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5. 29. 14:47

<조선 건국의 비밀 57> 7. 조선의 건국 ; 조선 건국의 주요 인물들8(황희석, 안경공, 유원정, 이직)


황희석(黃希碩 ; ?~1394 태조 3)

 

황희석(黃希碩)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군호는 평해군(平海君),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평해 황씨는 고려 때 금오위대장군을 지낸 황온인을 시조로 삼고 있는데, 3세조 황유중과 4세조 황서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여 권문세가로 발돋움하였다. 평해는 현재 경북 울진군 평해읍이다.


황의석(黃希碩)3세조 황유중의 손자이며 그의 부친은 고려 말에 판서(判書)를 지낸 황천록이다. 황희석은 원래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가 환속,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정도전과는 사돈관계로 인척이며, 1381(우왕7)에 왜구가 명량향(鳴梁鄕)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소란해지자 체찰사로 파견되어 민심을 수습하였고, 얼마 후에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에 임명되었다. 13837월 요심(遼瀋)의 호발도가 단주에 침입하자 다른 단주상만호 육려, 청주천호 이지란 등과 연합하여 해양(海陽) 등지까지 추격해 격퇴하였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청주상만호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통제사 이성계의 무장으로 출병하였다가 회군에 참여하였으며, 회군이 성공한 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고, 1389(공양왕1)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13923월에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사고를 당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이성계를 보호하였으며, 이 시기에 정몽주가 이성계파를 제거할 때 무신인지라 화를 면하였고 4월에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몽주당을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에 황희석은 구성로(具成老) 등과 더불어 제군사부(諸軍事府) 군관 200여 명의 연서를 받아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이것은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중요한 명분을 세운 공로가 된다. 조선 개국 이후 원종공신 28인에 이름을 올렸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 조선 개국 시(1392. 7. 17) 부친상을 당하여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같은 해 1119일 태조의 특지(特旨)에 따라 개국2등공신에 추가로 책록되면서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겸 의흥친군위도진무에 올랐다.


이것을 보면 황희석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신뢰가 상당하였음과 그가 조선 개국에 어느 정도의 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역임하던 중 139483일 병사하였다.


그가 질병에 시달리자 태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해주기도 하였으며, 죽은 후에는 서제(庶弟)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를 보내어 예장(禮葬)과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였다. 사후 문하시랑찬성사로 추증되었다. 가족으로는 아들 황상 등 4형제를 두었으며 사당은 평해군묘로서 양무공사(襄武公祠)라 하며 충북 증평군 증평읍 죽2(원평)에 있다.


태종 때 권희달이 황희석은 환속한 승려인데도 개국공신에 책록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를 보면 조선 초기인 태종 때 이미 조정 대신들은 성리학으로만 무장하여 편협함이 가득한 채 억불숭유하려고 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희석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개국공신의 녹훈을 유지한 것은 물론 그 후손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조선 성리학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조선의 성리학이 억불숭유에 앞장서서 불교를 탄압하였지만 권희달 같은 성리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황희석의 녹훈을 추탈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에서 배제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국공신에 대한 특별한 예우도 한 몫을 하였겠지만 이것은 조선시대 학자 및 관리들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한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장담과는 상반된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열망 중에는 청사(靑史 ; 역사상의 기록)에 길이 이름을 남기려는목표가 뚜렷하였다. 그만큼 역사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격화되어 국력을 소모한 일들 등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한편 1932106일에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이 사리갖춤은 조형적 특징과 미술사적 위상이란 면에서 크게 주목되기도 하지만 정치색이 짙은 특이한 유물이다.


