 탓하지 않고 후세에까지 애송되어온 시다.

유몽인은 이 시로 의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후일 신원될 때 의(義)자 시호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어우당은 정조때 신원이 되었으며 시호를 의정공으로 내리었다. 광해군이 패륜의 폭군으로 몰려 쫓겨났음으로 아무도 그를 따르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유몽인만이 절개를 지녔다 하여 높이 평가한 것이다.

유몽인은 처벌될 때 모두 적몰되어 자손이 없었는데 신원된 후 유활로 출계하여 후에 병천 청절사를 지어 제향을 받들고 있다.

◐6 유의신

유의신의 자는 언정(彦正)이요. 천안 원일면(지금 광덕)에서 1550년 12월 27일에 출생하였다. 의신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고향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공이 10세 때에는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여 사경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흘러 넣어 어머니를 살려내는 효성을 보였다. 그 후에도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항상 곁에서 간호해 드리면서 책을 가까이 하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그의 학문은 날로 뛰어나 동네 어른들도 그의 학문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의신이 고대하던 과거 날이 닥쳐왔다. 한편 의신은 병약하신 어머님이 몹시 걱정이 되었으나 기필코 장원 급제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마음껏 효도를 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과거에 임하였다. 그때가 바로 1583년 계미년(선조 癸未)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니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 자식이 마냥 대견스럽게만 보였다.

후일 선조 24년에는 어전에서 시사회를 개최하여 무예를 겨루었는데 이때 의신이 거수를 차지하여 왕으로부터 푸짐한 상을 하사 받았고, 특히 변장에 제수되어 이진 권관이 되었다.

의신은 즉시 부임하여 진심으로 군졸들을 잘 보살피고 병기의 수리와 제조에 힘썼고, 평상시에 병기를 잘 갖추어 놓지 않으면 급할 때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비무환의 정신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의 무리가 바다를 덮어 물밀 듯 들어오나 주장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황급히 관하 장졸을 불러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의신이 합리적이고 사리에 적당한 용병 계획을 세워 자세히 진언하니 이억기는 뛰어난 작전계획에 감탄하여 의신공의 계획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한편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내심으로 장하다고 여기면서도 의신의 심중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이제 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군대와 약체로 큰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적을 당하기 어려우니 헛되게 죽음을 택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이에 의신공은 크게 반발하여 장부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칼을 뽑았는데 어찌 자신의 몸을 생각할 수 있으리요. 죽는 한이 있어도 적과 싸우겠노라고 하며 곧 칼을 빼어들고 뱃머리에 서서 자기 관하의 사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자기 임지를 착실히 지키어 도망가기를 포기한 자는 내가 죽이지 아니할 것이나 사졸이 주장의(수사) 명령을 쫓는 자 있으면 모두 단칼에 목을 베이겠노라 하며 크게 노하니 모두들 엎드려서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한다. 이 광경을 본 주장 이억기는 크게 가상히 여기는 공으로써 선봉장을 삼으니 의신이 약간의 오합지졸로써 곧 큰 적을 가덕포 앞바다에서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싸워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이에 주장 (이억기)이 장계를 조정에 올리니 조정에서는 의신의 공을 가상히 여겨 훈련주부에 발탁하였다. 의신은 또다시 웅천포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를 거두어 그 공로로 훈련첨정에 승진되었다.

그 후 싸움마다 대첩을 거두다가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때에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하니 그 수가 부지기수여서 적의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드디어 적세가 크게 꺾이었다. 이때에 홀연히 하나의 적이 쌓인 시체 속에서 기어 나와 총으로 왼쪽 겨드랑이를 맞추니 의신은 곧 손가락으로 탄환을 후벼 파냈다. 유혈이 낭자한 팔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오른쪽 팔로 종일토록 싸웠으나 너무 피를 많이 흘리고 탄환 독이 점점 심하여 도저히 살지 못함을 생각하고 큰아들 연에게 모든 지휘권을 주면서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의신공이 마침내 진중에서 순직하니 7월 11일이었다. 그때 연의 나이가 19세의 약관이나 부친의 소임을 능히 감당했다. 이제 군졸들도 크게 놀라며 그를 도와 열심히 싸웠다. 전후 연은 부친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시어 장례를 치르니 그 숙성함과 효행에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논공책훈할 때에 의신을 선무 원종 1등공신에 기록케하고 호조참의를 증직하였으며 부모에게 벼슬을 봉하고 자손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연의 나이가 90에 이르도록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것을 뼈아픈 한으로 여겨서 일생을 장가들지 않았다 한다. 공이 어렸을 때에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간호하던 모습을 회고 한 아버지 세옹은 공의 모든 유물을 찾아 어루만지며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한다. 또 연은 일생을 장가까지 들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슬펐으면 이러했을까?

이 일은 또한 공의 평소 가정교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 편 아쉬운 것은 공의 위국진면한 충성에 비하여 포상이 너무 낮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처절했던 최후의 순간을 조정에서 세세히 알았더라면 어찌 정삼품관을 증직하는데 그쳤으랴,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지금 천안시 광덕면에 충효정문이 서 있어 의신의 충절이 전해주고 있다.

유의신은 임진란에 출전하기전 선조 초년에 유장군의 고향 천안시 광덕에 산채를 설치하고 출몰하던 안수를 토명하였다고 전하다.


◐7. 박자응(朴自凝)

박자응은 밀양 박씨로 자를 정언이라 하였다. 목천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과거에 응하여 급제하고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교리는 홍문관의 5품관이나 옥당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한림으로 불리우는 문관이며 누구나 선망하는 장래가 보장된 자리이다. 문한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벼슬이 있으니 재상 중에는 홍문과 대재학이며 아래로는 교리옥당이 문관들이 선망하는 자리이다.

박자응은 처음부터 학문을 인정받아 환로가 순탄하였으나 때마침 광해혼조를 당하여 명과 절을 숭상하는 박자응인지라 화를 자초하지 않고서는 못배기었다.

때마침 선조계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하니 이후부터 인목대비를 서궁이라 호칭하였다.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시해하니 이것을 폐모시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한 사건으로 패륜군주가 되어 반정의 빌미를 주었다. 북인일파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상소를 올리거나 조의에 부처 의논을 진행시켰다. 인목대비는 부원군 김제남의 따님으로 선조의 계비로 궁중에 들어와 영창대군 남매를 낳았다. 대비의 연령은 광해군보다 연하의 어머니였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육례를 갖춘 계모이면 어머니가 되는 것이 유교사회의 엄격한 법칙이다. 인목대비는 연소하지만 사리가 분명하고 명석하여 어떤 실수를 저지를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쟁의 희생으로 폐모시제 사건이 진행된 것이다.

선조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후궁소생이며 영창대군이 적자로 처음 탄생하였다. 선조는 광해군을 못마땅히 여기던 중 적자를 탄생하였으니 폐세자 할 생각을 가지었다. 영의정 류영정 등에게 밀의하여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세자의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선조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이첨과 정인홍에게 허위소문을 퍼친 혐의로 귀양명령을 내리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은 차일피일 출발을 지체하다가 갑자기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의 명령으로 복직되었다. 선조가 돌아가자 재빠르게 왕위에 오른 후 정인홍과 이이첨을 등용하고 선조가 총애하던 서인세력을 몰아내었다. 우선 왕위계승에 불평이 많은 임해군을 죽이고 이이첨과 정인홍의 모사로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에 나이 어린(8세) 영창대군을 강화에서 시해하였다. 이는 북인일파가 왕위에 불만을 느끼는 광해군을 충동하여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시제 사건을 일으켜 서인의 예기를 꺾고자 한 계책이다.

