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이야기

    오두 2013. 12. 10. 12:12

    - 오두의 신화이야기 215 -

    경주 형산강의 형산 왕룡사의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의 두 여신상의 정체

    - 김부대왕의 왕비와 왕비의 어머니를 모신 형산 왕룡사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사당 -



    들어가는 말


    경주와 포항 사이에 김부대왕 사당이 있다. 형산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이 그곳이다. 오늘 비가 오는 가운데 왕룡사의 김부대왕 사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촬영했다. 


    김부대왕(경순왕)은 신라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이었다. 전국적으로 그 신앙흔적이 남아 있는 것과 신라부흥운동 지역들과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구분은 쉽지 않다. 


    김부대왕 사당이 전국적으로 산상에서 평지로 옮겨지기도 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장군용왕전은 왕룡사가 있는 형산 꼭대기 가장자리에 아직도 있다. 


    *형산 위 왕룡사 갓바위에서 내려다본 경주에서 영일만 포항으로 흘러가는 형산강 일대. 

    왕룡사의 정확한 주소는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번지다. 


    형산강은 경주의 북천 남천과 함께 안강에서 모여 형산(兄山)과 제산(弟山) 사이를 흘러 포항 영일만으로 흘러내려간다. 


    경주 지역에는 이곳 외에 또 하나의 형산이 있다. 경주 선도성모를 기리는 성모사가 있는 선도산을 다른 명칭으로 서형산이라고 한다. 서쪽에 있는 형산이라는 뜻이다. 이곳 안강 형산은 북쪽에 있다하여 북형산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형산과 북형산은 같은 뜻으로 지명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선도산 - 서형산은 따로 '형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출처] 왕룡사|작성자 인도꿈


    형산의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제단에는 우측에 왕을 의미하는 황룡포를 입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위치하고 있고 좌측에는 장군상이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두 명의 여인상이 그려져 있다. 


     위쪽으로는 세 명의 삼신상이 함께 그려져 있다. 제단의 벽화 앞에 무인상과 문인상의 목조 신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 모양이 조선시대 인물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과연 그 목신상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는 것 같다. 


    황룡포 목신상이 경주문화원에서는 문무왕 목신상이라고 쓰고 있기도 하나 왕과 장군상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장군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곳 왕룡사의 무량수전 옆에 있는 '王將軍龍王殿' 건물 내부를 촬영하면서 주목한 것은 중앙에 작게 그려진 두 명의 여신상이다.


    *형산 왕룡사 무량수전과 왕장군용왕전(왼편 건물). 무량수전은 근년에 들어섰다.(아래사진 비교)

    *필자가 2013년 12월 9일 촬영한 왕룡사에는 왕장군용왕전 오른쪽으로 무량수전(중앙 큰 건물)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왕룡사용왕전은 무량수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봉여준다. 

    *형산 용왕사의 '무량수전'보다 왼편에 왕장군용왕전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옛사진. 





    *경주 형산 용왕사의 王將軍龍王殿(왕장군용왕전) 

    * 두 여인상이 작게 그려져 있지만 쌍룡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에 그려져 있다. 

    주변의 왕과 왕장군이 호위하는 모습이 되고 있다. 


    *해룡이 두 여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당의 핵심 해신이 이 두 여신상으로 볼 수 있다. 



    *제단의 중앙에 태양신 엠블렘 그림과 함께 두 여신상이 중심 주신으로 새겨져 있다.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 


