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평화/자본언론과 진실

자마구 2010. 1. 16. 09:38

1.  조선 일보의 반민주주의 친일적 역사


요즘에 언론에 관심이 있다면 조중동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것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통칭하는 말로써 자칭 보수 타칭 극우수구신문 셋을 말한다. (조중동은 각 신문의 영향력 순서이다.) 그렇다면 조중동 셋을 다 다뤄야 될텐데 유독 조선일보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를 비판을 하야 나머지 두 신문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위함도 있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조선일보가 걸어온 역사이다. 밑에서 말하겠지만 조선일보는 일제시기부터 존재했다. 그 당시 조선일보가 행했던 친일의 행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해방이후의 행적 또한 친일행적에 못지않을 정도로 악랄했다. 그것을 감추고 반성도 하지 않으면서 적반하장격으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친북이라던지 좌익등으로 매도해버리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조선일보의 창간(1)


왜 조선일보의 창간(1)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선 조선일보의 사주가 일제시기 3번에 걸쳐 바뀌었기 때문이다. 왜 사주가 바뀐 것이 중요한가에 대해 말하자면 신문의 성격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다. 그 후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조선일보는 경영이 잘 되지 않아서 1924년 민족주의자 신석우와 이상재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예종석: 대정실업친목회 간사

*조진태: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립에 참여, 간사를 맡았고... 경성부협의원... 1927년 6월 총독부 중추원 참의


조선일보의 창간(2)


1924년 조선일보는 민족주의자 신석우와 이상재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이후 사장 이상재 부사장 신석우 주필 안재홍등 민족주의자들이 신문사를 보던 기간이 있었고 이것이 지금의 조선일보가 민족지라고 운운하는 그 시기인 것이다.


조선일보의 창간(3)


1933년 조선일보는 방응모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이 시기부터가 지금부터 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33년 당시 조선일보는 판권이 대금업자에게 넘어가있을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틈을 타 방응모는 자신의 광산을 일본인에게 판 후 이 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다. 이 때 주지해야 할 점은 그 전의 조선일보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 마침내 방응모씨는 광산을 일본 사람에게 팔았다(註:이것은 매도계약임). 그리고는 4천원이 든 예금통장을 총독부에 제시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조선일보의 판권문제가 복잡하니 종래의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 인가를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수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1920년 창간설은 허구로 들어났지만 20년에 창간하였다고 주장하여도 민족주의자들이 이끌던 조선일보를 뺀다면 친일의 역사만 더 길어지는 셈이다.


3.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


여기서는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렇게 되면 상당한 양이 되므로 몇가지를 골라서 보기로 하자.


(1) [조선일보 1938년 6월 16일 자 사설] "조선 통치사의 새로운 기원을 이룬 것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 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 란에 수차 우리의 찬성의 뜻을 밝힌 바 있거니와...종래 조선 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황국신민 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 하여야 할 것이다."-(물총닷컴)


(2)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사고가 발생...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천황의 마차에는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에 무사히 궁성으로 돌아오시었다. 범인은 조선의 경성에 사는 이봉창이란 자로....현장에서 즉시 체포"(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 자 기사 「천황폐하 환행도중 돌연 폭탄을 투척」)-(물총닷컴)


(3)  봄바람이 화창하고 온갖 꽃이 흐드러진 이때에 다시 `천장절'을 맞아 억만 신하와 서민은 경축하는 마음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이다. 성상폐하께옵서 옥체 강녕하시다는 말씀 우러러 받드옵는 바 실로 다같이 황공하옵고 축하할 바이다. 해마다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크나큰 은혜와 어짊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나랏일을 하고, 충성과 의리를 다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마침 중국사변(중일전쟁) 제3년의 오랜 파괴와 건설이 병행하는 중에 있어 지극히 높은 임(지존·천황)의 하루 일을 우러러 받들면, 만가지 정무를 다스리옵심은 물론, 중대한 군무에까지도 마음을 쓰시옵는다는데, 이는 바로 제1전선의 빛나는 무훈에다 나라 위세가 높이 드날림으로 나타나도다. 이것이 임(천황)의 위세로부터 나온 것임을 되새기면 실로 황공무지하여 감격을 이기지 못할 바이다. 신민 두루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오래오래 사실 것을 축하하옵는 동시에 만백성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충성으로 위로 성스러운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여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의 나라 일본의 위광을 한층 더 온 세상에 빛나게 하는 길이요, 또 신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이날을 맞아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광영을 봉축하면서 끝으로 우리가 행복스러워하는 까닭임을 강조하여 둔다. 1939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사설 전문 일왕 생일을 맞아 쓴 생일축하문.-(우리모두)