이 계책에 말려든 광해군은 패륜의 임금이 된 것이다. 폐모의에 참석치 않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박자응은 본시 적극적인 사람이라 조정에 있으면서 폐모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니 그 언사가 파격하였다. 그 내용을 살피니 "23적신이 국모를 폐하고자 하니 천인공노할 패륜이오니 전하께서 만약 용납하시면 과격한 유생이 수백 명 떼지어 강상을 바로 잡고자 하면 상감께서는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그후 어전에 등대했다가 폐모를 주장하는 흉소가 들어오자 박자응은 광해군의 면전에서 찢어 버렸다. 박자응은 광해군과 북인의 비위를 건드려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서궁에 대한 충성은 대단하여 항상 서궁쪽을 향해 앉으며 조석으로 기둥을 붙들고 탄식하였다.

또한 호를 읍백당이라 하였다. 흰 것을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항상 결백을 견지한다는 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박자응이 인조반정 때까지 적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출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박자응은 벼슬에 환멸을 느껴 고향 목천현 말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생을 시주로 자오하며 여생을 마치었다.

◐8. 백문보(白文寶) (1322∼1374)

백문보는 고려말에 활약한 직산 명현이다. 백문보의 자는 화부(和夫)이며 사후에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은 분이다. 생장시의 기록은 자세히 없으나 환로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그의 강직하고 바른 안목은 여러번 정치에 반영되어 고려사를 장식하였다. 그의 활약상은 고려사에 충숙왕(忠肅王)때부터 우왕때까지 여러번 수록되어 있다.

백문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 학문에 힘써 충숙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우상시(右常侍)등 문한의직과 왕의 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전리판서는 고려 육조의 하나로 문관의 선임공훈 봉작등의 일을 맡은 관청이며 판서는 이 업무를 총괄하는 장관이다. 처음은 상서이부(尙書吏部)로 명칭 하다가 고려말기 직제 개편때 전리사(典理司)가 되었다. 사람을 뽑아쓰는 관청임으로 선부(選部)라고도 하였다.

고려왕조는 4백여년의 연륜을 거듭하는 동안 인재 등용때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더욱이 무신의 집권이후 인재 등용의 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간섭을 받아 더욱 인재 등용이 문란해 있었다. 이때 인재 등용을 맡은 전리판서가 된 백문보는 유능한 인재를 바로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 잡아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공민왕에게 여러번 상소를 올려 인재 등용의 난맥을 논하고 과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과거제도는 십과(十科)로 분리해 실시하므로 전문 관원을 뽑으며 또한 밀직사의 제학등 요직은 반드시 과거로 뽑은 인재로 등용할 것을 제의하였다.
밀직사(密直司)는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와 군기(軍機)를 맡은 관청으로 제학은 밀직사의 요직이었다. 왕의 측근에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왕실의 안위를 맡은 궁중 호위인 숙위의 임무를 맡은 사람은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문보의 이와 같은 주장이 모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은 인재 등용이 참신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몽진의 길을 떠났다.
이 난리로 개경에 있던 사초와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때 왕은 청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봉 곽추에게 명하여 나머지 서책을 경상도 해인사에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때 백문보는 공민왕에게 경기에 있는 국가의 중요 문건을 하향 먼 곳으로 옮기면 난리가 잘 수습되지 않는 줄 알고 민심이 흉흉해 질터이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곧 중지케 하였다. 또한 백문보는 철저한 유학자이며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고려말의 안향 백이정과 한가지로 유교의 이상 정치를 주장하였다. 고려말 문란해진 승려들의 생활과 정치 간여를 통박하여 그 폐단을 근절하도록 건의하였다.
공민왕은 백문보의 인품을 믿어 요직에 배치하였으나 불교 정책과 승려 대우 문제로 차츰 멀어져 갔다. 백문보는 공민왕의 태도와는 아랑곳없이 항시 정론으로 불교 폐단을 건백 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신임하여 정치를 내맡길 정도의 왕이었으니 불교를 비판하는 이를 용납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백문보의 인품이 정대하고 임금을 모시는데 지성이기 때문에 그의 건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백문보는 승려 허가제를 실시하여 누구나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으니 조선시대에 들어가서 실시한 승려도첩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백문보가 승려 허가제를 실시한 것은 불교를 억제하고자 한 정책이 아니라 승려의 질을 향상시켜 불교의 제 자리를 찾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는 듯 하다.
고려말 불교의 세력으로 보아 백문보의 승려 허가제가 실시에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주장이 불교 승려도 수긍이 가거나 이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완벽한 제도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환도에 따른 제반 정비를 맡겼다. 환안도감에서 하는 일은 환도에 따른 제반 복구 작업을 맡아 안녕 질서를 되찾는 작업을 하는 관청이다.
공민왕은 환안도감의 책무를 백문보와 평양군 김경직과 같이 맡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백문보는 문한(文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문적을 두루 정돈하였는데 이제까지 전해져 오던 전적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사관을 해인사에 보내어 두우통전(杜佑通典)을 가져다가 통전의 본을 따고 박충의 헌책을 받아 들여 새로운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이 의제는 불교식 의식이 아니라 유교식 의제로 바꾼 것이다.

공민왕은 우왕의 왕자 시절에 백문보를 사부로 삼아 훈도하게 하였다. 백문보는 강직함과 문한으로 훌륭한 왕사 재목이 분명하나 우왕은 어려서부터 왕재가 못되어 후일 폐위가 되었으며 고려를 멸망의 구렁으로 몰아 넣었던 임금이다. 그것은 스승 백문보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않았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백문보는 왕자 모니노(牟尼奴 : 우왕의 아명)를 바로 인도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노력의 효과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문보가 조정에 바른 소리를 하면서 살았으나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왕세자의 사부로 발탁되었으니 그의 고결한 인품과 정당한 행동은 간신도 어찌 하지 못한 것이다. 백문보가 신돈의 화를 당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9. 상국진, 마륙황

우리고장 북면과 입장면에 차령산맥이 동서로 뻗어 산등성이가 연계가 되고 양쪽 골자기에 마을들이 있어 예로부터 옹기종기 모여 다정하게 살고 있다. 이 면계의 산을 위례산이라 부르고 이 산에 쌓은 산성을 위례성이라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성을 직산 위례성이라 부른다. 직산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옛 기록에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근래 직산 위례성의 입지로 보아 한 나라의 도읍으로 보기가 어렵다 하여 백제 초도 위례성을 다른 곳에 비정(批正)하는 학자들이 있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산 위례성 주위에는 예로부터 온조왕이 남분할 때 온조왕을 모시고 백제를 건국한 열분 공신의 후예라는 이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십제 공신 중 한 분인 전섭의 후손들은 천안 전씨라 하여 천안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살아오고 있다. 전섭은 후일 환성 군으로 봉군 되었으며 후손들이 그의 단소를 모셔 제향을 받들고 있다.

