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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황제투어전문 2016. 11. 23. 02:21

콜롬비아 에스코바르의 흔적들


<콜롬비아의 나르코스> 

①'원조 나르코스' 에스코바르의 흔적들

한때 세계 7위 갑부가 직접 지은 감옥과 대농장엔 폐허만 남아

(메데인<콜롬비아>=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미국 넷플릭스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9월까지 제작·방영한 드라마

 '나르코스'(Narcos)는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나르코스는 콜롬비아의 전설적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 1949∼1993)의 일대기를 다뤘다. 

일개 밀수업자이던 그가코카인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한때 콜롬비아의 대통령까지 꿈꿀 정도로 

큰 부와 권력을 쌓았다가 결국 경찰의 총에 사망하는 과정을 시즌 1, 2에 담았다.

나르코스는 콜롬비아 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를 재조명당한 콜롬비아인들은 

에스코바르 역의 배우가 매끄럽지 않은 스페인어를 쓰는 브라질 출신이라는 것 등 많은 부분을 지적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사진들

에스코바르가 나고 자란 콜롬비아 제2 도시 메데인(Medellin)은 그가 설립한 마약 조직 '메데인 카르텔'의 근거지로 에스코바르와 함께 세계에 악명을 떨쳤다. 에스코바르 사망 23년이 지난 지금도 메데인에선 에스코바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자녀들을 위해 조성한 대농장을 비롯해 정부와 협상 끝에 자신이 투옥될 목적으로 직접 지은 감옥은 이제 폐허만 남아 마약으로 쌓은 부와 힘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

◇ 에스코바르의 감옥, 빌딩, 묘지, 농장…그의 흔적들

지난 13일(현지시간) 찾은 콜롬비아 중북부의 메데인은 해발 고도 1천500m에 자리 잡아 1년 내내 봄 날씨가 이어진다.메데진 시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어디를 가나 나무가 우거지고 꽃이 만개한 이 도시에서 에스코바르는 마약 카르텔을 설립하고 온갖 형태의 폭력을 지휘했다.

폐허만 남은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감옥 '라 카테드랄'

메데인 시내 남쪽의 산 중턱에 있는 감옥 '라 카테드랄'(La Catedral)은 그의 전성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성당이라는 이름의 이 감옥을 정부가 그를 체포해 가둬둔 곳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에스코바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 감옥을 직접 짓고 제 발로 들어갔다.

미국과 콜롬비아가 맺은 범죄자 인도 협정에 따라 미국으로 보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에스코바르가 콜롬비아 정부와 협상해 얻어낸 결실이었다.

에스코바르는 1991년 메데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지에 건물을 지어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당구대와 카지노 등 오락시설을 두고 헬기장과 축구장까지 만들었다.

그와 함께 수감된 사람들은 모두 부하들이었고 감옥 경비원마저 에스코바르가 고른 이들이었다. 이름만 감옥일 뿐 요새 혹은 궁전이나 다름없었던 이곳은 '클럽 메데인', '호텔 에스코바르' 등으로 불렸다.

폐허만 남은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감옥 '라 카테드랄'

현재 이곳에서 에스코바르가 누린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건물은 대부분 폐허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가이드 카를로스 가르시아(44)는 "메데인 시 정부가 분명히 관리하고 있다. 다만 마약으로 번 돈의 결말이 어떤지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근처의 개울 옆엔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다. 가이드는 "에스코바르는 '감옥'인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사람을 죽이고 나면 속죄를 한다며 개울에 와서 몸을 씻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소유했던 '모나코 빌딩'

메데인 시내에서도 에스코바르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6층짜리 건물 '모나코 빌딩'(Edificio Monaco)이 대표적이다.

1988년 1월 13일 에스코바르와 그의 가족이 이곳에서 자고 있을 때 메데인 카르텔의 경쟁 조직인 칼리 카르텔이 건물 앞에서 다이너마이트 80㎏를 실은 차량 폭탄을 터뜨려 에스코바르의 딸의 한쪽 귀를 먹게 했던 곳이다.

