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포커스

한사정덕수 2012. 4. 18. 09:52

인권은 이미 그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게거품 물고 침몰하는 자아를…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똑 같은 과정을 미리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일로만 생각할 수 없는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때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진실입니다.

‘모래시계(SBS 1995년)’ 이후 ‘자이언트(SBS 2010년)’를 거쳐 ‘빛과 그림자(MBC 2012)’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를 다루는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삼청교육대‘란 국가가 국민에게 가혹하게 행사한 불법적 폭력입니다.

모래시계에서는 깡패 박태수였기에 누군가의 비호를 받지 않고서는 어김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이언트와 빛과 그림자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상청교육대로 끌려갑니다.

모래시계에 강우석 검사로 그려졌던 홍준표 검사가 19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정치판을 떠나겠다 밝혔습니다.

 

 

드라마에 대한 내용을 지금 거론하려는 것은 아니니 여기서 접고, 1990년대 정권을 찬탈할 욕망에 사로잡힌 전두환과 ‘하나회’란 사조직에 의해 국보위가 설치되고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착착 마수를 뻗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이런 내용을 사실 그대로 알려주는 기사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번 19대 총선을 치르면서도 유력 일간지나 방송들은 편파적인 보도만 일삼았습니다.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이란 말이 여전히 귓가에 이명처럼 울리는데 인간이하의 처우를 받으며 혹독한 수모를 당한 이들이야…

여하튼, 무고한 이들이 살상을 당해도 국보위와 정치군인들의 입맛대로 조작된 기사만 만날 수 있던 국민의 입장에서는 진실은 철저히 가려진 정보만 얻고 이를 믿을 수밖에 없던 시대였습니다.

‘삼청교육대’도 그런 조작된 기사로 인해 사실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언비어’라는 이름으로 검속을 당하기 십상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얼추 짐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삼청교육대와 관련 된 글 몇 편을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삼청교육대 1

 

서릿발 허옇게 곤두선

어둔 서울을 빠져 북방으로

완호로 씌운 군용트럭은 달리고 달려

공포에 질린 눈 숨죽인 호흡으로

앙상히 드러누운

아 3·8교!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살아 다시 3·8교를 건널 수 있을까

호령소리 군화발길질에 떨며

껍질을 벗기우고 머리털을 깎여

유격복과 통일화를 싣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좌로굴러 우로굴러

나는 삼청교육대 2기 5-134번이 된다.

 

핏발 선 분노도 의리도 인정도

군화발 개머리판에 작살나

제 한 몸 추스리지 못해 웃음 한번 없이

깍지 끼고 땅을 기다 부러진 손가락

영하 20도의 땅바닥에서 동상 걸려 진물 흐르는 발바닥

얻어터져 성한 곳 하나 없는 마디마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벌건 피똥을 싸며

처음으로 소리죽여 흐느끼다

호르라기 집합소리에 벌떡 일어선다

 

눈보라치는 연병장을 포복하며

원산폭격 쪼그려뛰기 피티체조 선착순

처지면 돌리고 쓰러지면 짓밟히고

꿈틀대면 각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내무반을 들어서면

한강철교 침상위에수류탄 철모깔고구르기

군화발로 조인트 까져 나뒹굴고

빼치카벽에 세워 놓고 주먹질 발길질에

게거품 물고 침몰해 가는

아 여기는 강제수용소인가 생지옥인가

 

그렁그렁 탱크이빨에 씹히는 꿈에 소스라치면

홍건한 식은땀에 헛소리 신음소리

흐느끼는 소리 이를 앙가는 저주소리

그 속에서도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자

우리는 밤마다 조심스레 가슴을 연다

 

김형은 체불임금 요구하며 농성중에

사장놈 멱살 흔들다 고발되어 잡혀오고

열다섯 난 송군은 노가다 일 나간

어머니 마중길에 불량배로 몰려 끌려오고

딸라빚 밀려 잡혀온 놈

시장 좌판터에서 말다툼하다 잡혀온 놈

술 한 잔 하고 고함치다 잡혀온 놈

춤추던 파트너가 고관부인이라 잡혀온 놈

우리는 피로와 아픔 속에서도

미칠 듯한 외로움과 공포를 휘저으며

살아야 한다고 꼭 다시

살아 나가야 한다고

얼어터진 손과 손을 힘없이 맞잡는다

 

