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불이 문화재 여행기

민삿갓 2018. 6. 15. 23:00

독립문과 독립관(구 모화관)


개인사로 인해 촬영을 다주 다니지 못하므로 서울에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일찍 가서 문화재를 둘러보곤 한다. 이번에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를 촬영지로 정했다. 그런데 독립문에 가보니 인근에 독립관이 있어서 달랑 독립문 하나 있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않은 성과가 더 있었다.


(예전 영은문과 독립문. 암울했던 시기의 민족의 분노와 한이 타버린듯 빛바랜 사진 속에서도 느껴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촬영)


독립문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 착공하여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기존에 있던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 시공했고 현판은 김가진(조선 말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의 작품이다.


흔히 독립문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일합방에 대항하여 민족 자존의 기치를 높이고 위하여 세운 것이라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독립문은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만일 독립문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건축물이라면 왜놈들이 그냥 두었을리가 없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스스로 제후국임을 인정하고 명나라로부터 임금과 세자의 책봉을 받아왔다. 이것은 결국 소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은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을 건립하였다.


영은문(迎恩門)의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중화)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사대주의도 이런 사대주의가 없다. 이러면서 무슨 조선이 자주독립국이었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러니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몰랐으며, 명에서 요구하는 세공 또한 조선 조정에 큰 부담이 될 정도였지.


뿐만아니라 그런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치부하며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와 싸워야한다고 떠든 사대부들이 많았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따로 없고, 오로지 명분에 사로잡혀 나라의 국운이 어찌되건 상관없는 인간들이라 하겠다.


어쨋거나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겪으면서도 조선의 소중화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청감정은 꾸준히 이어졌고, 청나라가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조선 말의 선각자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모금을 하는 한편,  파리 개선문 사진을 보고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한 후 스위스계 우크라이나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에게 보내고 설계와 시공을 맡겼다. 일본은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위해 청일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국제법상으로 확인시켰다.


서재필은 이를 기회로 1896년 독립문 건설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켰다. 높이 14.28m, 폭 11.48m이며,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독립문 현판 글자 아래에는 오얏꽃 문양이 있다. 이 문양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독립문 앞에는 두 개의큰 돌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영은문을 철거한 후에 그대로 둔 것이다. 독립문 기공식 때 현판을 쓴 김가진은 삼전도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뜨렸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이전하여 지금의 위치에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정신빠진 인간들이 문화재를 철거하여 이전시키고 도로를 만들었는지 이 계획을 기안하고 시행하는데 참여한 이들을 욕해주고 싶다.


왜놈들이 조선을 합방한 후 도로를 내기 위하여 광화문 동쪽의 동십자각을 주변의 경복궁 담장을 허물어 동십자각을 경복궁과 아예 분리시켰는데 지금도 복원이 안 되어 동십자각은 독도처럼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 행각을 대한민국 정부인사들이 행한 것이다. 아무리 개발논리를 우선한다고 해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문에 대한 일반인 개방은 우여곡절 끝에 2009년 10월 28일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바라보는 독립문은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인 자긍심을 샘 솟게 하는 상징물이 아니다.  명나라에 스스로 제후국임을 자처하고,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고, 을사늑약으로 인해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를 당했던 소국(小國)의 아픔,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을 수백 년간의 한이 먼저 필자의 가슴을 예리하게 후빈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비록 우리나라 경제가 올 해에도 흑자가 이어지고 있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을 넘어설 것이라고 떠들지만 찬란한 번영이란 결국 지나온 아픈 역사의 발걸음 끝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는 번영의 발걸음은 또 언젠가 민족의 한스런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발걸음인지도 모른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언제보다도 더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시점이지만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힘없는 평화는 누구도 지켜주지 않음을. 솔직히 대한민국의 현재의 평화는 결코 우리 독자적인 힘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국방 실현을 위해 수십년 노력하였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이야기다. 


한반도에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더라도 우리의 안보를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것은 모래성과 같다. 우방이라고 떠들고 있는 일본 쪽발이 새끼들이 언제 또 다시 침략해 올 지 그 누가 알겠는가. 지금도 독도를 지네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판에. 굳건한 한미동맹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 때 가서 미국이 우리편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문은 스스로 자주적인, 진실로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는 그날까지 아마도 울고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백 여년 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백 년동안, 아니 그날이 되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아마도 독립문은 미소 짓지 않을 것 같아 안스럽기 그지 없다.


독립문을 바라보는 필자는 독립문을 결코 밝고 멋지게만 묘사할 수 없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비둘기 한 쌍이 독립문 앞에서 평화롭고 정답게 오후를 즐기고 있다.


비둘기야 너는 아니? 

너희 둘이 마음껏 자유롭게

하늘을 날으며 평화를 그릴 때 

독립문은 말 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백 년 전이나 오늘이나 그리고 또

앞으로도 오래도록 늘 그래 왔듯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도한다는 것을.

너희들의 사랑과 평화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너희들을 위한 누군가의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자리를 조금 옮겨서 독립관(구 모화관)으로 간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을 싱징하는 아파트 숲 아래 전통건축 방식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독립관이 위치해 있다. 이곳이 바로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영접하던 모화관이다. 원래는 동남쪽 350m 지점에 있던 것을 옯겨서 복원한 것이다.





현재 독립관은 순국선열의 얼을 추모하는 '순국선열 현충사'로 쓰이고 있다. 목천에 위치한 독립기념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모르는 것 같다. 서대문형무소 바로 옆에 있으니 서대문형무소를 찾는 관광객들은 이곳에 들러 묵념하길 바란다.


누군가 다녀갔는지 향 한 자루가 타고 있는데 필자도 향을 올리고 묵념한 후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땅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 청사에 빛나는 역사적 인물들이야 인구에 회자되지만 이곳에 봉안된 위패의 주인공들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이름을 알아도 누군지 기억할 수 없다. 이름만 있을 뿐 잊혀진 이름없는 용사라고나 할까?

이렇게 순국선열들의 위패들이 많다면 또 이름없이 죽어간 순국선열들은 얼마나 많은 것인가.








이곳에 안치된 위패의 주인들이 행동으로 실천한 자주독립의 의지가 곧 대한민국의 오늘이자 미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