(4) `황후 폐하께옵서 상병에게 화초를 어하사'


황후 폐하께옵서는 출전해서 다치고 온 부상병을 염려하옵시고 그들에게 황송하옵게도 신숙어원(新宿御苑)에서 기르옵신 화초씨를 내리셨습니다. 씨앗은 나팔꽃 공작꽃 같은 것 외에 마흔몇 가지이고 또 `달리아' 같은 구근(球根)도 십여종이라 합니다. 어(御·단어의 뜻을 높이기 위한 접두어) 인자하심에 감격해서 삼도군사보호원 부총재(三島軍事保護院 副總裁)는 지난 십구일에 참내 씨앗과 구근을 배수하고 각 요양소에 광영을 분배하였다 합니다. 1939년 4월 28일자 소년조선일보기사-(우리모두)


*조선일보의 폐간에 대하여


조선일보는 1940년 폐간하였다. 조선일보쪽에서는 이를 일제의 강압에 의한 폐간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진실은 이와 다르다. 조선일보측의 주장


"1940년 8월10일 일제에 의해 지령 6923호로 폐간, 창간후 20년 5개월 5일 동안 정간 4회, 500여회의 압수"(조선일보 '연혁')


"일제가 대륙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선 39년 12월 총독부는 조선일보에게 폐간하라는 방침을 통고해왔다. '자진폐간하느니 차라리 강제폐간을 당하겠다.' 결국 지령 6923호로 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당했다." (2000. 3. 5자 조선일보 '할말은 하는 신문')


그러나 위의 조선일보 주장은 허구라는 것을 총독부 경무국장의 말을 인용하면 잘 알 수 있다.


“신문통제를 결정해 1939년 이후 협의하자 조선일보사는 쾌히 시국의 대세를 양해하고 나아가 국책에 순응한다는 태도로 나오고 동아일보와 동시 폐간을 희망하는 허락의 뜻을 나타냈는데…”(매일신보.40.8.11. 담화)


또한 밑의 조선일보 폐간사를 보면 자진폐간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신동아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폐간당시 조선일보는 그 당시 돈으로 80만원을 받았다.


4. 조선일보의 해방이후~현대까지의 행적


조선일보는 자진폐간 후 해방직후 45년 11월23일 복간할 때도 사과나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원래 있던 신문이 일제의 억업에 의해 없어져서 당연히 복간한다는 듯이 나타났다. 이후 60년대 까지는 그저그런 신문에 머물렀으나 69년대 이후 3선개헌과 유신체제 및 전두환 쿠데타세력과의 유착으로 인해 판매부수 1위의 신문이 되었다. 이 때 당시의 기사를 통해 조선일보를 알아보자.


3선개헌 과 유신편


(1) 1969년 10월 16일 조선일보는 3선개헌이 통과되기 하루전 <영광의 후토보다 전진의 십자가를...나는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번더>에서 3선개헌을 분명히 지지하는 보도를 하고 같은날 보도 <각계 인사들이 본 성장 한국>에서 노골적으로 3선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의견만을 보도 하였다.


