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5. 22. 11:50

<조선 건국의 비밀45> 7. 조선의 건국 ; 이성계의 위기와 고려왕으로의 등극


1)조선 건국 직전의 상황

 

위화도 회군 이후 김저사건 등을 통해서 이성계파가 살해한 인물들 대부분은 무신들이었다. 무신 제거는 그 무신들을 반대하는 문신의 포섭에도 활용될 수 있었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변안렬, 조민수 등의 사전혁파의 반대, 공양왕의 이성계 견제 등에 대한 대책으로 이성계파의 지나친 사건조작은 오히려 반대급부로 이성계파에 대한 반감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시행한 것이 회유와 포섭 내지는 길들이기 작전이었다.


예를 들면 심덕부(沈德符 ; 1328~1401)는 공양왕 2(1390) 11월 김종연사건으로 연루되어 유배당했으나 이듬해 9월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복귀하였다. 정희계(鄭熙啓 ; ?~1396)는 최영과 함께 유배당했다가 풀려났으나 김저사건으로 다시 유배당했다가 13926, 이성계가 등극하기 직전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복직하였다.


유만수(柳曼殊 ; ?~1398)는 창왕 즉위년(1388) 8월에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응양군상호군으로 근무하다가 공양왕 4년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회군공신이라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이성계파에 의해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거나 제거당한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최영과 그의 측근들(김저, 정득후)

  ⓑ조민수(사전혁파 반대로 유배 후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창녕으로 유배), 변안렬, 왕안덕, 이을진 등은 김저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사망. 정지, 우인열도 유배당했다가 풀려남.

  ⓒ니성원수 홍인계, 전라도 순문사 윤유린, 체찰사 최공철윤이· 이초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獄死)하였고, 우인열은 청주 옥사에 갇혔다가 풀려남.

  ⓓ김종연사건으로 김종연 옥사, 박철상, 박가흥은 하옥되었고, 심덕부, 지용기, 박위, 정희계, 윤사덕, 이빈, 진원서 등은 유배당하였다. 이중 지용기는 다시 역모 사건에 휘말려 곤장을 맞고 유배당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문신으로는 이색(유배), 이종학(이색의 아들. 유배), 문달한(유배), 하륜(유배), 이숭인(유배), 권근(유배), 우현보(유배). 이밖에 이림, 이귀생(이림의 아들), 진을서, 조언, 안주, 곽선, 최철석, 권중화, 이인민, 장하, 경보 등도 유배당함.

 

이처럼 이성계파가 유독 무신들을 엄격히 다룬 것은 이미 전부터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반감이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해야 이성계를 등극시키는데 장애가 없거나 등극 후에도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살아남은 무신들은 이성계의 최측근 무장들이거나 회군공신 중 한 번 이상 유배당했다가 복권된 무신으로 이성계파는 이미 한 번 유배당한 무신들은 세력이 제거되어 반란을 일으킬 힘도 없고 길들이기 쉽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과전법(科田法) 반포(공양왕 35) 이후에도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에 대한 제거 작업은 계속되었다.

 

왕담과 성균사예 유백순은 이성계를 무신난을 일으킨 무신에 비유하였다가 유배당하였고(공양왕 37), 전 전의부령 김전과 전 호조판서 정사척은 호불론(好佛論)을 전개하였다가 탄핵받았으며, 판전의시사 유백유는 과전법 반포를 비난하였다가 유배당하였다.

 

2)정몽주의 반격과 이성계의 위기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중립을 지키던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파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성계파는 1391(공양왕 3) 5월에 과전법(科田法)을 반포하였다. 이는 이제까지의 통치 질서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 체계를 확립하자는 것으로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사전 포석이었다.


정몽주는 더 이상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특히 과전법(科田法) 반포 직후 정도전이 이색(李穡)의 목을 벨 것을 요청하여 사면되었던 이색(李穡)이 다시 유배를 당하자 7월에 더 이상 참지 못한 정몽주는 공양왕 즉위 후 그동안 논란거리가 되어 온 사건 5가지(김저사건 , 윤이· 이초 사건 등)를 들고 이의 처리가 적절치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이색(李穡)의 석방을 건의하고, 앞으로 이 5가지를 문제 삼을 경우 무고죄(誣告罪)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릴 것을 공양왕에게 건의하였다.


이것은 정몽주(鄭夢周) 독단의 것이 아니라 과전법 반포 직후에 관리들의 반대여론이 심화된 상황에서 이를 대변하듯 나온 요청이었다. 그러자 9월에 이성계가 사직을 요청하였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위협할 때나 혹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한 후 여론이 나빠지면 반발 무마용으로 사직을 빈번하게 이용하였다.