날이 갈수록 야수가 되어

헉헉거리다 탈진하여

마지막 벼랑 끝에 서서

차라리 포근한 죽음을 갈구하며

따스한 속 살 내음을 그리며

단 한순간만이라도 인간이고자

일어서 울부짖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구타 속에 의무실로 실려 가고

장 파열 뇌진탕 질식사로

하나 둘 죽어 나가

뜬눈으로 가슴 타는 초췌한 여인 앞에

돈 많이 벌어올 아빠를 기다리는 초롱한 아가 앞에

360만 원짜리 재 한 상자로 던져진다

 

민주노조를 몸부림치다

개처럼 끌려온 불순분자 이군은

퉁퉁 부은 다리를 절뚝이며

아버지뻘의 노약한 문노인을 돌봐 주다

야전삽에 찍혀 나가떨어지고

너무한다며 대들던 제강공장 김형도

개머리판에 작살나 앰뷸런스에 실려 나간다

잔업 끝난 퇴근길에 팔뚝에 새겨진 문신 하나로 잡혀와

가슴 조이며 기다릴 눈매 선선한 동거하던 약혼녀를 자랑하며

꼭 살아 나가야 한다고 울먹이던 심형은

끝내 차디차게 식어 버리고

일제시절 징용도 이보단 덜했다며

손주 같은 군인들에게 얻어맞던 육십고개 송노인도

홧통에 부들부들 뻗어 버리고

아무 죄도 없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끌려왔다며

고래고래 악쓰던 사십줄 최씨는

끝내 탈영하여 백골봉에 올라

포위한 군인들과 대치하다가

분노의 폭발음으로 터져 날아가 버린다

 

악몽 속에 몸부림쳐도 떨치려 해도

온몸을 뒤흔들며 묻을래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80년의 가을

개처럼 죽어간 자들의

시퍼런 원혼은 지금도 이 땅의 어드메를 떠돌고 있을까

가련한 살붙이와 여인네들은

이 휘황한 거리의 어디쯤에서 노점상으로 쫓기며

네온싸인보다 섬뜩한 원한으로 서려 있을까

그 많은 동기생들은

흐린 날이면 욱신대는 뼈마디 주무르며

지금쯤 어디 일터 어느 구석에서

삭아내리고 있을까

허연 칼날을 갈고 있을까

 

동상에 잘려나간 발가락의 허전함보다

철야 한번 하고 나면 온통 쥐어뜯는

폐차 직전의 내 육신보다 더 뼈저린 지난 세월 속에

진실로 진실로

순화되어야 할 자들은

우리가 아닌 바로 저들임을,

푸르게

퍼렇게

시퍼런 원한으로

깊이깊이 못 박혀

화려한 조명으로

똑똑히 밝혀 오는

피투성이 폭력의 천지

힘없는 자들의 철천지 원한

되살아나

부들부들 치 떨리는

80년 그 겨울

삼청 교육대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1984, 풀빛)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구’를 뜻하며 필명을 ‘박노해’로 사용한 시인의 시입니다.

1982년 국방부가 인정한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삼청교육생은 모두 3만9786명입니다. 교육생 중 절반 가까이가 초등학교 학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과 5범 이상이 8.2%, 초범이 22.3%고, 아무런 전과 없는 사람이 35.9%였다 합니다.

그중 교육과정에서 사망자는 57명으로 병사(病死) 36명, 구타 10명, 총기사고 3명 등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988년 국회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교육 후유증 사망자가 397명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부상자가 2786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자료일 뿐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집계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삼청교육대에 입소한 사람은 국방부의 공식 발표보다 20~30% 많을 것이란 당시 활동했던 이들의 증언도 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에서 발생한 피해자가 정부 발표를 여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청교육대는 입소한 이들의 숫자는 대략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회로 돌아온 이들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삼청교육대 1’은 목격자의 입장에서 털어놓는 피 비린내 물큰한 역사의 과오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작된 좌파들의 선동질’이라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도처에 존재하는 게 현실입니다. 계급장에 따라 처우가 다른 계급사회에서 승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만 아니라면 무엇이나 가져다 바칠 자들이 있습니다. 권력이 하달한 목표를 채우라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란 구차한 변명 따위는 이제 집어치워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죄 없는 국민을… 친구를 마중하러 기차역에 나간 학생을 붙잡아 넘기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웃의 거짓말에 잡혀가고, 평소 성깔 사납다고 소문이 난 이유로 잡혀 간 그들이 과연 얼마나 죽임을 당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모든 관련 문서는 불태우라는 권력자의 명령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신문기자들도 당시엔 국보위에서 던져주는 내용만 베껴 기사로 썼음에야…

