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6. 25. 03:16

<조선 건국의 비밀 67> 7. 조선의 건국 ; 조선개국원종공신에 대하여3 (최무선, 성석린)

 

최무선(崔茂宣 ; 1325~1395)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최무선(崔茂宣)의 본관은 영주이며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았으며, 병법 논하기를 좋아하여 천생 무인이 될 인물이었다. 문하부사까지 지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어려서부터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익혔고, 중국어에도 뛰어났던 그는 연구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염초)과 유황과 분탄(粉炭) 중에서 유황과 분탄(粉炭)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화약 만드는 기술을 국가기밀로 삼고 있어서 고려에서는 수입조차 하기 힘들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356(공민왕 5)에 왕이 보는 앞에서 남강에서 총통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고, 1373(공민왕 22)년에는 공민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새로 건조한 전함을 선보이고 화전과 화통을 시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의 화약은 전부 원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듬해 고려 조정에서 왜구의 준동을 막기 위해 원나라에 화약 제조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최무선은 직접 초석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인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에서 초석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원나라 강남 지역에서 온 염초장 이원(李元)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 등 화약 제조에 관한 몇 가지 비법을 전해 들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최무선이 이원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서로 친해져 자주 왕래하는 사이로 그 기술을 몰래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기록  <태조실록>의 최무선 졸기에서는 최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는데,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자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의 요령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이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최무선은 집에서 노비들에게도 이 기술을 익히게 한 후 많은 시험을 거쳐 결국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최무선이 이를 도당(都堂)에 고하고 시험해볼 것을 건의하였으나 아무도 최무선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를 사기꾼으로 여기는 자도 있었다.


몇 년에 걸친 끈질긴 건의 끝에 1377(우왕 3) 10월에 우왕은 화통도감의 설치를 명하였다. 화통도감의 제조(提調)가 된 최무선은 더욱 노력을 가하여 총포류인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六火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과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등의 발사용화기, 기타 질려포(蒺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剪), 유화(流火), 주화(走火 ; 로켓무기), 촉천화(觸天火)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다.


또한 최무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화약무기를 실을 수 있는 전함을 건조할 것을 건의하여 마침내 함포를 장착한 전함도 건조하는가 하면 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도 창설하여 정규 부대에 편성하였다.


1380(우왕 6) 왜구 선단 500여 척이 진포(鎭浦)에 출몰, 서천과 금강 어구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일삼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임명되어 도원수 심덕부(沈德符)와 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출항, 처음으로 화통과 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했다.


이 때 그는 군사들을 나눌 때 최칠석 등을 이끌고 진포에서 고려군을 지휘하였는바 진포에 침입한 왜선 500여 척을 전부 불사르는 큰 전공을 세웠다. 배를 잃어 퇴로(退路)가 막힌 왜구는 곧 삼도 전역을 돌며 약탈을 일삼다가 고려 조정의 대대적인 토벌에 운봉에 집결하였다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황산에서 궤멸되어 그 세력이 전에 비해 크게 꺾였다.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의 졸기에서 사관은 이로써 왜구가 차츰 줄고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잇따르며, 바닷가 백성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덕분이라 하나 최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음이다.”고 최무선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다.


1383(우왕 9)에 왜구가 다시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여 화기를 이용한 전술로 왜선을 격침하였고 이후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다. 두 번에 걸친 해전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 조정은 1389년 경상도도순문사 박위(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편에 의해 살해당함)를 원수로 삼아 전함 100척으로 대마도 정벌할 때 최무선도 출정하여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였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이성계파의 조준 등이 화통도감을 혁파, 군기시(軍器寺)에 통합시켰다. 조준 등이 내세운 명분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더 이상 화약무기의 제조가 필요 없다는 이유였지만 누가봐도 그것은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화약무기의 보급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큰 공을 세운 무신이자 화약 및 각종 화기 제조의 기술을 가진 최무선이었지만 이성계파는 그를 생전에 포섭하지 않았다. 1392(공양왕 4) 7, 이방원의 건의로 최무선은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 겸 판군기기사가 되었으나 이미 70세에 가까워 정무를 보기 힘들었다.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 못하다가 사후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하고 1401(태종 1)에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아들 최해산과 손자 최공손도 최무선의 뒤를 이어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의 졸기에 의하면 최무선이 임종할 당시 책 한 권을 부인에게 주며 아들이 다 자라면 줄 것을 당부하였고, 아들 최해산이 15세가 되자 유언대로 책을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화약제조법과 초석의 채취 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이라 한다.