메데진 시내 모나코빌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가이드는 "당시 테러로 에스코바르의 피의 복수가 시작됐다"며 

"메데인과 콜롬비아 시민에게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 장소"

라고 말했다.

roof escoba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원래 이름이 '에스코아르'(Escoar)였던 이 건물은 현재 리모델링을 위해 폐쇄됐으며 공사가 마무리되면 경찰서로 사용될 예정이다.

메데진 시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에스코바르가 1993년 12월 2일 최후를 맞은 메데인 시내 주택가의 옥상 역시 그대로 있다. 지금은 조그만 부동산 업체가 사용하는 1층짜리 건물의 옥상이며, 그 뒤로 에스코바르가 마지막까지 숨어 있다가 경찰의 급습을 맞았던 주택이 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숨진 옥상관련 이미지

메데인 출신 전직 경찰로 당시엔 보고타에서 근무 중이었다는 가이드 가르시아는 "지휘관이 '파블로가 죽었다!'고 외쳤고 우리는 모두 열광하며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고 회상했다.

roof escoba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옥상에서 사망한 에스코바르의 시신은 현재 메데인 시내 몬테사크로(Montesacro) 공동묘지에 안치돼 있다.

roof escoba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넓은 잔디밭에 세워진 비석으로 표시된 다른 묘들과 달리 에스코바르의 묘는 형제, 어머니 등 다른 가족들의 묘와 함께 검은 대리석이 둘러쳐진 별도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검은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글자는 계속 내린 빗방울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물을 닦아내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죽음에 개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약 범죄자의 묘지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것도 더 고급스러운 형태로 있는 것에 대해 시민 에벨린 팔라우(33)는 "누구나 무덤을 가질 수 있고 에스코바르도 마찬가지"라며 "이젠 주로 관광객이 보러오기는 하지만, 에스코바르가 저지른 일과 죽음 모두 우리 역사의 일부"라고 말했다.

콜롬비아 메데인에 있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비석

 

메데인에서 동쪽으로 약 175㎞ 떨어진 에스코바르의 '나폴레스 농장'(Hacienda Napoles)은 에스코바르의 독특한 취향, 자식 사랑, 재산 규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에스코바르는 아들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위해 미국 디즈니랜드와 비슷한 곳을 만들 생각에 1978년 2천995 헥타르(약 2천995만㎡)에 달하는 부지를 사들였다.

공룡을 좋아했다는 아들을 위해 그는 하마, 사자, 호랑이, 가젤 등 콜롬비아에서 볼 수 없는 세계 각지의 동물을 밀수해 와 이곳에 풀어놓고 동물들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호수 23개를 만들어 구역을 나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소유했던 '나폴레스 농장' 입구

 

에스코바르 사후 민간 기업이 농장을 매입해 리조트, 캠핑장, 워터파크, 동물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에스코바르가 저지른 폭탄 테러 등의 사진을 전시한 박물관도 마련했다.

이곳에서도 에스코바르가 거주하던 호화 주택, 다양한 자동차를 보관했던 주차장, 비행기 활주로 등은 폐허로만 남은 상태를 볼 수 있다. 특히 에스코바르의 주택은 이제 바닥의 주춧돌만 남아 형태를 짐작하기 불가능한 수준이다.

가이드는 "생전 에스코바르는 이곳에서 은제 식기를 훔친 하인을 묶은 채 호수에 빠뜨려 죽였는데, 에스코바르가 죽은 후 온갖 도둑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가져갔다"며 

"지금 남은 폐허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가졌던 힘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폐허만 남은 나폴레스 농장의 주택 터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에스코바르는 누구…

한때 미국행 코카인 80% 유통한 '원조 마약왕'

에스코바르는 1949년 12월 1일 메데인 인근 리오네그로(Rionegro)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 에르밀다 가비리아가 일곱 자녀를 챙겼다고 한다.

