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5. 17. 15:42

<조선 건국의 비밀 42> 위화도 회군 이후의 정치상황7 ; 이성계파의 반대파 제거 음모3


지용기(池湧奇) 역모 사건(1391)

 

지용기(池湧奇 ; 1330~1392. 4)는 충주 출신으로 호는 의재(毅齋)이다. 공민왕과 동년이며 공민왕 대에 여러 번 삼사사(三司事)를 지내고 삼사우윤을 역임하였다.


우왕 대에도 예의판서, 밀직부사 등을 지냈고 1378년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와의 전투에 참여하여 격퇴하였으며, 1381년 지밀직사사 재직 중 전라도 원수가 되어 왜구와의 싸움에 다시 참여하였으나 패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양광, 전라, 경상도 조전원수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과 함께 전라도 나주 반남현에 쳐들어온 왜구와 싸워 격퇴하였다.


1384년 문하평리로 전라도도원수룰 겸하였으며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구와 싸워 승리하였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 부원수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 부장으로 참가하였다가 이성계와 함께 회군을 단행하였고, 그 해 이성계, 정몽주, 심덕부, 설장수, 정도전 등과 함께 폐가입진(廢假入眞)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출하고 공양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워 공양왕 옹립 9공신의 한 명이 되었다.


이 공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고, 중흥공신녹권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나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 때 관련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강원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에 사헌부 대사헌 김사형 등이 그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한 공로를 정상 참작하여 죄를 경감하고 공신호와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 진의귀 등은 그가 역모(逆謀)를 꾸몄다고 하여 매 100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한 후 삼척으로 유배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 감형되어 외방에서 편리를 따르도록 허락받고 풀려났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1391년 지용기(池湧奇)의 부인 서씨(이천 서씨로 서희의 후손)의 친정 재종(再從 ; 6)지간인 왕익부가 지용기의 집을 드나들었는데 그가 스스로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 왕우(공양왕의 동생이자 이성계의 사돈)가 이를 입수, 지용기(池湧奇)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을 일으켜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꾸몄다고 고변하였다.


이에 사평부(司平府)에서 왕익부 등을 국문한 후 왕익부와 그의 동생 왕득부 및 일족 13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지용기(池湧奇)도 위기에 처했으나 그와 친했던 승려 신조(神照)의 도움으로 공신녹권과 임명장만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낭사 진의귀 등이 지용기(池湧奇)의 처벌을 다시 건의하였다. 하지만 공양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의귀 등과 헌사에서 또 다시 지용기(池湧奇)의 처벌을 집요하고 강력히 주장하자 정몽주와 조준을 불러 의논한 후 공장 백대를 쳐서 충청도 목천으로 유배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였다.(다른 기록에 따르면 벽지에 감금되었다가 목천으로 이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함) 13924월에 거주지를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허락했지만 얼마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것은 지용기(池湧奇)가 문신 출신이지만 무신으로도 인정을 받아 문무를 겸한 당대의 인물로 성장하자 이성계파가 미리 제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용기(池湧奇)는 전장에서 관우, 장비의 용맹에 비교될 정도였고, 곽자의, 이광필(당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장수들)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지용기(池湧奇)가 충의군에 봉해질 때 내려진 교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이성계파는 변안렬, 지용기(池湧奇) 등 이성계파를 위협할만한 무신들의 싹을 아예 지우려하였다. 이성계파의 이러한 무신제거작전의 이면에는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불신과 무시를 기본으로 하고 무신 집권기 이후 계속된 무신에 대한 복수심리도 가미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용기(池湧奇)의 무덤은 당진에 있으며 그의 처와 합장되었다. 지용기(池湧奇)는 사후에도 신원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용기(池湧奇)가 과연 역모(逆謀)를 꾸몄느냐의 증거는 그의 아들 지유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아들 지유용(池有容 ; 1363~1437)은 처벌받지 아니하였다. 원래 역모(逆謀)는 이를 행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연좌하여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들 지유용은 태종 때 사재감으로 당시 세자 양녕대군이 하정사로 명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으며, 세종 때 지영강현사, 영강진 첨절제사, 우군 첨총제, 판경성군사, 판경성부사, 경성도호부사, 강계절제사, 판의주목사를 지내다가 1437(세종 19)에 죽었는데, 사위는 우의정 조연의 손자 조운명이다.


지유용의 손녀사위 중에는 태조 이성계의 동생 의안대군의 손자인 이의구도 있다. 그밖에도 며느리들은 알만한 집안 출신들이고 손자들도 출세하였으며, 손녀들도 명문가에 출가하였다. 과연 역모(逆謀)를 꾸민 지용기(池湧奇)의 가문이라면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들을 살려주었음은 물론 왕권이 가장 강하던 태종, 세종 대에 지유용이 활동하였으니 만약 그가 역적의 아들이었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용기(池湧奇)의 역모사건은 비록 그의 집에 왕익부 등이 드나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음모에 이용한 왕씨 말살정책의 일환이자 이를 빌미로 우환이 될 수 있는 지용기(池湧奇)를 제거하려는 술수였다.


한편 2007년도에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진도군지>에 의하면 지용기(池湧奇)가 왕익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1391년에 곤장 100대를 맞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도에 유배된 지용기(池湧奇)는 지금의 지산면 거제리 앞 해변가에 원정(院亭)을 짓고 시를 읊으며 낚시를 하면서 소일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지은 원정의 터가 지씨원정(池氏院亭)’이란 이름으로 전해졌으며, 지씨원정(池氏院亭)은 조선시대에 유배되어 온 인물들의 강학소로 이용되었고, 특히 노수신이 지씨원정(池氏院亭)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옥주지>에 있는데, 현재도 지씨원정(池氏院亭) 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도 지용기(池湧奇)가 곤장 백대를 맞았다고 되어 있다. 곤장 백대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체벌이 아니다. 곤장 백대를 맞으면 거의 대부분 장독에 의해 죽는다. 그럼에도 목천이건 진도건 간에 유배당했다면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느 기록에도 곤장을 맞은 지용기를 치료해주었다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천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거나 진도에서 유배 생활 중 원정을 짓고 시를 읊었다는 것은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성계파가 지용기를 음모에 이용하였다는 간접적인 정황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파의 누군가가 지용기에게 어차피 너는 죽는다. 하지만 네가 죄를 인정하면 네 가족들은 처벌하지 않고 약간의 체벌만 가한 뒤 유배지에서 편하게 생을 마감하도록 해주는 것은 물론 네 아들의 입신도 보장해주겠다.”고 했을지 누가 알 것인가


이렇듯 이성계파는 급진개혁파답게 자신들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위화도 회군 이후 약 3년여에 걸쳐 반대파 혹은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몇 가지 사건을 이용한 음모로 거의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와중에 공사전적을 불태움으로써 사전을 혁파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니 이 때 새로 도입한 토지제도가 바로 과전법이다.


수전수전지법에 의한 전시과제도에서 과전법으로 바뀐 것이다. 이로써 고려의 근간을 바꾸었으니 이제 새로운 임금으로 이성계만 추대하면 역성혁명파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이제 과전법의 반포와 시행에 대하여 알아보자.  




작성자님의 식견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깊은 지식을 이렇게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