아들 최해산은 태종 때 화포개발자를 중용할 때 중용되어 화기 개발에 힘썼으며, 수레에 화차를 개발하여 1409(태종 9) 창덕궁 후원의 해온정에서 발사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세종 때 신기전의 개발로 이어진다.


비슷한 시기의 문신 정이오(鄭以吾)는 자신의 저서 <화약고기(火藥庫記)>에서 최무선의 업적을 두고 나라를 위해 마음을 썼으므로 능히 이원의 기술을 얻었으니 그 사려가 깊고 멀다 하겠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겨루려 들지 못하는데는 앞서 진포에서의 싸움과 뒷날의 남해에서의 승전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오늘날 경북 영천시는 최무선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최무선 과학축제(2018년에는 최무선 과학 꿈잔치로 축제명을 개명함)를 개최해 오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에서 명성을 떨친 우리 역사의 자랑 거북선은 사실 이순신 장군의 지시로 그 부하가 만든 것이 처음은 아니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태종실록으로 1415년(태종 15)에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이 귀선을 포함한 함선의 훈련도 관람하였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로 보건대 조선 초기에도 귀선이 있었음이 명약관화하다. 물론 당시의 귀선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같은 형태의 것인지는 설계가 전해지지 않아 알 길이 없으나 다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려 시대에 과선(戈船)이라는 전함이 있었는데 과선이란 배에 창칼을 박아 적의 침입을 막는 전함이다.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고려 후기에 과선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최고의 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이 전함을 건조할 때 고려의 재정상 많은 전함을 제조하기에도 벅찼을 것이므로 함포를 장착한 과선이나 귀선을 개발하여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요원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최무선은 이 과선을 바탕으로 함포를 장착한 초기의 귀선을 설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태종 때 초기의 귀선이 제작되어 훈련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전에 이순신 장군은 이 초기의 귀선을 바탕으로 더욱 효과적인 돌격함 거북선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은 필자의 추정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므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⑤  성석린(成石璘 ; 1338. 충숙왕 복위7 ~ 1423. 세종 5)

 

성석린(成石璘)의 본관은 창녕이며 호는 독곡(獨谷)이다. 조부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낸 성군미(成君美)이고 부친은 우왕 때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를 지낸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초명 성한생이며, 모친은 밀직사지신사를 지낸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1355년 사마시(司馬試)3등으로 합격하였고 1357(공민왕 6) 20세가 되었을 때 지공거 이인복(당시 정당문학), 동지공거 김희조가 주관하는 과거에 염흥방 등과 함께 급제하여 국자학유(國子學諭)가 되었다.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성석린의 재능을 인정하여 항상 글을 짓게 하였으며, 이어서 예문관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도 성석린을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 상서원 혹은 정방)의 비칙치(필도치)로 등용하였으며 이어서 전교시부령, 지인상서, 예부총랑을 역임하였다. 전리총랑(典理總郞)으로 재임 중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이 되었고 삼사좌언, 밀직사좌부대언,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우왕 초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며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로 대거 침입하자 조전원수가 되어 양백연(楊伯淵의 부하로 참전하였다. 이 때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성석린이 만약 우리가 다리를 건너버리면 인심이 등을 돌려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을 것이오. 다리를 등지고 싸워야 하오.”라고 주장하자 장수들이 이에 따라 모두 죽음을 무릎 쓰고 싸워 왜적을 격퇴하니 크게 공을 세우고 수성좌리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나중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그의 공술(供述 ; 진술)에 성석린이 언급되었으므로 곤장 107대를 맞고 함안(咸安)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자유롭게 거주지를 선택하도록 배려를 받았다. 이후 복직되어 창원군(昌原君)으로 봉해지고 단성익조좌리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되었다가 양광도 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주(),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 의창(義倉)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가 되었고, 이성계파와 함께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 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하였다. 이 때 우왕과 창왕 시절의 관작에 따라 임명된 이들을 조정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도당(都堂)에서 논의케 하였으며, 사헌부가 궁중 가까이 있지 않고 궁외에 떨어져 있어서 백성들의 실정을 모두 전달할 수 없고 임금이 여론을 넓게 들으려면 반드시 사헌부와 같은 대간(臺諫)들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상소하여 공양왕이 그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어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았으며 창성군 충의군(昌城郡 忠義君)에 봉해졌다. 1390년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조(李朝) 33인을 선발하였으며, 1392년 조선 건국 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승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 부분에서 성석린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동 백과사전이 가장 믿을만한 역사백과사전이나 대부분 약 20년 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으로 이후로는 수정이나 개정을 하지 않아 오류가 많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문학 및 사학계의 현실인가 싶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얼마 후 병이 들어 사직을 청했으나 이성계가 허락하지 않고 정조공신(定祚功臣)의 칭호를 덧붙여 내려주었으며 예문관대제학으로 옮겼다가 곧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1393(태조 2) 개성부판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개국원종공신으로 녹권되어 노비 3인과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한 때 이색과 우현보 당여(黨與)로 몰려 동생 성석용과 유배당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풀려나 1398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 도절제사, 평양부윤을 지낸 후 내직으로 돌아와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어 익대공신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이 되었으며 창녕부원군에 봉해졌고 1402년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 때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이 때 성석린이 태조 이성계의 오랜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데 도리를 진술하여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무학대사도 큰 역할을 함)


