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Angel 2010. 5. 5. 16:36

 

 

黨이라고 하는 영혼Soul of the Party-바울이 옳았다: 권력의 토대들을 흔들기 위해 종교를 활용하기

- 슬라보예 지젝

- Newstateman April, 1, 2010

 

 

왜 신학이 다시 급진정치의 준거점으로 부각되는가? 우리 노력의 최종 성공을 보증하는 신적인 ‘큰 타자’를 제공하기 위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큰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들의 급진적 자유의 징표로서 부각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떻게 神이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신은 우리들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자비로운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우리들이 온전히 우리자신들일 때까지 우리를 일깨우는 자이다).

 

우리가 여기서 얻게 되는 神은 마치 어느 공산주의 선동가가 죽은 후에 지옥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는 옛날 볼셰비키 농담에서 나오는 神과 닮았다. 자신이 지옥에 온 것을 안 그 선동가는 재빨리 지옥 보초들 설득하여 지옥에서 빠져나와 천국으로 갔다. 사탄은 그가 없어졌음을 알아채고, 사탄에게 속한 지옥으로 다시 끌고 올 것을 요구하기 위해 神을 방문한다. 그러나 사탄이 神에게 ‘나의 주님’이라고 인사말을 건네자마자, 神은 사탄을 말을 끊으면서 “첫째로 나는 ‘주님’이 아냐, 나는 동지야. 두 번째로 너 미쳤니, 소설 쓰니? 난 존재하지 않아! 셋째로 간단히 얘기할게, 나 당-세포 모임이 그립거든 !”

 

이것이 진정한 좌파가 필요한 神이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두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곁의 동지로서의 神이자 온전히 ‘인간이 된’ 神 그리고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의 부재를 인정하고 성령(黨, 해방집단)의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사랑으로 완전히 넘겨주는 神. 가톨릭교는 종종 ‘순수’ 기독교와 이교異敎사이의 타협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때 그 개념의 차원에서 기독교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한발  더 나가보자: 모든 결과들을 그것의 기본적 사건(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끌어오는 개념의 차원에서 유일한 기독교는  [오직] 무신론 뿐이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utti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빛이 비추는 유일한 교회는 불타는 교회다.” 그의 지적이 反-성직자적 의미로 의도되지만 않았었다면 그는 옳았다.

 

“지적인 짐승은 위험하다”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Bertolt Brecht 주장한다: “짐승은 강력하고, 무시무시하게 파괴하는 어떤 것이다; 짐승은 잔혹한 소리를 내뿜는다.” 놀랍게도, 브레히트는 “사실 핵심 문제는 이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염려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짐승들, 어떻게 우리가 그런 짐승들이 될 수 있을까?” 브레히트에게 이 문제는 어떻게 수준 높은 문화 국민인 독일인들이 나찌 짐승들로 돌변할 수 있었을까하는 차원의 안타까움 아니라, 긍정적 과제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善이 상처 줄 수 있음 또한 이해해야만 한다 - 야만에 상처 줄 수 있음을.”

 

이런 배경에서만이 우리는 기독교의 해방 논리를 동양적 지혜로부터 구분하는 간극을 명확히 할 수 있다. 동양적 지혜의 논리는 궁극적 실재로서 카오스chaos라든지 태초의 공허[空]void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유에서 동양적 논리는 그 고유한 공간 속의 각 요소들이 갖는 유기적 사회 질서를 더 선호한다. [반대로] 기독교의 핵심에는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가 있다: 파괴적 부정성의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단순히 카오스적인 공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파괴적 부정성을 부과함으로서 스스로를 조직하여 새로운 질서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는 反-지혜이다: 지혜는 우리들에게 모든 노력이 헛되며, 모든 것은 카오스로 끝맺는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기독교는 미친 듯이 불가능한 것을 주장한다. 사랑, 특히 기독교적인 사랑은 확실히 지혜가 아니다. 이것이 바울이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sapientiam sapientum perdam-고린도전서 1장 19절”라고 말한 이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를 그 말 뜻대로 취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혜는] 그 자체로는 인식이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는데, [바울이 공격하는 지혜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현실주의적’ 수용이란 의미로서의 지혜이다.

 

사회 질서와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 전통은 지혜, 즉 위계질서는 우리의 운명이며 그 위계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시도들이나 다른 평등질서를 창조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 파괴적인 공포로 귀결된다는 [통속적인 세상의] 지혜를 [진정한 기독교 전통은] 거부한다. 정치적 사랑으로서 아가페가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이웃을 위한 무조건적이면서도 평등한 사랑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로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현상 형태를 우리는 또한 공산주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평등주의적인 연대의 사회질서 실현 욕구. 사랑은 사회적 위계 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입장들을 뛰어넘어서 인민의 개별성 속에서 해방적 집단으로 인민들을 직접 연결하는 보편적인 결합 능력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기독교도 사회주의자는 무신론적 사회주의자보다 더 무서운 자다”라고 했을 때 그는 옳았다. 그렇다, 기독교도 사회주의자는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해방투쟁에 대한 적절한 정의를 제공한 것은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장 12절).”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우리의 투쟁은 부패한 개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투쟁 대상은 권력가진자들과 그들의 권력과 세계 지배질서와 그것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이다.”

 

정치를 모든 긍정적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최악最惡을 회피하고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모든 자유주의적이고, 희생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단호하게 거부해야한다. 비엔나 태생의 유대인 작가 아서 펠트만Arthur Feldmann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보통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바로 우리 목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