학창 시절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학교에 갔던 에스코바르가 망신을 당하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가게에서 신발을 훔쳐서 아들에게 줬고, 에스코바르는 "내가 자라면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만 남은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자동차들

훔친 자동차 되팔기와 밀수업을 하던 에스코바르는 26살 때 칠레 출신 코카인 제조업자를 만나 마리화나(대마초) 잎이 주를 이루던 당시 세계 마약 시장에 코카인 분말을 소개했으며 처음으로 미국행 코카인 밀수 루트를 개발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은 콜롬비아의 좌파 게릴라 콜롬비아민족해방군(FARC)을 비롯해 중남미의 좌파 세력을 척결하는 데 신경을 쏟느라 마약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는 에스코바르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됐다.

한때 미국 시장으로 들어가는 코카인의 80%를 유통해 '코카인의 제왕'으로 불렸으며 코카인으로 벌어들인 돈이 넘쳐난 나머지 땅에 묻어뒀다가 나중에 찾아보니 썩거나 쥐가 파먹어서 못 쓰게 된 것도 많았다고 한다.

1989년에는 250억 달러(약 29조 원)를 보유, 미국 포브스지 선정 세계 7위 부자였고 지폐를 묶는 고무줄을 사는 데만 매달 2천500 달러(약 300만 원)를 써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도주 중 어린 딸이 춥다고 하자 200만 달러(약 23억 원)어치 지폐를 태워 불을 피우기도 했다.

1980년대 콜롬비아 당국이 압수한 에스코바르의 재산은 비행기 142대, 헬기 20기, 요트 32척, 잠수함 2척, 주택과 사무실 141곳 등에 달했다. 

에스코바르는 미국으로의 송환을 가장 두려워해 콜롬비아 정부에 강제 송환 법률을 폐기하는 대가로 국가채무 100억 달러(약 11조7천억 원)를 

대신 상환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라 카테드랄'에서 내려다본 메데인 시내

 

빈곤층을 위해 상하수도, 주택, 축구장, 동물원 등을 지어 의적의 상징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고 '메데인의 성자'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에스코바르가 약 1만 명 이상의 사망에 관여했다고 본다.

특히 1989년 미국과의 범죄자 강제 송환 협정에 찬성하던 당시 대통령 후보 세사르 가비리아 한 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비리아가 탑승할 예정이던 아비앙카 항공 203편을 폭파해 승객과 승무원 등 107명을 전원 죽게 한 것은 에스코바르 최악의 테러로 여겨진다.

정작 가비리아 후보는 당시 비행기에 타지 않았고 이후 콜롬비아의 제28대 대통령이 돼 1994년까지 재직하며 '마약과의 전쟁'을 이끌었고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대통령궁에서 지켜봤다.

콜롬비아 제3 도시 칼리(Cali)에 근거지를 둔 경쟁 조직 칼리 카르텔과 극우파 민병대의 공격에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세가 약해진 에스코바르는 44번째 생일 다음 날인 1993년 12월 2일 메데인 내 은신처에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당시 하늘에 DEA의 헬기가 떠 있는 것을 보고 미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피하고자 직접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다는 추측도 있다.

jk@yna.co.kr

 관련 이미지

롬비아의 나르코스> ②콜롬비아인이 본 에스코바르·나르코스

에스코바르 본거지였던 메데인의 전직 경찰 "나르코스는 트라우마"

(메데인<콜롬비아>=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누군가는 그를 성자나 로빈 후드로 부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직 경찰인 제게 그는 나쁜 놈일 뿐입니다."

1970∼1990년대 초반 콜롬비아 사회와 세계를 뒤흔든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흔히 팝가수 샤키라,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콜롬비아인'으로 일컬어진다.