또 다른 십제공신 조성의 후예들은 직산 조씨로 행세하며 조성의 묘소를 정성껏 가꾸고 있다. 현재 삼국 초기에 장사 지낸 묘소가 지금까지 전해 온 것으로는 신라 박혁거세 왕릉이나 있을 정도이므로 조성의 묘소가 지금까지 전해온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도 있으나, 그 후손들의 주장이니 다른 고증이 없는 한 굳이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십제공신의 한 분인 마려의 후손들은 목천마씨로 관향을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직산 위례성를 들러 싼 천안지방에 십제공신의 후예라는 이들이 이 고장을 관향으로 하여 오래토록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산 위례성 백제 초도설은 아주 무근한 주장은 아닌 듯 싶다.

동국여지승람 목천성씨조에 본 현에는 우, 마, 돈, 상, 장의 오성이 살고 있는데 언전에 따르면 고려가 개국한 이래로 누차 반란을 일으키므로 고려 태조가 이들을 미워하여 축성을 사성하고 천대하였다한다. 그후 세월이 흐른 다음 고려 조정의 노여움도 사라져 성씨를 정상으로 고치도록 허용하여 우씨(牛氏)는 우씨(于氏)로 돈씨(豚氏)는 돈씨(頓氏)로 상씨(象氏)는 상씨(尙氏)로 장씨(張氏)는 장씨(張氏)로 개칭하였으나 마씨(馬氏)는 원래 백제건국 십제공신 마려의 후손이라 하여 그대로 마씨라고 불렀다 한다. 이들 오성은 모두 목천을 관향으로 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까지 살아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오성반란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상씨, 마씨 가승과 만성보에 간단한 기록이 전할 따름이다. 이 오성 반란을 주도한 이는 그들의 가승에 전하는 인물이었던 상씨의 시조 상국진과 마씨의 시조 마륙황의 이름이 전할 따름이다. 이들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고 의로운 반란이기에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현관인 장붕익과 김홍욱이 목주인의 기질을 칭찬하는데 오성고사를 예화로 들고 있다. 장봉익은 인조 반정공신 장유의 부친이며 김홍욱은 호가 학주로 전국 각 고을의 제영을 지었으며 강빈사건을 직관하다가 죽음을 당한 곧은 선비이다.

상씨 가승과 만성보에 따르면 상국진은 원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이 땅에 진군하였을 때 이에 반항해서 백제의 국권을 회복하려고 항쟁하였다. 상국진을 중심으로한 백제 유민들은 통일신라에도 계속 대를 이어 불복하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백제를 회복하려고 일어선 것이라 하였다. 이 반항군의 대표가 상국진이고 다음은 마륙황이었던 모양이다.

마씨는 백제 창업 십제공신의 후예로 백제의 교목세신 이었던 가문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들이 웅거한 근거지는 상왕산이라 불렀다. 현재 독립 기념관의 뒷산으로 흑성산이라 불리우는 산이다. 산정에 석성이 있는데 검은 돌로 쌓았다 하여 흑성산이라 한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기록이 없고 축성법으로 보아 고대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흑성산을 상왕산이라 함은 대록지 기록에도 일치한다. 대록지 단묘조에 기우제단이 상왕산에 있는데 '상왕산은 바로 흑성산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大麓誌 檀廟條 祈雨祭檀 在象王山 郞黑城山)

목천마씨의 가승에는 십제공신의 후손 마륙황이 십제를 복구하려다가 실패하여 고려 태조의 노여움을 사 갖은 학대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 학대는 오래 지속되었으나 마륙황의 8대손 목천군이 고려 정종때 벼슬길에 나아가 문하시중 평장사가 되어 비로소 가문을 회복하였다 한다.

상씨 마씨만이 가승에 반란고사와 주동한 인물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목천 돈씨는 만성보에 오성고사만 인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우씨는 중국의 주무왕의 자손이라 하였을 뿐 목천 반란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천 장씨도 인동 장씨와 같은 계통이라 했지 오성반란을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이들 오성은 고려 초기 천인으로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천적에 들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예 감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성반란 사건 이후 가문이 영락하여 기록이 없다가 중시조 이후에야 비로소 계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반란의 근거지를 상왕산이라 한 것으로 보아 상국진을 십제의 왕으로 추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간다.

상국진을 위시한 오성이 십제를 회복한다고 선언하였다 하나 백제가 망한지 2백년 후의 일이므로 그저 혼란한 틈에 복고 감정에 호소하여 창업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 세가 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천하는 비운만 겪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영성지 성씨조에 덕흥부곡의 대성으로 상씨를 꼽고 있다. 고려시대 부곡은 천인집단이다. 그러므로 낙천한 상씨가 부곡의 장인으로 거주한 것이 분명하다.

목천 오성반란 사건과 상국진과 마륙황의 사적은 이것 이상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이정도의 기록마저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는 이가 없어 인멸될까 염려되어 상국진과 마륙황의 기록을 남겨두고자 한다.

우, 마, 돈, 상, 장의 고려 태조에 대한 반란 사건은 세종대왕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 관찬 서적과 대록지환여승람 등 지지에 기록되어 있다.


◐10. 상진(尙震)

사화가 빈번히 일어나던 시대에 15년간이나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상 정승은 자가 기부(起夫)이고 호는 범허재(泛虛齋) 또는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목천면에 우뚝솟은 흑성산 아래에 「상 정승골」이란 곳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그곳(목천)이 상씨의 본관인 것이다.

상진의 아버지는 충청도 공주목 임천군 합하동(현재의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에서 살았으며 안기도 찰방(경상북동 안동지방)을 지낸 성보이다. 부모가 늦게까지 슬하에 자식이 없자 보령군에 있는 성주산에서 치성을 드리고 얻은 아들인데 성종 24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매부 하산군 성몽정의 집에서 자랐다.

상진은 워낙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워 성인과 같았다. 그러나 나이 열다섯이 지나도록 공부를 게을리 하여 누님의 속을 태웠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였으나 차차 철이 들면서 느낀바 있어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14년(1519)에 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의 부정자가 되더니 그후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여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명종 임금때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에 상진은 누차 사양했으나 명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명종 17년(1562)에는 70세가 됨으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했으나 오히려 경연을 겸하게 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였다.
상진은 1564년에 나이 72세로 별세를 했는데 성안이란 시호를 받았다. 상 정승은 교훈이 되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 가지만 들어 수록해 보고자 한다.

서울에서 벼슬살이 할 때 집으로 돌아오다가 금으로 만든 술잔을 길에서 주었다. 상 정승은 그 물건을 주인에게 찾아 주려고 대문 옆에 크게 방을 써 붙여 잃은 사람을 찾으니 금잔을 잃은 사람은 어느 대가집 종이었다. 이렇게 하여 종의 목숨을 구해 주니 당시 유명한 복술가 홍계관이 말하기를 「공은 수명을 15년 늘렸습니다」하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공은 당시로는 드물게 72세를 누리었다.

공의 증조부 영부는 임천(부여군 장암면)에 살면서 가세가 풍요하여 곡식과 돈을 대여해 준 기록문(차용증서)이 많았다. 하루는 이 기록문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하는 말이 「내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터인데 이것을 무엇에 쓰겠느냐」하였다. 공의 조부는 수사이고, 부친은 현감과 찰방을 지냈으며 공에 이르러 만인지상에 일인지하인 영의정이 되었으니 증조부의 말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다.

