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엿보기/추천글과 말

자마구 2012. 9. 3. 11:04

저는 지금 이 포스트를, 또 다시 10킬로 이상의 상공에서 씁니다. 학회와 강연 건으로 다시 한 번 노르웨이를 잠깐 떠나게 된 것입니다. 컴퓨터 건전지가 머지 않아 다 떨어질 것이니 일단 이 “비행하는 감옥”에서 제 머리에 든 가장 중요한 생각부터 간단히 적겠습니다.
 
“비행하는 감옥”에서 계속 앉아 있기가 신체적으로 매우 힘들지만, 제게 아주 큰 도움이 된 것은 오슬로공항에서 운좋게 사놓은 노암 촘스키 선생의 <제국적 야망> (Imperial Ambitions)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이라크 침략 직후의 촘스키와의 일련의 문답, 대담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가 그 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 하나 읽어냈습니다. “책임의 윤리”를 논하는 촘스키는, 책임이 특권에 정비례한다고 못을 박죠. “특권”이라는 게 여기에서 광의로 쓰인 거죠. 교육이나 사회적 위치 등도 “특권”이지만, 예컨대 어떤 발언이나 비폭력적 정치적 행위를 저질러도 감옥이나 고문실로 잡혀 들어가지 않는 곳에서 산다는 것도 일종의 “특권”입니다. 인류의 상당부분은 표현과 정치적 행위의 자유가 억제돼 있는 정치체에서 사니까요. 뭐, 굳이 “위”에서의 압박이 없어도,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지구인의 절대다수는 실생활과 직접 유관하지 않는 한 “정치” 등을 사고할 여유 자체가 없는 거죠. 그러한 여유를 갖는다는 것도 하나의 “특권”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언제 골병이 들어 천천히 불구자가 될 제조업 하도급 기업의 노동자가 옆에서 일하는 조선족 동료에게 폭언을 퍼붓고 “조선족이 우리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야기를 하도 돌아다니면 그는 분명히 가해자일 것이지만, 한국의 이민자 정책이 범죄적이며 국내 언론의 중국 내지 중국 조선족 관련 보도가 극도로 혹세무민적인 악선전에 가깝다는 말을 하지 않는, 즉 권력 비판이라는 지식인의 고유 임무를 유기한 SKY의 교수는 그 노동자보다 백배, 천배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는 국가의 이민정책이나 언론들의 이민자 관련 보도의 범죄성을 십분 인지하고 체계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족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비방을 했던 노동자는 행여나 조선족 동료와 친해지면 그 언행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알고 어쩌면 회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남을 괴롭히고 차별하기 위해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아무리 관변 프로파간다가 주도하는, 미친 사회에서 산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래도 인간이죠. 피차별, 피억압 피해자들의 인간성이 나와 똑같다는 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그들과 편견과 국경을 넘어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걸 학교에서 안배워서 그렇지, 식민지 조선의 급진적 (주로 공산주의적)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식민지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재조선 일본인은 십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투쟁과정에서 “현장”에서는 어쩌면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담은 무너질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런데 차별이라는 범죄를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노동자는 어쩌면 회개할 수 있어도, 사회적 비판 의무를 유기한, 즉 자신의 책임을 유기한 특권적 지식인은 절대 참회하지 않습니다. 특권적 지식인 (예컨대 “명문대” 교수)을 생산하는 메커니즘 자체가 “책임의 윤리”를 원천 봉쇄하여 애당초부터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실은 “책임의 윤리” 의식이 강한 사람이 특권적 지식인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부터 문제죠. 그리고 그 세계에 이미 들어간 사람이라면, “책임의 윤리”를 추구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수공업과 달리 현대 공업에서 한 개인만이 혼자서 생산의 단위가 될 수 없기에, 생산직 노동자들은 아주 쉽게 연대를 합니다. 같이 일하면서 하나의 생산단위가 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에게 “마을”이 존재하며, 자영업자들에게 그 단골이 돼야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동네”가 존재합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도 약자 (비정규직, 알바생 등등)에 대한 착취와 배제 등 다양한 문제들도 발생될 수 있지만 좌우간 그들 사이에 과도한 자기중심주의가 발전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식인의 세계는 달라도 아주 다릅니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논문과 학술저서의) 생산단위는 개인입니다. 그 원자화된 개개인들에게는 출신대학과 같은 “파벌”도 있지만, 그 파벌 안에서는 만인들이 경쟁자 아니면 “상전”들이죠.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동년배나 후배, 선배와 경쟁하면서 “실세”들의 안중에 들어가야 그 다음에 특권적 지식인이 될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열리면, 즉 행운을 맞아 대학에서 전임자리를 얻으면, 이건 경쟁의 끝이 아니라 보다 더 피 말리는 경쟁의 시작입니다. 인제 승진심사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서 미국의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제출하는 전세계의 동업자들과의 또 하나의 무한한 경쟁에 돌입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서는 본인과 직접 무관한 국가의 범죄적 이민 정책을 생각이라도 할 여유가 있을까요? “책임”은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경쟁”에 매몰돼 있는 我國의 지식업자들에게는 경쟁의 단위인 “나”와 직속 가족, 뭐 어쩌면 몇 명의 충실한 꼬붕들 이외에는 관심사라고 없죠. “경쟁”의 세계에서는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촘스키는 미제의 전세계적 난동에 대한 미국 특권적 지식인, 즉 자기 동료들의 침묵을 한탄하지만, 특권의 정도로는 동방예의지국의 “교수님”들은 촘스키의 미국 동료보다 몇 급이나 되겠지요. 특강은 물론, 학회 발표나 사회, 토론에도 다 돈이 지급되고, “외국 학술지 논문 게재”에 학생들에게 약탈한 수천만 원이 “교수님”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이런 나라는 도대체 세상에 어디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요즘 예컨대 개신교 일부 목사들의 교회 세습이나 매매, 권위주의, 정신병적 극우주의 등이 여론의 도마에 올라 “반개신교 기류” 같은 현상까지 보이지만, 특권만큼 무책임이 절대적인 대학의 교수사회는 여전히 거의 “성역”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재벌들과 마찬가지로죠. 대한민국이라는 착취공장 운영에 교수집단이라는 “브레인”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거죠. 실제 한국만큼 “權學 유착”이 심한 나라에서는 교수들로서는 권력 비판을 급진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아비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비판적 분석의 도마에 올린 루소나 톨스토이와 같은 지적 용기는 그들에게 기대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이걸 쓰고 나서 한참 생각해보니 저도 한국 교수집단을 비판하자면 결국 “자아비판”부터 해야 할 셈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발표료 나오는 학술회의”에서 저부터 15년 동안 숱하게 참석해왔으니까요. 지금 컴퓨터 건전지와 함께 제 힘도 떨어지지만, 언젠가 포스트를 따로 하여 이 부분을 상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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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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