에스코바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카르텔의 거점이 됐던 콜롬비아 제2 도시 메데인 사람들은 

에스코바르와 그의 일대기를 그린 미국 드라마 '나르코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콜롬비아 메데인의 전직 경찰 카를로스 가르시아(메데인=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콜롬비아 메데인의 전직 경찰 카를로스 가르시아는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활동하던 1989년 메데인에서 경찰이 됐다. 그가 들고 있는 사진은 경찰 근무 시절의 모습.


◇ 메데인 전직 경찰이 기억하는 에스코바르의 전성기

에스코바르와 메데인 카르텔의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폭력과 위세가 절정에 달했던 

1989년 메데인에서 경찰로 일했던 카를로스 가르시아(44)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에스코바르는 그가 지금 내 나이와 같은 44세이던 1993년 사망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당대 세계 최강의 마약 조직 메데인 카르텔이 활개 치던 1989년의 메데인에서 경찰이 된 이유를 묻자 가르시아는 "역설적으로 마약 조직 덕분에 경찰이 되기 쉬웠다"고 답했다.

에스코바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는 "

경찰 한 명을 죽이면 에스코바르가 50만 페소(약 18만 원)를 주던 

시절이다. 

당시 경찰이 하루 5명씩 죽어 나갔으니 원한다면 

누구나 경찰이 될 수 있었다"며 

"다른 직업을 위해 공부를 하기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이어 "에스코바르는 적들에게 '돈이냐 죽음이냐'를 물었지만 

내겐 '경찰이냐 에스코바르의 부하냐'에 대한 선택이 있었을 뿐"이라며 "떳떳한 삶을 살고 싶었기에 경찰을 택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폭탄 테러 장면 사진

가르시아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메데인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후 메데인 경찰과 메데인 카르텔의 결탁을 의심한 정부가 경찰들의 지역 순환 근무를 도입하면서 수도 보고타로 자리를 옮겼다.

가르시아는 "2년간 메데인에 근무하면서 나와 매우 가까이서 폭탄이 터진 것만 네 차례"라며 "메데인 카르텔의 각종 테러로 나와 알고 지냈던 동료 경찰만 따져도 60명이 숨졌다. 나는 정말 행운아였다"고 돌아봤다.

메데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또 "당시 시내 경찰서에서 집까지 차로 20분 거리였는데 

 항상 미행을 피하느라 1시간씩 걸려서 먼 길로 다녔다"며

 "권총을 절대 총집에 넣지 않고 항상 손에 들고 다녔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생각에 

38㎜와 9㎜ 등 권총 두 정에 수류탄 한 개를 매일 휴대했다"고 말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폭탄 테러 장면 사진

 

죽음의 공포 앞에 에스코바르 일당에게 

굴복했던 이야기도 털어놨다.

가르시아는 "보고타 국제공항에 근무하던 1992년, 외국으로 나가려던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들이 '지키는 게이트를 5분간 열어두면 300만 페소(약 112만 원)를 주겠다'고 했다. 경찰 월급이 50만 페소이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에 앞서 같은 요구를 거절했던 동료 한 명이 죽은 채 발견됐다. 소위 말하는 '돈이냐 죽음이냐'가 적용된 것"이라며 

나는 두려워서 요청을 들어줬다. 돈이 생긴 것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곧 죄책감이 들어 상부에 보고했더니 위에선 이해한다면서 나를 다른 근무지로 보내줬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가르시아는

 "당시는 어디서든 총소리가 들리고 폭탄이 터지는, 카우보이가 활보하는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며 "아마 에스코바르가 내 이름은 몰랐던 것 같다. 그의 살생부 수첩에 이름이 적히면 누구든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가 나를 몰랐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 메데인 사람들 "나르코스는 트라우마…

에스코바르 자랑스럽지 않아"

나르코스는 콜롬비아판 '응답하라 7090' 정도의 내용에 해당하는 드라마다. 한국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른 점은 애틋하게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아니라 끔찍한 기억을 다룬다는 것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장례식 장면 사진