상 정승은 일찍이 남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한 적이 없다. 어느 날 무더운 여름철에 찾아온 선비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사람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걸어갔다. 선비의 하는 말이 「저 사람 한쪽 다리가 짧군요」하니까 공은 「어찌 남의 단점을 말하리오, 다리 하나가 길다는 것이 듣기에 좋지 않느냐」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이 당시 명언이 되었다 한다.

다음으로 좌의정 오상이 어렸을 때 상 정승을 찾아 뵈온 일이 있었다. 이때 오상이 세상의 각박함을 한탄하여 글을 지어 상 정승께 올렸다.

「羲王樂俗 今如掃 희왕락속 금여소
只在春風 盃酒間」 지재춘풍 배주간
삼황오제 시대의 아름다운 풍류는 비로 쓸은 듯이 없어졌고, 봄바람만이 술잔 사이로 오락가락 한다.

상 정승이 이 글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오생(吳生)이 대성할 줄 믿었는데 어찌 그리 말이 박하냐 하시며 오생이 대성하려면 싯구나 말이 후덕해야 된다고 하면서 즉시 퇴고하기를

「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盃酒間(희황락속금유재 간취춘풍배주간)」이라 하였다. 이는 삼황오제 때의 풍류가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이 술잔 사이로 오락가락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희망적이고 낙천적이며 여유가 있는 글인가?

상진은 70세에 노령으로 퇴관하고 송현에 살았는데 지금의 서울 중구 상동이 아닌가 한다. 그때 임금의 행차가 자주 공의 집 앞을 지나갔다 한다. 그때마다 늙은 공은 문안에서 부복하고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다. 주위 사람들이 왜 이왕이면 문밖에 나가 부복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에 상 정승은 정색을 하면서 "임금의 행차에 신하가 부복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나 임금의 눈에 띄어 괴임을 받으려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바른 도리가 아니다"하며 매양 하던대로 지켜 나갔다 한다.

공은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너희는 나의 행장을 지을 때 다른 말은 쓰지 말고 「늙게 거문고 타기를 즐겨왔으며 거문고를 타다가 문득 임금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여생을 보냈노라」고 쓰라 하였다.
공이 남긴 글과 말속에서 그의 덕성을 엿볼 수 있으려니와 그는 노비의 천한 지위에 있는 자라도 착함이 있으면 반드시 말과 안색으로 칭찬하였으며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여 15년간의 정승자리에 있으면서도 조복이외는 비단옷을 입지 않고 항상 포의처럼 생활하였다 한다. 또 조석에 반찬 그릇이 많으면 상밑에 내려놓고 말하기를
「옛 어른들은 식미를 중히 여기지 아니했거늘 항차 나 같은 사람이 식미를 택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한다.
공은 비록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나 권세를 가진 간사스러운 신하를 배척함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으며 그의 청빈한 정신은 정사의 기반이 되었다 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정승이 약 500명 가량 배출되었었다. 그 중에서 정승으로 능력을 갖춘분은 그리 많지 못했다. 세줄을 타고 정승이된 사람, 간교와 아첨으로 자리를 얻은 사람 등 지탄을 받는 인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정승다운 정승을 찾아본다면 세종때의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상진 정승 세분 뿐이라 하였다. 상정승은 15년의 긴 세월을 정승으로 재직하였으며 당시 명종 임금때의 조정이 대윤:소윤의 싸움으로 어려운 시기였으나 태산과 같은 무게로 원만무애한 처신에 아무도 상정승을 헐어 말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상정승 집안에 알 수 없는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은 옛말에 「덕을 쌓는 집안에 복이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상정승과 같은 덕인의 후손이 그리 창달하지 못하였다. 그 불가사의는 설화가 우리고장에 구정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상정승이 퇴관하여 향저에 머물러 계실때의 얘기라고 한다. 이때 상정승에게 혼인할 나이가 된 약관의 아들이 있었다 한다.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올 때의 일이다. 이때 상정승이 향저의 사랑방 대청에 앉아 있는데 한 양민이 허름한 차림으로 댓돌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하나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으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상정승은 의아하게 생각하여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느냐. 어서 말하여 보아라"하며 말하기를 재촉하였다. 후덕한 말씨였지만 매우 엄숙하였다. 그러나 그 양민은 얼른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재삼 독촉을 받고서야 간신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아뢰우기 시작하였다.

"소인에게 딸이 하나 있아온데 이제 과년이 되어 짝을 찾아 여위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합당한 혼처를 구하여 혼가를 시키려 하였는데 영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까닭을 물으니 외람스럽게도 정승댁 며느리로 들어가야할 몸인데 어디 함부로 혼담이냐고 하며 일언에 거절합니다. 소인이 이 가당치 않은 말에 어이가 없어 딸아이를 타일렀습니다. 우리집 가문이 어디 상정승댁과 혼인할 처지냐 언감생심 천벌을 받을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꾸짖었더니 딸년은 당돌하게도 제가 상정승댁 며느리로 들어가야 상정승댁이 계속 번창할 수 있으니 상정승댁에 가서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며 식음을 전폐 하므로 딸년 죽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죽을 각오를 하고 와서 감히 입을 열어 사뢰옵니다."

상정승이 이 말을 듣고 "너의 딸아이가 분수를 모르는 생각을 하는구나 우리집 아들은 이미 성혼한 곳이 있으니 네 딸은 단념하고 좋은 곳 선택하여 출가시키도록 하여라"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얼른 물러날 생각을 아니하고 다시 고개를 조아려 말하기를 "소인의 딸아이는 예사 아이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천수를 점치는 재주가 있어 제 운명을 점치는 능력이 있아오니 예사로 듣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상정승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상정승을 모셨던 선비들과 청지기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내몰며 "분수 모르는 주제에 엉뚱한 소리한다"고 혼내였다.

그후 양민은 여러차례 또와서 상정승 뵙기를 청했으나 청지기들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여 아예 상정승께 알리지도 않았다. 그후 양민의 딸은 스스로 상정승댁에 찾아와서 며느리로 맞이해 줄 것을 애걸복걸하였으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처자는 하늘을 향하여 허희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한미한 양가의 딸이기는 하나 처자의 몸으로 청혼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 있을 수 있으리오. 이제는 상정승댁 가운도 그만이구나"하며 대문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혼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상정승댁 사람들이 방에 누이고 치료했으나 깨어나지 않고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상정승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고 장마에 전답이 유실되어 가산이 허물어 졌으며 역병에 가족이 꺾이는등 환란이 거듭하여 가운이 영영 기울고 말았다.
이 구전되는 설화가 얼마나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후덕한 상정승댁이 영화롭게 계승하지 못하니 이런 설화가 나왔음직하다.

상씨는 천안지방에 대를 이어 살아왔으나 그 손이 그리 많지 않으며 영달한 이도 적은 것으로 알려 있다.


(천안의 역사)

고대

광덕면 대평리에서 동검, 병천면 봉황리에서 소형마제석부, 두정동에서 마제석검 유구석부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천안 지역의 역사가 기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로서 마한의 맹주격인 목지국의 터전이 현 직산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대록군과 그 영현이었던 순치현이 있던 지역이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을 경덕왕이 개명하여 목주라 한 곳이다. 또, 백제의 온조가 옛 마한지역을 통일하고 백제를 이룩할 때 환성이라 한 곳으로, 또 위례성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의 천안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룡리에 있는 위례산성이 바로 그 유적이라고 전하나, 일부 학자들은 부인하고 있다.

