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사람

한사정덕수 2015. 1. 24. 17:32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는 화자가 마치 나라도…

 


노래를 부른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가 아닌 다른 이, 노래를 만들게 되도록 시를 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각도가 좀 어긋난 듯 하지만 이번 경우엔 짚고 넘어가야겠다.

시의 이웃인 시린(詩隣)’이란 표제로 음반을 발표한 시노래 가수 박경하 씨가 좋아하는 시 중에서 곡을 부탁했다는 사평역에서의 곽재구 시인의 시는 제법 오래전에 만났다. 물론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을 시인에게 안겨주었던 사평역에서도 신문 지면을 통해 만났으니 곽재구 시인의 시는 등단작부터 알았다고 이야기를 해도 무리는 아니다.

같은 해인 1981103일 고향 설악산을 찾은 길에 쓴 시가 3년 뒤인 1984년 양희은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한계령이고 보면,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신춘문예를 통해 활동을 시작한 곽재구 시인과 일면식 하나 없이 10년 이라는 나이차를 벗어나 같은 시기에 활동을 한 것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시인의 시를 다시 만난 것은 1999년으로 기억된다.

교보문고에 들렸는데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란 제목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들고 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시가 따듯한 편지.

 

따뜻한 편지

- 바람에게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열림원에서 펴낸 이 시집도 많은 독자를 만났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시 따뜻한 편지 또한 많은 이들의 아련한 추억의 곳간을 간질이며 애송되었겠다. 시인들이 세상에 내놓은 시가 모두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 곽재구 시인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인임을 부정 할 수 없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정작 시인은 등록되지 않았으나 이미 정태춘의 노래로 시인의 시 유곡나루나 살던 고향이란 제목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 시는 제목으로야 참으로 그럴싸한 풍경부터 그리게 하지만, 일본의 은어낚시꾼들에 유린당하는 섬진강과 이 땅에 살아가는 불쌍한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시에는 애초 담긴 음률이 있다. 어느 시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겐 시가(詩歌)가 있었고, 이와 같은 노래를 전문으로 부르는 이를 일러 소리꾼이라 했다. 물론 문자로 전달하기엔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던 시대엔 소리꾼들의 활동 영역이 단가(短歌:짧은 노래/시조)에 국한되지 않고 소설까지 흥에 실어 전했다. 흥부가를 비롯해 춘향가와 심청가가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소리이고 보면 이 또한 조선시대에 훈민정음과 함께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페라가 여러 배우들이 등장해 각각 맡은 역할의 노래를 부른다면 판소리로 대변되는 우리의 전통 소리는 한 사람이 모든 역할을 해낸다. 그만큼 다양한 성격과 풍경, 행동까지 소리로 풀어내니 참으로 비상한 재주를 지니지 않고야 감당하기 어려운 수련과정은 필수적이겠다. 또한 소리를 듣는 이들도 한 사람의 소리꾼이 풀어내는 다양한 장면과 인물들의 모습을 듣는 것만으로 공감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야 부르는 쪽이나 듣는 쪽 모두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340초에서 4분 남짓 되는 가요에 익숙한 이들에겐 5분만 넘어가는 노래도 버겁다. 5분을 훌쩍 넘겨 부를 노래도 그다지 많지 않은데, 제법 긴 내레이션이 도입부와 중간에 들어 있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514초란 시간으로 노래가 끝난다. 누군가 전체 연주시간을 이야기 하며 란 노래도 시간이 길다고 주장하였는데 43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간이 제법 많이 필요한 노래로 인식되니 그만큼 듣는 이들에게 버겁기 때문이 아닐까.

 

박경하 씨가 발표한 시린에 6번째 곡으로 실린 사평역에서는 무려 628초라는 긴 시간동안 노래가 이어진다.

먼저 사평역에서 시를 보자.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짧지 않은 이 시를 노래로 부른 그에게 더러 전주와 간주가 불필요하게 길다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일정부분 공감하지만 곡을 쓴 이의 의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바에야 불필요한 논쟁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 노래가 지닌 고유의 음률과 감정 자체를 가수가 어떻게 살려내는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강병규 : 충청북도 영동군에 있는 황간역 강병규 역장님께서 보내주신 황간역 사진


사평역에서를 노래가 아닌 그의 낭송으로 잠시 들었다. 그의 낭송은 이미 곡을 붙인 노래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장단(長短:길고 짧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잠시 정차했던 기차가 기관사의 판단에 따라 조금 느리거나 조금 빠르게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차이만 있을 뿐, 흐리거나 맑거나 상관없이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이들과 어딘가 정해진 행선지로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할 이들이 있기는 마찬가지로 그려진다.

그의 낭송에서나 노래에서 밤새 대합실밖엔 송이눈이 쌓이는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이 희붐하게 그려지고, 낯설음도 뼈아픔도 모두 다 설원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애잔한 삶의 풍상이 단풍잎 같은 몇 장의 유리창을 단 채 떠난 밤 열차의 다음 행선지에 대한 상념이 자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는 화자가 마치 나라도 되는 양 긴 호흡으로 풀어내고 나서야 노래는 끝난다.

 



시인의 시에서 노래로 탄생하여 세상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서도 여전히 시가 지닌 고유의 음률은 살아있다. 숲 너머 먼 곳으로부터 서서히 빛살을 뿌려 빈틈없이 숲의 어둠을 지우는 햇빛처럼 시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그가 참으로 곱다. 이제는 그가 부른 사평역에서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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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아, 고맙습니다.
종종 들려 좋은 말씀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박경하님의 팬 이구요...충북영동에 삽니다...
아, 영동이시면 황간역에서 경하씨를 보셨겠군요.
종종 경하씨의 노래에 대한, 그리고 시에 얽힌 이야기 소개하겠습니다.
소중한 영상 감사합니다!!
박경하씨 음반을 구하고 싶은데 교보나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