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평화/4대강 자료실

자마구 2011. 9. 20. 10:00

송기역작가의 흐르는 강물처럼 중 에서 (5)

금강의 할머니들

내성천을 따라 다시 금광리로 접어든다. 마을로 향하는 다리 하나를 건너면 금광리다. 이 마을은 장씨 집성촌으로 마흔 세대가량이 살고 있다. 옛날엔 백 세대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현재 영주시 국회의원인 장윤석 씨가 이 마을 출신이다. 어린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그까짓 놈 알 거 아이라.”며 배신감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마을회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박세원 선생과 나는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아 여든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그녀와 함께 길을 걷는다.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공출을 피해 열여섯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 왔다. 가난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궁리를 할 만큼 그녀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까지 힘드셨나요?”
“응. 희망이 안 보이드라.”
할머니는 평생 난리를 세 번 겪었다고 한다. 마지막 난리는 영주댐 건설이다.
“대동아전쟁 겪었지. 육이오 겪었지. 전쟁 나서 두 살 된 첫 아이 업고 청도로 피난 가가지고, 남편은 가다 붙들려가지고 군대 가불고 없고, 육십 노모 시어머니하고 그래 가이 나중에 마 쪽박 들고 얻어머러 다녔지. 지금 또 쫓겨나가지. 어느 자슥이 날 데려가서 모셔요. 그지? 자식한테 가믄 누가 반가브려요? 여 있던 땅이 젤 좋은데.”
어느새 할머니 댁에 도착한다. 담 옆에 외양간 한 채가 있는 집이다. 소가 없는 외양간이 휑하다. 무릎관절이 아프다면서도 낯선 불청객을 손님이라며 단감을 깎으며 한숨을 내쉰다. 여든 생애에서 언제부터 ‘사는 게 사는 것 같았냐’고 여쭙는다. 할머니는 에둘러 대답한다.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억지로 사는 게지. 지금은 딴 거 아무 것도 안 바래코 내가 자슥한테 짐이 안 되면 돼. 그러믄 내일 죽어도 관계 없어.”
댐 건설이 원망스러운 이유다. 허리가 불편해도 할머니는 일손을 놓지 않는다. 할머니를 따라 뒤꼍의 밭으로 간다. 목화 열매를 따준다. 작은 밭엔 무며 배추, 녹두, 들깨 등 다양한 먹거리들이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할아버지와 시부모님은 모두 앞산 너머 선산에 계신다. 그리울 때면 고개 들어 그곳을 바라보곤 한다. 할머니는 그리운 이들이 잠들어 있는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다.
할머니의 밭을 뒤로 하고 마을을 가로질러 장씨 고택 쪽으로 향한다. 집을 나서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섭섭해요. 여 동네가 4백년 됐고 참 좋은 동넨데. 나쁜 게 없어. 강물 참 좋재. 얼매나 좋아요. 다 좋아. 내는 대책도 안즉 없고 이래고 있어요. 아이구, 며느리도 데려갈 생각도 안 하고 나도 아즉 갈 생각도 안 먹고 있어. 불편하니까. 고마 여 이래 살았으면 좋은데.”
할머니의 집 맞은편엔 기와집 한 채가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장씨 고택이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부터 눈에 띄던 기와집이다. 고택은 단산 아래 마을 중턱에서 내성천을 바라보며 터를 잡고 있다. 고택 입구 안내판에 “조선 세조 때 적계공신 장말손의 후손 사계 여화가 이곳에 터를 잡아 세거하여 후손이 번창했다.”라고 쓰여 있다.
대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육중한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끼이익,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너른 마당을 지나 또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마른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여든 둘 고택의 며느리시다. 스무 살에 시집 온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 객지에서 지내다 내려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할머니는 일본 오사카에서 자랐다. 열일곱에 해방이 되면서 이 땅을 처음 밟았다. 해방은 그녀를 이주민으로 만들었다. 우리말을 할 줄 몰라 애먹은 세월을 들려준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집이 그때 뜯긴다 했어. 육이오 사변 때 뜯긴다 했는데 안 뜯겼어.”
전쟁의 화를 피한 고택은 댐 건설의 화를 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어떻게 될까?
“정부에서 수리해줘서 요래 반듯하게 됐는데, 또 정부에서 옮긴다 하는데 안즉 결정이 안 났어요. 땅이 있어야 이걸 어데로 옮기고 하지. 요새 댐 된다 하이께네 땅들이 비싸서 잘 안 되는 갑든데.”
할머니에게 앞날을 여쭙는다.
“아이고, 인제는 나이가 먹었으니께네 여게 있다가 죽어뿌먼 좋지요. 안 그래이꾜? 자식이 있다 그래도 요새는 다 저는 저대로 사는데.”