여기에는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 은제조금 팔각당형 사리기, 청동발, 백자발 등이 발견되었는데 2008년 주경미 교수에 의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져 학계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주교수에 따르면 이 사리갖춤은 이성계 부부가 핵심이 되어 불사(佛事)를 일으켰고 주된 내용은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명문에는 이성계, 부인 강씨(신덕왕후)가 새겨져 있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조반사건을 해결하고 권력의 실세가 된 이후로 보인다. 그런데 팔각당형 사리기의 명문에는 경오년(庚午年 ; 1390= 공양왕 2)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원자들 명단에 보면 강양군부인 이씨, 낙안군부인 김씨 등 다수의 상류층 여성 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영삼사사 홍영통(洪永通)¹, 동지밀직 황희석(黃希碩), 그리고 박자청(朴子靑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백자발의 명문에는 이성계와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공양왕 3(1391) 4월에 장차 미륵이 세상에 오기를 기다리며 발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로 볼 때 당시 고려 말에도 신라 말처럼 미륵신앙이 유행했으며, 시기상으로 볼 때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잡은 후 발원한 것이므로 인연이 깊은 불자들과 무려 1만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불교 성지 금강산으로 가서 불사를 벌임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미륵세상을 만들려는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런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킬 정도로 이성계의 위치와 권력이 대단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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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홍영통(洪永通)은 고려 후기 유명한 재상 홍자번의 증손으로 신돈 집권 시 중용되었으나 신돈 몰락 후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이인임에 붙어먹으면서 온갖 원성을 들었던 전형적인 간신이나 또한 발 빠르게 움직여 이성계파에 협조함으로써 조선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참고2)박자청(朴子靑 ; 1357~1423)은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인물이다. 간단히 말해서 태종 대에 유명한 토목공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원래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으로 평민 출신인데 내시로 출사해 무신인 낭장이 되었고 조선 건국 후 중랑장으로 승진한 후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내상직이 되면서 어전 밖을 지켰다. 선공감소감, 오익사대장군을 거쳐 태종 대에는 공조, 예조전서, 1406년에는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가 되는 등 주로 영선(營繕 ; 건물을 새로 짓거나 보수는 일)을 맡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413년 지의정부사를 지냈고 좌우군도총제를 거쳐 1415년 판한성부사, 1419(세종1) 참찬의정부사,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초기의 모든 건출물에는 그의 땀과 노력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문묘, 제릉, 건원릉 공사를 감독하였고, 경복궁, 창덕궁, 종묘, 성균관, 청계천은 물론이고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었던 태종의 묘 헌릉을 마지막으로 만들었다. 한양을 기획한 것이 정도전이라면 이를 완성한 사람은 박자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가우디라고 불린다. 평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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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공(安景恭 ; 1347~1421)

 

안경공의 본관은 순흥(順興 ; 현재의 영주)이고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조부는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으로 안축(安軸)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한 후 고려에 와서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를 지냈다.


안경공(安景恭)의 부친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 ; 1325~1394)이며 모친은 우상시 김휘남의 딸이다. 1365(공민왕1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무관직의 하나), 낭장 겸 사헌규정을 거친 뒤 1376(우왕2) 의영고부사로 재직 중 동진사(東進士 ;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전리좌랑, 전법좌랑, 사헌지평, 예의정랑을 역임하였다. 1382년 경상도안렴사로 있으면서 합주(현재의 합천)에서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 초군장군, 산군장군 등을 칭하며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 판통례문사진현관제학, 판전교시사지제교예의판서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고, 1390(공양왕2) 정몽주가 윤이, 이초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했다고 탄핵했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1391년 예문관제학이 되었고, 1392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좌대언에 올랐다.


이 해에 조선 건국에 참여했으며, 곧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공신이 책봉될 때 3등공신이 되었다. 1393(태조2)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겸 도평의사사보문각학사에 올랐고, 같은 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1406(태종6) 판공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판한성부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정탁, 유창(유경), 조견, 한상경, 조온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1398(태조7)의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과 남은의 죄를 감해주도록 요청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죄를 받지는 않았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집현전대제학에 특별 임명되었고 흥녕부원군으로 봉작되었으며 142175세로 사망하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1 경재(卿宰) 편에는 안경공(安景恭)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윤회(尹淮 ; 윤소종의 아들로 1422년 집현전 부제학을 지냄)가 지은 안경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원전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 중 상기 내용과 겹치는 부분을 제외하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안경공(安景恭)은 가훈(家訓)에 따라 조금도 부귀한 집 자제의 습성이 없었으며, 온화하고 선량하며 효제(孝悌)하였다. 조선 건국 후 두 번이나 사헌부(司憲府)에 있으면서 정도를 지키면서 굽히지 않았으며, 풍채가 엄숙하였다.


