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효림 2019. 4. 5. 09:00

* 도화(桃花) 한 가지 - 박목월

물을 청(請)하니

팔모반상(飯床)에 받쳐들고 나오네

물그릇에

외면(外面)한 낭자(娘子)의 모습.

반(半)은 어둑한 산봉우리가 잠기고

다만 은은한 도화(桃花) 한그루

한 가지만 울넘으로

령(嶺)으로 뻗쳤네. *

 

* 꽃들 - 문태준

모스크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 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 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 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

 

* 꽃 - 김용택

한점 숨김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꽃은.

꽃잎 속 제 그늘에도 티 한점 없다.

꽃은 호랑이도 살얼음도 무섭지 않다.

허튼짓이 없으니, 섭섭지도 않고

지는 것도 겁 안난다. *

 

* 꽃 - 김용택

꽃은 피어 있는데

피는 걸 누가 보았답니까.

꽃이 졌는데

지는 걸 누가 보았답니까.

아무도 못 본

꽃 *

 

* 꽃 -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 홍매 - 김영재

이런 봄날 꽃이 되어

피어 있지 않는다면

그 꽃 아래 누워서

탐하지 않는다면


눈보라

소름 돋게 건너온

사랑인들 뜨겁겠느냐 *

 

* 꽃처럼 - 조정권 

몽우리 때가 좋았지.

꽉 쥔 주먹처럼 그때는 속이 꽉 차 있었으니까.

속을 내주고 나니 윤곽으로만 남았어.

이제 나는 외곽으로 산다.

그래서 꽃들은

겉모습으로 살며

제 자신이 버린 속을 들여다본다.

 

* 기억해 내기 - 조정권

혼자

꽃.


진 채

내게 배송된 꽃.


발송인을 알 수 없던 꽃.


그 꽃을 기억해 냈다.

슈베르트 음악제가 한 달간 열린

알프스 산간 마을

한가로이 풀꽃에 코 대고 있는 소 떼들이

목에 달고 다니는 방울

그 아름다운 화음에서.

 

* 꽃 - 정호승

마음 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 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

 

* 맨드라미 - 김명인    
붉은 벽에
손톱으로 긁어놓은 저 흔적의 주인공은
이미 부재의 늪으로 이사 갔겠다
진정 아프게 문질러댄 것은 살이었으므로
허공을 피워 문 맨드라미는
지금 생생하게 하루를 새기는 중!
찢긴 손톱으로 이별을 긁어대는
오늘의 사랑 뜨겁다
 
아침의 하늘에
날개 자국 하나 흘리지 않고
맨드라미 꽃봉오리들 지나가고 있다
푸르디푸른 판유리를 미는
시뻘건 맨살들, 하늘 벽에 파고든
핏빛 너무 선명해서
너도 쉬 지워지리, 잔상만으로 아득하리 * 
* 김명인시집[꽃차례]-문지,2009

 

* 파 꽃 - 안도현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밀어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흙쥐가 있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대가리야 흰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

파 꽃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밀어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흙쥐가 있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대가리야 흰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701315#csidx31739a829bae5b1b05a850d8b873b81

 

* 저 꽃 - 황동규

앞으로 산책 거리 줄일 땐 어디를 반환점으로?
학수 약수터? 남묘(南廟)?
아직은 집에서 너무 지척인 남묘를 향해
일부러 이 골목 저 골목 에둘러 가다가
마지막으로 꽤 숨찬 언덕길을 오르다 만나는,
담 헐고 만든 꽃밭, 허나 다른 꽃들 자리 뜬 조그만 마당에
부용꽃.
내가 여름 꽃 하나만 그린다면
파스텔로 빛깔, 모양, 줄무늬까지 뜨고 싶은 저 꽃.
떠질까, 냉수로 새로 막 부신 듯 저 느낌?
발길 멈춘다.
작년 여름에도 그랬지.
오늘처럼 무더운 날 오후 저 꽃이 별안간
트라이앵글 소리 냈어.
이번에도 쟁! 또 한 번 쟁!
이번에도 발을 헛디딘다.

 

* 설중매 - 노천명

송이 송이 흰빛 눈과 새워

소복한 여인 모양 고귀하여

어둠 속에도 향기로 드러나

아름다움 열꽃을 제치는구나

그윽한 향 품고

제철 꽃밭 마다하며

눈 속에 만발함은

어늬 아낙네의 매운 넋이냐 

 

* 찔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영산홍(映山紅) - 조용미

꽃들이 간격을 두지 않고 다투어 피었다

엘리뇨 탓이다

진달래 지기도 전 영산홍이 따라 피었다

영산홍과 진달래를 비교하는 봄은 짧아 몸 가진 것들 다 앓아 눕는

노을만큼 붉은 꽃들로 가득한 세상

 

낙선재 뜨락이나 남양주 석화촌에서 만났던

다섯 장의 꽃잎을 한 데 달고 있던 통꽃들

어질머리 나는 그 속을 들여다 보았던 기억을 들추어보지 않아도

솜털 보송한 연두색 꽃다대가 붉은 꽃들을 서너 개씩 떠받치고 있는 그 꽃들이

오래 봄날을 혼미하게 했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이제 아픔 곁에 서서 마당의 영산홍은 하루 종일 나를 지켜본다

내가 들여다보는 영산홍과 자산홍의 시간이란

햇빛과 어스름과 봄비와 달빛 속이지만

 

꽃은 그 속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꽃잎보다 긴 암술이

지난밤 그 빛깔에 닿을 수 없는 영산홍의 몸짓을 짐작케 할 뿐

 

가장 짧은 수술이 닿아 있는 꽃의 속살에

점점이 갈색 열꽃이 번져 있다

영산홍이 함부로 향기를 내뿜지 않는 이유가 꽃이 가진 지나친 붉은 빛 때문일 거라 중얼거리며

영산홍에 마음의 부림을 당하는 한나절

내가 쏟아놓고 싶은 말들이 때로 꽃의 저 선연한 붉은빛과 닮아 있었다는 걸 당신은 아는지 *

* 조용미시집[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山)을 날아오르다]-창비,2000

 

* 看花 - 朴準源

世人看花色 - 세인간화색
吾獨看花氣 - 오독간화기
此氣滿天地 - 차기만천지
吾亦一花卉 - 오역일화훼

-꽃을 보다
세상 사람 꽃의 빛깔을 볼 때
나는 홀로 꽃의 기운을 본다.
그 기운 천지에 가득 찰 때면
나도 또한 한 송이 꽃이 된다.

 

* 題僧軸 -  임유후(任有後)

山擁招提石逕斜 - 산옹초제석경사
洞天幽杳閟雲霞 - 동천유묘비운하
居僧說我春多事 - 거승설아춘다사
門巷朝朝掃落花 - 문항조조소낙화

-낙화산은 절을 감싸 안고

돌길은 구불구불 올라가네.
구름이 감춰놓은
호젓한 골짜기를 들어서자
스님의 푸념 소리 들려오네.
"봄이라 일도 많네!
아침마다 절 문 앞에서
낙화를 쓸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