 

지난 14일 지금은 테마파크로 변신한 에스코바르의 옛 농장 '아시엔다 나폴레스'에서 만난 메데인 출신 카리나 에스피노사(26)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에스피노사는 "유튜브에서 다른 동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나르코스 광고가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보는 즉시 이를 꺼버린다"며 "나는 어려서 에스코바르 시기에 대한 직접적 기억은 없지만,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어른들은 누구나 에스코바르 일당으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등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런 드라마를 왜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외국인들은 우리가 에스코바르를 자랑스러워하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폭력의 시간을 지나 이제 평화롭게 사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누엘 가르세스(37)도 "그의 장례식에 메데인 시민 2만5천 명이 왔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맞을 수 있다. 그의 혜택을 받은 빈민들이 많이 온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장례식 참석자 중엔 에스코바르 잔당의 복수를 우려해 어쩔 수 없이 간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가르세스는 "친구 25명이 에스코바르의 테러로 죽었다. 그는 메데인의 모든 가정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다"며 "그가 죽은 1993년 나는 13살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권총을 샀다. 13살이지만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던 시절"이라고 덧붙였다.

콜롬비아 출신 축구선수 산토스 보레는 지난 2일 스페인 스포츠 매체 '마르카'와 한 인터뷰에서 "나르코스 같은 드라마가 유행인데 우리나라가 마약 밀매 국가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며 "콜롬비아가 힘겨웠던 시기를 다루지만, 이미 오래전 일인데도 사람들은 마치 지금도 그런 것처럼 받아들인다"고 불평했다.

나르코스가 콜롬비아인의 시각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4∼2007년 메데인 시장을 지낸 세르히오 파하르도는 지난달 29일 미국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나르코스'는 매우 복잡한 현실의 가벼운 버전"이라며 "이 드라마는 소위 '마약과의 전쟁'에서 미국 마약단속국(DEA)의 관점에서 에스코바르의 역사를 소개한다"고 주장했다.

파하르도 전 시장은 "우리 사회의 조건에 대한 일말의 이해와 흥미도 없다"며 "'나르코스'는 콜롬비아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그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미국 영웅의 스릴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드라마 내용은 맞지만, 콜롬비아인들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도 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보고타 출신 로레나(29)라는 여성은 '더 브리프'라는 영국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에스코바르의 폭탄에 대한 공포를 기억한다. 여전히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로레나는 "폭탄이 무서워서 콜롬비아를 떠났다"며 "나르코스에 묘사된 콜롬비아는 절대적으로 진실이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그때 어렸던 사람들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정말 슬프다"고 덧붙였다.

전직 경찰 가르시아는 드라마 나르코스가 "트라우마"라고 표현했다.

가르시아는 "드라마를 봤다. 당시 우리나 카르텔이 쓰던 무기와 차량을 잘 재현했다. 매우 진지하게 만든 드라마고 이를 존중한다"면서도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 숨져간 동료 경찰들이 떠올렸다.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라마의 재미를 위해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부분도 많다. 드라마의 60% 정도는 픽션이고 40%만 진실"이라며 "그 시절 이곳 콜롬비아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르시아는 "동료들과 당시를 기억하면서 맥주 한 잔 같이 기울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며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그저 묘지에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jk@yna.co.kr



 
콜롬비아의 나르코스> ③내전-마약 악순환…콜롬비아 폭력 역사

 격차 극심→ 좌파 게릴라 봉기→ 도시 이주 빈농들 마약조직에 가담

(보고타=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

안데스 산맥을 지나는 콜롬비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은 콜롬비아를 너무 아름답게 만들었고, 형평성을 위해 악인들을 주셨다.'

콜롬비아인들이 자국을 묘사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다. 

안데스 산맥, 아마존 정글, 태평양, 카리브 해를 모두 가진 콜롬비아의 자연 풍광은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린다.