아래 이미지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들이 좌담회를 가졌다는 내용인데 당시엔 이런 식의 기사가 매주 나왔습니다. 요즘 ‘MBC100분토론’이나 ‘생방송 심야토론’이 당시엔 없었고 이런 기사가 대신 그 역할을 맡았다 보시면 됩니다. ‘사회정화운동… 이런 것부터 바로잡자’며 ‘일상의 질서 찾아야 한다’는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일련의 불법적인 행동들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정화’란 의미는 이 사회의 만연한 부조리와 부도덕, 그리고 폭력을 근절하자는 좋은 뜻으로 국민들에게 홍보되었고 일정부분 목적은 달성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지역에 주둔하던 부대에 꾸려진 삼청교육대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생생한 기록 하나를 만나보겠습니다. 이 글을 쓴 이가 24년이란 세월 전에 삼청교육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글을 쓸 당시 자신의 나이가 49이라고 밝힌 걸로 미루어 2004년이나 2005년에 글을 썼고, 삼청교육대에서 조교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할 당시 25살의 나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55세 정도 되었겠군요.

제가 들은 바로는 조교는 대부분 사병이었다고 합니다.

 

내 나이 49, 거의 반백년은 산 셈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만히 회한에 젖는 때가 있다.

 

지금으로 부터, 24년 전 삼청교육대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줄 잘못 섰다가 조교로 차출이 되었고 우리 부대에는 충청도 병력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한 사람 앞에 세 사람씩 때려죽이라는 명령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니 죽이는 연습을 하란다.

어수룩하게 엄벙덤벙 두들겨 패니까…

‘조교들 회식’이라면서 술을 마구 먹인다. 그리곤 패란다. 기막힌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고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빤히 쳐다보는 대부분 선량한 교육생들의 괴로운 눈동자를 쳐다보면 섬짓한 공포의 소름을 느끼곤 했다.

‘이래선 안 되는데’ 하면서도 교육생들을 많이 쥐어 패지 않으면 내가 맞는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잘해도 때리고… 못하면 더 때리고…

진짜 와야 할 사람보다는 노동일 하다가, 막걸리 한잔 걸치고, 흥얼대면서 늦은 밤길에 집에 가다가 붙잡혀온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혹시라도 몸에 문신이 있으면 영락없이 끌려오고, 어지간한 사람이면 신원조회 해보곤 하소연할만한 연줄이 없는 것이 확인 되면 못된 순사들 실적에 맞추기 위해 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가 사진촬영이라도 할 때면 몸집이 크고 얼굴이 험상궂으며 문신이 새겨진 사람들을 앞줄에 세워놓고 목봉체조를 시키곤 했었다. 그런 장면이 뉴스시간에 화면에 나올 때는 대한민국의 불량배들을 모조리 골라잡아 새사람 만드는 훌륭한 정책으로 국민들은 오인하기 십상이었고, 그들은 몸이 아파도 가만히 참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배탈이 심하다는 교육생이 있으면 설사약을 먹여서 아래바지가 온통 똥물에 젖어 줄줄 흐르게 만들었고, 치질이 심해져서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사람이 생기면 하얀색 시멘트를 물에 이겨 항문에 붙여주곤 항문이 헤져 울고 기어 다니는 교육생이 생기곤 했을 때 우리는 하늘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뒤에서 몇 사람 교육생이 모여 길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돌려가며 피우다 나에게 적발이 되었다. 그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거의 삶을 포기한 표정으로 나에게 살려달라고 모두들 두 손 모아 비는 거였다.

모두 나에겐 큰 형이나 삼촌은 되고도 남을만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는 소리 지르고 말았다.