    경주문화원에도 같은 무인상과 문인상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본래는 목조가 아닌 청동상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200여년 전에 청동상은 형산 아래에 사는 유씨 문중에서 자신들의 사당 위쪽 산상에 이들 청동신상들이 있다 하여 그것들을 형산강 아래로 밀어트려버려 현재의 목신상을 사당에 다시 만들어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곳 왕장군용왕전 사당에 모셔진 주신이 김부대왕과 그 태자 김충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태자 김충이냐 또는 김유신장군이냐 하는 여러 설이 있지만 좌대 위에 세워진 두 목신상을 보아서 문신상과 무신상은 왕릉 앞에 세운 무신상과 문신상처럼 단지 벽에 모셔진 인물상들에 대한 수호신 위치로 보여진다. 특히 문신상은 왕이 아니라 오히려 무신상과 쌍이 되는 신하상이라는 면에서 김부대왕은 아니며 수호신으로서 문신상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그 뒤 좌대 정면의 벽화에도 왼편으로 무신상이 있고 같은 크기로 오른편에 김부대왕으로 보이는 황룡포 남자상이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대칭되는 두 인물이기에 김유신장군상과 문무대왕상이라는 설까지 있는듯 하다. 사실상 신라멸망과 그 부흥운동에서 경주에서 가까운 이곳에 김부대왕 사당으로 알려진 이곳 사당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의 명장 김유신장군과 문무대왕을 모셨다고 볼 수도 있다. 대칭되는 왕과 장군은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 두 '왕과 장군' 모습의 그림은 사당의 이름 왕장군용왕전에서 해답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당의 이름에서 용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왕신이며 왕장군은 지상을 지키는 왕이며 장군 즉 왕장군을 의미하는 무속적인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벽화에 그려진 왼편의 무장은 무속적인 최영장군이나 관운장과 같은 패장의 한이 남아 있는 '왕장군' 신앙대상으로 그려진 것이며 오른쪽의 황룡포 임금상은 용왕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황룡포 용왕상이 왕장군상보다 우위인 것은 앉아 있는 신위의 편에서 보면 '좌청룡 우백호'의 위치에서 좌측(황룡포 신상)의 용왕상이 우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그곳 왕룡사의 산령각의 외벽에 그려져 있는 산신도에서 왼편은 산신이 올라탄 호랑이상과 오른편(보는 사람의 편에서)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용왕과 왕장군이 숭상된 이곳은 신라멸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곳이 김부대왕 또는 그 왕계를 잇는다는 의미의 태자 김충의 신상을 모셨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 설들이 있지만 포항에서 발행된 바 있는 <일월향지>라는 잡지에는 근거를 밝히지 않은 전설을 요약해 놓은 내용이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신라가 멸망하자 신라의 유민들이 경순왕의 고려납국을 반대하여 이곳 북형산성에 수천 명이 모여 농성했다. 고려왕조에서는 이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켰다. 경순왕이 개경에서 서거하자 유민들은 이곳  북형산 성터에 사당을 건립하여 김부대왕 신위를 김충 태자와 함께 모시고 형산성황사(兄山城隍祀)라 하였다. 고려시대 내도록 이곳 성황사는 춘추향제를 지냈으나 고려말에 기복신앙처로 바뀌었다. 사당은 본래 토막식 건물로 조선말엽까지 산성터에 있었으나 연일의 모 문중에서 그 터에 분묘를 설치하여 사당을 철거해버리자 100여년 전에 사당은 왕룡사 경내에 옮겨와 복원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인용이 어디인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본래의 사당 이름이 형산성황사(兄山城隍祀)이라 한 것을 보면 성황사당 즉 '서낭당'이었다는 면에서 처음부터 기복신앙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월향지>의 사당 이름의 祀는 祠의 오기로 보이기도 한다. 


    본래 사당이 산성쪽에 있다가 왕룡사 경내로 옮겨왔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곳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에 관하여 전해내려오는 전설들에서 공통점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대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조사해보면 김부대왕 사당은 단지 김부대왕만을 모신 것이 아니라 '두 여신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특히 이곳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에 모셔진 신상들에서 비록 작은 모습이지만 두 여신상은 복판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호위하는 위치에 있다는 면에서 이곳 사당의 주신은 이들 두 여신상이라고 필자는 판단했다. 


    이러한 구도는 경기도 시흥시의 군자산 정상에 있던 서낭당에도 김부대왕, 그 왕비인 안씨부인, 안씨 어머니인 홍씨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는 점에 필자는 더욱 신라 모계 신의 계승이라는 무속적인 모계 계승의 모습을 추정해 낼 수 있었다. 이제 이 글을 통하여 '김부대왕 사당'에서 신라 모계 계승의 여신상들이 무속적으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1. 신라부흥운동과 김부대왕의 무속적 신앙화


    김부대왕의 김부(金傅, ? -978)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본명이다. 비록 고려에 투항했으나 후대에 수많은 제사가 이어져 왔다. 특히 강원도 인제 김부리는 그 대표적인 곳이었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의 김부대왕제 제사는 더 이상 올리지 않고 있다. 소를 잡아 제사를 하고 제의 후에는 마을대항 돌팔매싸움(石戰) 전통을 이어오던 그 맥이 끊어졌다. 


    1997년 음력 5월 5일(양력 6월 10일) 윤씨 부부가 올린 제사가 그 마지막이었다. 1993년 종합전술훈련장으로 국방부가 접수해버리고 대왕각만 남아 있다. 일년에 한번씩 김부대왕 후손들만 찾아온다. 지난 여름 필자가 찾아갔을 때 군부대 관계자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긴 했으나 필자 일행을 감시하고 있었다. 


