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효림 2010. 5. 11. 08:12

* 그대 벗이여... - 박희진

소나무 아래 정자에선 녹차 한 잔 들게나

바쁜 세상일수록 마음을 비우고

솔바람 소리 듣는 법도 배워야지

차 맛은 길지만, 인생은 짧다네 *

* 박희진시집[소나무 만다라]-시와진실 

 

* 행곡리 처진 소나무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말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또 하나 있네

그걸 보러 산 넘고 물 건너 왔는데

해는 이미 졌고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와 있네그려

하지만 밤눈에도 키는 크지 않지만

그 수관(樹冠)은 보은의 정이품송
축소판 같아 작은 청산이다

달도 별도 없이 잔뜩 흐린 하늘 

알차고 풍만한 검은 청산 둘러싸고
일행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싱그러운 솔기운을 받아서리

밤의 소나무도 소나무는 아름답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보랴

* 박희진시집[소나무 만다라]-시와진실  

 

* 무제  

오늘은 종일 쓸쓸한 늦가을 바람이 불다

나는 홀로 솔숲을 거닐면서 시낭송을 들려주다

이 솔 저 솔 애무하며 속삭이듯 들려주다

소나무들은 즈믄 해의 거문고로 일제히 화답하다 *

 

* 선생님 새해에는 
저 해를 꿰뚫고 날으는 새처럼
생명의 연소 속에 앞장을 달리소서
저 백두산 천지(天池)처럼 가득히 고인
영감(靈感)의 높이에서 겨레를 살피소서 *

 

* 학과 소나무  
학이 소나무에 끌리는 것은
두 날개 활짝 펴며
아득한 천공에서
홀연 날아와 안기려 하는 것은
학 안에도 소나무가 있기 때문

학이 소나무에 사뿐히 내려 앉는 것은
학 안의 소나무와 밖의 소나무가
만나서 하나 되길 원하기 때문

학은 날아다니는 공중의 소나무요
소나무는 땅에 뿌리 내린 학이라오

 

* 다시 대관령휴양림에서 

금강송 숲 속에서 금강송 바라보며

금강송 숲 속에서 금강송 명상하며

일주일만 지냈으면!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그냥 일주일만 서성거려 보았으면!

아니 허리 꼿꼿하게 직립해 보았으면!

이 몸도 금강송이 될 수 있는지

나무 대관령 금강송 보살님

나무 관세음 금강송 보살님 

* 박희진[다시 대관령휴양림에서]-부분 

 

* 장락무극(長樂無極)  
향설당 여사의 올해 연하장은
장락무극(長樂無極) 붓글씨 넉 자!
벽에 붙여놓고 조석으로 바라보니
새삼 그것이 삶의 진수임을 알겠구나

처음 그 넉 자를 본 순간 어디서인가
감로가 솟아 나를 촉촉이 적셔주었거니
이어 가슴 깊은 곳 흐르는 시냇물은
줄곧 희열을 시나브로 솟게 했다

어둠은 밝아지고 막힌 것은 뚫리고
피는 맑아져서 들숨 날숨은
더없이 고르게 편하게 되었다
찬미 무궁무진, 그것은 일찍이 내가 했던 말

대긍정과 찬미의 삶이
바로 장락무극(長樂無極)의 근본일세
실상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부단히
그렇게 살 거라는 이 순수지속의 마음

이 세상 도처에 미(美)가 있고
그것을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시인의 혓바닥이 마르지 않는 한
찬미의 노래는 온 우주의 활력소 되리 

 

새 봄의 기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네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 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야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 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 붙게 하옵소서 *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은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이 눈먼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

 

* 허(虛)

밤이 되어 찬란한 보석들이 어둔 하늘을 수놓을 때엔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어라 실상 이렇게 유리와 같은 가슴의 벽을 넘나드는

투명한 슬픔은 내 아무런 생에의 집착을 지니지 않음이니 아 이대로 돌사람처럼 꽃다운 하늘 아래 단좌하여 허(虛)할 수 있음이여 나는 아노니 이윽고 내 야기(夜氣)에 젖어 차디찬 입가엔 그 은밀한 얇은 파문이 새겨질 것을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박희진(朴喜璡)시인
-1931년 경기도 연천 출생
-1955년 [문학예술] 추천으로 등단. 월탄문학상, 한국시협상 수상
-시집 [실내악][연꽃 속의 부처님][박희진 세계기행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