“그렇게도 담배들이 피우고 싶어요? 느닷없이 오늘 밤이라도… 하늘에서 담배라도 떨어지면 맛있게 피워요!”

그리곤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날 밤, 나는 화랑담배 한 보루를 그들의 내무반 천막에 집어 던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훈련중에 ‘좌로굴러’ ‘우로굴러’ 훈련받던 중 어느 교육생의 주머니에서 화랑담배 한 갑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긴급상황이 생긴 것이다. 불벼락이 교육대장의 욕설과 협박 속에… 모든 조교단의 희생을 막기 위해 내가 자수를 했다.

“제가 담배 한 보루를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그 날 밤 비가 쏟아지는 연병장에서 흙탕물에 뒹굴며 한도 없고, 끝도 없는 매를 맞아야했다.

엉망이 되어 망가져가는 나를 쳐다보는 교육생들은 분명히 울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정말 용서받기 힘든 짓들을 국가에서 저지른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희생자였다.

하나님, 그들을 용서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삼청교육대 어느 조교의 기록

 

이 조교가 쓴 원문은 문장을 제대로 구성하지 않아 문장만 일부 교정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었던 장면들이 촬영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칠게 보이는 이들을 앞에 세웠던 것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촬영된 보도나 기사를 만나면 사람들은 국가가 정말 옳은 일을 하는 걸로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이 글에서도 잡혀 온 이들이 참으로 억울할 수도 있다는 건 확인됩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차로 3~4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기린면이 있습니다. 그곳은 3군단이 주둔한 곳으로 1980년대엔 인제에서도 1시간 이상을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5·18 민주화항쟁과 관련해 군부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던 정훈장교(당시 대령)가 쓴 글이 있습니다.

아래 글에서는 기자의 행동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참으로 이런 자가 어떻게 기자로 활동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령 신분의 장교가 정보를 주어도 이를 외면하는 기자라니…

 

삼청교육대의 그 사람은 무사할까

 

강원도 현리에서 ‘귀양살이’하던 시절엔 이래저래 눈물 흘린 날이 많았다. “사나이가 무슨 놈의 눈물이 그렇게도 많은가”라고 자주 핀잔을 들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일생 동안 가시밭을 헤치며 걸어와서인지 고난이 닥칠 때는 오히려 마음이 단단히 무장돼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어머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오늘 아침에도 내 글 “장군이 다 뭐다냐? 광주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디!”를 다시 읽다가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보잘것없는 아들을 하늘처럼 끔찍이 여기며 평생을 사신 어머님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눈물을 많이 흘리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진다. 술기운이 올라 있을 땐 세상 사람이 모두 불쌍하게 느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소리 내어 우는 때가 많았다.

험난한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해도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난 늘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막연하지만, 그분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항에 맞닥뜨렸을 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미약한 힘만 지닌 난 용기 없는 비겁자일 수밖에 없었다.

 

삼청교육대 앞에서 침묵한 우린 공범자였다.

강원도 현리 시절, 군단 관할 지역엔 삼청교육대가 두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정훈참모이던 내겐 그들에게 정신 교육 특강을 하라는 임무가 부여돼, 난 그곳에 자주 다녀왔다. 꼬불꼬불 흔들리는 비포장 길을 지나 그곳에 다다르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포로수용소보다 더 으스스한 풍경이 나왔다.

완전히 딴 세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만 보이던 그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얼굴은 깡마르고 광대뼈는 튀어나왔으며 체구는 왜소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모아다 놓은 전시장 같았다. 가난에 쪼들리고 세파에 시달리며 구박받으면서 살아온 천덕꾸러기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주동자들이 어떤 짓인들 못하랴마는, 이른바 '민주국가'에서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살인적 만행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게르만족이 유대인을 학살할 때의 광기와 살기를 내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혼이 나가버린 로봇처럼 조교들의 악다구니에 절대 순응했다. 인간 도살장 같은 지옥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기계처럼 움직였다. 잡혀온 사람들은 거기서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대접과 노예보다 더 극심한 강제 노역을 견디면서 끊임없는 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지막지한 노동을 강요당했고, 채찍과 몽둥이에 얻어맞고 군화 발질에 걷어차여 온몸에 피멍이 맺히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들을 완전히 짐승 취급했다. 아니, 짐승이라도 당장 죽이지 않을 바에는 그렇게까지 무지막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목도한 우리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는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가느다란 고동소리일 뿐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말리지도, 정면으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목사님도, 법사님도, 신부님도 “저들이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요”하며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그렇게 우린 범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공범자였다.