이번에도 과전법 반포로 여론이 나빠지자 사직을 청한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여론이란 백성들의 민심이 아니라 조정 신하들의 여론, 즉 대다수 신하들의 반발을 말한다) 그러자 공양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성계의 사직서를 받고 이에 더하여 이색(李穡)의 처벌을 주장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을 대간(臺諫)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봉하에 유배 보내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 정담도 모두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또한 윤이(尹彛이초(李初) 사건을 제기한 장본인 조반(趙胖)을 공전(公田)을 탈취한 혐의로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죽림에 유배하였다. 아울러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우현보(禹玄寶) 등을 사면하고 조정으로 다시 불러 들였으며, 이색(李穡)을 한산부원군에, 우현보를 단산부원군에 봉하고 대간(臺諫)은 정몽주(鄭夢周)와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인물들로 채웠다.


이것은 공양왕이 이성계를 견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태울 때 이미 고려의 통치 질서 체계가 무너진 것에 비통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이성계파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써 이성계의 사직을 기정사실화하자 이 때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색이 이성계의 사저(私邸)를 방문하자 이성계가 꿇고 앉아 이색에게 술을 올리면서 이색에게 서서 마실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공양왕 311). 그만큼 이성계의 사직은 실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최대 위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공양왕 4(1392) 3. 우여곡절 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복귀한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던 중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역성혁명파를 축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던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가 부상으로 칩거하자 그의 측근들을 모두 제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정도전은 이미 유배 중이었고,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공양왕이 전부 유배시켰. 이제 남은 것은 이성계 뿐이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 때 이성계를 직접 내치진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이성계만큼 대단한 무장이 고려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구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패의 신화를 가진 이성계를 제거할 경우 국방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정몽주는 이성계가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무장으로서 그를 따르던 정도전, 조준 등의 무리들이 이성계를 배경으로 하여 이성계를 부추기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장에서부터 이성계의 조전원수로서 이성계를 보좌하면서 이성계를 지근거리에서 많이 보아온 정몽주인지라 이성계에 대해 남다른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정몽주는 이성계보다는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 있는 설로는 이성계가 반발하여 그의 강력한 친병(이미 핵심 중앙군으로 편제되어 3군도총제부 소속의 중앙군이 되었으나 어차피 그들은 이원계, 이화, 이지란 등이 지휘하면서 이성계의 말 한 마디면 당장 칼을 들고 나타날 군사집단이었다)이 거사를 일으켰을 경우 이를 막을만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두 가지 요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본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을 제거하고 이성계는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틀림이 없다. 특히 정몽주는 이성계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부상을 당하자 이성계의 대표적인 측근들을 모두 제거한 정몽주는 이성계의 사저(私邸)를 찾아 병문안을 갔다.


이 때 정몽주의 측근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憂慮)를 나타내자 정몽주는 이성계와의 신의를 내세우며 병문안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성계를 찾아갔던 것이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 외에 그의 속내가 알려진 바 없으나 정몽주가 이성계의 주요 측근들을 전부 유배 보낸 후에 이성계에게 병문안을 간 것은 이미 대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고 이젠 예전처럼 무장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해 주기를 내비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에는 병문안이라는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선전포고였을 수도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 또한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손발이 잘린 마당에 마땅히 이성계가 할 일은 없었다. 이미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고,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은 모두 유배당했거나 축출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부상 중인 자신이 무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라 하루 빨리 몸부터 추스르려고 하였다. 이 때 과감히 나선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이성계의 심복 조영무, 고려, 이제 등을 사주(使嗾)하여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방심하던 정몽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고 그가 생각한 개혁은 한 순간에 뜬구름이 되고 말았으니 그것은 곧 고려의 멸망과 직결되었다.

 

일반적인 역사서에는 정몽주가 죽고 난 후에 이성계가 얼마 후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1392426일 정몽주가 살해되고 나서부터 717일 이성계가 등극하기까지의 약 3개월 동안의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미 조정은 절의파 정몽주당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원천적 힘인 무력을 기반으로 위협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다시 요직(要職)에 복직시켰다. 그리고 당연하듯이 이번에는 이성계파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거의 정권을 장악하였다고 생각하였다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뻔하였던 이성계파는 이번 기회에 반대파를 모두 축출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안위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밀직사사 이숭인, 이색의 아들 이종학, 우간의 이래, 우헌납 권홍, 산기상시 김진양, 우상시 이확, 판삼사사 설장수, 동지밀직사사 이빈, 예조판서 김이, 병조총랑 안노생, 예조총랑 최관, 전 대사헌 강회백, 정언 유기, 우부대언 이사영, 지신사 이첨 등 24인을 정몽주당으로 몰아 옥에 가두거나 유배 보냈다.