    김부대왕 설화와 그 유적은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김부대왕 설화는 용이나 신 그리고 무속적인 내용을 가진 전통으로 남아져 왔다. 그무엇보다도 못다이룬 권력자들에 대한 무속적 신봉은 강력한 신앙을 만들어 왔다. 최영장군이 무속에서 강한 신앙대상이 되는 것도 이성계에게 당하여 제 뜻을 펴지 못한 최영의 한이 무속적으로 신봉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조에게 패권을 빼앗긴 관운장이 전신으로 믿어져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백제의 견훤에 의하여 공격을 받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자결하자 경순왕이 신라왕으로 옹립되어 8년간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서라벌에 있었다. 그러나 왕건에 귀속된 채 개성으로 간 김부대왕은 죽을 때까지 개성에서 43년간을 지냈다. 


    경순왕이 죽자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고려왕실에서 내렸다. 경순왕릉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것도 그의 마지막 운명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사직을 들어 항복하는 과정에서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그의 아들 마의태자 김일(金鎰)이 인제 등에서 활약한 여러 흔적을 남긴 것은 경순왕의 내면의 신라부흥운동의 밀명을 받은 결과라는 것은 앞선 글에서 시리즈로 밝혔다. 


    <역사산책>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 뒤에는 경순왕이 있었다 (1)

    <역사산책> 경순왕은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마의태자를 도주시켰을 것 (2)

    <역사산책> 신라 화랑들의 금강산 제사와 마의태자 (3)

    <오두의 유적 답사> 마의태자의 나라, 인제 '後新羅'의 발자취를 찾아  


    경순왕이 935년 왕건에게 투항했을 때 경주 지역을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부여하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경주지역 백성들에게는 신라의 마지막 왕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경주에서 흘러내려오는 안강 지역의 형산강 가에 있는 형산은 어쩌면 경순왕 즉 김부대왕에 대한 애절함과 신라부흥운동에 대한 신앙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설에서도 신라가 멸망하자 이곳 형산에 신라유민들 수천명이 모여 농성을 했고 형산 산성에 서낭당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곳 형산 왕룡사의 왕장군용왕전 사당은 신라부흥운동 유적이면서도 무속적인 신앙의 대상이 된 서낭당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형산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신상과 전국의 김부대왕 사당들


    오늘 찾아가 본 왕룡사는 이름 자체가 신라의 임금을 모신 왕룡(王龍) 숭배의 자리를 느끼게 했다. 그곳의 王將軍龍王殿(왕장군용왕전) 사당은 불교 사찰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고 단청까지 한 곳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불단 위에 조선시대식 감투를 만들어 씌운 문신상과 무신상을 묘사한 목조 신상 2좌가 세워져 있고 그  두 개의 목상(木像)을 좌우로 한 뒤 벽에는 왕이 모습을 한 곤룡포와 또 한 사람의 무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 중앙 상단에는 삼신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바다와 용 그림 위에 두 여인이 선도 복숭아와 연꽃으로 봉양하는 자세가 그려져 있었다. 


    *두 여신상이 쌍룡을 중심으로 중앙에 그려져 있다.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에 그려진 두 여인상. 
    좌우로 크게 왕장군신상과 황룡포 용왕신상이 그려져 있다.
    붉은 태양이 불꽃과 함께 그려진 것은 용왕을 상징한다. 

    *왕룡사 산령각 외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
    왼편에 '왕장군'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오른쪽에 '용왕'을 의미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왕장군용완전의 벽화를 이해하려면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무속과 '대왕' 신화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건에 귀의한 경순왕이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부인으로 동시에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의 딸을 황후(神成王后 金氏)로 맞이했다. 고려의 왕건이 신라백성들을 무마하고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거기에 더하여 왕건의 손자인 고려 제5대 경종(景宗)도 경순왕의 딸을 황후(憲承皇后)로 맞이했다. 


    아무리 경순왕 즉 김부대왕이 고려에 귀속되었다 해도 백성들은 신라의 마지막 왕에 대한 종교적 '대왕신앙'이 살아 있었다. 그 결과가 전국적으로 김부대왕의 이름으로 유적, 사당, 전설 등이 산재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곳들은 경상북도 경주시 형산 왕룡사원(왕룡사)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다. 