안데스 산맥을 지나는 콜롬비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안데스 산맥을 지나는 콜롬비아의 도로 풍경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바로 그 산맥과 정글의 밀림에서 코카인 분말을 제조했고 카리브 해만 건너면 닿는 

미국 마이애미로 마약을 실어 나르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세계적 악인의 대열에 올랐다.

에스코바르가 메데인 빈민의 지지를 얻고 수많은 충성스러운 조직원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콜롬비아의 역사가 한몫했다.

2004∼2007년 메데인 시장을 지내고 2012∼2015년 메데인이 속한 안티오키아 주지사를 

지낸 세르히오 파하르도는 지난달 

29일 미국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에스코바르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 '나르코스'를 비판하며

 이 드라마가 콜롬비아 사회의 맥락을 

외면했다고 주장했다.


파하르도는 "마약 거래가 시작된 1970년대 메데인에선 많은 청년이 기대나 희망 없이 성장했다. 그들은 수천의 희생자와 큰 분노를 낳은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폭력적 분쟁을 피해 도시로 이주한 농민의 자손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메데인 사회는 그들의 동네에서 자라나는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평등은 이해받지 못했고 

고려되지도 않았다"며 "(에스코바르 등) 1세대 마약상들은 이런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파하르도 전 주지사가 말하는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폭력적 분쟁'은 현재 콜롬비아 최대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을 비롯해 

민족해방군(ELN), 4월19일운동(M-19), 인민해방군(EPL) 등 좌파 게릴라와 콜롬비아자주방위군(AUC) 등 극우파 민병대가 얽힌 내전을 뜻한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찍힌 사진들

 

콜롬비아 내전의 기원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좌파 대선 후보였던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이 암살되고 '보고타소'(Bogotazo)로 불리는 

수도 보고타의 폭동이 일어난 1948년부터 1958년까지의 10년은 '폭력의 시기'(La Violencia)로 불린다.

폭력의 시기에 분출된 분노는 1964년 FARC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과거부터 이어진 농촌의 빈곤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자 

좌파 게릴라들이 "정부가 농민과 빈곤층을 수탈한다"며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AFP통신은 "좌파 대통령 후보 가이탄이 암살됐던 1940년대부터 내전의 기원이 형성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1920년대의 

농민 반란에서 근원을 찾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좌파 게릴라와 정부군의 무력 충돌은 주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농촌 지역에서 이뤄졌으며 이에 농민들은 내전을 피해 도시로 이주, 

슬럼가의 빈민층을 형성했고 여기서 에스코바르를 위한 토양이 마련됐다.

역시 농민의 아들이었던 에스코바르는

 13살 때 학교의 학생복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빈곤층 학생을 위한 통학용 교통수단과 음식을 요구했다고 한다. 

상류층이 토지와 자산의 대부분을 보유한 콜롬비아에서 

당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층으로 분류됐고 빈농의 자식 에스코바르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나르코스'에서 파블로 에스코바르 역을 맡은 브라질 배우 와그너 모라(AP=연합뉴스 자료사진)

 

파하르도 전 주지사는 

"초창기 에스코바르는 '농민의 로빈 후드'였다"며 "좌·우파를 불문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줬으며 정치에 입문해 콜롬비아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수많은 젊은이가 마약 거래와 범죄 속에서 그들이 가지지 못했던 기회를 모색했으며 그 대가로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초 가난 때문에 꿈을 가질 수 없었던 청년들이 에스코바르 수하로 들어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에스코바르는 실제로 빈곤층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메데인 쓰레기장 근처 한 슬럼가의 가혹한 환경을 보고는 

'판잣집 없는 메데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며 집 수천 채를 지어줬고 

이 지역은 현재 '파블로 에스코바르 동네'로 불린다.

