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사람

한사정덕수 2015. 2. 5. 17:16

씨앗을 바람에 날리는 들꽃처럼 시()를 음률에 실어 날리고, 사람들은 서서히 꽃이 지고



날씨는 제법 쌀쌀하지만 마음만큼은 훈훈한 저녁이었다. 2시간에 걸친 공연을 끝낸 그가 로비로 나와 음반에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거나 사진촬영에 응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와 함께 자리를 옮길 생각을 했다. 차에 가서 전달하려고 준비한 걸 가져왔을 때도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을 바꿨다. 이리 훌쩍 떠나면 공연한 오해를 살 수 있겠단 생각에 예정된 뒤풀이 장소에서 조금 일찍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 전화 한 통화면 충분하겠지만 그에게 대한 걱정이 아닌 다른 이들이 지니게 될 오해를 만들지는 말아야 했기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며칠 자리를 비웠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돌아와 앉는 것만으로 일상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처리해야 될 일이 있고, 출발하기 전 미리 약속된 일도 해결해야 했다.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이제 며칠 전의 기억을 되살려 낸다는 게 부질없을 수 있으나, 이 또한 하지 않으면 짐이 되어 손님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한 주인 같은 마음으로 허둥거릴 것임을 알기에 엿새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리에 앉았다.

글이란 게 쓸 때와는 다르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몇 곳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미리 넓게 행간의 여백을 마련해둘 필요성을 항상 느끼지만 글을 쓰는 순간과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읽어 볼 때의 생각은 여전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감동을 줄 다른 의미를 발견해서도 아니다. 전체적인 틀을 모두 다스리기에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게 맞겠다.

 


때때로 내 속에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나운 짐승 같기도 하다. 때로는 한껏 풀어헤친 갈기를 날리며 대지를 힘껏 박차고 내달리는 야생마, 한껏 멋을 부린 자태로 큰 날개 펼쳐 춤을 추는 두루미는 아닐까.

음악회가 시작되고 황동규 감독님께서 제작하신 영상과 함께 사평역에서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불현 듯 35년 정도 지난 까맣게 잊고 있는 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느 소녀의 일기장/그런 애닮은 사연을 닮은/수줍은 사연 읽힐까로 시작되는 글인데 전문은 기억에서 지워졌는데 이 구절만 선명하게 기억에 떠올랐고, 이 글을 적었던 작업대며 풍경이 추억의 갈피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얼굴 하나 정도는 더 키가 큰 그의 노래에서 손 시리다며 칭얼거리던 여섯 살 누이가 연상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가지산 홍류재, ‘꽃뫼로 그녀는 동행이 되어 나섰다. 어느 들판엔가 4월 지천으로 피어 씨앗을 바람에 날리는 들꽃처럼 시()를 음률에 실어 날리고, 사람들은 서서히 꽃이 지고 별이 지는 풍경 속으로 이끌렸다.

 

하얀 꽃잎

 

터진 맨몸 위로 꽃잎이 섧다

물 젖은 너의 입술 향기로운데

허물어진 나의 영혼이 달리는 천평선

하얀 꽃씨 하나 바람에 날려

한 번도 난 적 없는 길을 걷는다

 

잠들어지면 행여

꿈에라도 만날까 싶어

황홀히 웃으며 만날까 싶어

통곡조차 향그런 꽃이 되었네

 

온 삼일 가랑비 추적이더니

날개 젖은 나비는 길을 못 찾고

먼 구름 위 날아갔느니

 

홀연히

덧없는 시름 날려 보노라.

 

1997. 4

 

시어로 길어올려진 노래는 바람에 날려 새로운 자리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꽃씨처럼 또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 커다란 나무 아래 먼 산 응시하는 이의 긴 기다림의 끝자락에, 산기슭 거슬러 오르는 누군가의 마음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움을 틔울 것이다. 한 땀, 한 땀 무명천에 무늬를 만들어내는 수()처럼 단단히 무늬를 그려놓을 것이다.

한 송이 핀 꽃이 무리를 이루고 들판을 가득 채우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일렁인다.

 

숲 사이를 지나온 시린 바람이 가슴팍에 안긴다.

