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효림 2019. 5. 16. 09:00

* 농사꾼은 빈 몸으로 들에 나가지 않는다 - 이중기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올지라도
농사꾼은 맨몸으로 들에 나가지 않는다

상업학교 나온 내 친구 동철이 첫 월급 타서
부모님 선물 중에 라이방도 하나 끼워넣었다
돌목어른 머리털 나고 처음 라이방을 쓰던 날
두충밭으로 빈 지게 지고 나가다 되돌아와
똥물 한통 퍼담아 지고 나갔다
그게 사단이었다
마차골 입구에서 돌부리가 어이쿠 발을 걸었다
돌목어른 똥물 뒤집어쓴 채 퍼질러앉아
허허 참, 그것 참, 혀를 끌끌 차더란다
산초 캐러 갔다 오던 아낙 둘이 보았단다
눈 똑바로 뜨고 보았단다, 몇번이나 보았단다
라이방은 별탈없이 반듯하게 걸려 있더란다

산그림자만 한 마당 짊어지고 올지라도
농사꾼은 빈 몸으로 들에 나가지 않는다 *

 

* 그 말이 가슴을 쳤다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
밥이나 먹고 보자며 자장면 집으로 몰려가자
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
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돼
쌀 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
밥은 안 먹고 뭐! 수입 밀가루를 처먹어?
에라 이 화상들아
똥폼이나 잡지 말든지

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 일주문을 부숴 버렸다 *

* 정끝별의 밥시이야기[밥]-마음의숲

 

* 참 환한 세상 

파꽃 한번 오지게 둥둥둥 피어난다

거두절미하고 힘찬 사내의 거시기 같다

 

단돈 만원도 안되는 원수 같은 것들이

탱탱하게 치솟는 풍경을 흘겨보던

등 굽은 늙은이 입술 묘하게 비튼다

빗장거리로 달려들어 북소리 물고

둥둥둥둥, 북소리 물고 달려가는

저, 수여리들의 환호작약에

늙은이는 왈칵, 그리움도 치살려본다

 

내 아직 펼칠 뜻 없는 건 아니리

시간이 마음을 압도하는 벼룻길일지라도

북소리로 팽팽하게 펼쳐 보일 수 있으리

화살되어 궁궁궁궁 달려갈 수 있으리

 

연꽃이 게워내는 법구경보다

참 노골적으로

욕망의 수사를 생략하며

무궁무궁 피어나는 파꽃의 절경에 젖은 늙은이

젖 한통 오지게 빨고 있는 웃는 아이 같은

저 늙은이 파안

저승꽃 만발한 서러운 절창! 

 

세상 참 환하다 *

 

* 밥상 위의 안부

오늘도 식당밥으로 점심을 이우셨군요
은유와 상징으로 맛보신 농촌은 어떠했나요
표고버섯 고사리 도라지 바지락에
된장국 곁들인 삼치구이 백반을 드시다가
버릇처럼 간혹 손이 간 김치 몇 조각이 혹
그대 입맛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얼핏 젓갈냄새 풍기는 김치쪼가리
걸쳐 먹은 밥 몇 숟갈에서
몸파는 어린 조국의 안부를 들었습니까

오늘도 밥상 위에서 안부를 묻습니다
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입니까
흑백의 거친 폐허를 거처로 삼은 사람들이
북만주나 외몽고에 전세 들고 싶은 날,
생인손을 앓는 목민심서 문장 속으로 들어가니
토사곽란의 길 끝에 잘 늙은 절 하나,
시줏돈은 색주가에 다 퍼날렸는지
俗때 묻힌 대웅전은 장엄하나
요사채는 기울어 덧쌓인 폐허입니다

짐승의 피를 달래 인간을 이롭게 한
옛 사람의 손길은 산중까지 닿아 있는데
무엇을 못 이겨 대들보가 무너지는지
늙은 젖무덤 같은 산허리꼬집어 물으니
우야겠노 우야겠노 중중대는 물소리 끌며
물거리를 한 짐 지고 노인이 산을 내려갑니다
그 사람 사랑방에 등짝을 풀고 싶은 날,
입술이 붉은 수다새들만 들락거리는
이 절간에서 빌어먹던 중은 출타중입니다 *

* 이중기시집[밥상 위의 안부]-창비,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