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역사 산책

민삿갓 2018. 7. 3. 17:31

<조선 건국의 비밀 68> 7. 조선의 건국 ; 조선개국원종공신에 대하여4(권중화, 한천)


 ⑥ 권중화(權仲和 ; 1322. 충숙왕 9 ~1408. 태종 8)

 

권중화(權仲和)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동고(東皐)이며, 부친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내고 예천부원군에 봉해진 일재(一齋) 권한공(權漢功)이다. 권한공(權漢功)은 충숙왕 때 삼사사(三司使),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충선왕이 양위한 후 원나라에 가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만권당에서 수학하며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한 때는 충숙왕에 의하여 구금된 후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당하여 이에 대한 복수로 심양왕(瀋陽王) ()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고 획책하였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고려의 공신이자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권중화는 1353(공민왕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부대언(승지역할)을 시작으로 관직에 몸담았다. 이어 좌부대언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에만 충실하였다. 그의 진중한 성격은 결국 역성혁명파와 절의파의 정치싸움에서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침이 없었다.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1377(우왕 3)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는 영예를 얻어 문하에 이름난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이후 삼사좌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0(공양왕 2) 윤이, 이초의 옥사 연루되어 유배당했으나 곧 풀려 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어 문하찬성사,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왕조가 바뀌었으므로 고민 끝에 조정에 계속 출사하기로 하여 1393(태조 2)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 2)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 예정지 신도안이 포함된 <계룡산도읍도>를 올렸으며 신도안이 하륜의 진언에 따라 새 도읍으로 무산되자 다시 한양의 종묘와 사직, 궁궐, 조시(朝市)의 형세도를 올렸다.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며, 1394214일 태조가 하륜, 권중화, 정도전, 성석린, 남은, 이근, 권근, 이무방 등에게 동국(東國) 역대 현인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뽑아서 바치게 하니 이틀 후 수창궁에서 권중화가 이것들을 엮은 <비록촬요(秘錄撮要)>를 바쳤다.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398년에 예천백에 봉해졌다. 1404(태종 4)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후에 영의정부사까지 올랐으나 사직하고 물러났다. 재임 기간 중 학문에도 힘썼으나 의학이 조선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려 말 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簡要)하다고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다.


특히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은 중국의 약방에만 의거하지 않고 조선 출산의 약재로 간편하게 치료하도록 편찬된 것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후에 권중화는 다시 김희선 등과 함께 의료경험과 종래의 의약서 등을 참고로 하여 <향약제생집성방(30. 6권이 보물 1178호로 지정되어 인천 가천박물관에 소장)>을 재생원에서 편찬하였는데 이 때 주요 대본이 된 것도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이다.


이 의학서들은 다시 1433(세종 15)에 권채, 유호통, 노중례 등이 편찬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으로 이어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권중화는 1399(정종 1)에 조준, 김사형의 명령에 따라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한상경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까지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본문 개국공신 한상경 편 참조)