1407년 좌의정을 지냈으며 1411년 고령인지라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하였다가 얼마 후 부원군으로 물러나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성석린은 조용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짓는 등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문집 <독곡집>이 전해오고 있다


 성석린의 동생 성석용은 보문각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다른 동생 성석연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성석용도 개국원종공신에 이름을 올리는 등 창녕 성씨는 성석린 대에 와서 크게 흥하였다. 동생 성석용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의 증조부이다. 슬하에 22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성지도, 차남은 성발도이다.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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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여완(1309~1397)은 드물게 장수한 고려 유신으로 133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1371(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그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조사겸, 유준 등과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가 1378(우왕 4)에 복직되어 정당문학상의가 되었다. 아들 성석린이 공양왕 옹립에 참여하는 등 이성계파와 입장을 함께 하였으나 자신은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포천 계류촌에 은둔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유신 회유책으로 그를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겸 창녕부원군으로 봉하였으나 조정에 나가지는 않았다.

 

*2)양백연(楊伯淵 ; ? ~ 1379. 우왕 5)의 본관은 청주이며 시조 양기(楊起)는 중국 사람으로 원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중서성정승으로 있을 때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서 고려에 들어와 정착한 인물이다. 양백연은 시조 양기의 손자로 공민왕 초에 판각문사(判閣門事)를 지냈는데 밀직(密直) 신귀(辛貴)의 처 강씨와 간통했는데 강씨는 당시 찬성(贊成) 윤성(允成)의 딸이었다. 이로 인해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후에 상호군 최영의 휘하에서 종군, 1363(공민왕 12)에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1등공신인 추성익위공신이 되었으며 개성윤(開城尹)에 임명되었다가 극성방어사가 되었다. 1365년 밀직부사로 원나라에 가서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을 알리고 돌아와 석북면도순위사가 되었으며, 1370년에는 사북면부원수로서 지용수, 이성계, 임견미 등과 함께 동녕부를 쳐서 공을 세웠다. 이듬해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었다가 다시 동강도지휘사가 되어 예성강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1373년에는 서북면도순찰사가 되었다. 1377년에 서강부원수로서 이성계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했으며, 그 해에 찬성사가 되어 제조정방(提調政房)을 겸하였다. 그 뒤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이에 대비하다가 진주 반성현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수고 개선하였는데, 이때부터 전공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인임, 임견미 등의 미움을 받아 합주로 귀양 갔다가 살해당했다.

 

*3)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이란 1389(공양왕 1) 12월 우왕을 폐위하고 공양왕 옹립에 가담한 당시 문하시중 이성계를 비롯하여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조준, 박위, 정도전, 성석린 등 일명 9공신에게 내려진 공신녹권이다. 중흥공신의 원래 명칭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이 때 이들 공신들에게는 벽상도형(壁上圖形)되는 영예와 더불어 부모와 아내를 봉작하고 자손에게 음서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그 자손 10대에 이르기까지 사면되는 특전을 주었다. 9공신에게 내려진 정식 공신명칭은 전부 다 틀린데, 예를 들면 이성계는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이고 성석린이 받은 공신 칭호는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이다. 성석린이 중흥공신녹권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에 성석린이 이성계파와 뜻을 함께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석린이 이성계파처럼 역성혁명을 꿈꾸는 진보적 개혁성향의 인물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만약 성석린이 확실한 이성계파였다면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 개국공신에 책봉되었을 것이다. 성석린은 동생 성석용이 이색, 우현보와 상당한 친교를 맺었던 것과는 달리 이색과 우현보와도 친했지만 이성계와 더욱 가까운 친교를 맺는 등 상당히 넓은 인맥을 가진 중후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급진개혁보다는 온건보수적 성향의 성석린은 이성계파와 절의파 중간의 인물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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