    경북 경주시, 영주시, 문경시 봉암사(양산사),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용화산) 고자암(태고사), 마애미륵불, 인제군, 평창군, 경기도 연천군, 파주시, 시흥시, 안산시. 수원시, 충북 제천시 한수면 월악산 덕주사지 마애불 또는 김부대왕사, 충주시 수안보면 월악산 미륵사지 미륵불, 충남 보령시, 전북 전주시, 전남 순천시, 경남 하동군 등이다. 


    불교 사찰에서 김부대왕을 모신 곳도 상당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의 영수암(永守菴), 경북 경주시 불곡사(佛谷寺), 전남 순천시 송광사(松廣寺) 등이 그런 곳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 ? )이 1839년에 펴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김부대왕변증설(金傅大王辨證說)>에는 문경 양산사에 김부대왕의 화상이 있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 필자가 찾아본 왕룡사는 형산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있다. 형제산을 의미한다. 오늘날 포항 영일만의 운하로 흘러가는 물이 이곳 형산 아래로 흘러가는  형산강이다. 


    *경주 안강쪽에서 흘러내려오고 있는 형산강을 양쪽으로 형산(왼쪽 산)과 제산(오른쪽 산)이 있다. 

    사진의 왼편 상단 산상에 왕룡사가 있다. 


    *형산(왼편 산)과 제산(오른편 산) 사이로 흐르는 형산강. 포항쪽에서 경주방향으로 촬영.


    *제산(왼편 산)과 형산(오른편 산) 사이로 흐르는 형산강. 경주 안강쪽에서 포항방향으로 촬영.


    포항에서 안강으로 가는 7번도로 상에서 왼쪽으로 산상이 길게 일직선으로 뻗어 보이는  산이 형산이다. 그 산 정상 왼편 끝자락에 왕룡사 사우(祠宇)가 위치하고 있다. 왕룡사로 올라가는 산길 길목에는 '왕룡사원'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왕룡사의 다른 이름으로 형산사, 옥련사 등으로도 불려져 왔다고 한다. 


    왕룡사의 오른쪽 정상 부분에 있는 돌미륵상이 있는 곳에서 포항쪽으로 바라보면 형산강 건너 왼편제산이 보인다. 왕룡사와 형산 제산에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전설에 의하면 형산과 제산은 원래는 붙어 있어 경주에서 내려오는 형산강과 북천 남천이 빠질 곳이 제대로 없어 안강벌이 홍수로 침수되곤 했다. 그리하여 김부대왕이 용으로 둔갑하여 꼬리로 그 두 산을 끊어 형산과 제산으로 나누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산강이 형산과 제산 사이의 끊어진 곳으로 흘러 영일만으로 내려가 바다로 가게 되었고 안강지역은 수해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순왕이 용이 되어 형제산의 산세의 지맥을 끊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대왕이 죽어 된 용이 지룡의 맥을 끊었다는 것이 아닌가. 문무대왕이 죽어 고래나루에 묻혀 해중대룡(고래)이 되겠다고 했다. 


    설화에서 왜 형제라고 했을까? 고려와 신라의 연결된 맥을 끊었다는 것이 아닐까? 고려는 신라를 복속하고 아마도 '형제'라는 의미를 강조했을지 모른다. 


    이곳 왕룡사의 전설은 김부대왕의 태자 김충도 용으로 변했다고 전한다.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의 김부대왕 사당이 그 태자 김충을 모신 곳인지는 불확실하다. 


    사당 벽화에는 왕관을 쓴 김부대왕이 용을 탄 모습이 있고 또 한쪽에는 용만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래 사진)


    *왕장군용왕전 외벽에 그려진 '용이 된 김부대왕'. 이 벽화 오른쪽 벽에는 용만 그려져 있었다. 


    강원도 인제의 김부대왕 전설과 함께 자주 회자되는 마의태자 전설은 충북 제천시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월악산 전설은 경순왕의 덕주공주에 관한 전설이 주를 이룬다고 하겠다. 대개가 신라멸망을 고려 불교가 안위하여 신라백성들을 안무제압하고자 하여 신라 마지막 왕가 인물들을 '불교귀의'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그것이 경순왕과 그 왕자들과 공주에 대한 불교화를 꾀한 흔적으로 보이는 설화들이 남발되어 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선도사상적이다. 그러나 월악산에서 마의태자는 미륵사(신륵사)에 미륵불을 세우고,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월악산 덕주사(德柱 寺)에 마애불을 조성한다는 식이다.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본래는 용화산)의 마애미륵불은 김부대왕 또는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전설도 그러한 같은 불교적으로 유도한 배경으로 보인다. 