1394년에 부친상을 당했고, 복상이 끝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흥녕군에 봉해졌으며 1406년 판공안부사, 정헌대부,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숭정대부로 승품되었다. 1408년 모친상을 당했는데 약물의 봉양과 상장이 예법에서 정성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1410년 태종이 송도(松都)에 거동해서 안경공(安景恭)을 개성유후(開城留後)로 삼았다.


안경공(安景恭)은 언제나 나라 일을 걱정하며 여러 사무를 합당하게 처리하였고, 대신이 되고서는 법도를 따르며 장중(莊重)하여 조정의 귀감이 되었다. 일찍이 경상도안렴사와 전라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는 풍교(風敎)를 이어받아 선정을 베풀면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보살피어 너그럽고 간소하게 하며 까다롭지 않게 하였으므로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1421(세종3) 정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 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안경공(安景恭)이 병이 걸렸을 때 태종과 세종이 급히 어의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며, 중사(中使 ; 왕명을 전하던 내시)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양궁(兩宮 ; 상왕 태종과 세종)이 애도하며 조제(弔祭)를 후하게 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크게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였다. 227일 경신(庚申)에 금천 백사동 언덕에 장사지냈다.


안경공(安景恭)은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신실하며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삼가고 신중하게 하여 일찍이 권세를 좇아 부침하지 않았고, 특별한 체하며 겉으로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사귀고 일을 처리하는데 성심으로 하고 허위가 없었으며, 마음속으로만 옳고 그름을 결정짓지 밖으로는 절대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만년에는 한가롭게 지내며 때를 가려서 외출하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꼭 술자리를 베풀되 오직 즐겁게 흡족함만 취하였고 호사(豪奢)함은 숭상치 않았으며, 흉금(胸襟)은 담박(澹泊)하여 남과 더불어 다투지 않았다. 안경공의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성명(盛名; 명성)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오직 그만이 천록(天祿 ; 하늘의 복)을 누리면서 나라의 원로가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적선(積善)의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안경공(安景恭)의 부인은 오천 정씨로 문정공 정사도의 딸이며, 아들 안순(安純)을 두었는데 안경공(安景恭)의 묘지명을 쓸 당시 숭정대부로 호조판서(戶曹判書), 보문각대제학에 재임 중이며, 안순이 정당문학 정공권의 딸과 혼인하여 43녀를 두었고 4남 중 차남 안숭선은 1420(세종2)에 장원급제 하는 등 4남 모두가 요직에 있고, 3녀 중 장녀가 사헌부대사헌 이숙치에게 시집간 것을 비롯하여 나머지 두 딸도 요직에 있는 조혜, 김준례에게 시집갔다. (중략)

 

내용을 보면 안경공(安景恭)은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고 부친 안종원(安宗源)은 청렴한 관리로써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진중하게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히 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말의 과거급제자는 거의 이색당을 거쳐 정몽주당에 속하던 시기이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것을 보면 성격이 신중하고 처세를 잘하여 온건파 내지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던 인물로 판단된다.


공민왕 대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지낼 때조차도 누구를 특별히 탄핵하는 일은 없었으나 환관의 폐단을 논하거나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지 않아 강릉으로 좌천을 당한 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밀수로 장사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한 점 등을 보면 그의 성품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공평무사하고 청렴하였기에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가 서로 공격하고 유배자가 수시로 나오던 시기에도 무사하였고, 급진개혁파가 되어 조선 건국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고려의 유신을 자처하며 구시대적 보수주의를 고집하지도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조선 건국 초기의 국정 안정화에 참여하여 많은 관리들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안경공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과 교육으로 자신 또한 격변하던 시기에 언행을 삼가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므로 주변 동우들게게 보신주의자라고 손가락질 받았을지는 모르나 묵묵히 자신의 일만 충실히 하여 조부-부친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순흥 안씨 가문을 명문으로 올려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안경공(安景恭)이 조선 개국에 특별한 공로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3등공신에 책록된 것은 그와 부친 안정공(安宗源), 순흥 안씨를 포용하려던 정치적 의도였을 것이다.