뒤에 고구려가 세력을 장악했을 때에는 사산현이라 하였다. 순치현은 백제의 감매현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으로 풍세현이라 부른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천안지역은 천안부와 그 영현인 풍세현과 직산현, 그리고 청주의 목주가 있었다. 천안부는 930년(태조 13)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동서 두솔을 합해 천안부로 하고 도독을 두었다.

995년(성종 14) 환주로 고치면서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단련사를 폐하고, 1018(현종 9) 다시 천안이라 하고 지부사를 두었다. 1310년(충선왕 2) 영주로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천안부라 했는데 별호는 임환이었다.

직산은 신라의 사산현을 고려 초에 직산이라 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천안부에 내속했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풍세현은 신라의 순치현을 고려 초에 풍세현이라 했으며, 1018년에 천안부에 내속했는데, 별호를 자천(?川)이라 하였다. 목주는 신라 때 대록군을 고려 초에 목주라 하여 청주에 예속시켰고,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는데 별호를 신정이라 하였다.

성환읍 대흥리에 홍경사지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이곳은 갈래 길의 요충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과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하여 행인을 자주 약탈하는 강도가 많으므로 고려 현종이 형긍스님에게 명해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상서 강민첨 등이 이를 감독하여 집 200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라고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지금의 천안지역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했던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의 지역이었다. 천안군은 고려 초의 천안부로 태종이 1413년(태종 13)에 영산군으로 고쳤다가 1416년에 다시 천안군으로 하여 인접 풍세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당시 천안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06호에 2,385명이었다.

목천은 고려시대 목주로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 목천이라 하고 1413년에 현감을 두었다. 조선 초 목천의 호구 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404호에 2,286명이었다. 직산현은 고려시대의 직산인데 1393년(태조 2)에 환관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돌아오자 직산을 지군사로 승격시켰다가 1401년(태종 1)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다.

1413년 직산에 현감을 두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1507년(중종 2) 다시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임진왜란 후 평택현이 폐현되면서 직산에 합병되었으나, 6년만인 1618년(광해군 10) 다시 분리되었다. 조선 초 직산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53호에 2,111명이었다.

동면 구도리에서 살았던 세조 때의 문신 김일손은 춘추관의 기사관으로 있을 당시 ≪성종실록≫의 사초에 세조의 잘못을 직필했다는 연유로 무오사화 때 희생당하였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이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하던 중 며칠 간 머물던 곳에 화축관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 역대 제왕의 입비를 세우고 봉안하고 고을 원으로 하여금 매년 삭망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천안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목천에서 태어난 목천상씨 상진은 명종 때의 영상으로서 조선조 3대 정승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근대


1895년(고종 32) 공주부 천안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천안군으로 되었다. 1914년 천안·목천·직산 3군을 통합해 천안군이 되었다. 1920년 영성면을 천안면으로, 성산면을 직산면으로 고쳤다. 1931년 천안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아우내는 한때 이름났던 고장으로 이동녕·조병옥·유관순 등을 배출시킨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일제에 항거하여 3,000명의 시골주민들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끝내 순국하였다.

현대


1963년 행정구역 변경 때 천안읍과 환성면을 합쳐 천안시로 승격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은 천원군으로 되었다. 1969년부터 1973년에 걸쳐 병천면 탑원리에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사우를 세웠다. 1973년 성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2년 군청이 천안시에서 성거면의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1983년 충세면 구룡리가 천안시에 편입되었고, 1985년 성거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2읍 10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5년 독립기념관을 목천면 남화리 일대에 1987년에 완공하였다. 1991년 천원군이 천안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천안시와 천안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천안시가 되었다. 2002년 1월 1일 시조례 제508호로 직산면과 목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8년 6월 23일 시조례 제860호(2008.3.21공포)로 2개 일반구(동남구, 서북구)설치 및 청사 개청하였다.

(천안의 역사인물)

1.유관순 열사- 세계적인 여성독립운동가, 우리민족의 영원한 횃불

1902년 12월 16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교사 샤프부인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워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를 부르겠다고 학장에게 강하게 요청하였다.

총독부 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김구응,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열사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수감중에도 옥중에서 끊임없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체포당시 상처와 고문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유관순 열사는 비폭력 투쟁,삼일정신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다.

2.충무공 김시민-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진주대첩의 명장

고려 충신 김방경 장구느이 12대손이며 조선을 사명현 김충갑선생의 셋째 아들로 1554년 8월 27일(음력)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25세 때인 1578년(선조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고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격해오는 왜군을 크게 격파한 공로로 7월말 진주목사로 발탁.

1592년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

1604년(선조 37년)6월 25일에 선무공신 2등에 올랐고, 10월 29일에는 장군의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며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렸다.

1702년(숙종35년)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3.석오 이동녕-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임시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1869년 2월 17일에 태어났다

석오는 총명하고 출중하다는 칭찬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를 치름.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서울에 올라가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를 바로 잡고 이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기르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여 북간도를 활동 무대로

정하고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북간도 최초의 한국인 학교 였다.

1907년 안창호,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의정원 의장 3회, 주석 4회를 역임.

1940. 3. 13 중국 사천성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하여 국장을 거행.

1948. 9. 22 김구 선생 주도로 봉환하여 효창원에 안장.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4.담헌 홍대용-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1731년(영조7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났으며 10여세 때부터 김원행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오랜 세월동안 사사관계였다. 북학파 학자들인 박지원,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유학보다는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는 1765년(영조41년) 청나라에 가는 서장관 홍억의 군관으로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던 일이다.

북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등과 사귀면서 청조의 문물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배청의리론을 극복하고

주체적 세계의식으로 전환하여 의산문답을 저술하였다.

44세가 되던 영조 50년(1755년)에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별히 임명되는 음관으로 종9품의 선공감의

말직인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을 보필하는 세손익위사의 사직으로 지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사헌부의 감찰, 태인현감,영주군수

등을 지내다가 정조 7년(1783년)2월 풍으로 세상을 떠나 천안땅에 묻혔다.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였고 오행설과 음양설을 극복하여 서양과학의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서양과학이 수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주해수용을 저술하였다.

5.유석 조병옥- 최초의 장관, 최초의 박사, 민족운동의 지도자

1894년 갑오년 3월에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재필,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특히 안창호의 인격과 애국연설에 감복하여 흥사단에 가입,

활동했었다.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재정총무겸 경성지회 책임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광주 학생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39세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잠시동안 전무 겸 영업국장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광산사업에 4년간 손을 대기도 하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유세기간중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 저서;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6.황혜성- 천안을 빛낸 여성, 조선왕조 궁중음식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1920.7.5 천안에서 출생. 천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공립고등학교,일본경도여자고등전문학교를 졸업.

1939년 대전 대동공립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조 최후 주방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 받았다.

1946년 부터 1990년까지 숙명여대,서울대,명지대,한양대,성균관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하여 1973년 1월 5일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되었다.