    이규경의 <김부대왕변증설>(1839년 기록)에도 월악산 신륵사의 늙은 승려의 말이라고 하여 전해져 오는 월악산 덕주사 뒤의 성(城)은 김부대왕이 피난했던 곳이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썼다. 


    불교적이기라기보다 김부대왕에 대한 유적들은 사실상 사당으로서 그 경향이 강했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1927)에서 덕주사 뒤에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가 있었다고 한 것들이 그것이다. 신라의 전승은 무속에서 전해오는 것이 제대로 그 원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인제 김부리처럼 김부대왕이 서낭당 사당에 모셔진 것도 같은 맥락의 무속적 사당이다.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 서낭당, 안산시 성곡동 잿머리(城頭) 서낭당, 수원시 평동 벌말 서낭당 등의 김부대왕 서낭당도 같은 맥락이다. 


    3. 왕장군용왕전 사당의 두 여신의 해석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에 모셔진 주신은 김부대왕일 수도 있고 그 왕비일 수도 있다. 수원시 군자동과 평동의 서낭신은 김부대왕이고, 성곡동의 서낭신은 김부대왕의 왕비인 안씨부인이다. 


    그런데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김부대왕의 왕비를 모신 곳은 산상의 서낭당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김부대왕을 모신 곳과는 또 다른 김부대왕 왕비를 여신으로 모신 산상의 서낭당 역사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김부대왕 왕비를 모신 사당의 주신이 김부대왕으로 혼동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에 군자산 정상에서 서낭신인 김부대왕을 맞이하여 마을로 모시고 내려오는 굿을 행한다. 신라왕의 신은 산신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은 단군이 구월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무속적 맥락이다. 헌강왕이 남산산신과 함께 춤을 추었다는 것은 신라왕이 산신과 호환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신라시대의 '저승' 또는 '하늘'은 산상이었다. 오늘날 공간으로서 '하늘' 개념은 후대의 개념이었다. 살아있는 신이 거할 곳은 공중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 몸으로 된 신이 거할 산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시흥시 군자산 정상의 서낭당에는 김부대왕, 왕비인 안씨부인, 장모 홍씨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장모와 그 딸인 왕비가 김부대왕과 함께 모셔진 것은 신라의 모계 계승 왕실의 신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군자산 정상 서낭당의 안씨 왕비와 장모 홍씨 영정은 형산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에 모셔진 두 여신의 정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결국 신라의 왕실 모계혈통이 왕룡사 왕장군용왕전의 계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왕장군'은 '용왕'을 보필하는 위치이고 왕과 왕비를 의미했을 것이다. 용왕은 여신이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어산불영편에서 잘 보여준다. 

     

    전설에 의하면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온 김부대왕은 덕지(德摯)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김부대왕 왕비 안씨 부인은 매일 군자봉에 올라가서 죽은 남편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세상을 떴다. 산상에 두 부부의 영이 서낭당에 모셔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왕장군'과 '용왕여신'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의 유명한 외교관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갈 때도 시흥시 군자산 산상 서낭당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시대 서희가 바다를 건너 송나라 사신으로 갈때도 해신에게 기원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안씨 부인이 서희의 뱃길을 보호해 주어 군자봉에 서낭당을 지어주었다"라는 전설의 내용은 서희가 결국 김부대왕 부부신을 해신으로 모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장보고를 비롯하여 신라의 배가 바다에서 안전하다고 믿어온 그 전승이 신라신을 받들어야 안전하게 왕래할 수 있다고 믿어 왕조를 달리해서도 고려왕조의 외교관이던 서희가 시흥 군자산 정상에 서낭당을 세우고 제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잿머리(城頭) 서낭당도 군자동 서낭당과 마찬가지로 안씨부인 즉 여신중심이다. 그것은 바다의 풍랑을 막아주는 해신이 여신이라는 신라 전승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역시 안산시 잿머리 서낭동에도 배를 자주 타야했던 서희(徐熙 942?-998)의 꿈속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는 전설에 따라 서희가 세운 사당이라는 것이다. 풍랑 때문에 서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던 서희의 꿈에 나타난 두 여인들은 신라 김부대왕의 아내와 그 친정어머니로 표현된 것이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왕조에는 신라왕가의 신들이 바다의 풍랑을 일으킬 수 있다고 근심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의 왕들은 굴복시켰으나 그 왕비들이 모계로 내려오는 '여신=해신'의 신화를 제압하는 것은 또 다른 무속적인 문제였다. 서희가 서낭당을 만들어 신라의 마지막 왕비 가계의 여신들을 위하여 서낭당을 지어준 것은 바다의 풍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신라의 여신들은 바다의 해신이었다는 것은 선덕여왕에게서도 보인다. 선덕여왕이 바다로 가기 위하여 동짓날 해돋는 방향으로 첨성대를 짓고 그의 무덤을 스스로 같은 방향인 낭산에 정했다. 이른바 향동지일출 라인은 반월성과 함께 대왕암 고래나루로 이어지는 '바다로 가는 길'이다. 