댐만 아니면 여기 살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인생에서 두 번째 이주민 신세를 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김종국 씨가 방문한다. 그는 이산면에 있는 문화재 괴헌고택 주인이다.
괴헌고택은 안방에 피난다락과 사랑방 뒷벽에 은신처가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김진창 씨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독립군과 좌익 인사들을 숨겨준 곳이라고 한다. 영주 지역엔 영주댐 건설로 괴헌고택, 장씨고택을 비롯해 열세 개의 문화재가 수몰지에 있어 이건될 처지에 있다. 김종국 씨는 이런 문화재와 관련한 대책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장씨고택에서 나와 1년 전 고향에 내려와 마을을 지키고 있는 장진수 씨 집으로 향한다. 마을 골목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다.
장진수 씨가 금광리에 내려온 것은 수몰지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다. 그를 따라 마을 언덕을 오른다. 마을 뒷산인 단산으로 이어지는 볕 잘 드는 양지에 묘들이 모여 있다. 마을에 기여한 사람만이 묻힐 수 있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여기는 묘를 함부로 못 써요. 마을 회의를 통해 들어오거나 종손 집안 중에서도 특별한 분들만 올 수 있어요. 10년 전 아재뻘 되는 분이 있는데 마을에서 묘를 쓰지 말라고 했는데 장지로 가는 날 갑자기 여기 묘를 쓴 일이 있었어요.”
돌아가신 분 입장에서 후세의 욕심으로 얼결에 명당자리를 차고 누우신 셈이다. 그 명당자리 옆에 수몰지역을 표시한 푯말이 꽂혀 있다. 돌아가신 분 입장에서는 수몰을 피해 어딘가로 피신해야 할 처지가 됐다.
단산 고개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신 성황당이 있다. 우리가 성황당에 갔을 때 키 높은 소나무 꼭대기에 만수위를 표시한 깃발이 있었다. 성황당과 함께 마을 전체가 수몰되는 것이다.
장진수 씨를 따라 생강밭으로 간다. 몇 해 전부터 마을의 여러 농가가 생강 농사를 짓고 있다. 그의 어머니와 마을 할머니 세 분이 밭에서 생강을 캐내고 있다. 박세원 선생이 일손을 돕는다. 장진수 씨 일을 조금씩 도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다녔다. 현재는 직접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2월 이곳에 내려온 후 일을 많이 줄였다고 한다. 처음 내려올 땐 두세 달가량 머물 계획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댐 건설은 너무 빠르게 추진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억울함을 가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마을 노인들을 대신해 이 일 저 일 하다 보니 머무는 기간이 늘었다.
“시골에서 고생 많으셨는데 노년에 편하게 지내셔야 되는데 댐이 되고 해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요.”
지난 명절 때 고향에 내려온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들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려왔다.
“모여서 옛날 얘기 많이 했죠. 마음도 쓸쓸하고 눈물 나죠. 수백 년 전통을 쌓아온 동네인데 수장시키니까. 우리 고향 이렇게 된다고 하니까 진짜 받아들이기 힘들죠. 내 추억이 있는 곳을 훼손하는 것이 견딜 수 없더라고요. 꼭 해야 되는 사업이라면 가슴이 아파도 이해하겠는데 안 해도 되는 사업을 하려고 하니까.”
어린 시절이 그리운 듯 달뜬 목소리로 내성천에서 놀던 추억을 한참 동안 늘어놓는다. 그가 앞으로 계획을 말한다.
“제가 생각해보니 마을 공동체로부터 도움만 받았지 준 게 없더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태어난 것도 받은 거죠. 마을이 절박한 상황이니 이제 작정을 하고 한 2년 정도는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그는 외국의 친구들에게 고향마을이 처한 상황을 얘기해주곤 한다.
“못 믿겠다는 거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거죠. 4대강에 대해 얼핏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해요. 나라마다 정책이 친환경적으로 변해가는데 역행을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몇 년 더 역행하면 회복하는 데 수십 년, 백 년이 걸리니까요.”
생강을 수확하는 할머니 세 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들은 모여 앉아 생강에서 종자를 떼내고 있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 한 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할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아유, 건강하지 못해. 내가 몇 가지 약을 지금 먹는다고. 골다공증 약에, 심부전증 약에, 병원 가는 게 너무 힘들어. 의사한테 가가지고 그래. 내가 얼매나 오지에 사는데 선생님 나 빨리 안 봐주면 오늘 집에 못 드가네 그래. 어데 가도 나이 많음 떼나 쓴다 그래니께.”
“그런데 이렇게 일 해도 돼요?”
“그래도 뭐 하던 일이니께 해야 되재. 이 동네 떠날 때까진 해야 돼.”