조직화한 거대폭력 앞에서 우리의 힘은 참으로 미약했다. 아니 그보다 나 자신이 너무도 비굴했다. 그들은 3군단으로 밀려오게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내 입을 조용히 닫게 만들 수 있었다. 난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더 큰 일을 위해 참노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치만 살피면서 불안에 떠는, 가엾기 그지없던 사람들의 표정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부가 사회정의를 어지럽히는 사회악이라며 힘없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철퇴를 휘두른,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자에게 삼청교육대원의 사연 적은 쪽지 건넸으나…

잡혀온 사람 중엔 성경구절을 줄줄 암송하고 찬송가도 잘 부르며 자연스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감정을 넣어 막힘없이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강의를 하기 위해 천막 안에 들어서면 천막을 날려버릴 듯이 큰소리로 박수 치고 목이 터져라 찬송가를 불러댔다. ‘당신은 우리 속사정을 알 것 아니오! 제발 좀 도와주시오!’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산전수전 다 겪고 막다른 곳까지 온 그들에게 내가 무슨 정신교육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난 그나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신앙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경험이나 말 대신, 성경 구절을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보안대 등에서 내 강의 내용에 꼬투리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설교하러 온 목사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고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지, 억울하게 잡혀왔다고 호소하는 내용을 깨알만한 글씨로 적은 쪽지를 남이 볼세라 번개처럼 내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사람도 있었다.

그 무렵, 마침 전방 2사단 사령부 지역에 신문사 간부와 기자들이 대거 방문했다. 육군본부 정훈감실 주관으로 열린 최전방견학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들과 칵테일을 마시던 시간에 난 당시 이름을 날리던 한 유명 기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들게, 삼청교육대의 문제점에 대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내 호주머니에 자기 사연을 적은 쪽지를 넣은 분의 하소연을 전하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 기자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우다가 이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틀림없이 관심을 보이리라고 기대하고, 벼르고 별러 이야기를 꺼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참 실망스러웠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름 있는 기자가 기자 정신을 묻어버리고 현실에 영악하게 타협하는 모습을 보며 통탄했다.

물론 민주화를 위해 정의의 편에 서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킨 훌륭한 언론인도 있었지만, 그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당시 많은 언론인들은 양심에 거리끼지도 않는 듯 독재 정권을 비호하며 권력의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광주학살에 대해 정론을 펼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기대했던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른 셈이었다. 양심을 팔아먹는 일부 기자들이 반란 도당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며 반역을 성공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그 기자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뿐 아니라 일부 공보장교도 문제였다. 몇몇 공보장교들은 기자들과 “형님, 동생”하며 어울리고 뒷바라지하며 환심을 사기도 했다. 또한 지휘관한테 판공비를 뜯어내어 기자 접대를 잘 하는 사람이 유능한 공보장교로 평가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암흑의 시대였다.

나를 피해버린 그 기자를 보며 나라가 참으로 암담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깡패’들의 천하가 이대로 굳어지는구나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나 혼자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말을 안 할 뿐이지 대다수는 나와 같은 심정일 거야.’ 울적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날은 잔을 사양하지 않고 연거푸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절망의 설움에 북받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노래를 불렀다.

원통 쪽으로 넘어오는 좁은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난 계속해서 ‘울밑에 선 봉선화’도 부르고 ‘사나이 가는 길 앞에 눈물만 있을소냐’도 불렀다. 사랑하는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부르던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사이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은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도 되풀이해서 불렀다.

세상은 이미 광주학살을 자행한, 의롭지 못한 권력의 편에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데도 마지막까지 정의를 이야기해야 할 기자들까지 안일한 불의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으니, 추운 겨울에 귀양살이하는 내 신세가 노랫말의 주인공인 것 같아 울고 또 울며 불렀다.