    신라의 왕들 특히 왕비들은 바다에서 왔다고 믿은 것은 알영부인이 '고래(용)이 배를 갈라 나왔다'(삼국유사 박혁거세편)는 것에서부터 김유신장군 집의 우물이 그의 부인 이름을 딴 재매정이라는 것도 신라의 지배층의 부인들이 바다에서 와서 바다로 간다고 믿었다. 작제건의 부인 용녀가 바다에서 왔다가 다시 우물을 통하여 바다로 가는 것에 이어져 있다. 바다의 풍랑은 여신들의 조화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희의 서낭당 조성과 그 신들이 신라의 왕실 여인들이라는 것은 그 신화적 배경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부들이 바다로 나갈 때 서낭당 당집에 기원을 해온 것은 신라의 왕실 왕비들의 여신 즉 해신을 모신 곳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산상에 여신들이 모셔진 곳들이 많았다는 것은 신라 2대 남해왕 왕비인 운제부인(雲帝婦人)이 오어산 산상에 모셔졌던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오어사(吾魚寺)의 이름에서도 오어사가 운제부인을 모신 의미를 알 수 있다. 바다를 건너 왜국에 사신으로 간 신라의 김제상(박제상) 부인인 치술신모가 산상에 모셔진 것도 같은 풍랑의 여신 배경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 외에도 수원시 평동 동사무소 인근 벌말 서낭당에는 김부대왕과 부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서 김부대왕이 말을 탄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서라벌에서 고려의 도읍 개성으로 올라가는 김부대왕 모습을 의미한 것이리라. 개성은 송나라와 가까운 곳이기도 하여 서해 해신으로서 김부대왕과 그 왕비의 신이 서낭당에 모셔졌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북 전주시 성황산 정상에 있는 성황사에도 김부대왕, 김부대왕의 두 부인, 마의태자, 덕주공주 등 다섯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고려 때부터 매년 음력 5월 5일에 성황제(서낭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왜국으로 오가는 바다사람들에게 경주와 포항 사이의 형산 산정의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은 풍랑을 잠들게 하기 위하여 해신에 대한 제사한 사당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필자가 그곳 사당의 두 여인을 김부대왕 왕비 안씨부인과 김부대왕의 장모로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형산과 제산 사이로 흘러가는 형산강. 


    흥미로운 것은 형산 왕룡사 인근의 전설은 바다와 섬 왜구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형산 왕룡사 지역으로 왜구들이 침략해 들어올 때 울릉도 남쪽에 12개의 섬이 있어서 그리로 쉽게 쳐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부대왕은 "죽으면 용이 되어 저 섬들을 다 없애버리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어서 해중대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유언과 맥이 같은 것으로 보이기에 알맞다. 


    12개의 섬이란 독도에서 일본 시네마현으로 가까이 위치한 오키섬들을 의미했을 수도 있으나 그 12섬은 가라앉아 울릉도 남쪽 바다 밑의 바위들이라는 전설도 있다.  


    왕룡사의 전설에는 "손살맥이에 큰 뱀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용'이라 했더니 큰 뱀은 용이 되어 12섬을 없앴다"는 것이다. 그 용은 울릉도마저 없애려 하는데 “울릉도는 나라의 수구맥이니 치지 말라” 하는 신의 소리가 들려와서 울릉도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내도록 울릉도와 독도는 '도둑들의 근거지로 공도정책(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맥을 갘이하는 울릉도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볼 수 있다. 


