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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회기동 출근길 '철학자의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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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31.

아침 출근길이 전에는 부산했다.

회기역에서 내려 경희의료원까지 가는 마을 버스를 타고 정문에서 내려 교시탑*을 지나 법학관까지 한참 바삐 걸어야 했다. 배차 간격이 길어 악명 높은 중앙선 전철을 제 시간에 타지 못 하는 날에는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타기도 했다.

그러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금년 신학기부터는 새로운 코스를 찾아 걷기로 했다.

어느 동료교수가 '철학자의 산책로'라고 이름지었는데 번잡하지 않고 아주 고즈녁한 길이다.

 

* 외국학생들이 유학을 많이 오는 뉴밀레니엄 시대의 경희대 교시는 "Towards Global Eminence"(세계적 수월성을 지향)다. 학교 설립 당시 조영식 박사의 창학이념은 "문화세계의 창조"였으며 교시탑에는 지구본 아래 그렇게 새겨져 있다.

 

회기역 계단을 내려와 마을버스 타는 줄에 서지 않고 길을 건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전주 콩나물국밥 집 메뉴를 읽으며 골목길로 접어들면 휘경동 동네의 변화된 모습을 축약판으로 보여주는 골목길이 나온다. 허름했던 단층 가옥들이 원룸 오피스텔로 바뀌더니 1층에는 커피숍과 젊은이들 취향의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자연히 오늘 학교에서 할 일(To Do List)을 떠올리게 된다.

차량 통행이 많은 이문로에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려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신축 오피스텔들이 즐비하다.

다시 왼쪽 경희대 방향으로 골목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청량초등학교가 나온다.

서울의 동쪽 청량리에 있는 학교이니 그렇게 이름지었겠지만 우선 교명에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하고 학교 운동장 밑에 주민들을 위한 공용주차장을 만들어 놓아서 지역사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등하교 시간에는 보호자들이 저학년 어린이의 손을 잡고 걷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르진 않아도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지난 며칠 동안 머리속을 지배하던 생각들이 갈피를 잡게 된다.

세븐일레븐 편의점 옆길은 대학생들 상대로 하숙을 치다가 자취방으로 리모델링한 2-3층 주택들이 죽 이어진다.

 

* 왼쪽은 청량초등학교. 저 앞에서 1시 방향으로 걸어간다.

오르막길의 중간 지점에서는 학교 방향으로 걷다가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얼핏 보아 막다른 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길 안내자가 없으면 막다른 골목인 줄 알고 돌아나오기 십상이다. 여기쯤 해서 구상하고 있는 논문의 키워드나 프레임워크를 붙잡아야 한다. 

앞을 막고 서있는 경희대 약대 건물과 사람 손길이 닿은 적 없어 보이는 약초재배 실습장 옆으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 약학대 약초재배장 앞은 막다른 골목길처럼 보인다.

나무로 된 문까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사유지인 것으로 보이지만 경희중학교 축구부 합숙소이기에 24시간 개방되어 있다.

경희대 의학도서관  앞 급경사 길을 올라서면 경희중학교와 경희고등학교가 나온다.

오른편으로는 학생들이 무리지어 뛰놀고 운동하는 운동장이 펼쳐진다. 

 

자연히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며 잠시나마 10대 시절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다음은 '질풍노도의 시절'을 무사히 살아났다는 상념과 함께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젓곤 한다.

입시경쟁에 다시 뛰어들기 두렵고 내가 걸어왔던 그 길을 다시 걷지 못하고 밀려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의 치열한 입시경쟁, 취업전쟁을 보노라면 무슨 수로 다시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을 한단 말인가? 

어린 학생들의 떠들썩한 함성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급경사길을 오르면 새로운 장관이 펼쳐진다.

 

* 경희대 노천극장 주변풍경

저 멀리 평화의 전당이 보이고 오른편부터 무용학과, 경영대, 문과대와 이과대, 중앙도서관, 그리고 밝은 사회운동 기념탑, 새로 신축한 스페이스21 건물이 죽 늘어서 있다.

이곳이 내가 18년 동안 학생들 가르치며 연구해 온 경희대 서울 캠퍼스인 것이다.

이곳에 다다르면 세상의 거친 풍파가 일순 잠잠해 진 듯하다. 학교에서 할 일, 강의 구상, 쓰고 있는 논문의 내용 등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가 하나씩 정리되는 것 같다.

 

* 노천극장에서의 행사 장면

공연이나 테니스를 하는 학생들 젊음의 분출구였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주차장으로 바뀐 노천극장을 오른편으로 하고 직진한다. 문과대와 이과대 사이길에 올라서면 나의 무대였던 제1법학관과 연구실이 있는 제2법학관(아래 사진)이 나타난다.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쪽으로 가는 후문이 나온다.

 

회기역에서 천천히 걸어서 15분 남짓 걸리는 산책 길이지만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왔기에(upgrade) 숨이 가쁜 것 같다. 자연히 반대 방향의 코스는 정년을 앞둔 나처럼 실감나게도 줄곧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고비마다 경사진 코스가 있어 상급학교 올라가는 관문 같은 길이다.

또 안내자나 조언자(Mentor)가 없으면 막다른 길인 줄 알고 되돌아서기 쉬운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곳곳에 철따라 꽃이 피고 신록과 단풍, 나목을 번갈아 볼 수 있는 '꽃길'이기도 했다.

채 20년이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내가 학자로서 지낼 수 있었던 학문의 전당 진입로로서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인 길이었다.

역시 이 길은 "철학자의 산책로"(Promenade of Philosophers)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학문의 길
쉼 없는 논문구상
나 절로 철학자
Along the Scholars' path,
ceaseless study and research
will make philosophers.

 

서울대 김화진 교수가 Facebook (2019.08.26)에 "교수란 무엇인가"란 글을 올렸다.

글로벌하고 프래그머틱한 관점에서 상법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나름 철학자가 다 되신 것 같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여기 옮겨쓴다.

 

교수란 무엇인가. 자진해서 자기 연구실에 65세까지 징역형을 받아 감금되어 사는 사람들이다.

방학이란 무엇인가. 2개월 독방 감금조치.

논문이란 무엇인가. 감옥에 계속 살 자격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이다. 대부분 수인들간에, 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간에 읽고 끝난다. 근데 열심히 잘하면 정년보장형을 받을 수 있다.

신문 칼럼이란 무엇인가. 외로운 감옥생활에서 창 밖을 향한 절규다. [수인(囚人) 생활을] 알아 달라는.

상담 학생이란 누구인가. 접견권 가진 변호사? 엄청 반갑지만 티 내면 안된다.

총장이란 누구인가. [수인들의 서열을 정하고] 배식을 담당하는 사람.

그런데 이 감옥에는 탈옥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일부는 탈옥을 감행한다. 바깥세상을 두루 겪는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대부분 다시 감옥에 돌아온다. 서로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 . .

교수란 자유로운 직업의 대명사다.

그러나 세상에 외롭지 않고 자유로운 직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