 


딸 여섯 중 유독 나를 데리고 자주 산엘 가시던 아버지. 허름한 옷, 지퍼달린 가방과 호미를 메시고 앞 서 산에 오르시는 아빠 뒷모습은 언제나 휘휘 거침없었다.

추진하시던 연탄사업을 가까운 이에게 잃으시고 몇 배나 더 힘내었지만 이미 병약한 몸 사력 다 해 추스르시며 살아가시던 아버지!

약초꾼도 농사꾼도 아닌 분이 그리 산에 오르시던 심경을 뒤늦게야 알았다.

깊은 산 속 폭신한 고엽이 쌓인 그 곳에서 가방에 넣어 오신 보름달 빵이랑 베지밀을 내게 먹여 주시고 스케치북이랑 크레용도 쥐어주신 뒤 주변을 다니시며그때 들었던 대로, “삽주싹, 모시대, 더덕버섯이라고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들.

이내 매번 꼭 향을 맡아보라고 하셨다.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때 그 정선 땅 깊은 흙내음! 마트나 슈퍼에 딸려 간 흙은 흙이 아니다. 진한 표고의 내음이며한순간도 그때의 내음을 잊지 못하며 산다.

산에서 쉬실 때 어김없는 노래 한 자락 풀어내셨다.

하냐앙 처어어얼리 떠나오온들 너를 어이 잊을 쏘오오냐

아버지 노랫소리의 꾸밈음 위치며 그날그날 선곡에 따라 9살 딸에게도 그려진 갖가지 무늬들이 귀를 타고 울대를 울리어 지금까지도 메아리친다.

아버지 작은 가방이 얼추 차고 해 질 무렵, 이제는 산 아래 길에 내려 선 나의 노랫소리가 더욱 드높아지고 소리도 올렸다 내렸다 목을 떨며 주현미의 흉내를 내고, 성가대의 찬송가를 부르는 소프라노도 되었다. 구성진 민요를 부르던 TV속 쪽진 머리 아줌마도 되었다. 어쭙잖은 언니들의 팝송과 교과서에 있는 노래, 9살 인생에서 알게 된 모든 노래를 산을 오가며 죄다 짜랑짜랑 불러 젖혔다.

그 좋아하시던 청명한 숲길에 가셔도 이제 딱 열 걸음, 열 걸음 걸으심 앉아 쉬셔야 하는 아버지. 내 노래에 아버지 소리가 겹쳐 울리는 것, 어쩌면 당연 한 이치이고 고해다.

 

-박경하 글 옮김

 

그의 노래에서 어린 시절 누이가 그려지고, 시리도록 아련한 추억의 들판이 열린 까닭이 바로 비슷한 시기를 같은 고장에서 지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덕이며, 참나물, 취나물이 어느 산이고 오르면 쉽게 찾아지는 정선, 그곳에서 9살 어린 소녀는 아버지의 길동무 기꺼이 되어 나서곤 했던 모양이다.

별로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음에도 몇 곡 노래를 들으며 동질감을 느낀 이유라면, 얼마간 사북에서 정선방향으로 조금 내려와 있던 묵산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했던 기억 한 자락 들추면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어울리면 늘 술판이나 벌이는 이들과의 이질감을 해소하려 산엘 올랐고, 한참을 산비탈을 휘돌아 내려오는 손엔 제법 푸짐하게 산나물이나 더덕과 같은 게 들려있곤 했다.

 


삶이란 것이 절묘한 시간에 무의식적으로 물결에 떠밀려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면적 삶의 대칭점에서 어느 순간 잠깨어 인식의 상태로 나온 바람의 흐름을 감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캄캄한 호수 위를 날아오르거나, 비 개인 오솔길에서 싱싱하게 생명을 추슬러 일어선 이끼가 지닌 향기에 한껏 취했다. 이끼가 낙엽이나 돌로부터 끌려올려진 원소들의 희생을 망각하듯 시()의 깊은 숲으로 걸어들어가 자아(自我)를 잃었다.


이제 잠시 손을 놓고 창문을 활짝 열어 눈 내린 창밖을 보며 그의 노래를 음미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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