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6. 19. 00:58

<조선 건국의 비밀 66> 7. 조선의 건국 ; 조선 개국원종공신에 대하여2(홍영통, 안종원, 우인열)



2)주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선정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7개의 녹권(錄券)을 통하여 이름과 직책은 알 수 있지만 다수의 백과사전에서도 이들의 대부분은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 등 그 이상의 정보는 거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일부는 청사(靑史)에 기록될만한 인물들이므로 이들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함으로써 개국원종공신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① 홍영통(洪永通 ; ?~1395)

 

홍영통(洪永通)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고려 후기의 충신 홍자번(洪子藩)의 증손으로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홍경(洪敬)의 손자이고, 선공부령(繕工副令)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홍승연(洪承演)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음보(蔭補)로 관직을 얻어 여러 벼슬을 지내고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안동부사를 거쳐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으나 김경유의 말을 빼앗은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후에 신돈(辛旽)에 의하여 다시 등용되어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나 1371(공민왕 20) 신돈이 주살되자 같은 당여(黨與)로 물려 유배되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 기용되어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이어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에 순성경절협찬공신이 되었으며, 판삼사사(判三司使)를 거쳐 1382(우왕 8) 마침내 최고위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년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고, 1388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된 후 1392년 왕조가 바뀌자 파직되었다가 곧 노인직(老人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복직되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호는 안민(安愍)이다.


생전에 홍영통의 행적은 많은 사람들(주로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들과 청렴한 무신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367(공민왕 16) 이준이 헌납(獻納)으로서 팔관회에 참석했을 때 홍영통의 횡포로 정당한 업무를 수행하던 이준을 비롯하여 좌사의대부 신덕린, 헌납 박진손, 정언(正言) 정리(鄭釐) 등을 폭행하여 우사의대부 탁광무가 홍영통을 탄핵하였으나 신돈에게 의지하여 처벌을 면하고 오히려 신덕린이 파직되었다.


홍영통은 신돈(辛旽)의 심복으로 활동하면서 악행을 여러차례 저지르다가 신돈 주살 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된 후 비리와 부패로 악명 높았던 이인임과 결탁하여 원성이 높았으며, 이인임이 물러나고 임견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조민수와 함께 시중(侍中)이 되어 왕명을 출납하는 내재추에 속했으나 다행히 임견미와는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기대지 않음으로써 조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거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런 인물을 태조 이성계는 물론이고 이성계파의 사대부들이 좋게 생각할 리 없었으므로 홍영통을 개국원종공신에 책봉한 것은 그가 고령의 고려 유신이자 남양 홍씨라는 명문 출신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남양 홍씨 중에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로 충혜왕(장남)과 공민왕(차남)의 모후인 공원왕후 홍씨(명덕태후)와 충선왕의 후궁 순화원비(공원왕후의 언니)를 배출하여 당시 명문으로 거듭난 가문이므로 조선 왕조가 이들을 포용하려는 정책에서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남양 홍씨의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을 가르치다가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해 신라로 피신한 후 신라에 유학을 발전시킨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양 홍씨에서는 선계(先系)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② 안종원(安宗源 ; 1325~1394)

 

안종원의 본관은 순흥(順興 ;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호는 쌍청당(雙淸堂), 부친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한 유명한 학자 안축(安軸이다. 1341(충혜왕2)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삼사도사(三司都事)를 거쳐 공민왕 초에 전법정랑(典法正郞)이 되었다. 이 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 ; 어사대에 속한 종5)를 거쳐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공민왕이 다시 음죽으로 옮기자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을 가서 공민왕을 접대할 수 없게 되어 문책을 당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으나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다시 승진되었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내세워 개혁정치를 할 때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지만 안종원은 청렴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죄 없이 참소(讒訴)를 당해 강릉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 ; 살아 있는 사람을 제사 지내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신돈이 주살된 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올랐다. 우왕 초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유순(柳珣) 5명과 함께 도당(都堂)에 상소하여 환관의 폐단을 논했으나 재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우상시(右常侍 ; 내사문하성에 속한 정3)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였으며,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후 부친 안축(安軸)에 이어 흥녕군(興寧君)에 책봉되었다.