궁중음식발표회를 여러차례 가졌으며 1986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0년 10월 대통령표창 보관장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궁중음식,한국민속종합조사,한국음식 등 수십권이 있다.

7.이봉주(1970년 10월 11일 - )

충남 천안 출생으로 마라톤 선수이다. 1998년 4월 19일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2시간 7분 44초로, 2000년 2월 13일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로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웠다.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과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마라톤, 2007년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2008년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는 아프리카 선수들의 페이스에 밀리며 2시간 17분 56초로 28위에 머물렀다.개인 통산 서른여섯 번째 완주였다.

2009년 10월 21일 제 90회 전국체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5분 25초 만에 완주해 1위로 결승점을 통과, 그의 은퇴 경기이자 41번째 완주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천안의 이야기)

1.천안삼거리의 이야기

천안삼거리는능수버들가락이늘어지는흥타령이유명하여한편으로는매우풍류어린곳으로여결질법도하지만,사람들이교차하는곳에는언제나사람들의스쳐가는만남과이별이애달프게서려있게마련이니천안삼거리에관한이야기들도예외가아니다.

대표되는 이야기들은 다 '능수버들'과 관련된 것인데 하나는 충청도에서 살던 유봉서라는 홀아비와 어린 딸의 이야기이다.

아비가변방에수자리를가게되어하는수없이어린능소를삼거리주막에맡기고가면서버들가지를하나꽂고갔다.오랜세월이지나돌아와보니버드나무가자라아름드리나무가되어있고그아래아리따운처녀가된능소가기다리고있어부녀는감격의상봉을했다는이야기이다.그때부터'능수버들'이라는이름이생겨났다고한다.

다른하나는한젊은선비와삼거리주막의기생이야기이다.전라도고부땅에서과거를보러올라가던선비박현수가삼거리주막에서하룻밤을묵게되었다.밤이되어잠을청하는데어디선가청아한가야금소리가들려왔다.소리를따라가보니능소라는어여쁜기생이타고있었다.하룻밤에백년가약을맺은박현수는과거에장원급제하여돌아왔고흥이난능소가가야금을타며"천안삼거리흥~능수나버들아흥~"하며흥타령을읊조렸다는것이다.

또한 아비와 능소가,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능소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진 자리에 자라난 것이 능수버들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2.어룡리의 전설

성환읍에서 평택쪽을 향해 국도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건너면 어룡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그 형태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마을의 뒤에는 수리조합이 있고 앞은 탁 티어져 있다. 이 마을의 내에 고기가 살다가 변하여 용이 되어서 승천했다고 하여서 어룡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매년 정월 초사흘 밤 12시가 되면 안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정제를 지낸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가려서 제주 1인을 선정하고 이장, 새마을 지도자, 반장이 함께 참석하며 딴 사람들은 참석할 수가 없다. 제관은 정월 초하루부터 제를 지내는 시간까지 일체 문 밖 출입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여서는 안된다. 집안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하며 금줄은 샘과 동리의 길가와 제주집 문전에 느리며 동리의 입구에는 황토를 펴 놓는다.

제수비용은 대동회에서 정제비로 염출하며 제물은 돼지머리와 떡, 삼색실과, 탕을 쓰고 술은 제주집에서 조라술을 담구어 사용한다. 전에는 소머리를 썼으나 요즈음에는 돼지머리를 쓴다. 제일이 되면 마을 안에 있는 공동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띠어 놓았으므로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제가 끝나고 나면 제주의 소지를 먼저 올리고 다음으로는 세대주의 소지를 고령자부터 나이순으로 올려준다.

다음날 새벽 1시쯤 정제가 끝나면 마을회관에 모여서 노인들께 먼저 음식을 드리고 모여서 먹는다. 이 마을에서는 제가 끝나면 밤, 대추 등을 우물에 집어 넣는데 그것을 제일 먼저 건져다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서 부녀자들이 서로 먼저 물을 뜨려고 한다.

3.위례산의 이야기

입장면 호당리에는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으로 화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이 되어 공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4.번개마을

병천에서 동면쪽으로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동면소재지 700m정도 못미쳐 좌측이 화계리 번개마을이 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흩날 밤 12시부터 보름날 1시 사이에 지내는데 제사를 지낼 제관은 축관 1인과 제관 1인 그리고 불대장이라 부르는 유사 1인을 선정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사람이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나 요즈음엔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일 당일에는 정성을 다하는데 제는 제관 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제관의 집과 우물 주위에 황토를 펴고 제장은 마을의 방위로 따져서 제일에 손이 없는 방향에 차일을 치고 제장으로 삼는 완전한 노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42호가 모여 사는 번개마을은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걷어서 제수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일 전날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와 미리 담그어 놓은 조라술로 제사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의 제로 강신-분향-초헌례-고축-아헌례-첨작-종헌례로 이어지며 제일 당일 제관들은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소지는 세대주마다 한 장씩 올리며 보름날이 되면 저녁에 전 주민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치를 벌인다.

제 2대 대통령... 윤보선 [, 1897.8.26~1990.7.18] 대통령

 

호 해위(). 충남 아산()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저서에 《구국()의 가시밭길》이 있다.

 

 

 

(아산의 유명한 인물)

 

1.이순신(1545~1598)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이다.

 

공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 되던 해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주부, 조산보 만호, 선전관,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었다.

 

공은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 때 옥포, 함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충동 때, 사천, 당포, 당황포, 울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충청 등지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 당황포, 장문포 등지에서 왜적을 소탕하였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보호에 힘을 쏟던 중 모함으로 사형 받게 되었으나 약포 정탁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의 막하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 1598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 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였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꺽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선조 37년(1604) 덕풍 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책훈되었으며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의 어라산에 위치하여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가 세워졌다. 이곳 현충사 외에도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


2.맹사성(1360~1438)


맹사성은 1360년(공민왕9)~1438년(세종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온양 출신으로 1386년(우왕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여 춘추관검열이 된 데 이어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그가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 사시가” 가 있다 .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한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3.장영실(?~1442)


장영실은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

세종 조 의 찬연한 정신문화 위에 다채로운 과학기술의 힘을 더한 사람은 장영실이었다. 그는 동래부 관노의 소생인데, 그의 선조는 아산 사람이었다. 장영실은 과학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세종5년(1423)에 발탁되어 노예의 신분에서 면제되었으며, 사직의 벼슬에 올라 세종14년(1432)에는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의 제작에 착수하였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했다. 세종15년에는 호군의 벼슬에 승진하였고, 세종이 역상에 관한 모든 기구를 제작하고자 할 때 정인지, 정초 등은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장영실이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특히 세종20년(1438) 경복궁 뜰에 혼천의를 간직한 흠경각을 세우는데도 모든 공역을 담당하는 공헌을 하였다. 「혼천의」제작을 완료하였고, 이듬해에는「갑인자」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는 한편, 물시계인「천평일귀」, 「앙부일귀」, 「해성정시의」및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규표」등을 제작감독 했다. 특히 세종 23년 (1441)에는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독하에 제작된 국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불경죄로 파면을 당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서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기계, 건축, 과학의 발전과 실용화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이며 발명가이다.