 

유원정(柳源廷 ; ?~1399 정종1)

 

유원정(柳源廷)은 문화(文化) 유씨로 충청도 서성(瑞城 ; 현재의 서산) 출신이며 1390(공양왕2)에 밀직부사로서 노왕(魯王)의 상()에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에 한양부윤이 되었다. 1391년 앞서 진위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사사로이 방물을 매매한 행위가 드러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한 후 남원으로 유배당하였다.


복귀 후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중추원부사를 거쳐 서해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다. 1396(태조5)에 그의 가비(家婢 ; 여자 종)를 살해한 갑사(甲士) 이부개를 가혹하게 처벌하려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인 점을 고려하여 사면되었다.


1398년 사위인 사헌잡단(司憲雜端) 전시(田時)가 왕실에 대하여 불경한 말을 한 데 연루되어 죄를 받게 되었으나 역시 공신의 예우로 사면되었다. 그는 문재(文才), 무재(武才)도 없는 인물이었으나 정승 조준과 친하였으며, 그의 천거로 높은 벼슬을 지내고 개국공신이 되었다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개국3등공신임에도 유원정(柳源廷)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 1374(공민왕23)에 정지(鄭地)를 추천하여 그를 중낭장, 전라도안무사로 발탁한 일이 있는 것을 보면 고려 후기에 이미 출사하여 인사 추천을 할 정도의 관직에 있었으며, 정지(鄭地)가 무신으로서 승승장구하여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도원수로 이성계 휘하의 무장으로 출병했다가 회군에 참여, 회군공신이 된 것과 유원종이 어떤 경로에서 조준과 친하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인맥이 있어 이성계파의 일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동국통감 고려 공민왕 23(1374) 봄 정월 조 기사에 보면 유원정이 중랑장 정준제(정지의 초명)를 비호하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 유원정(柳源廷)의 관직을 위사(衛士)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려사> 열전 임박 편에 보면 유원정(柳源廷)이 공민왕이 살해당했을 때 빈전도감의 판관을 맡았었는데 성품이 강직하여 거리낌 없이 직언하였으므로 공민왕의 시강으로 있을 때 크게 기대를 모은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임박이 공민왕이 죽은 다음날 공민왕의 빈소 곁에 있으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고 선왕이 그대를 두고 사직을 지켜갈 신하라고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슬픔을 망각하고 웃으니 이는 충신의 태도가 아니오.”라고 꾸짖자 나중에 임박이 권세가 높아졌을 때 유원정을 미워한 나머지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유원종(柳源廷)이 어떤 인물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편이라 생각되며, 이런 성품으로 인해 조준이 4년간 은둔할 때 유원종(柳源廷)과 교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반면에 <고려사> 열전 김주 편에 보면 한양부윤 유원정(柳源廷)이 아들을 혼인시키려다가 며느릿감이 될 여인에게 반하여 유원정이 그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풍속을 어지럽힌 죄가 있으므로 이를 탄핵하여 유원정을 유배 보낸 일이 기술되어 있다. 이를 보건대 나이가 든 후 유원정의 인물됨은 젊은 시절과 또 다른 면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건데 유원종(柳源廷)은 과거급제자 출신이 아니며 문음(門蔭)으로 출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문재(文才)나 무재(武才)가 없는 것을 알고 자신이 살아남아 출세하기 위해 교우관계를 특별히 하면서 실세가 될 만한 사람들과 인맥을 쌓아 그들의 도움으로 출세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밀매로 장사를 하였고, 한양부윤 재직 시 며느리 될 여자를 자신이 취한 것 등을 보면 전형적인 소인배가 분명하므로 그의 인품이 공신에 들 자격이 없는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그가 3등공신에 책록된 것은 조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을 지와 당시 역성혁명파는 물론이고 그들을 도운 이들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원정(柳源廷) 같은 인물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물이 공신이 되었음을 보고 후대 수백 년 동안 성리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눈에 선하다


이직(李稷 ; 1362 공민왕 11 ~ 1431 세종 13)

 

이직(李稷)은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이다. 증조는 고려 후기의 유명한 문신 매운당 이조년(李兆年)이고, 조부는 검교시중을 지낸 이포, 부친은 문하평리를 지낸 이인민(李仁敏)이며, 흥안군 이제의 사촌형이으로 이인임의 조카였으니 가히 고려 말 가장 막강한 권문세가 출신인 셈이다.