당시에 환관으로 있던 김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해 김현을 유배 보냈으며, 환관의 수를 10명 이내로 줄여서 국정의 문란을 막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또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奇貨)로 금, , ,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해 장사함으로써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므로 이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새로 책봉되었고 공신(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조반사건 이후 최영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청렴한 그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 후 흥녕부원군이 되었고, 조선 왕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문간(文間)이다.


안종원은 개혁을 원했으나 이성계파처럼 역성혁명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고려의 신하로서 묵묵히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것이 자신이 배운 성리학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유신처럼 조정을 등지지도 않았다. 그것 또한 백성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파와 절의파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안종원 같은 인물들이 고려 말 조선 초에 다수 있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 회유하여 정치 일선에 나서도록 유도하였다. 특히 안종원은 순흥 안씨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전파한 안향(安珦)과 동향이며 부친 안축(安軸)과 안향(安珦)을 존경하던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온건파의 주요 인물이므로 조선 왕조에서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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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종원의 부친 안축(安軸 ; 1282~1348)은 순흥이 낳은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로 죽계(竹溪 ; 소백산 죽계9곡으로 유명한 순흥의 한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이다. 안축(安軸)은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할 만큼 문재가 뛰어났으며, 경기체가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제현과도 친하게 교우하였으며 청렴하고 학문이 높아 후에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을 설립한 후 1년 뒤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도 추가 배향한다. 관직은 1344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 ; 2. 재상반열에 속함)을 거쳐 1345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 2)를 지냈고, 1347년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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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우인열(禹仁烈 ; 1337~1403)

 

우인열(禹仁烈)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처음에는 도평의(都評議) 녹사(綠事 ; 기록에 관한 일을 하던 하급 실무직)로 출사하였고, 1359(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원수 한방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가찰어사가 되었고 1372년에 제주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로서 명나라에 가서 말을 바쳤고, 그 이듬해 다시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우왕 1)에 응양군상호군으로서 명사피살사건(明使被殺事件)으로 간관의 탄핵을 받은 이인임에게 부탁해 한리(韓理)와 함께 그를 변호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순문사를 거쳐 1377년 경상도원수로서 영광, 장사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다음해 경상 양광 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왜구와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위험에 처했으나 분발하여 왜구를 대파한 후 사람을 보내어 승전보를 올리니 우왕이 술과 안장 얹은 말을 내려주었다.


1379년 지문하사(知門下事)로서 경상도상원수 겸 도순문사가 되어 청도에서 왜구를 격파하였고, 이어 합포(合浦)와 사주(泗州)에서 또 왜구를 대파해 합포도순문사가 되었으며 우왕이 다시 옷과 술을 내려주었다. 왜구가 울주, 청도, 밀양, 언양 등지로 침투하자 배극렴, 하을지, 오언과 합세해 울주, 동래, 사주 등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많은 왜구을 사로잡으니 우왕이 전리판서 정남진을 보내 우인열을 비롯한 장수들을 치하하고 술을 내려주었다.


1383년 왜구가 다시 반성현으로 침구(侵寇)한 후 대산(碓山) 정상에 올라 목책을 세우고 수비하자 우인열이 박수경, 오언 등과 함께 포위 공격해 34명의 왜구의 목을 베고 격파하였으며, 이후 찬성사(贊成事)상의(商議)로 승진하고 청평에 들어온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5년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고, 1387년 문하평리(門下評理)상의(商議)로서 홍징(洪徵)과 함께 한양산성의 수축과 전함의 수리를 감독했으며, 1388년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偰長壽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창왕의 즉위를 알렸다. 1390(공양왕 2) 계림윤이 되었으나, 전 해에 일어난 김저의 옥사에 변안열, 이림, 우현보 등과 함께 연루되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청풍군으로 유배되었다.


이 후 곧 풀려났으나 다시 윤이,이초 사건으로 청주옥에 갇혔다가 홍수가 난 후 풀려났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해 판개성부사가 되었으며, 개국원종공신에 올랐다. 1395(태조 4)에 개성유후사유후가 되었고, 1400년 판승녕부사에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1년에 다시 정종의 선위와 태종의 즉위를 허락한 데 대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3년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랐으나 병사하였다.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평소 우인열은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충직(忠直)하였으며, 신흥무장으로서 많은 하급 무장들은 물론이고 문신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 그의 증조부는 증 문하시중(贈 門下侍中)우천석이고, 조부는 밀직사부사를 역임한 우팽이며, 부친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을 역임한 우복생이다.