4.김옥균(1851~1893)


김옥균은 조선 고종때의 정치가 자는 백온, 호는 고균 , 고우, 시호는 충달, 병기의 아들이다. 1872년(고종9) 문과에 급제 옥당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일본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척신들이 정권을 잡고 사대사상이 팽창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허세를 부리고 있어 나라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지라 김옥균은 이를 개탄하여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협력하여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정을 개혁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하려고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박영효, 홍영식 등과 협력하여 거사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만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와다라 변명하고 오가시마리섬과 홋카이도, 도쿄 등지를 전전하면서 10년을 지냈다. 1894년 3월 28일 상해로 건너간 김옥균은 동화양행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죄명을 씻기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순종 때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을 받고 관리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

았다.


5.이지함(1517~1578)


이지함의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 또는 향중,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하다. 고려 말의 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의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아 수리, 의학,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달통하였다. 1573년(선조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 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어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걸인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의 흙담 움막집에서 지내‘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으며 일년의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을 저술하였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고“농아집”을 저술하였으며,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이 마포에 찾아와 그를 도연명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에 제향되었고 1713년(숙종39)에는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6.윤보선(1897~1990)


윤보선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 호는 해위. 그리스도교의 집안인 윤치소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게이오대학에 유학 중이던 20세 되던 해 학업을 중지하고 여운형을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약관의 나이에 의정원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 농산국 고문을 역임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 시장, 상공부장관에 기용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비민주적인 정치를 행하자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1954년 야당인 민주당 소속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후 4, 5민의원과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4.19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합동회의에서 내각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혁명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물러났으며 74년 정계를 은퇴하여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재야 지도자가 되었다. 저서로는 회고록 “구국을 위한 가시밭길"등이 있다.

 

 

 

천안출신 유명인을 알아보았습니다.

도올선생님의 카리스마가 단연 돋보이네요..

참고로 전, 개그맨 안상태 3년 선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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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연예인 >

1. 이봉주 : 마라톤선수, 천성중학교.

2. 김태균 : 야구선수, 남산초, 북중. 북일고. 한화이글즈. 지바롯데 마린스.

3. 김미연 : 개그맨,가수. 천안여고, 서울예대, 대전대.

4. 예성 : 가수 , 슈퍼주니어, 부성중학교, 병천고등학교.

5. 김학래 : 개그맨, 성남면출신, 배우자임미숙.

6. 안상태 : 개그맨, 인주중, 천안중앙고등학교.

7. 이선화 : 골프선수 , 천안여상, 단대 스포츠과학부.

8. 문필희: 핸드볼선수, 천안여중.베이징올림픽 핸드볼 국가대표

9. 정재순 : 탤런트, 천안여고.

10. 이왕표 : 프로레슬링선수, 북면출신.








< 천안의 인물 >

[유관순]- 삼일운동때의 순국처녀,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을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을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김시민] -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홍대용] -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이동녕(1869~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는데 청년시절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다가 간도로 망명해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키고, 안창호-신채호와 신민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3,1운동 후로는 임시정부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죠.

조병옥(1894~1960)도 역시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는데 기독교 학교를 다니면서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미국으로 유학해 박사 학위를 받고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안창호의 흥사단과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합니다. 조선일보를 인수해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광산 사업에도 손을 댔었죠. 해방 후 UN 대표, 장관 등을 맡았습니다.

황혜성(1920~)은 한때 교사 생활을 하다가 조선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받아 여러 대학 교수를 지내고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해 중요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된 궁중음식 명인입니다.

[도올 김용옥 ]

생애

대학교수이자 학자이며 철학자, 언론인, 한의사이고, 극단의 단원으로도 활동하고, 연출가이고, 영화와 연극의 시나리오를 쓴 극작가이고, 언론에 기사와 칼럼을 써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학문적 탐구와 저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누군가 그에게 돌이라고 비하, 조롱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돌에서 힌트를 얻어 아호를 도올이라 부르기도 했다.

1982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고 85년 9월에는 동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후 1988년 무렵부터 방송 강연에 출강하였다.

일반인에게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대중을 대상으로 강의한 TV 노자와 21세기 강좌에서의 상식을 깨는 인상적인 강의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철학은 동양과 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기철학을 중심으로 한다. 아직 그 전모에 대해서는 형성중이라고 여겨지지만 동양사상이 그 뿌리인 기철학을 통해 서양철학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고 사상적,보편적 비전을 제시하는 의미를 가지리라 판단된다.

[편집] 학력

  • 1953년 4월~1959년 3월 천안제3국민학교 졸업
  • 1959년 4월~1965년 2월 보성중·고등학교 졸업 (55회)
  • 1965년 3월~1967년 2월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생물학과
  • 1967년 3월~1968년 2월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 1968년 3월~1972년 2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문학사, 「버트란드 럿셀의 논리원자주의」)
  • 1972년 3월~1972년 8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대학원(철학 석사)
  • 1972년 9월~1974년 6월 대만 국립대만대학 철학연구소 (철학석사,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
  • 1974년 9월~1975년 3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연구생
  • 1975년 4월~1977년 2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철학석사,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
  • 1977년 2월~1977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
  • 1977년 9월~1982년 6월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철학박사, 「왕부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chich(1616~1692)」)
  • 1990년 3월~1996년 2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 (한의학사)

[편집] 활동

[편집] 경력

  • 1982년 9월~1985년 8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
  • 1984년 3월~1987년 12월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콘템포러리 뮤직으로 승화시키는 다양한 기초작업을 함. 한국의 전통음악을 이끄는 대표적 주자, 백대웅․김혜숙․박범훈․송방송․이성천․권오성․최종민․이보형․양승희 등이 참여.
  • 1984년 3월~1990년 2월 유기화학자 김용준과 함께 신과학운동 세미나를 주도하고, 대우재단지원 과학사상연구회(科學思想硏究會)를 설립함.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과학사상가들(조순탁,이성범,장회익,김두철,서정선,신중섭,이봉재 등)이 참여.
  • 1985년 9월~1986년 4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정교수
  • 1986년 8월~ 대중의 사랑을 받는 마당극으로 유명한 극단 미추를 손진책, 김성녀와 함께 창단.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는 많은 연극 작업을 함. 『시간의 그림자』,『그 불』 등을 직접 연출.
  • 1987년 10월~1988년 1월 영화인 심포지움을 만들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준비운동을 함.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온 감독들(유현목,김수용,임권택,이장호,김호선,하명중,정지영,박광수,이두용,황기성 등)이 참여.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개벽』, 『취화선』의 대본을 썼고, 특히 『취화선』은 2002년 55회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획득하였다. 『취화선』과 『왕의 남자』의 자막을 영역하는 작업을 하여 세계 영화애호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 1988년 6월~1999년 6월 도도회(檮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국화운동을 주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 교수들과 그 대학 출신 화가들(이종상,김병종,김호득,장상의,심현희,장혜용,이민주 등)이 참여.
  • 1989년 2월 13일~1989년 2월 15일 태권도철학세미나를 개최. 무술의 본질과 태권도문화의 세계화를 논함. 유병관,양진방,김영선,김용범,최의정,임신자,바비 클레이튼(Bobby Clayton),스티븐 카프너(Steven D. Capener) 등이 참여. 이 세미나의 결과물로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집필․출간. 이 작업의 정신과 성과는 무주 태권도공원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함.
  • 1989년 6월~1993년 6월 한국사상사연구소(Korean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 설립, 기초문헌 작업.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삼국유사인득』을 출간. 이 작업은 후에 제자 김현 교수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전체 한글번역 프로그램인 CD-ROM작업으로 이어져 한국학의 신기원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류의 원류인 사극 드라마들의 희곡작업의 근간을 이루었다.
  • 1993년 7월~2001년 7월 도올서원을 설립, 15림에 걸쳐 3,000여 명의 재생을 배출. 한학의 배경을 가진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사회에서 활약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국역사업을 지원하였고, 그 기관이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되는 데 헌신적 노력을 하였다.
  • 1996년 9월~1998년 6월 도올한의원을 개원. 많은 난치병환자를 치료하여 제세의 사명을 다함.
  • 1996년 3월~1997년 2월 서울대학교 천연물과학연구소 연구교수
  • 1996년 9월~1998년 8월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
  • 1997년 3월~1997년 8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초빙교수
  • 1997년 9월~1998년 8월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대우교수
  • 1998년 8월~1999년 8월 보스턴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New England Complex Systems Institute) 철학분과 디렉터
  • 2002년 12월~2004년 3월 문화일보 기자
  • 2003년 3월~2004년 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객원교수
  • 2003년 9월~2004년 8월 중앙대학교 교육학부 석좌교수
  • 2005년 3월~2006년 2월 국립순천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 2007년 3월~2008년 6월 세명대학교 석좌교수
  • 2007년 4월~2009년 3월 중앙일보 기자(중앙일보에 “도올고함(檮杌孤喊)”이라는 칼럼을 연재. 중앙선데이 판에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신발굴 성서자료)를 연재하여 한국인의 기독교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혁신해나가는 운동을 벌임.)