 

이성계파의 반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몽주당을 축출하였으니 이제 남은 인물들은 왕씨 성을 가진 고려 왕실의 종친들과 그 인척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이성계를 등극시키는 것도 힘들지만 이성계가 왕이 된 후에도 그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1392(공양왕 4) 6월에 왕화, 왕규, 왕기, 왕서, 왕자, 왕담, 왕복 등 고려 왕실의 종실 종친들과 우현보(禹玄寶), 우현보의 아들 우홍수 등 우현보 아들 5명도 모두 유배 보냈다.


우현보당으로 몰려 유배당한 인물들은 우현보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18명에 이른다. 이들 18명은 정몽주당에 속한 자들보다 일반적으로 품계나 직책이 높았다. 이성계파가 우현보를 포함한 이들을 우현보당으로 한꺼번에 몰아 유배시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우현보의 아들 중에 우홍수가 있고, 우홍수의 아들 즉 우현보의 손자가 우성범인데 그가 바로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바로 공양왕의 손발을 모두 자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성계파는 이성계를 즉위시키는데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을 전부 제거하려했던 것이다.   

 

결국 손발이 모두 잘리고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된 공양왕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느끼게 되자 7월에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와의 동맹을 제의하였다. 제의의 내용은 이성계에게 의지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전에 우왕(禑王)이 자신의 유모 축출사건 때 최영이 자신을 겁박하였지만 결국에는 최영에게 의지하면서 그의 서녀(庶女)를 비()로 맞이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미 대세가 완전히 이성계에게 기울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최영과 달랐다. 최영은 마지막에 우왕 편에 섰으나 이성계는 공양왕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자신의 인척이라서 옹립한 공양왕이 사사건건 자신의 일에 방해를 하려했는가 하면 정몽주를 두둔하여 자신의 측근들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위태로움을 느낄 상황까지 몰고 간 배후가 바로 공양왕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성계파는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된 마당에 공양왕의 동맹제의를 받아줄 필요가 없었다. 특히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은 그동안 공양왕이 보여준 행태에 극히 배신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성계파의 배극렴은 공민왕의 비인 정비 안씨에게 공양왕 폐위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대비도 이미 기운 대세를 돌릴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하는 수 없이 명을 내려 공양왕을 폐위시켰고 이성계파는 공양왕을 원주로 방출하였다. 그리고는 양위(讓位) 형식을 빌려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즉위하였다.


공민왕의 정비 안씨의 힘을 빈 것이나 양위(兩位) 형식을 이용한 것, 그리고 즉위 후 반포한 17가지 개혁안을 보면 이 모두가 이성계가 고려의 권위를 빌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비록 그것이 곁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공양왕을 폐하여 원주에 유배 보낸 후에도 이성계파는 단양군 우성범(공양왕의 사위), 진원군 강회계(공양왕의 사위)를 참수하고 강회계의 부() 청성군 강시를 유배 보냈는가 하면, 성식린(성식린의 딸은 공양왕의 동생 왕우의 아들에게 출가)을 비롯하여 예문관대제학 한천, 전 밀직 유혜손, 개성소윤 유향, 선공부령 김윤수, 정당문학 이원굉, 밀직제학 성석용, 군자윤 강회중 등을 공격하여 유배 보냈다. 이렇게 이성계파의 정적 제거가 종결되자 이제 남은 수순은 새 왕조를 굳건한 토대 위에 구축하는 길 뿐이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의 낙마사고를 틈타 이성계의 측근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뒤 그를 병문안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한 것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이방원과 이성계의 측근 무장들의 생각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된다. 누구라도 반대파의 수장 집을 방문할 때는 자신을 경호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정몽주(鄭夢周)는 그리하지 않았다.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정몽주는 이성계파 대부분이 유배당한 터라 너무 안이한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그만큼 이성계를 믿었다는 말도 되지만 모든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사고라는 절호의 기회로 이성계의 측근들을 모두 유배 보내면서 조정을 장악하였지만, 마지막에 방심한 결과 자신은 살해당했고 공양왕도 쫓겨났으며, 이성계는 임금이 되었다. 정몽주의 신의 한 수도 결국 마지막에 패착을 함으로써 그가 평생 계획했던 개혁을 통한 고려 국운의 재기는 허망하게 끝나고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파는 절대적인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훈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하여 반대파를 철저히 제거하는 당파싸움의 전초를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