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행복보다는 스스로 찾은 행복이야말로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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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묵상

2016. 3. 7.


주어진 행복보다는 스스로 찾은 행복이야말로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제주도 김만덕>



조선 후기 문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公 1720-1799)은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교리를 지냈으며 도승지로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10여 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이가환, 정약용과 함께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천주교로 새로운 건설을 추구하였으나 반대파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되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천주교 박해 때에는 관직이 추가로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회복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채제공(蔡濟公)의 번암집(樊巖集)에 실린 김만덕(金萬德)의 이야기입니다.


제주에 김만덕(金萬德)이라는 이름을 가진 양가집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는 의탁할 곳이 없어서 스스로 기생 노릇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더 들자 관가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기생 명부에 올렸습니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생 노릇을 할망정 어느 기생과는 달랐습니다. 만덕은 스물 살이 되자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눈물 흘리며 관가에 하소연하였습니다. 관가에서는 만덕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기생 명부에서 이름을 빼고 다시 양가로 돌려보냈습니다.

만덕은 살림을 차렸으나 남편을 얻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기발한 재능이 있어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년 후에는 제법 부호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조 때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의 시신이 거리에 더미로 쌓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왕은 곡식을 배에 싣고 가서 구제하기를 명했지만 먼 곳까지 제때에 미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만덕은 천 금을 회사하여 상당한 양의 쌀을 뭍에서 사들였고 모든 고을의 사공들은 때맞춰 이를 운송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중 십분의 일을 벌어다가 자기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를 모두 관가에 실어 보냈습니다. 굶주려 몸이 부어오른 자들이 이 소문을 듣고 관가 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관가에서 그 완급을 조정하여 쌀을 나누어주자 그들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습니다.

제주목사의 보고를 접한 왕은 만덕에게 소원이 있다면 쉽고 어려움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돌보아주겠다며 치하하였습니다. 만덕은 서울에 가서 상감님 계신 곳을 바라볼 수 있고 금강산에 가서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시의 국법에는 탐라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서 뭍에 오르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목사가 그녀의 소원을 상주(上奏)하니 왕은 기꺼이 허락하며 역마와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였습니다.

만덕은 푸른 바다를 건너 서울에 올라가 정승 채제공을 찾아갔습니다. 채제공은 선혜청에 명하여 달마다 만덕에게 식량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만덕은 대궐에 들어가 왕비께 문안을 드렸습니다.

"일개 여자가 의기를 내려 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니 갸륵한 일이구나." 하며 후히 상을 내렸습니다.

만덕은 또한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채제공을 만나 이승에는 다시 대감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이라며 슬퍼하였습니다. 이에 채제공은 이렇게 위로하였습니다.

"너는 탐라에서 자라 영주산인 한라산을 보았고 또 봉래산이 금강산을 보아 삼신산 중에 이미 둘이나 보았으니 천하의 수많은 사내들도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없는데 슬픈 빛을 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