[편집] 방송 출연

  • 1994년 MBC 《MBC 이야기쇼 만남, 공부란 무엇인가》
  • 1997년 SBS 《명의 특강, 건강하십니까》
  • 2004년 9월 8일 MBC 《아주특별한 아침 - 도올 김용옥, 랩 가수 데뷔?》
  • 2007년 7월 11일 KBS 《단박인터뷰》도올 김용옥
  • 2007년 10월 9일 KBS 스페셜 《남북정상회담 특별기획 도올의 평양이야기》
  • 2007년 12월 18일 MBC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

[편집] TV 강의

  • 1999년 11월~2000년 2월 《노자와 21세기》(56회), EBS
  • 2000년 10월~2001년 5월 《도올의 논어 이야기》(64회), KBS
  • 2002년 8월~2002년 11월 《도올, 인도를 만나다》(28회), EBS
  • 2004년 1월~2004년 6월 《도올 한국사상사특강, 우리는 누구인가》(26회), MBC
  • 2006년 1월~2006년 5월 《도올특강 역사를 말한다》(6회), 광주MBC
  • 2006년 2월~2006년 8월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50회), EBS
  • 2009년 11월, 《도올특강 논어이야기》, 광주MBC

[편집] 다큐멘터리 제작(연출)

  • 2004년 12월~2005년 8월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10회), EBS

[편집] 인터넷 강의

  • 2007년 2월~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60강), EBSlang
  • 2010년 5월~ 《도마복음강해, 도올이 만난 살아있는 예수》, 나즐공
  • 2010년 5월~ 《대학(大學), 대학이란 무엇인가?》, 나즐공

[편집] 저술

  • 《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85
  •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6
  • 《루어투어 시앙쯔》(윗대목· 아랫대목), 통나무, 1986
  • 《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 통나무, 1986
  • 《어찌 묻힌단 말 있으리오》, 통나무, 1986
  • 《아름다움과 추함》, 통나무, 1987
  • 《절차탁마 대기만성》, 통나무, 1987
  • 《이땅에서 살자꾸나》, 통나무, 1987
  • 《새춘향뎐》, 통나무, 1987
  • 《老子哲學 이것이다》(上), 통나무, 1989
  • 《나는 佛敎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1989
  • 《老子-길과 얻음》, 통나무, 1989
  • 《도올 金容沃의 新韓國紀 》, 통나무, 1990
  • 《白頭山神曲-氣哲學의 構造》, 통나무, 1990
  • 《장군의 아들》, 통나무, 1990
  • 《讀氣學說》, 통나무, 1990
  •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통나무, 1990
  • 《도올세설》, 통나무, 1990
  • 《대화》, 통나무, 1991
  • 《도올논문집》, 통나무, 1991
  • 《三國遺事引得》, 통나무, 1992
  • 《氣哲學散調》, 통나무, 1992
  • 《石濤畵論》, 통나무, 1992
  • 《너와 나의 한의학》, 통나무, 1993
  • 《醫山問答-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통나무, 1994
  • 《삼국통일과 한국통일》(上·下), 통나무, 1994
  • 《天命·開闢》, 통나무, 1994
  • 《檮杌先生 中庸講義》(上), 통나무, 1995
  • 《건강하세요》(Ⅰ), 통나무, 1998
  •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통나무, 1998
  • 《이성의 기능》, 통나무, 1998 (원저: The function of Reason, Alfred North Whitehead)
  •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통나무, 1999
  • 《노자와 21세기》(1·2·3), 통나무, 1999(1권), 2000(2·3권)
  • 《도올 논어》(1·2·3), 통나무, 2000(1권), 2001(2·3권)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1·2·3), 통나무, 2002
  • 《도올의 淸溪川 이야기》, 통나무, 2003
  • 《혜강 최한기와 유교》, 통나무, 2004
  •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
  • 《도올심득 東經大全》(1), 통나무, 2004
  • 《도올의 국가비젼》, 통나무, 2004
  • 《앙코르와트·월남가다》(上·下), 통나무, 2005
  • 《논술과 철학 강의》(1·2), 통나무, 2006
  • 《요한복음강해》, 통나무, 2007
  •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
  • 《큐복음서》, 통나무, 2008
  •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1), 통나무, 2008
  • 《논어한글역주》(1·2·3), 통나무, 2008
  • 《21세기 한의학을 위하여》의 제2강,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9
  • 《효경한글역주》, 통나무, 2009
  • 《대학·학기 한글역주》, 통나무, 2009
  • 《계림수필》, 통나무, 2009
  •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1·2·3), 통나무, 2010

[편집] 상훈 경력

[편집] 가족 관계

  • 딸 : 김미루(金彌陋), 작가, 미술가

[편집] 논란

[편집]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의혹 제기

1991년, 자신의 책 《도올세설》에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 여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기한 적이 있으며, [1]}}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을동 의원에게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2] [3][4]

[편집] 천안함 침몰 사건 발언 무혐의

2010년 5월 23일 서울 봉은사에서 '코뿔소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 동서화통의 깨달음'이라는 특별강연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한 합동조사단 발표를 강력히 비판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소당했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신유철 부장검사)는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들이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비난한 혐의로 도올 김용옥을 고발한 사건을 두고 무혐의 처리했다고 9월 27일 밝혔다.[5]

[편집] 춘성과 육두 문자

2002년 10월 당시 방송 강연 중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선승 춘성 스님의 육두 문자 발언을 방송에 인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6][7] 이때 방송 강연에서 그는 춘성 스님의 욕설과 육두문자를 그대로 전하여 논란이 되었다.[8] 그러나 논란은 곧 종식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육두문자가 공중파 방송과 라디오 방송에서 허용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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