어찌 보면 나도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사람들하고 다를 바 없는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 쫓기며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믿고 쪽지를 전해준 그 분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무사히 지옥 속을 헤치고 나왔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표명열(예비역 준장) 

 

표명열 예비역 준장의 이 글을 읽으며 제가 목격했던 삼청교육대를 다녀 온 이들의 참혹한 모습을 떠 올렸습니다. 이 분의 블로그 ‘군대개혁에 바친 내 일생(blog.daum.net/ktg0706)’을 들어가 쓰신 글들을 읽으며 대한민국 군대에도 이런 분이 계셨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육군의 정훈감으로 예편하신 이런 분께서 더 오래 군을 통솔할 위치에 계셨다면 과연 어땠을까 싶습니다.

 

가해자인 그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여전히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차수혁이 악마의 가슴에 선량한 가면을 쓰고 태연히 거짓말을 하듯, 장철환과 조명국이 여전히 타인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려 발버둥 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삼청교육대,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질 뿐일지 모르겠으나 고통을 당한 이들이 과연 용서를 할 수 있는지는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게 저라면 그들의 끝까지 쫓아 종말을 보고야 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갈 입장이 된다면…

 

할 이야기는 많아서인지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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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안타까운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네오님 단편 하나의 분량에 달하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씻을 수 없는 치욕스런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면 또 다시 이런 비극을 우리는 만나게 되리란 생각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
인간의 잔인함은 어디까지 인지...권력의 무자비한 횡포에 소름끼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러니 전두환이 년간 혈세 8억 넘는 돈을 경호에 쏟아 부을 만도 합니다 그려...ㅋ
경호를 하지 않으면 테러를 당할까 전전긍긍 하고 있을 겁니다.
죄 짓고는 못 사는 법인데 잘 버티는 거 보니 그나마 용하긴 합니다.
술 먹고 비틀거린다는 이유로 잡아가는것을 어릴적 보았습니다..
사회정화가 아니고 정권유지 차원이었지요..
1982년에 삼청교육대는 중지되었다 하지만 늘 사람들은 걸핏하면 “삼청교육대를 보내야 할 놈”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청송보호감호소가 수 많은 이들을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지요.
표명열 당시 중령의 말을 외면한 기자나 광주학살 실태를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언론사, 이하 언론인들을 보면 과거사 정리가 얼마나 중요하고...또 필요한지... 세삼 느끼게 되네요. "일부 기자들이 반란 도당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며" 이런 인간들,언론사, 죄를 묻지 못한다면 언제, 어느시대건 수도 없이 쏱아져 나올것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일제 잔재들부터 과거사를 차곡 차곡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이런글 쓰기도 겁시 납니다..대한민국이 아프리카 토고 보다도 낮은 언론 자유도가 69위 인지라...
알고는 있었지만 글 읽으니 무섭습니다
역사에 관심 많은 내 아이들이 이런 사실들도
알아야 한다는게 무섭고 두렵습니다
전태일 책 한권 앞에 두고 스무살 아들이
중1 의 동생과 대화 하는걸 듣고도 놀랬었는데
착잡합니다

와....저는 이제 중학교3학년을 올라가는 한 학생입니다.
처음엔 전혀 삼청교육대란 존재를 몰랐었어요..
그런데 빛과 그림자 라는 드라마가 시작된후로부터 쭉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읽다보니까 집중되어서 끝까지 한글자 한글자 다 읽었네요.
이것만 보아도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이 무슨짓을 했는지 자세히 알수 있겠더라구요..
제가 사회를 좋아해서 정치나 이런쪽에 관심이 많아서 검색해보았는데 이런 비극이 숨어있을줄은...
진짜 안타깝고도 부끄럽군요..
진짜 이번글을 통해서 많이 알게되었어요.
이 글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져서 엄청 울면서 읽었네요.
이런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멀리 퍼뜨려야겠네요..
좋은 포스팅이네요!a
유태인홀로코스트도아니고 속칭민주주의라는국가에서 있었던 수치수러운사건이군요 제친구도 끌려가서 보호감호까지전방에서 노역하고 나왔읍니다 피해자들에게는 정신적인 보상이 있어야 할것같은데 김대중정권때도 그냥 넘어가더군요
당한 사람만 억울한것이죠 같은민족끼리 다시는 이런일이 없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