    형산 왕룡사의 전설은 김부대왕이 용이 되어 형제산을 둘로 나누고 바다의 12섬을 바다에 가라앉혔다는 것은 신라왕들과 그 왕비들의 모계가문이 얼마나 무속적인 신앙으로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들판에 큰 뱀이 되어 나타나 용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시조 박혁거세 장례식에 나타난 큰 뱀의 재현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기록) 제21권에 의하면 경주부의 동북쪽 4리에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이 있었다.  이 사당은 동천묘(東泉廟, 1627), 경순왕전(敬順王殿, 경종 때) 등으로 불려왔는데 1888년 이래 현재까지 숭혜전(崇惠殿)이라 불려지고 있다.  


    숭혜전은 본래 김부대왕 사당이었으나 1887년부터 미추왕이 보태지고, 1888년 문무왕이 추가로 모셔졌다.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이 사당을 보완한 것이다. 


    다만 김부대왕 왕비 안씨부인을 모신 곳은 해신을 위한 바다 뱃사람들의 신앙에 이어져 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김부대왕이 사당으로 모셔진 것은 많은 김씨들이 경순왕을 그 시조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의 경순묘(敬順廟)와 영모전(永慕殿, 1966), 하동군 청암면 중리리의 경천묘(敬天廟, 1904), 영주시 영주동의 숭은전(崇恩殿, 1961)과 자인전(慈仁殿, 1958, 八榮亭), 평창군 진부면 호명리의 숭인전(崇仁殿, 1924) 등도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사당이다. 


    김부대왕이 산상에 모셔질 경우 바다와 연관되고 평지에 세워질 경우 신라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김씨조상 사당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형산 산상의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벽화에는 두 여인이 각각 연꽃과 복숭아를 들고 있다는 면에서 김부대왕의 왕비와 그 어머니로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형산 왕장군용왕전 김부대왕 사당은 오히려 바다에 연관하여 그 중앙에 그려진 두 여신상이 주신으로 보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같은 경우로『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발행) 제20권에 의하면 충남 보령시 남포현(藍浦縣. 현재 남포면) 옥마산(玉馬山) 정상에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가 있었으나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곳에 김부대왕의 왕비 안씨부인과 그 어머니를 주신 영정으로 그려져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4. 산상의 용왕신 사당이 소멸되거나 산 아래로 내려온 배경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은 형산 산상에 있다. 그런데 전주시 성황산 정상의 성황사나 앞서 언급한 시흥시 군자봉 정상의 서낭당도 산상에 있다가 산 아래로 내려왔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치술신령에도 치술신모 사당이 있었으나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포항시 북구 연화재 꼭대기에 비석이 세워져있기도 한 소랑재상부인 전설도 바다의 해신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연화재 고개엔 본래 소랑부인 사당이 있었을 것인데 현재 비석만 세워져 있다.


    왕룡사가 있는 경주 안강 형산은 정상이 길게 뻗어 있어 마치 臺(대)를 이루고 있다. 왕룡사의 사당은 같은 김부대왕을 모시고 있는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帝釋里)의 왕대사(王臺寺) 사당과 유사하다. 그곳 산이 왕대산(王臺山)이기 때문이다. 


    왕대사(王臺寺)의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어떤 사람의 꿈에 황룡포를 입은 조상이 나타나 시킨대로 바다로 가서 파도에 밀려온 상자를 열어보니 비단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호서옥마산김부대왕지기(湖西玉馬山金傅大王之旗)’라고 씌어 있는 깃발이 있었다. 그 깃발에는 위패가 싸여있었는데 ‘경순대왕김부신주(敬順大王金傅神主)’ 라는 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사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다에 연결시킨 것을 보면 해신과 신라 김부대왕의 왕비를 이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상의 신라여신 서낭당들이 산아래로 내려오기도 하는 것은 산상 여신, 산하 씨족시조신이라는 두 가지 사당 경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산상의 서낭당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필자가 찾아간 삼척 근덕 해망산 서낭당도 바닷가 작은 섬 산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사당 안에 모셔진 해신은 여신이며 신라 왕실의 왕비 여신일 수 있다. 


    *필자가 찾아간 삼척 해망산 서낭당. 바닷가 작은섬의 정상에 있다. 

    *필자가 찾아간 삼척 해망산 서낭당. 바닷가 작은섬의 정상에 있다.

    *형산 산상에 위치한 김부대왕과 그 왕비 안씨부인 및 안씨부인 어머니가 모셔진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필자촬영.


    신라의 모계 무속전통을 부계 전통으로 윤색한 것이 왕룡사 '김부대왕과 그 아들 태자 김충 사당'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룡사에는 김부대왕과 '왕장군' 모습의 무인상이 양쪽으로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 '두 부인'이 그려져 있다. 