따라서 이직(李稷)은 공부를 등한시해도 출세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지만 성리학을 공부하여 1377(우왕3)에 불과 16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될 정도로 문재(文才)가 대단하였으며, 이후 사헌지평, 전교부령, 종부영, 밀직사우부대언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知申事)로서 개국3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 중추원학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7(태조6)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1399(정종1) 중추원사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해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1401년 좌명공신 4등이 되었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로서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六曹)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에 올랐고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 영흥부윤이 되었으며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고 1410년 천릉도감제조로서 덕릉, 안릉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414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으나, 1422(세종4)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이 해에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다가 1431년 사망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형재시집>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태종실록에 보면 태조 이성계는 이직(李稷)을 두고 자신이 총애한 이제의 사촌형이라 발탁했다(태종실록 155133번째 기사)고 하였지만 공신도감에서 그러한 이유만으로 아무런 공이 없는 이직(李稷)을 공신으로 선정할 리는 만무하다.


즉 이직(李稷)이라는 인물이 이제의 사촌형이라는 기본적인 토대 위에서 충분히 조선 건국 후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선정하였을 것이며, 여기에는 이직(李稷)이 비록 이인임의 인척이지만 매운당 이조년의 후손으로서 그의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포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까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공신에 오른 이직(李稷)은 조선 건국 초기에 명나라에 4차례나 왕래하면서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였고, 각종 제도를 마련하거나 한양 도성 건축과 동북 성곽 구축 등과 같은 토목공사에서도 재능을 보인 능력 있는 행정가형 관리였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직(李稷)의 아내는 하륜의 처 이씨의 사촌동생으로 이직(李稷)과 하륜(河崙)은 사촌동서지간이며, 이직(李稷)의 장녀 신순궁주 이씨는 과부가 된 후 태종에게 출가하였고, 이직(李稷)의 차녀는 민제의 아들이자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동생인 민무휼에게 출가할 정도로 명문집안의 위세를 누렸다.


하지만 태종실록 15(1415) 510일 기사를 보면 황주목사 염치용에게서 노비 소유권에 관해 불평을 들은 민무회가 그 말을 태종에게 전한 일이 민무회, 문무휼 형제의 옥으로 발전되면서 이직(李稷)도 사위로 인해 그 사건에 휘말려 그들 형제를 감쌌다는 혐의를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고,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하여 유배당한 후 8년간 손님도 만나지 않은 채 밤낮 글만 읽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에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민씨 형제들을 비롯하여 외척이나 훈구척신, 권신들의 힘을 약화시키려할 때 이직(李稷)도 휘말린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1422년에 과부가 된 이직(李稷)의 장녀를 후궁으로 삼고 이직(李稷)을 불러들여 직첩과 공신녹권을 돌려주었는데 이는 태종이 왕권강화 및 정권안정책의 일환으로 벌인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쳤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태종 이방원이 이렇게 이직을 다시 복권시킨 것은 이직을 회유시켜 아들 세종 대에 불협화음이 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측면도 있다. 즉 자신이 벌인 일들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마무리 지어야 아들 세종이 성군이 되는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때 이직(李稷)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직(李稷)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딸 덕분이라고 하여 그의 죄를 다시 청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세종과 태종이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1424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제수하는 등 중용하였다.


신하들은 이직이 중용되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을 염려하여 이직에게 다시 죄를 물었지만 이직은 그런 소인배가 아니었다. 이직은 복권된 것은 기뻐하지 않았지만 다시 조정에 나아가 영의정 등 요직에 있으면서 지나간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고 하니 그의 인품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황희석이 정도전과 사돈관계라는 것은 근거가 있나요 ? 사서에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이직에 대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황희석이 정도전과 사돈관계라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니 삭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