(2) 1972년 10월 18일 사설<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서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 헌법기능의 일보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보도 하여 유신체제 수립을위한 비상계엄 선포를 옹호


(3) 1972년 11월 23일 사설<새 역사의 출범>에서 “그 어느 때보다 압도적 지지와 찬성을 나타냈다...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역사적 문제의식과 사명감에 불타는 박대통령의 영단에 의하여 태동된 10월 유신은 이에 대한 전체 국민의...압도적이고도 열렬한지지 찬성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된것이다...”라고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확고한 것처럼 보도


(4) 1972년 12월 28일사설<새 역사의 전개-제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한다>에서 “부와 근대화의 씨앗을 뿌려 가꿈으로써 이 나라 국민의 뼈에 젖은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용기와 자신으로써 대체해주고 지난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냉전 속에서의 동족상잔과 남북결원의 민족사에 10.17 구국의 영단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위하여 정초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토록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덥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온갖 난경서 오늘의 굳건한 역사발전의 기틀을 구축한 그의 훌륭한 정치역량을 우리는 더욱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국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탁월한 영도자를 가졌다...”라고 보도하여 박정희의 영구적인 집권체제 출범을 적극 옹호하는 보도를 하였다.


80년 전두환쿠데타 세력편


(1)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악의적읜 보도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不安感만…


「無政府 상태 光州」1週


銃들고 서성대는 「과격파」들 길목서 저지…武器 반납 지연


市民들 "生必品 동나 苦痛스럽다"


光州 화정동에서=金大中 기자】光州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光州」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 뒤편의 거리는 차가 없어 더욱 넓어 보였다.


그 바리케이드를 마주보면서 6백여m 쯤 떨어진 이쪽 도로 중앙에 철조망과 함께 「무기 회수반」이라는 글자가 쓰인 5개의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다. 바로 이곳이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는 당국의 전초선이다.


24일 오후 光州의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 수습대책위는 얼마의 총기를 가져다 놓고 갔다고 했다. 여기서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던 한 관계자는 『수습대책위에서 총기를 반납하려해도 바리케이드 저쪽에 있던 과격파들이 이를 저지하거나 감시하고 있어 대책위 측에서는 골목길을 돌아 이 무기 반납소에 무기를 놓고 간다』면서 무기 반납에 아직도 「방해」라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일부 사람들이 이 지역을 「대치장소」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이 관계자는 몹시 못 마땅해 했다. 『우리는 지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곽차단을 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대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관계자는 『문제는 광주 시민의 생업입니다』라고 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광주에는 식품과 의약품 등 생필품의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타지에서 반입되던 생필품이 끊긴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상점과 시장들이 가게를 열었을 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고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온 몇 사람들은 얘기했다.


바리케이드와 무기반납소 사이에는 인도에 수십 명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요일에 교통이 차단된 어느 번화가의 모습과도 흡사했지만 사람들은 그 번잡했던 거리가 벌써 7일째 텅 비어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에는 간간이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했다. 시민들에게 계엄당국의 전단을 뿌리려 가거나 뿌리고 오는 헬리콥터라고 했다.


24일 정오(나중에는 오후 6시로 연장)까지 무기를 회수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져오면 과거를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광주통합병원이 바로 이 화정동 무기반납소를 의미한다. 무기를 반납하러 오는 사람들 보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30분간 기다리는 동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다만 오토바이를 탄 어느 사람이 잠시 반납소의 종사원에게 접근하더니 다시 횡 돌아서 질주해 갔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느 관계자가 『아마 뭣인가 물어보려 온 사람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2. 조중동 한경대 비교


오후 2시 30분쯤 도청의 수습위원들로부터「허락」을 받고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본사의 徐淸源 李榮培 朴來明 曺光欽 네 기자가 마치 4총사처럼 무기반납소 쪽으로 걸어올라 왔다. 7일 동안 마치 몇 년씩 늙은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들이었다.


막혔던 얘기를 나누고 얼마의 돈을 건네주고 그동안 찍었던 필름과 새 필름이 교환된 뒤 네 기자는 올 때처럼 그렇게 길을 걸어내려 갔다. 글들의 모습이 바리케이드 저쪽으로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불안했다. 이 불안은 광주사태가 해소될 때까지 남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불안인지도 모른다.


-광주민주화 운동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따위 기사가 버젓이 신문에 실렸다는데 분노를 느껴야한다. 민주화운동을 하기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을 한낱 난동자로 써버리는 신문. 그런 신문이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나라와 민족을 좀먹는일제친일
기득권층을 위한 반민족 언론이다 이땅에서
빨이 없어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