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 수를 줄여 적의 눈을 속인다는 고사성어 감조지계(減竈之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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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성어

2017. 11. 20.


아궁이 수를 줄여 적의 눈을 속인다는 고사성어 감조지계(減竈之計)



춘추전국시대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孫武)의 후손인 손빈(孫臏)과 라이벌이었던 방연(龐涓)은 일찍이 병법철학의 대가였던 귀곡자(鬼谷子)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웠다. 이야기는 야망에 불탔던 방연(龐涓)이 먼저 세상을 나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위(魏)나라 혜왕(惠王 BC400-BC334) 밑에서 장수가 된 방연(龐涓)은 잇달아 공을 세우면서 나름대로 잘 나갔다. 그런데 인재 욕심이 유별났던 혜왕(惠王)이 방연(龐涓)에 만족하지 않고 손빈(孫臏)에 관심을 나타내자 어렵사리 차지한 자리를 그에게 빼앗기지나않을까 술책을 부린다.

방연(龐涓)은 손빈(孫臏)을 꾀어서 위(魏)나라로 부른 뒤에 돌연 첩자라고 모함하고는 두 무릎뼈를 자르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했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 이름을 떨치지 못하도록 아예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그 후 제(齊)나라 사신이 위(魏)나라로 왔을 때에 은밀하게 제나라 사신과 만나고 사신의 도움으로 위(魏)나라를 탈출한다.

오랜 세월 절치부심한 끝에 중원의 패권을 노리는 제(齊)나라 위왕(威王)의 군사(軍師)로 발탁된다. 두 다리가 없는 손빈(孫臏)이 천하통일을 꿈꾸는 야심가의 군사가 된 것이다. 손빈(孫臏)과 라이벌이었던 방연(龐涓)은 전쟁에서 두 번이나 수읽기 싸움을 벌였다. 하나는 방연(龐涓)이 혼쭐난 계릉전투였고, 또 하나는 방연(龐涓)이 끝장난 마릉전투였다.

계릉전투는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魏)나라 군대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趙)나라가 급히 제(齊)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제(齊)나라의 명장 전기(田忌)가 곧바로 위(魏)나라 군대를 치러 나가려고 하자 손빈(孫臏)이 말려 위(魏)나라의 도읍을 공격하게 하였다. 놀란 방연(龐涓)이 서둘러 병사들에게 철수를 명하고는 허둥지둥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손빈(孫臏)의 명령에 따라 별도로 파견된 제(齊)나라 군대가 계릉이라는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계릉전투 이후 13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손빈(孫臏)은 마침내 평생 별러 온 복수극의 대미를 장식할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는 방연(龐涓)의 군대가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한(韓)나라는 제(齊)나라의 도움을 구했고, 제(齊)나라는 또 다시 손빈(孫臏)과 전기(田忌)를 전쟁터에 내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도 손빈(孫臏)은 한(韓)나라로 직행하지 않고 위(魏)나라 도읍지를 향해 진격하게 했다. 13년 전과 똑같은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방연(龐涓)은 주먹을 불끈 쥐며 비웃었다. 방연(龐涓)은 한(韓)나라에서 군사를 돌리기는 했지만 위(魏)나라 도읍지로 곧장 가지 않고 제(齊)나라 군대의 후방을 칠 계획을 세웠다.

방연(龐涓)의 군대가 후방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이미 국경을 넘어 위(魏)나라 땅에 발을 들여놓은 손빈(孫臏)은 급히 후퇴를 명령했다. 이 모든 것이 손빈(孫臏)이 계산해 놓은 함정이었다. 출전에 앞서 손빈(孫臏)은 전기(田忌) 장군에게 이렇게 당부해 놓았다.

"방연이 이끄는 위나라 병사들은 사납고 용맹스러워서 우리 제나라 군대를 겁쟁이라고 깔보고 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이익에 눈이 멀어 무작정 적을 쫓아가면 파멸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위나라 땅에 들어가면 첫날에는 잡 짓는 아궁이를 10만개 만들고, 둘째 날에는 절반으로 줄여 5만개를 만들며, 셋째 날에는 다시 3만 개로 줄이십시오."

전기(田忌) 장군은 손빈(孫臏)이 시키는 대로 겁먹은 듯이 후퇴하면서 아궁이 수를 점차 줄여나갔다. 이것이 감조지계(減竈之計)라는 계책이다. 추격하던 방연(龐涓)은 이런 상활을 보고는 기뻐서 외쳤다.

"위나라 병사들의 밥을 짓는 아궁이 숫자가 불과 사흘 만에 절반도 넘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제나라 졸개들이 우리의 위세에 눌려 날마다 탈영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빨리 쫓아가서 나머지 오합지졸들을 모조리 박살내자."

손빈(孫臏)은 그날 저녁에 마릉에 방연(龐涓)의 군대가 당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마릉은 계곡이 깊고 길이 좁아 복병을 배치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손빈(孫臏)은 병사들을 시켜 큰 통나무로 길을 막은 다음에 나무껍질을 벗겨서 흰부분에 이렇게 썼다.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사우차수지하)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

날이 저물자 방연의 군대가 마릉계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뒤에 길을 막고 있는 통나무를 치우다가 웬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횃불을 치켜들고 그 글을 읽으면서도 방연은 설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방연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을 거두면서 방언은 이런 말을 남겼다.

"逐成賢子之名(축성현자지명) 기어이 그 녀석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해주었구나."


손빈(孫臏)과 라이벌이었던 방연(龐涓)의 마릉전투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감조지계(減竈之計)이다.

감조지계(減竈之計)란 아궁이 수를 줄여 적의 눈을 속인다는 전략으로 밥솥의 숫자를 줄이면서 적을 방심케하는 계책을 일컫는 말이다.<꽃사진: 기생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