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효림 2010. 5. 11. 08:11

*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 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 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 애송시 100편-민음사  

 

*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결연히 뒤돌아서자
그녀는 우연히 같은 리듬으로 춤을
그리고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그는 영하(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고
당신은 그저 뒤를 돌아보겠지만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

* 이장욱시집[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 뼈가 있는 자화상
오늘은 안개 속에서 뼈가 만져졌다
뼈가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희미한 경비실이 되자 겨울이 오고
외로운 시선이 생겨났다
나는 단순한 인생을 좋아한다
이목구비는 없어도 좋다
이런 밤에는 거미들을 위해
더 길고 침착한 영혼이 필요해
그것은 오각형의 방인지도 모르고
막 지하로 돌아간
양서류의 생각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또는 먼 곳의 소문들
개들에게는 겨울 내내
선입견이 없었다
은행원들도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덜 존재하는 밤,
안개 속에서 뼈들이 꿈틀거린다
처음 보는 얼굴이 떠오른다 *

* 이장욱시집[생년월일]-창비,2011

* 실종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내 발이 지상을 떠나가는 풍경을

행인들은 관람하였다

내 눈썹과 입술과 또 어깨가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실종 중일 때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누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햇살 속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렸다 *

* 이장욱시집[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