이번엔 옆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도 여든이 넘은 나이였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서 13개월 동안 치료받았다. 후유증으로 지금도 아프다고 한다.

“여가 뿌서졌어. 쇄골 여가. 갈비도 뿌러져가지고. 지금도 마이 아프거든요. 그래가지고 몸무게가 자꾸 줄고 그래요. 먹는 거는 남들처럼 먹는데 자꾸 빠자. 38키로드라꼬.”
“이 동네 몇 십 년 사셨어요?”
“52년요. 시집와가 계속 살았지.”
“이 동네 살면서 뭐가 좋았어요?”
“인심요. 살기는 힘들었고요. 교통은 안 좋아요. 여기서 시방도 갈라믄 저 재 넘어 걸어가 나가야 되고. 할매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거 불편코. 그래 댕기는 게 힘들어요. 또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뭐 이래 몸이 안 조으이께네. 그래 힘이 들고.”
“여기 댐 들어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획 있으세요?”
“안즉 계획 없어요. 그냥 있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안즉은 아무 계획이 없어요. 대통령이 나라를 전체적으로 잘 살구로 할라꼬 그런지 그거는 모르겠는데, 너무 힘들게 하잖아. 옛날엔 땅도 못 부치고 힘들었는데, 댐이 된다고 해서 섭섭하고 안 좋죠.”

내가 이 마을에서 만난 거의 모든 할머니들이 병을 지니고 있었다. 나머지 한 분의 할머니는 나이가 일흔이다. 동네에서 젊은 축에 낀다.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아흔 둘이다. 여든 정도의 노인들은 모두 밭에 나와 일한다고 한다.

“할머니, 일하실 만하세요?”
“뭐 앉아서 하이께 놀기만은 모하지요. 이걸 하믄 손이 아파. 이리케 따잖아요. 계속하니까 아프지.”
“평소 일은 많이 하세요?”
“마이 하는 사람은 하고, 우리네는 농사 쪼끔 하이께네. (옆에 있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이 할머니는 상할머닌데. 마 일을 최고로 마이 하시는 분이래요.”
“좋은 데 살아서 이렇게 정정하신 거 같아요. 산 있고, 물 맑고.”
“여 공기는 좋지요. 아침으로 인나서 이렇게 문 열고 보믄 얼마나 공기 좋다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은 만족스러우세요?”
“만족 모하고 살았지요. 내 생활에 대해서 이제 뭐 그렇게 만족을 느끼고 산 건 없지. 내 운명이 요기까지다. 그래 생각하믄 괜찮고. 뭐 그래 지내왔지요.”
“이렇게 떠나면 뭐가 제일 아쉬울 것 같아요?”
“첫째는 얼굴 알고 이래 친하게 지내다가 헤어지면 그게 섭섭하고. 새로 사귈라 그라믄 촌에 있던 할매들이요, 도시하고 적응하기가 좀 힘들지. 이런 데는 촌이기 때므로 서로 덮어주는 게 좀 많아요. 니가 나쁘다 탁 꼬집어가지고 잘못했다 이거 없고 뭐 이래니께네.”
“몇 십 년을 보고 살았으니까 서로 이해해주는 거죠?”
“그래이께 서로 덮어주고 그래 살지.”
“두 번째는요? 두 번째 아쉬운 거.”
“모든 게 아쉽지만은 내 정든 고향 내비리고 가는 게 아쉽지요. 뭐 이렇게 실컷 참 몇 십 년을 살던 데를 물바다 만드고 가는 게 좋을 사람은 없잖아요. 수자원공사 그걸 보이께네 고마 마음이 스무리한 게 안 좋더라고요.”
“수자원 공사요?”
“거기 가이 수자원공사 저거 해놨데요. 그림 홍보해 논 거. 물이 어드까지 차는지 표시해놨잖아. 내가 있던 집이랑 다 물 속에 있고. 서글프잖아.”

할머니는 댐 건설 현장에서 본 조감도를 보고 충격에 빠져 멍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조감도엔 그녀가 살던 마을과 집이 파란 물속에 잠겨 있었다. 내성천도 물 속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