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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삿갓 2015. 4. 9. 21:48

성경의 이해 7 - 점성술과 마술



헬레니즘 사회에서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점성술이다. 원시인들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한 것에 비추어 대자연을 신성시하는 신앙을 오랫동안 간직해왔다. 그것은 밤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인류가 불을 발명한 이후에 조차도 밤하늘의 별들은 원시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문명이 더욱 발전하면서 원시인들은 각 개인의 운명(Tyche, 튀케)이 여신화된 행운”, “기회”, 또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왔다. 무엇인가 보다 열정적이고 경직된 입장은 숙명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그것은 별들과 유성들의 비인격적이고 고정된 질서에 대한 바빌론적인 개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서 개인의 운명이나 행운은 태어날 때의 별들의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는 견해가 생겨났다. 이것이 점성술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그리스 신화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다. 그래서 하나의 신에 그리스 이름과 로마 이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여신으로 익히 인구에 회자되는 비너스는 로마식 이름(“벨누스”)이고 그리스식 이름은 아프로디테이다. 그들은 신화를 별자리에 이용하여 오늘날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수 많은 별자리를 만들었는데 이 또한 점성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들이 흔히 라고 하면서 12간지의 동물이름을 붙여 어느 해, 혹은 어느 시간대에 태어나는지로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듯이, 서양사람들은 이 별자리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점성술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심지어는 국가적인 모든 행사(국가적인 의례, 전쟁, 대규모 토목사업 등)에도 점성술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별을 이용한 점성술 외에도 점치는 것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했던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서 갑골문을 들 수 있다. 오늘날 한자의 기원이 되는 이 갑골문은 중국 황하문명시대에 성행했던 점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점성술에 대한 연구는 헬레니즘 시대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거의 모든 제국 내의 지역과 종교와 종교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것이 희랍 수학과 결합되어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기도 하였다. 2세기의 로마 작가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는 다음과 같이 점성술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운명은 각 사람을 위한 법으로, 변경할 수 없는 결과인 그의 탄생시의 별자리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별자리는 선과 악의 수많은 원인들에 의해 제한당한다. 즉 결과들은 운명의 두 대신들이며 스스로 태어난 신들인 희망기회에 의해 감시 당한다. 이들은 인생을 다스리며, 강요와 회유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을 지키도록 한다.”


 


점성술이 고도로 나타나는 분야 중의 하나는 마술(magic)이었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의 마술쇼와는 다른 것이며, 실제로 이집트 파피루스 사본에 나타난 마술적인 내용의 기록을 보면 예수를 포함하는 히브리어 이름들이 마술에 나타난다. 여기에는 귀신들린 자들을 위해 부적을 쓰라고 권하면서 예수 등의 이름과 주문이 적혀 있다. 마술이라는 그리스어는 magus로 이 단어는 본래 페르시아인들이 점성술을 사용했던 사제들에게 붙였던 명칭에서 빌어온 단어이다.


 점성술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마술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비로운 세력들에 대해 어떤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한, 그리고 특히 전쟁과 기근, 질병, 가족문제들을 야기시키는 사탄의 세력들을 제어해주는 하나의 시도였던 것이다. 올바른 방법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반복한다는 것은 생활 속에 일어나는 사탄의 재난들을 다루는 최초의 과학적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신약성서에도 점성학에 대한 가장 분명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은 동방박사들이 발견했던 별이다.(마태 2:1~12, 16) 여기서도 마술이 나온다. 또한 사도행전 8 9~24절에는 마술을 행하며 베드로의 능력을 사려고 했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 시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복음서의 경우 병 고치는 이야기들의 몇몇 내용들은 마술과의 관계에서만 잘 이해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신약성서 27권의 배경이 되는 무대, 즉 헬레니즘 사회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 보았다. 기독교의 정경인 성서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인이든 비() 기독교인이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서에 기록된 역사에 대하여도 흥미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가 기록된 문서로서의 성서의 가치로만 보아도 그것은 가장 오래된 인류 역사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한 권 이상 가지고 있는 필독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도서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국 등 아시아인들이 교양서 혹은 필독서로 유교의 경전이나 도가의 경전 등을 아직도 애독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인들은 믿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성서를 애독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가장 세계적인 종교인 기독교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어떻게 발전 계승되어 왔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밝혀주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자 가장 확실한 자료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리적, 신학적 발전 또한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1947년 독일의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 1883~1969)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주요 종교와 사상이 B.C.900~A.D.200년 사이에 일제히 등장하였다는 이른 바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주창하였다.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이 시기에 서양철학의 요람 그리스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였고,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서양의 사상적 뿌리를 굳건히 뿌리내렸다.


 또한 종교적으로 보자면 서양의 종교에서는 구약의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같은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 구약 율법의 완성이자 신약의 시작의 기준이 되는 메시야 예수가 등장하였고, 동양에서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등장하였다. 이전에 나타났던 종교들이 주로 기복적, 타부적, 세속적 기원에 바탕을 둔 제례의식 위주였으나, 불교와 기독교는 이 보다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종교든 사상이든 그것은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서양이라는 거리적 한계에 상관없이 이렇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동시에 출현하여 동서양 양 축의 인류사를 이끄는 종교와 사상을 뿌리내렸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이 모든 것들이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에서 출발한 원류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거리적으로 가깝다.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발전한 역사에서 어느 적당한 시기에 이와 같은 종교와 사상을 발명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진행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는 인류의 모험심과 탐험심은 고대의 그 먼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모험과 탐험을 통하여 접촉하고 교류하여 동서양이 서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의 불충분 내지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정확성 때문에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우리는 동양과 서양에서는 각기 거의 독자적인 사상과 종교를 발전시켰음을 인정해야 하고 이것은 사상적 종교적 평등성 면에서 중요하다. 즉 성서에 나오는 대로 대접받고자 하는 이는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것처럼 내가 믿는 종교가 인정받고 남들의 이해를 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내 종교는 대접받기를 원하면서 남의 종교는 배척한다면 그것은 내 종교를 배척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기독교인 된 사람들은 남의 종교적 선택 및 그의 종교에 대한 신념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오늘날 TV나 신문 방송을 통해 좋지 않은 종교적 사건들이 발생하면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불교도(혹은 불교나 특정한 사찰, 불교종파)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과 불교인들이 기독교인들(혹은 기독교나 특정한 교회, 특정한 교파)을 흑색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물론 그것은 사건을 일으킨 당사들의 도덕적 혹은 사회적 윤리의식의 결여라는 종교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벌인 경우에 주로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 종교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뉴스를 본다면 참 종교인은 그것이 자신이 믿는 종교라면 더욱 반성을, 다른 종교라면 반면교사로 삼는 것과 동시에 상대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종교를 믿는 목적은 타 종교를 비난하거나 비평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은 불교에 대한 편견이다. 아니 편견이라기 보다는 그저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광신적 배타주의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조건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결코 한국인으로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불교 역사는 16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국교로 믿어온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200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불교신자들이었다. 이땅에 구교인 천주교가 발을 디딘 것이 200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불과 100여 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의 80%가 불교문화재이다. 그러니 한국인의 정체성에 불교적 유전자가 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 300년쯤 뒤에 기독교가 여전히 우리나라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기독교 문화재가 국보급 문화재로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재로 부상하게 되었을 때 불교도들이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배척한다고 상상하면 기분이 좋을 것인가.









그리움이 있다는것은 내가 존재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울 불친님이 옆에 계시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올려서 잘 보고 갑니다.
날씨가 정말 화창한 주말이에요.
날씨만큼 화사한 주말 되시구요.
감사의 뜻으로 공감 꾹 누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