이밖에도 권중화는 고사(故事)에 밝아 정사(政事)에 고문역할을 하였으며 의약, 지리, 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그에 따라 1395년 유방택¹이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²>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 나옹화상비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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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방택(柳方澤 ; 1320. 충숙왕 7 ~ 1402. 태종 2)의 본관은 서산이며 호는 금헌(琴軒)이다. 조부는 유굉, 부친은 유성신이며 부인은 예조판서 손애의 딸이다. 유방택은 경학(經學)과 천체 관측에 능했다. 1393(태조 2) 태조 이성계는 유방택은 일관(日官)으로서 천시(天時)를 점쳐 태조가 대위(大位)에 오르도록 권고한 공이 있으니 은전(恩典)을 주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려 개국원종공신의 녹권을 받았다. 1393년 태조의 명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하였으며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취령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다 생을 마쳤다. 자녀는 32녀를 두었으며, 아들 유백유는 1369(공민왕 18)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2)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노인이 고구려 천문도라는 탁본을 올렸다. 천문도를 새긴 비석은 평양에 있었는데 전란 중에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인본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태조는 명 황제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는 받았지만 아직 국왕으로서 책봉되지 못하던 터에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만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징표가 손 안에 들어왔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천하에 공표하여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천문도를 돌에 새겨 제작하라고 서운관(書雲觀)에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 천문도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별자리가 이동하여 시간 측정의 기준이 되는 중성기가 어긋났다. 서운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하여 천문계산을 담당했던 유방택, 물시계 관리자 전윤(田潤)과 김자수 등이 한양의 자오선(子午線)에 맞춰 중성(中星)을 추산하여 중성기를 개수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구려 당시 평양의 하늘을 지났던 중성기가 한양의 중성기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1398년 물시계인 경루(更漏)를 제작하고 새벽과 황혼을 알리는 대종을 종루에 걸어 표준시각을 알렸다.) 개수가 끝나자 권근은 찬문도 탁본의 유래, 중성기의 개수, 관상수시의 중요성, 조선왕조의 개창과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실천 등이 담긴 천문도지를 지었고, 설경수가 글씨를 써서 이를 돌에 새기니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완성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태조본(높이 211cm X 너비 122.7cm)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보 제228호이다. 흔히 비석하면 광개토왕비를 떠 올리지만 이 천문도 비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가운데하나로써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유산이며, 세계적인 보물이다. 139512월에 제작된 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하늘의 모습’ ‘천상(天象)’()’분야(分野)’에 따라 벌려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12구역을 말하고, 분야(分野)란 하늘의 별자리 구역을 열둘로 나눠 지상의 해당지역과 대응 시킨 것을 뜻한다. 이 비석의 뒷면에도 전면과 똑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지만 일부 내용의 배치가 바뀌고 세련된 것으로 보아 세종 15년에 복각(復刻)한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이 마모되자 숙종 13(1687)에 원형보존을 위하여 상태가 좋은 탁본을 바탕으로 이민철이 새로 복각하였다.(숙종본) 1770(영조 46)에 관상감 안에 흠경각을 지어 이 두 개의 천문도 석각을 함께 보존하여 오다가 1908년에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으로 옮겨져 창경궁 명정전에 70년대 초까지 보관되어 왔으며 현재는 둘 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완성한 조선 조정은 이 비석의 내용을 필사하거나 목각하여 인쇄본이나 탁본을 제작하여 집권층이나 사대부들에게 배포하여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홍보하는데 사용하였다. 근대에 와서 이것을 판독하여 처음 소개한 사람은 1913년 평양의 합성숭실대학교 교수 칼 루퍼스였다. 칼 루퍼스 교수로 인해 서양의 학자들도 조선의 천문도를 접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천문도 석각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 왕도정치의 구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정치적 상징물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과학적 창의성이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며, 그 속에 내포된 과학사상은 500여년을 두고 면면이 이어져 전근대 동아시아 천문과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안타깝게도 대동강에 빠졌다는 고구려 천문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 천문도 비석의 제작연대, 태조본 각석에 고구려 성도(星圖)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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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천(韓蕆 ; 생몰연대 미상)

 

한천(韓蕆)의 본관은 청주이며 우정승 한악(韓渥의 손자이고 도첨의사 한대순(韓大淳 ; ?~1355)의 아들이다. 1365(공민왕 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 등 55, 십운시(十韻詩)로 임한(林翰)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다.


1391(공양왕 3) 판개성부사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 등과 함께 유배당하였으나 후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 후 1393(태조 2) 태조로부터 전조대신(고려왕조의 유신) 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하여 개국원종공신에 녹권되었다. 1400(정종 2) 권희 등과 함께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청주 한씨는 고려 개국공신이자 삼한벽상공신인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고려 초부터 명문이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유신을 회유하려는 정책에서 한천(韓蕆)을 개국원종공신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아쉽게도 생몰연대나 자세한 전기는 살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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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천의 조부 한악(韓渥 ; 1274. 고려 원종 15 ~ 1342. 충혜왕 복위 3)1310(충선왕 2) 우대언, 1320(충숙왕 7)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왕을 노리던 심양왕 왕고가 여러 가지 이유로 왕을 참소하자 한악이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첨의평리와 찬성사를 거쳐 1330(충혜왕 원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中贊)을 역임하고, 1340(충혜왕 복위1)에 우정승에 올랐다. 한어와 몽고어에 능했으며 성품이 신중하였고 사후에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려 말의 명필 한수(韓脩 ; 1333~1384)는 한악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한수(韓脩)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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