    형산의 왕룡사의 왕장군용왕전이라는 사당 이름도 인제의 김부리 사당 이름이 대왕각(大王閣)이라 지칭한 것과 연결된다. 무속에서 '용왕'이나 '대왕'이라 한 것은 신라의 임금을 의미하면서도 바다의 해중대룡과 연관한 사해의 용왕-대왕들의 이름에 이어진 결과이다. 


    평창군 진부면 호명리에 숭인전(崇仁殿)도 김부대왕을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 김부대왕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주시 귀래면에도 김부대왕의 영정을 봉안한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39년 기록)의 <김부대왕변증설(金傅大王辨證說)>에 나오는 원주의 용화산 학수암(鶴樹菴), 황산사(黃山寺), 고자암(高自菴, 일명 太古寺)도 김부대왕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서 김부대왕이 학수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주 황산사(黃山寺)는 본래  황(皇)자를 가진 황산사(山寺)였다는 것이다. 무속의 황은 옥황상제이며 여신이다. 김부대왕이 그곳 황산에 '왔다'는 것은 실체가 온 것이 아니라 신으로서 그 왕비를 함께 모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 3대 사찰이라는 전남 송광사에도 김부대왕 영정이 있었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일본인이 순천 송광사에 있던 김부대왕 영정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원주 황산사(黃山寺) 미륵산(용화산)의 미륵을 김부대왕이 세웠다고 전한다. 미륵산이란 불교가 들어와 용화산을 미륵산으로 변이시킨 것이다.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불교적인 산이름들인 '문수산(문수보살에서)' '비로봉(비로자나불에서)' 등 불교명의 산들은 본래 불교 이전의 용궁환생사상의 선도적인 이름들을 바꾼 것이다. 예를 들면 신라시대 동물토템숭배의 '대왕' 신앙은 산이름들에서 '비봉산(봉황이 날아 내리는 산세)' '비학산(학이 날아내리는 산 모양)' 등의 동물토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고래산' '옥녀봉' 등도 신라시대의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신라의 마지막 임금에 대한 대왕신앙과 신라부흥운동 유적지들은 구분되어야 한다.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인제 김부대왕동(지금의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실제로 김부대왕이 왔던 곳이라 하지만 그곳 김부대왕 전설 지역은 김부대왕의 밀명을 받은 마의태자의 활약지로 보아야 한다.  


    김부대왕의 무덤이 경기도 연천에 있다지만 이곳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 오미자골 입구 도로변에도 있다. 필자가 찾아가본 그곳 김부대왕 유적지는 군사훈련지로 바뀐 채 단지 대왕각(大王閣)만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고구려 후신인 고려에 투항한 신라의 김부대왕의 사당을 남북으로 분단되어 군사 심리적으로 예민한 휴전선 인근에 그대로 두는 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이것이 김부리의 김부대왕 유적지가 군사 당국에 의하여 축소 제거되고 대왕각만 남긴 배경이었을 것이다. 


    김부1리는 본동(1반), 항병골(2반), 비둑재(3반), 단지골(4반)의 네 개 마을이 있고 인근 옥새바위, 수구네미, 옥터골, 항병골, 맹개골, 군량리(양구군) 등에 김부대왕에 대한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옥새바위는 두개로 포개져 있는데 그 사이에 김부대왕의 옥새(玉璽)가 숨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흰색 또는 여러 색을 띈 뱀이 나타나 그 옥새를 지킨다고 한다. 박혁거세 장례 때 나타난 큰 뱀을 연상하게 한다. 신라 선도성모 여신상은 흰색을 칠한다. 해(해는 희다가 그 어원)를 상징하는 색이 흰색이기 때문이다. 


    형산 왕룡사 왕장군용왕전 사당을 내려오면서 신라의 멸망은 무속에서는 전혀 멸망되지 않고 김부대왕과 그 왕비 안씨부인과 그녀의 어머니라는 모계무속 전승은 천년 신라 모계 왕실의 신앙이 2천년을 거쳐서도 사라지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12/09/13 오두 김성규. 신발모(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형산 왕룡사의 제단에 모셔진 두 목신상과 벽화. 두 여신상이 중앙에 그려져 있다.

    2013년 12월 9일 촬영.













    *산신각 앞의 여신상. 





    *포항 옥녀봉을 향하여 


    *형산 왕룡사 갓바위에서 내려다 본 형산강과 포항지역.








    귀한 글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