그는 주택 외에 상·하수도, 축구장, 학교, 공원 등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기반 시설을 

빈민층에 제공해 한때 '메데인의 성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에스코바르가 죽은 지 23년 지났지만, 콜롬비아의 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부와 FARC가 지난 9월 평화협정 서명식을 치렀지만, 곧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평화협정 개정안이 지난 12일 발표됐으나 국민투표에서 한 번 거부됐던 협정의 실질적인 이행은 아직 불투명하다.

현재 FARC와 정부는 휴전 중이지만 폭력의 흔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고타에 있는 한 한국인 주재원은 "가 기억하기로 마지막으로 보고타에서 폭탄이 터진 것은 고작 4년 전인 2012년"

 이라며

 "당시 사무실 건물 바로 옆에서 엄청난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고 떠올렸다.

지금도 보고타 시내 대형 건물 앞에선 사설 경비원과 함께 폭발물 탐지견을 쉽게 볼 수 있다.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는 반드시 탐지견의 검색을 거쳐야 한다.

'나르코스'에서 파블로 에스코바르 역을 맡은 브라질 배우 와그너 모라(AP=연합뉴스 자료사진)

 

물론 콜롬비아 사회는 과거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곳이 됐다.

 파하르도 전 주지사는 

"메데인의 인구 10만 명 당 살인 건수는 

1990년대 초 380건에서 

현재 20건으로 줄었다"고 

강조했다.

콜롬비아 전체의 중산층 비율은 2002년 16.3%에서 2015년 30.5%로 늘어났고 

빈곤층 비율은 같은 기간 49.7%에서 27.8%로 감소했다.

드라마 나르코스의 주인공 중 한 명이자 실존 인물인 스티브 머피 전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은 

콜롬비아 근무 시절 입양한 딸들과 함께 2014년 콜롬비아를 찾았다고 한다.

머피 전 요원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콜롬비아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딸들에게 알려줬다.

 기관총, 군인, 어디나 있는 위험 등이었다"며 "하지만 지금 얼마나 현대화됐는지를 보고 정말 기쁘게 놀랐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는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있지만, 중남미를 관통하는 마약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머피 전 요원과 파트너로 일했던 하비에르 페냐 전 DEA 요원은 이코노미스트에

 "메데인 카르텔 붕괴 이후 칼리 카르텔이 뒤를 이었다"며 

"마약 수요가 존재하는 한 이 사업을 기꺼이 이어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나르코스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콜롬비아가 안전해진 것은 마약과의 전쟁이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등 콜롬비아 북서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며 

"나르코스의 새로운 시즌을 만들 수많은 얘깃거리가 있다. 시청자들에겐 기쁜 일이며 중남미엔 비극일 것"이라고 평했다.

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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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원전 수출 물 건너가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베트남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한국형 원전의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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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vietnam nuclear pow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베트남 국회는 22일 정부의 원전 도입 중단 계획을 승인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베트남은 전력난을 덜기 위해 2030년까지 총 14기의 원전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2010년 러시아, 일본을 원전 협력 국가로 선택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베트남 중남부 닌투언 성에 각각 원전 2기를 짓기 위해 그간 사업 타당성 조사와 원전 설계 등을 했다.

러시아가 맡은 원전 1호기는 2014년 착공, 2020년 가동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그동안 착공 시기가 계속 연기됐고, 

다른 원전 건설도 진행되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 새로 구성된 베트남 국가지도부는 안전성 논란이 이는 원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재정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원전 도입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이 원전 도입 계획을 철회함에 따라 한국 정부의 원전 수출 구상도 무산됐다.

한국은 베트남에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2011년 양국 정상회의에서 '원전 건설 종합계획'(OJPP)을 승인한 데 이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때 양국 정상이 '원전 협력'을 명시한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베트남 원전 개발을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지난해 마치고 본조사와 계약 등을 추진해왔다.

한국은 베트남에서 사업비 100억 달러(약 11조7천억 원) 이상 규모의 140만kW급 원전 2기를 수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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