또한 우현보(禹玄寶 ; 1333~1400)와는 증조부가 같은 인척으로 명문 출신이므로 이성계파에서 그를 길들이기 위해 위화도 회군 이후 여러 사건에 연루시켜 세를 약화시켰으나 그를 비롯하여 단양 우씨를 회유 및 포섭하기 위하여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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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장수(偰長壽 ; 1341~1399)의 자는 천민(天民), 호는 운재(芸齋)이다. 원나라에 귀부한 위구르인의 후손으로 부원후(富原侯)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설손은 1358(공민왕 7) 부친 설손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올 때 따라와 귀화(歸化)하였다. 1360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대임하던 중 부친상을 당했으나 서역인이므로 왕이 특별히 명해 상복을 벗고 과거에 나아가게 하였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올랐고 얼마 후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그 때의 경험으로 1365(공민왕 15)에 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방비할 계책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에 녹권(錄券)되었다. 1387(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가서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을 피해 요동에서 고려로 도망쳐 온 이타리불대 등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 호를 명에서 조사하여 찾아가려 하는 것을 그만 두게 하고, 고려의 관복을 명의 제도대로 사모단령(紗帽團領)으로 하는 것을 허락받아 돌아왔다. (후에 정몽주의 건의로 이 사모단령을 고려의 관복으로 보급하였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시행하게 된다.) 1388(우왕 14) 2월에 명에서 돌아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한 홍무제(洪武帝)의 말을 전하여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혀지고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유배당했으며 우왕이 폐위되었다. 설장수는 1389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성계파가 공양왕을 옹립할 때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1390(공양왕 2)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를 겸하여 인재를 발탁하였다. 이 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수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으며 1394(태조 3)에 사역원제도로서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한 진언을 올렸고, 1395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96년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오르고 11월에 계림(鷄林 ; 경주)을 본관으로 받았으며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1398(태조 7) 3월 태조의 어진(御眞)을 경주에 봉안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양위하여 정종이 즉위하자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요동(遼東)의 첨수참 파사포에 이르렀을 때 명 홍무제(洪武帝)가 죽은데다가 요동도사로부터 “3년에 한 번 조빙하기로 한 것과 어긋난다.”며 저지당했다. 의주로 돌아온 설장수는 좌정승 조준에게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아뢰든지 아니면 진향사(進香使)로 뽑아 보내자고 보고하여 이듬해 1월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김사형, 하륜과 함께 북경에 갔다가 6월에 명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 해 1019일에 병으로 죽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설장수는 비록 위구르인이지만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는데, <용재총화>에 의하면 설장수의 필법이 굳세어 규범이 있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며, <소학(小學)>을 중국어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지엇는데 이 공로로 1441(세종 23)에 그의 아들들이 관직에 등용되었다. 문집으로는 <운재집>이 있으며, 1478(성종 9)에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설장수의 시 9수와 부친의 시문 초고 7책을 엮어 지은 <근사재일고>(홍건적의 난으로 소실) 발문이 실려 있다. 설장수에게는 네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 중 설미수와 설경수는 나란히 병진과에 급제하여 고려에 충성하였으며 설미수는 벼슬이 2품에 이르고, 설경수의 아들 설순은 무자과와 정미년 중시에 급제하여 역시 벼슬이 2품에 이르고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처럼 설씨 가문이 고려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마자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설장수 등은 이성계파와 절의파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설장수가 정몽주 당여로 몰려 우현보, 이색 등과 함께 유배당한 뒤 얼마 안 되어 수도로 옮겨진 것은 거의 유배에서 풀려난 것으로 이것만 보아도 이성계파는 설장수를 비롯한 설씨 가문을 처음부터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포섭이나 회유할 대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성계파의 의도대로 설장수와 설씨 가문은 조선 왕조 초기에 국정 안정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장수는 개국원종공신에 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이성계파는 설장수를 확실한 정몽주 당여로 보았음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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